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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마하시선원 원문보기 글쓴이: 까루나
2017년 9월 개원 10주년 기념법회_가르침의 사용법
선원 개원 10주년과 관련해서 너무 짧지도 않고 길지도 않게 법문을 설하겠습니다.
부처님 출현이 어렵다고 하지만 무시윤회이기 때문에 그 사이에 강가 강의 모래알 숫자만큼 부처님들께서 많이 출현하셨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출현하신 부처님들마다 항상 설하시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첫 번째 가르침은 ‘Sabbapāpassa ākaraṇaṁ 모든 악을 행하지 말라’입니다. 불선업, 악행이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것도 몸으로도, 말로도, 마음으로도 행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 첫 번째 가르침을 통해서 부처님께서 ‘계’라는 실천항목을 밝히셨습니다.
두 번째 가르침은 ‘Kusalassa upasampadā 선업을 구족하라’입니다. 몸과 말과 마음으로 선업을 행하도록 노력하라는 뜻입니다. 삼학으로 따지면 이 두 번째 가르침은 ‘삼매’의 실천항목을 나타내셨습니다.
세 번째 가르침은 ‘Sacittapariyodāpanaṁ 번뇌들로 더럽혀진 자신의 마음을 깨끗하게 해야 한다’입니다. 이 세 번째 가르침을 통해서는 통찰지 수련, 혜학을 나타내셨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이러한 가르침이 모든 부처님들의 가르침이다’라고 계정혜 삼학을 설하시면서, 모든 부처님들께서 이 가르침을 설하셨습니다. 요약하자면 게송으로 ‘악행삼가 선실천 마음깨끗이’입니다. 따라해 보십시오.
그러면 가르침에 크게 몇 가지가 있습니까? (대중: 세 가지가 있습니다, 스님) 이렇게 ‘부처님의 가르침은 세 가지입니다’라고 하셔도 됩니다. 빠알리어로 sāsanā라고 하고, 우리말로는 ‘가르침’, ‘교법’ 혹은 ‘훈계’ 등 여러 가지 표현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러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났을 때 그 가르침을 어떻게 유용하게, 이익이 되게 사용할 수 있는가에 대해 알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내용은 법문 후 법보시해드릴 『어려운 것 네 가지』 라는 책에 있습니다만, 직접 법문을 듣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마련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과 만나는 것과 관련하여 일화 하나를 말씀해드리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아난다 존자와 함께 지내실 때의 일입니다. 비가 온 다음 날 저 멀리서 땅이 계속해서 움직이는 것을 보고 아난다 존자가 부처님께 “부처님, 저기 땅이 움직입니다”라고 여쭈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저기 움직이는 것은 땅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비가 많이 와서 바깥으로 나온 지렁이들이 움직이는 것이 땅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 것이다. 실제로는 지렁이들이 움직이는 것이다. 저 지렁이들이 다른 존재라고 생각하지 마라. 저 지렁이들이 나중에 나의 가르침의 후반부에 전부 다 비구, 비구니, 청신사, 청신녀들이 되어서 나의 가르침의 의무를 잘 짊어지고 실천수행을 해서 깨달음을 얻을 제자들이 될 것이니라”라고 설하신 일화가 있습니다.
그 지렁이들이 누구겠습니까?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이나 저희들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가르침과 만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과거 선업 바라밀 때문에 이렇게 가르침과 만난 것입니다.
■ 가르침의 사용법
지금까지 가르침의 의미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그러면 계정혜 삼학이라는 그 가르침과 만났을 때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우빨리 장로 일대기」를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요약하자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났을 때 부처님의 가르침을 사용하는 방법에 첫 번째, 위로 토하게 하는 구토약으로 사용하는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두 번째, 아래로 설사해서 바깥으로 내보내게 하는 설사약으로 사용하는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대역할 때는 세 번째, 네 번째 순서를 바꿨습니다) 세 번째, 즉시 죽게 하는 독약으로 사용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네 번째, 위급할 때, 절체절명의 순간에 목숨을 보호하는 응급약으로 사용하는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사용하는 방법에 몇 가지가 있습니까? (대중: 네 가지가 있습니다, 스님) 게송으로 따라하십시오.
