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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욕망을 찾아서(1)-자크 라캉
무협지를 많이 읽은 나는 가끔 엉뚱한 상상을 할 때가 있다. 신은 이 무림의 최고의 지존으로서 신의 영역에 속하는 진리의 정원에 인간들이 감히 접근할 수 없도록 고도의 난해한 진을 펼쳐 놓은 것이 아닌가……가끔 오만한 인간들은 진리를 캐기 위한 무모한 열정으로 이러한 신의 영역에 침입한다. 그러나 그들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된 끝없는 미로 속에서 헤매다 결국 고사한다. 신은 매일 아침이면 이러한 오만한 인간들의 주검이 진의 곳곳에 너부러져 있는 것을 보며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해 혀를 찰지 모른다. 끌끌끌.....수천년 동안 전해 오는 무림의 전설 속에서 인간이라 불리는 그 누구도 감히 신의 정원에 발을 들여 놓은 자는 없다.
그러나 수천년 동안 신을 경악케 한 사건이 몇 건 있었다. 어느 날 아침 신이 정원에 나가 아래를 내려다보니 한 사내가 비록 까마득하게 멀리 떨어진 곳이지만 진에 들어와 조금씩 전진해 올라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니 진의 진입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위해 고난도의 주문을 걸어 놓은 것을 그가 어떻게 풀었단 말인가? 그리고 이 사내는 신이 곳곳에 걸쳐 파놓은 오만과 질투, 탐닉과 자기 과시, 방탕, 허영, 물욕과 육욕이라는 인간으로서 거의 피할 수 없는 함정을 잘도 피해서 조금씩 신의 정원으로 전진해 오는 것이 아닌가! 비록 인간의 수명이라는 어쩔 수 없는 한계 때문에 그들은 신의 정원의 입구에 못 미쳐서 숨을 거두었지만……. 전설에 의하면 신도 정원의 입구에 쓰러진 이들의 주검을 보고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네 비록 인간이지만 가상하도다.”
진리의 동산인 신의 정원 입구에서 죽었다는 이러한 전설에 나오는 인간의 이름은 아인슈타인, 프로이트 그리고 자끄 라캉이다.
라캉……. 나는 그가 신이 만들어 놓은 진리를 둘러싼 난해한 진을 거의 해독할 뻔 했던 몇 명 안 되는 인간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지난 삼년간 그의 난해한 저서인 에크리를 읽으며 진리란 손에 쥐여 확실히 파악할 수 있는 어떤 실체가 아니라 순간적으로 잠시 스쳐가는 어떤 느낌과도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on-off가 거듭되는 모니터처럼 나는 그의 이론을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순간의 기쁨도 잠시, 다시 캄캄한 암흑 속에서 헤매기를 얼마나 반복하였던가?
라캉, 그 또한 진리에 대한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느끼며 인간과 세계에 대한 탐구를 끈질기게 추구한 인간이었으리라. 진리가 명멸하는 순간, 그것은 마치 무거운 바위를 정상에 올려놓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시 바닥으로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쳐다보는 시지푸스의 허탈한 심정과도 같다. 그러나 포기하려는 찰나 꿈틀거리고 솟아나는 욕망은 다시 그를 바닥에서 바위를 밀고 정상에 오르게 하는 것이다. 그때 그는 어떤 섬광처럼 스치는 단서를 얻었다. 신은 인간이 감히 진리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인간에게 욕망이라는 어쩔 수 없는 덧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 인간 욕망의 맹목성은 영원히 인간을 신의 정원에 들어오지 못하고 헤매다 말라죽게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신이 걸어놓은 저주로서의 인간 욕망이 어쩌면 신의 정원에 다다를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일지도 모른다. 인간의 욕망이라는 어두운 심연이 또한 인간을 살게 하는 힘인 것이다. 그는 반세기 전에 프로이트가 이미 통과했던 입구를 발견하고 신의 진영에 들어왔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그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그는 그가 발견한 무의식을 완벽하게 해독할 방법까지는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라캉은 프로이트가 발견한 무의식이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무의식을 해독할 단서를 찾아냈다. 프로이트가 중단한 지점에서 무려 반마일 이상을 나아갔다. 이러한 그의 전진은 신을 경악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자크 라캉(1901-1981)
오늘 날 구조주의와 탈구조주의라는 양대 사상을 잇는 위대한 철학자로 인식되는 라캉은 사실 철학자가 아닌 정신과 의사였다. 그는 미국식 정신분석학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자아의 형성 과정에 대한 이론으로 해석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소쉬르의 기호학적 개념을 빌어와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이론을 재해석하였다. 그러나 그의 급진적인 프로이트 해석은 전통적인 프로이트 이론을 신봉하는 기존 학계와 충돌하여 그는 국제 정신 분석학 협회에서 축출되었다. 1966년 그는 틈틈이 세미나란 방식으로 그의 이론을 강의한 내용을 묶은 논문집인 <에크리>를 출간하였는데 68혁명 이후 학계의 보수적인 이론에 식상한 지식인들의 폭발적인 관심을 끌며 일약 사상계의 총아로 떠올랐다. 그는 프로이트로 돌아가자는 기치를 내걸고 프로이트처럼 인간의 본질을 욕망하는 주체로 보았다. 그리고 언어학의 이론과 프로이트의 억압의 이론을 묶어서 인간이 언어로 둘러싸인 사회 속에서 유배된 존재로 보았다. 인간은 말하는 존재가 아니라 말해지는 존재라는 것이다.