구토설사 응급독약 교법용법 네가지
1. 구토약
그 의미가 무엇인가 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의미입니다. 부처님의 거룩한 교법을 구토약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도의 지혜와 과의 지혜, 깨달음을 얻기 위해 실천하고 수행하고 있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도의 지혜, 과의 지혜를 얻기 위해 실천하고 노력하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단순히 번역하는 것 보다 여기에 조금 더 첨가해서 도의 지혜, 과의 지혜를 꼭 진실로, 확실히, 틀림없이 얻기 위해서 실천하고 노력하고 있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여러분들은 ‘이번 생, 이번 몸, 이번 부처님의 가르침에 도와 과의 지혜로 열반을 증득하지 않으면 안 돼. 꼭 얻을 거야’라고 진실로, 확실하게 원하십니까? 조금 더 넓게 설명하자면 보시, 계, 수행을 실천하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 바로 부처님의 교법을 구토약으로, 위로 토하게 하는 약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보시, 지계, 수행 중에 어느 것이 제일 중요합니까?”라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보시를 하지 않으면 허물이다, 악행이다, 잘못이다’라고 합니까, 하지 않습니까? (대중: 하지 않습니다, 스님) ‘출가자나 재가자가 계를 지키지 않으면 허물이다’라고 합니까, 하지 않습니까? (대중: 합니다, 스님) ‘수행하지 않으면 허물이다, 악행이다’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대중: 없습니다, 스님) 이러한 측면으로 보면 보시는 하면 선업이지만 하지 않는다고 불선업이 아니고, 수행도 하면 선업이지만 하지 않는다고 불선업은 아닙니다. 그런데 계는 지키지 않으면 불선업, 악행이 되기 때문에, 그리고 청정한 계를 바탕으로 보시를 해야 더욱더 과보가 크고, 수행도 계청정이 구족되기 때문에 항상 법회하기 전에, 보시하기 전에 계를 수지하는 것입니다.
다시 원래 가르침으로 돌아와서 보시와 지계, 수행을 실천하는 것이 토하게 하는 것이라면 그러면 보시와 지계, 수행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무엇을 토해내고 있는지 질문할 수 있습니다. 구토약은 무엇을 토해내게 합니까? 음식을 토해내게 합니다. 중생들은 시작을 알 수 없는 오랜 과거로부터 윤회를 하는 동안 수많은 번뇌를 삼켜 놓았습니다. 중생들의 심장에는 탐욕, 성냄, 어리석음, 질투, 인색, 자만, 아만, 이러한 나쁜 법들이 가득 차 있습니다. 여러분들 심장 속에 가득 차 있습니까, 가득 차 있지 않습니까? (대중: 가득 차 있습니다, 스님) 음식을 너무 많이 먹어서 소화가 잘 되지 않는다면 지내기에 편안합니까, 편안하지 않습니까? (대중: 편안하지 않습니다, 스님) 위장까지 들어가서 소화된 상태가 아니라 목에 걸려서 힘든 상황일 때는 설사약이 아니라 토하게 하는 약을 먹어야 합니다. 토하게 하는 약이 없으면 손가락을 집어넣어서라도 토하게 해야 합니다. 소화되지 않은 음식이 뱃속에 있다가 토하게 되면 그때서야 지내기 편하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중생들은 시작을 알 수 없는 긴 세월을 윤회하면서 계속해서 삼켜 왔던 탐욕, 성냄 등의 여러 번뇌가 심장에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지내기에 편안하지 않습니다. 탐욕 때문에도 편하지 않고, 성냄 때문에도 편하지 않고, 질투, 인색 등 번뇌 때문에 지내기에 편안하지가 않습니다. 지내기 편하지 않다, 싫다, 괴롭다 이런 것은 전부다 마음속에 번뇌라는 것들이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편하게 지내지 못하기 때문에 해결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가득 찬 번뇌를 해결할 방법을 찾지 못해서 술을 마시고, 다른 관심사를 찾고, 그러다가 도저히 참지 못하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까지 있습니다. 토해내게 할 바른 방법을 알지 못해서입니다. 여러분들은 시작을 알 수 없이 윤회하면서 심장 속에 가득 차서 스스로를 답답하게 하고 괴롭게 하는 번뇌를 보시를 통해서, 계를 통해서, 수행을 통해서, 이러한 선업을 통해서 위로 토해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보시할 때 돈이나 어떤 물건을 쓰지 않고서는 할 수 없습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보시 선업을 행할 때는 각자가 보시하는 재산이나 물건에 대해 애착하고 아끼는 탐욕을 토해내야만 보시를 행할 수 있습니다. 혹은 자기 재산을 아까워하면서 남과 공유하기 싫어하는 성품, 남에게 주기 싫어하는 인색을 토해내야만 보시 선업을 행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보시를 행하는 데 게으른 것, 열심히 하지 않는 것, 새김이 없는 방일함과 보시의 이익을 모르는 어리석음 등을 토해내야만 보시 선업을 행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탐욕이나 인색, 성냄, 어리석음 등을 토해내지 못하면 보시를 행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색경」에서 “인색하고 방일하기 때문에 보시를 행하지 못합니다”라고 부처님께서 설하셨습니다. 자기가 벌어 놓은 재산과 재물이 줄어들고 없어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아끼면 보시를 할 수 없습니다. 어떤 분들은 ‘보시를 하게 되면 나의 재산이 줄어든다. 없어진다’라고 생각해서 보시를 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하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두려워할 만한 것이 아닙니다. 비유하자면 우물의 물을 퍼내지 않고 가만히 두면 썩어버리고, 우물에서 물을 퍼내면 새로운 물이 다시 가득 차듯이 마찬가지로 보시를 하게 되면 지금 현재 내 재산이 줄어들지 모르지만 그것에 해당하는 만큼 혹은 그것보다 몇 배나 더 재산과 건강 등의 여러 측면으로 더욱더 많은 이익을 가져다줍니다. 보시 선업을 행하는 것은 인색, 탐욕 등의 번뇌를 토해내게 하는 구토약을 먹는 것으로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두 번째로 계의 선업도 번뇌를 토해내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범부들에게 있는 번뇌의 세 단계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세 가지란 위범 번뇌vītikkama kilesā 違犯 煩惱로 범하는 번뇌가 하나, 두 번째가 현전 번뇌pariyuṭṭhāna kilesā 現前 煩惱로 마음에서 드러난 번뇌가 하나, 세 번째가 잠재 번뇌anusaya kilesā 潛在 煩惱로 이렇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계라고 하는 선업은 범하게 하는 번뇌, 즉 몸과 말로 분명하게 범할 정도로 강하게 생겨나는 번뇌를 토해내게 하는 것입니다. 계를 아주 잘 지키는 이들에게는 몸과 말의 행위에서 거친 형태의 탐욕이나 성냄, 어리석음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계 선업을 통해 위범 번뇌가 생겨나지 않게 합니다. 그렇게 계를 통해서 위범 번뇌가 생겨나지 않게 하는 것을 두고 이 가르침에서 ‘지계 선업이 위범 번뇌를 토하게 한다’라고 표현합니다.
첨가한다면 위범 번뇌가 몸으로 하는 악행, 말로 하는 악행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사람들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물론 몸의 행위도 많이 관련되지만 그것보다 말의 행위가 조금 더 많이 관련되어 있어서 말을 부드럽게 하는 것과 거칠고 잔인하게 하는 정도에 따라서 상대방이 싫어하는 정도가 다릅니다. ‘말 때문에 좋아하고 말 때문에 싫어하고, 말 때문에 원수되고 말 때문에 친구되고’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삼매 수행은 현전 번뇌를 토하게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 공덕을 생각하는 것, 자애 명상, 죽음에 대한 명상, 더러움 명상 등 사마타 수행주제, 보호명상 주제 하나를 실천해 나가다가 어느 정도 삼매가 생겨나면, 삼매가 생겨나는 동안, 마음이 잘 집중된 동안에는 일시적으로 마음속으로 분명하게 드러나는 번뇌가 생겨나지 않습니다. 고요해집니다. 이렇게 선정까지 안 가더라도 찰나삼매를 통해 현전 번뇌, 마음속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번뇌가 생겨나지 않고 부분적으로, 혹은 일정 기간 동안 억압하여 제거하는 것을 ‘삼매 선업이 현전 번뇌를 토하게 한다’라고 표현합니다.