라캉의 이론을 잘 모르지만 대부분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 아들은 어머니를 사랑하나 경쟁자인 아버지에 의해서 억압당하다가 굴복하여 결국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숨기고 아버지처럼 되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사실 프로이트의 이론은 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이론에 모든 것이 담겨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버지
어머니 아이
이 이론에 담긴 이야기의 구조를 알아보자.
1)단계: 아이는 어머니를 사랑한다.
2)단계: 어느 날 아버지가 나타나 아이는 공포를 느끼고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포기한다.
3)단계: 아이는 어머니에 대한 욕구를 숨기고 아버지를 닮으려고 노력한다.
4)단계: 아이는 자라서 엄마를 닮은 다른 여인과 결혼하여 아버지가 된다.
1)단계: 프로이트에 의하면 아이는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 한 몸이었던 원초적 기억을 갖고 있다. 어머니를 사랑하는 것은 어머니와 다시 한 몸이 되려는 욕구(리비도)이다. 프로이트는 이처럼 원초적 욕구(리비도)를 어머니의 자궁 속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으로 봄으로써 인간 욕구의 어두운 모습을 드러냈다. 즉 리비도의 최종 기착지는 어머니의 자궁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으로서, 결국 그것은 출생의 반대과정인 죽음에의 욕구(타나토스)이다.
2)단계: 아버지의 등장이란 아이에게 있어 자신과 같은 남근을 가진 또 다른 존재가 있다는 충격이고 아버지가 자기의 남근을 빼앗아갈지도 모른다는 공포(거세불안)에 휩싸인다. 이러한 공포 때문에 아이는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포기한다.(프로이트는 이때 아기가 느끼는 충격을 인간에게 평생 각인되는 트라우마로 본다. 정신병이란 이러한 불안과 공포가 성인이 된 이후에도 나타나는 증상이다.)
3,4)단계: 이때 숨겨진 욕구는 인간의 무의식으로 남는다. 이처럼 욕구를 감추고 아버지를 닮아 아버지의 세계를 살아가며 결국 자신이 아버지가 되는 일, 이것이 모든 문명을 살아가는 인간의 반복되는 모습이다. 결국 문명이란 리비도(쾌락원칙)를 숨기고 아버지의 세계(현실원칙)를 받아드리는 일이다.
이상의 요약해 본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이론은 인간 의식의 바탕에 무의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심리학과 정신분석학뿐만 아니라 20세기 인문과학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라캉은 이러한 프로이트의 이론을 생물학적, 정신분석학적 차원을 벗어나 소쉬르의 기표와 기의(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기호학적 개념과 야콥슨의 은유와 환유의 개념을 빌어 와 언어학적으로 재해석하였다. 즉 어머니와 자신을 구별하지 못하는 오이디푸스 이전 단계를 라캉은 주체와 객체, 자아와 세계를 구별하지 못하는 나르시시즘이 지배하는 단계로 상상계, 혹은 ‘거울 단계’라 칭한다. 이러한 단계에서 어린아이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영상 이미지, 혹은 타인의 이미지를 자신과 동일시함으로써 ‘나’라는 자아를 형성해 간다. 그런데 어느 날 아이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된 언어적 질서를 받아드림으로써 비로소 언어의 상징적 질서의 세계로 들어간다. 이때 아이는 사물과 나를 구분하고, 사물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만들어 낸 임의적 기표인 시니피앙의 세계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처럼 언어를 습득한 아이(아버지의 질서를 받아들인 아이)는 더 이상 사물과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지 않고 사물과 일정한 거리를 갖는 ‘상징 질서’ 속에 살게 된다.