세 번째로 수행, 특히 위빳사나 수행이라고 하면 지혜 수행은 잠재 번뇌를 토해낼 수 있습니다. 위빳사나 선업을 실천해서 위빳사나 지혜가 생겨날 때는 대상에 잠재된 번뇌를 토해내고, 제거할 수 있습니다. 더욱더 나아가서 위빳사나 지혜가 향상되어 도의 지혜, 과의 지혜가 생겨나면 상속에 잠재된 번뇌까지 완전히 사라지게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위빳사나 지혜나 도의 지혜, 과의 지혜로 잠재 번뇌를 부분적으로 혹은 뿌리까지 완전히 제거하는 것을 ‘지혜 선업이 잠재 번뇌를 토하게 한다’라고 표현합니다.
요약하자면 보시, 지계, 수행을 실천하면서 각각의 해당되는 번뇌를 제거하는 것, 생겨나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부처님의 교법에서 구토약으로, 토하게 하는 약으로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구토약이 실제로 중요합니다.
여러분들이 재가생활을 하면서 가정 문제와 직장 문제 등으로 겪는 어려움을 저희에게 말씀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 저희가 할 수 있는 만큼 부처님의 가르침에 있는 여러 가지 법문, 올바르게 마음 기울이는 방법, 숙고하는 방법, 더 나아가서 부처님 공덕 명상, 자애명상, 더 나아가서 위빳사나 관찰로 제거하는 방법 등을 설명해드립니다. 그러면 그 설명을 듣고 그대로 실천하면 조금 토해내는 것입니다.
특히 중요한 것이 여러분들 중에 의사, 경찰, 판사, 변호사 등의 직업을 가진 분들은 주로 접하는 대상이 아프거나 분쟁하거나 나쁜 짓하는 사람들이어서 좋은 대상은 아닙니다. 빠라맛타 실재 성품상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 대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한 대상들을 만날 때마다 계속 잘 관찰할 수 없으면 마음속에 쓰레기가, 뜨거움이 쌓이는 것입니다. 그것을 제때 처리하지 못하면, 빨리 잘 토해내지 못하면 마음의 병이 생기고, 그러한 마음의 병이 몸의 병까지 생기게 합니다. 이런 분들이 토하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나중에는 병이 나고 더 나아가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까지 벌어집니다. 이유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토하게 하는 방법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토하게 하는 방법을 잘 사용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토하게 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잘 아셨습니까? 무엇입니까? 보시를 행하고 지계를 행하고, 수행을 행하는 것입니다. 지금 저희들이 여러분들에게 ‘보시 한 알, 지계 한 알, 수행 열 알’이라고 처방전을 써드린 것입니다. 써드린 처방전대로 잘 드시고 번뇌를 토해내기 바랍니다.
2. 설사약
두 번째, 거룩한 부처님의 교법을 설사약처럼 사용하는 방법은 범부들과는 무관한 방법입니다. 과의 위치에 있는 성자들과만 관계있는 방법입니다.
방금 설명했듯이 토하게 하는 약으로 위빳사나 수행을 실천하여 차례대로 지혜가 향상되어 도의 지혜 다음에 과의 지혜까지 생겨나서 열반을 증득했다면 과의 위치에 있는 성자가 됩니다. 그러한 과의 위치에 있으면 다음의 단계를 위해서 수행을 하긴 하지만 이러한 분들은 자신들이 증득한 열반의 적정한 행복의 맛을 누리기 위해 과 선정증득에 자주 입정합니다.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성자들은 자신이 증득한 열반의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 고요하게 머무십니다. 이러한 분들은 자유자재로 빨리 입정할 수 있도록 닦으셨다면 몇 번 관찰하는 것만으로 평소에도 자주자주 바로 과 증득에 입정할 수 있습니다. 어떠한 성자들은 야채 다듬는 중간중간에도 과 증득에 입정한다고 합니다. 책 읽는 중간중간에 과 증득에 입정하기도 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책을 읽는데 책의 의미가 안 들어오는 것입니다. 진짜인지 묻는 분들이 계신데 직접 증득해서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열반이라고 하는 적정의 행복, 적정의 상태에 입정한다는 것은 바로 지금 생애, 지금 현재 분명한 행복을 누리는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열반의 행복 경험해 보셨습니까? ‘스님들과 파마가 전혀 관계없듯이 범부들과 열반은 전혀 관계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려운 것 네 가지』 책에도 있지만 열반의 맛을 조금이라도 비유해서 알 수 있도록 표현하자면 화장실 다녀 온 상태와 조금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행지에서나 처음 가 본 곳에서 길을 가다가 급하게 화장실을 찾는데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땀을 뻘뻘 흘리고 참아가면서 힘들게 찾아다니다가 겨우겨우 물어서 화장실에 갔습니다. 그렇게 급하게 가서 화장실에서 볼일을 막 끝내고 나왔을 때의 행복이 너무나 큰 상태, 자세한 일화는 책 보시면 나와 있습니다.
과 증득에 입정해 있으면 열반만을 대상으로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열반을 대상으로 마음이 생겨나지 않을 때 생겨나는 여러 가지 몸의 고통, 혹은 일부는 마음의 고통을 과 선정에 입정에 있으면 자기가 증득해 있는 시간만큼 그러한 고통이 사라져서 편안하고 행복한 맛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미 다 소화가 되었는데 밑으로 막혀있는 것에 대해서 설사약을 사용합니다. 이 비유와 마찬가지로 과의 위치에 있는 성자들은 각각 단계에 따라 여러 번뇌를 제거했습니다. 비유하자면 음식이 어느 정도 소화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 물질과 정신, 몸과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것과 관련하여 보아서 생겨나는 고통, 들어서 생겨나는 고통 등이 생겨납니다. 그러한 고통에서 잠시 벗어나기 위해 성자들은 과 선정증득에 입정합니다. 이렇게 과의 위치에 있는 성자들이 과 선정증득에 입정하여 열반의 행복을 누리는 것이 바로 가르침을 설사약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3. 응급약
원래 순서는 독약처럼 사용하는 것이지만 순서를 조금 변경하여 응급약처럼 사용하는 방법을 먼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세 번째는 가르침을 응급약처럼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목숨을 구하는 응급약은 항상 사용하는 약이 아닙니다. 사느냐 죽느냐 하는 매우 긴박한 순간에만 응급약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세상에 일부 사람들은 사업이 잘 되도록, 지위가 높아지도록, 명성이 높아지도록 삼보에 귀의하고 보시를 하는 등 가르침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가르침의 전승에 의무가 있는 출가자들 중 일부도 네 가지 필수품을 많이 얻도록, 보시를 잘 받도록, 명성이 높아지도록, 이러한 목적 정도만으로 가르침을 의지하면서 시간을 보냅니다. 경전의 의무와 위빳사나의 의무라는 원래 해야 할 일을 버려두고 있습니다. 이것은 ‘윤회윤전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하여’라는 출가의 근본목적을 무너뜨리고 있는 것입니다.
불교의 가르침에 입문한 재가자와 출가자 모두가 이렇게 세간적인 목적을 위해 가르침을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늙음이라고 하는 위험, 병듦이라고 하는 위험, 죽음이라고 하는 위험, 이러한 큰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가르침을 의지하는 것이 바로 응급약처럼 가르침을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여러분은 ‘늙음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죽음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죽음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윤회로부터 벗어나기를’이라고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기도하셨습니까? 아직 두려워하지 않으시지요? 응급 상황이 아니라고 생각하시지요? 전부 다 지금 응급 상황입니다.
늙음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병듦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죽음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윤회윤전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가르침을 의지하는 것이 응급약처럼 가르침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늙음, 병듦, 죽음도 태어남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태어남이 없는 곳, 곳이라고 하지만 구체적인 장소가 있는 것이 아니라 상태입니다. 태어남이 없는 곳, 늙음이 없는 곳, 병듦이 없는 곳, 죽음이 없는 그 곳, 그 상태인 열반을 서원하면서 보시, 지계, 수행을 하는 것이 가르침을 응급약처럼 사용하는 것입니다. 세간적인 목적을 위해서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의지하면 아주 가치가 많은 귀중한 것을 매우 가치 없게 쓸모없는 곳에 사용하는 것과 같습니다.
제가 양곤 마하시 센터에 있었을 때 한 보살님께 위빳사나 수행을 할 것을 권유하자 그 보살님이 다음처럼 말했습니다.
“스님, 지금 수행을 할 수 없습니다. 집을 구해야 합니다.”
“세간적인 것은 지금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금 위빳사나 수행 선업을 실천해서 지혜가 많이 향상되어 깨달음을 얻으면 세간적인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출세간적인 법을 얻는데 세간적인 것은 저절로 잘 얻을 수 있으니까 그런 것보다 먼저 수행을 하십시오.”
“스님, 집을 구해야 한다니까요.”
“중요하지 않다니까요.”
“스님, 그럼 집은요?”
“집은 나중에 저절로 얻어질 것입니다.”
“확실합니까?”
“확실합니다.”
“보증합니까?”
“보증합니다.”
그래서 제 말에 따라서 집 구하는 것은 잠시 미루고 수행을 한 달, 두 달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그 보살님이 집에 갈 생각도, 집을 구할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남편이 찾아와서 “우리 아내 좀 집에 돌아가게 좀 해 주십시오”라고 청했고, 그 보살님을 불러 “이제 그 정도하면 됐으니 집에 돌아가서 세간적인 일을 하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 보살님이 집에 돌아가서 얼마 되지 않아 원래 가격보다 매우 저렴한 가격으로 집을 구해서 저를 다시 찾아 왔습니다. 그래서 그 집을 담마와사dhammāvāsa, 법이 구해준 집이라고 명했습니다.
자석이 힘이 매우 강하면 일부러 철을 가져다 댈 필요가 없습니다. 자석의 힘이 매우 강하면 주위에 있는 철이 저절로 와서 달라붙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여러분들의 계, 삼매, 통찰지 등의 힘이 열반까지 생겨날 정도로 강하면 열반을 대상으로 할 수 있습니다. 출세간법인 열반도 다가오게 하는데 세간적인 것 정도야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출세간의 법을 얻으면 세간의 행복은 저절로 얻기 때문에 응급약처럼 절체절명의 순간을 위해서 쓸 수 있는 법을 세간적인 목적을 위해서 쓰지 않기를 바랍니다.
4. 독약
마지막으로 독약으로 가르침을 사용하는 방법을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마지막 네 번째로 가르침을 독처럼 사용하는 이는 가르침을 거스르는 이, 가르침과 반대되게 행동하는 이를 말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몇 가지라고 했습니까? (대중: 세 가지입니다, 스님) 게송으로 해 보겠습니다.
악행삼가 선실천 마음깨끗이
지금내생 행복해 부처님설법
부처님께서 ‘모든 불선업을 몸으로 행하지 말라. 말로도 말하지 말라. 마음으로 생각하지 말라’라고 설하시고 교시해 놓으신 것을 따르지 않고 반대로 불선업을 행하고, 말하고, 생각하고 있으면, 그 사람은 가르침을 따르는 것입니까, 가르침을 거스르는 것입니까? (대중: 거스르는 것입니다, 스님) 그러면 그 사람은 가르침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까? (대중: 독약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님) 독을 먹으면 행복할까요, 괴로울까요? (대중: 괴롭습니다, 스님) 독을 먹으면 죽습니다. 설사 죽지 않더라도 죽을 만큼의 심한 고통을 겪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모든 선업을 행하라’라고 하셨는데, 선한 행위들을 하지 않으면 가르침을 어떻게 사용하는 것입니까? (대중: 독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스님) 보시를 하는 것이 좋은 선업입니다. 계를 지키는 것은 좋은 선업입니다. 법문을 듣는 것, 수행하는 것은 좋은 선업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할 수 있는 만큼 행해야 합니다.
‘마음을 깨끗하게 하도록 해라’라고 하신 부처님의 훈계에 따라서 행하지 않고 마음을 더럽게 하고 번뇌만 일으키고 있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독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중생들의 마음은 시작을 알 수 없는 과거로부터 윤회하면서 탐욕이나 성냄 등으로 아주 더럽혀져 있습니다. 이렇게 더럽혀진 마음을 깨끗해지도록 행하지 않고, 수행하지 않고 더욱 더럽혀지도록 행한다면, 이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가르침을 독처럼 사용하는 것입니다.
레디 사야도 당시 뻐꾸꾸라는 지역에 우 지 사야도라고 유명한 스님이 계셨습니다. 어느 날 여러 스님들이 찾아가서 “스님께서 수행하신 방법을 저희에게도 알려주십시오”라고 청했습니다. 사야도께서 “특별한 방법 없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실천했을 뿐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어떠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부처님께서 어떻게 가르치셨습니까?”라고 다시 스님들이 물었습니다. 그러자 사야도께서는 “부처님께서 행하지 말라는 것은 하지 않았습니다. 구족하도록 노력하라고 하신 것은 구족하도록 노력했습니다. 깨끗이 하라는 것은 깨끗이 했습니다. 마음 깨끗이 하도록 노력했습니다. 이것뿐입니다. 이 세 가지만 잘 하면 매우 위력이 큽니다. 하지만 확신하지 않고 믿지 못해서 이대로 실천하지 않은 사람은 이러한 이익을 얻지 못할 뿐이지요”라고 대답하셨다고 합니다.
부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계와 관련된 것이고, 갖추도록 노력하라고 하신 것은 보시도 포함해서 삼매 수행입니다. 마음을 깨끗하게 하라고 하신 것은 특별히 위빳사나 수행을, 부처님께서 어디까지 원하시는가 하면 아라한이 될 때까지 원하십니다.
여러분들 가르침에 대해 배웠습니다. 가르침을 어떠한 방법으로 사용하고 있습니까, 어떠한 방법으로 사용해야 합니까? 가르침을 사용하는 방법에 네 가지가 있었습니다. 다시 살펴보도록 합시다. 첫 번째, 보시와 지계, 수행 선업을 닦는 것을 통해서 번뇌를 토해내게 하는 구토약으로 쓰는 방법을 사용해야 합니다. 두 번째, 설사약처럼 사용하는 것은 과의 지혜를 얻은 성제자들과만 관계된 것이기 때문에 범부들과는 관계없습니다. 범부들이라면 가르침을 설사약으로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세 번째, 각자가 매일 만나고 있는 늙음의 위험, 병듦의 위험, 죽음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목적으로 가르침에 의지하고 공경하는 것을 통해 생명을 구하는 응급약처럼 사용하는 것이고, 잘 사용해야 합니다. 네 번째, 부처님의 가르침과 반대되는 행동과 말과 생각들을 행하고 말하고 생각하는 것이라는 독약처럼 사용하는 방법은 할 수 있는 만큼 삼가야 합니다. 이런 약은 쓰면 안 됩니다. 대부분은 계와 관련됩니다. 그래서 계가 매우 중요합니다.
실제로 ‘부처님과 만나기 어렵다’라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과 만나기 어렵다’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른 방법에 따라서 사용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에 그러한 의미로도 ‘부처님께서 출현하시기 어렵다’ 혹은 ‘가르침과 만나기 어렵다’ 혹은 ‘가르침을 올바른 방법으로 사용하기 어렵다’라고 설하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어려운 것 네 가지』법문에 해당되는 원래 법구경 게송을 빠알리어와 한국어 대역으로 독송하고 마치겠습니다.
이렇게 한국마하시선원 개원 10주년을 맞이해서, 또 저의 60세를 기념하여 여러분들이 부처님과 승가에 음식을 포함한 여러 가지 보시한 보시의 공덕, 잘 수지한 지계의 공덕, 법문 들은 청법의 선업, 중간중간 실천한 수행의 선업, 이러한 여러 가지 선업 공덕으로 이번 생에 여러분들 가족 모두와 함께 여러 위험, 장애에서 벗어나서 몸과 마음 건강하고 행복하게, 세간의 모든 행복, 더욱더 나아가서 출세간의 모든 행복 누리시길 바랍니다.
사-두 사-두 사-두
첫댓글 안양 선원 개원 10주년 법회 때 사야도께서 하신 법문입니다. 「어려운 것 네 가지」책에서도 볼 수 있는 내용이지만 법문 때 첨가해서 하신 내용도 있어서 늦었지만 올립니다. _()_
덕분에 법문을 다시 음미하게 됩니다.
자세하게 기록해 주셔서 감사 감사합니다~~~
사두 사두 사두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