프로이트는 이와 같은 오이디푸스 이론을 바탕으로 꿈, 재담, 증상, 언어의 실착 등을 분석한다. 꿈이란 인간의 무의적인 욕구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원초적인 욕구는 그대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압축과 전치를 통해 변형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라캉은 프로이트가 말한 압축과 전치를 언어의 기표가 갖는 은유와 환유의 연속적인 대치 과정으로 봄으로써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의 방법을 꿈뿐만 아니라 언어로 표현되는 모든 것으로 확장시킬 수 있는 지평을 열어 놓았다. 즉 모든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 되어 있다는 것이다.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라캉의 유명한 명제는 텍스트에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과 그렇게 말하려고 하지 않았지만 자기도 모르게 드러내는 것의 구별이 사실은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즉 무의식적인 글쓰기도 언어로서 구조화되어 있는 것이다.
시니피앙과 시니피에
라캉이 구조주의자로 불리는 이유는 그 역시 소쉬르의 기호학적 개념을 정신분석에 적용하였기 때문이다. 소쉬르는 기호를 의미에 관계하는 부분인 시니피에(기의)와 소리나 문자 등 물리적 표현의 수단인 시니피앙(기표)이 합쳐진 것으로 본다.
시니피에(Signifie, 기의)
기호(Sign)= ----------------------
시니피앙(Sinifiant, 기표)
예를 들면 우리가 사과라고 말할 때 맛있는 빨간 과일은 시니피에, 즉 기의에 해당하고 ㅅ + ㅏ +ㄱ +ㅗ + ㅏ 라고 우리가 발음하는 것은 시니피앙, 즉 기표이다. 그런데 소쉬르는 사실 기표와 기의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말한다. 우리가 군침이 도는 빨간 과일을 서과라고 말하지 않고 사과라고 말하는 것은 남들이 그처럼 말하기 때문인 사회적 약속인 것이다. 이처럼 특별한 원칙이 없이 단지 사회적 약속에 따른 그렇게 말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자의적이다. 자의적이란 말은 제멋대로 그렇게 정했다는 뜻이다. 결국 인간의 언어 행위는 내 의사와 관계없이 미리 정해진 룰을 따르는 일이다.
갓난아이가 있다. 아이가 울자 엄마는 “아이고! 우리 아가 배가 고프구나.”하며 젖을 물린다. 조금 후에 아기가 또 울자 엄마는 “아이고 우리 아가 응가했구나.”하며 기저귀를 갈아 준다. 이때 아기의 울음소리는 모든 시니피에를 대표할 수 있는 만사형통의 시니피앙이 된다. 어머니는 남들에게는 동일한 시니피앙을 각각의 다른 시니피에로 분절해 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아기는 어느 정도 자라면 울음 대신 m-m-a 등의 구개음으로 된 시니피앙을 사용한다. 그러나 이때도 엄마는 아기의 단순한 시니피앙을 배가 고프다든지 아프다든지 각각의 시니피에로 귀신 같이 알아듣는다. 그러나 어느 날 아기가 대여섯 살의 어린이로 자라서 배가 고프다고 맘마라고 했다간 “너 똑바로 말 못해!”하며 아버지에게 당장 혼쭐이 난다. 이때 어린이가 “밥 줘”라고 말했다면 아버지는 “밥 줘가 뭐야. 밥 주세요라고 해야지.”라고 말하는 것이다.
상징계와 상상계
라캉은 이처럼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이론에서 아버지의 개입을 어린이가 언어의 세계를 받아드리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그 유명한 프로이트의 '아버지의 이름으로(nom de pere)'에서 이름을 뜻하는 불어의 nom이 금지를 뜻하는 동음이의어인 non(no)으로 바꿔 해석한 것이다. 이처럼 언어의 세계로의 진입은 저렇게 말하는 것은 안 되고 이렇게 말해야만 하는 금지의 세계로 진입함을 뜻한다. 사물을 이렇게 말해야 한다는 것은 하나의 사물을 무엇으로 대신해서 말해야 하는 것을 뜻한다. 걸리버 여행기에서 나오는 라프타인들은 의사소통을 위해서 사물들을 담은 자루를 갖고 다녔다고 한다. 예를 들면 그들이 원하는 빵을 표시하기 위하여 빵을 가지고 다니다가 누구를 만나서 빵을 달라고 말하려면 빵을 꺼내어 보이면 된다. 그러나 빵의 시니피앙을 누구나 먹는 빵으로 말하는 것을 약속한 이상 더 이상 빵을 가지고 다닐 필요가 없다. 이처럼 언어의 세계는 어떠한 사물을 언어적 기호로 대체하는 상징의 세계이다.
라캉은 언어의 세계를 상징의 세계라고 말하고 오이디푸스 이론에서 아버지의 등장으로 아이가 어머니에 대한 욕망을 감추고 아버지의 세계로의 진입을 상징계로 진입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 이전 아기가 어머니를 욕구하며 어머니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단계를 거울 속의 아이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과 자신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과 흡사한 거울 단계, 또는 상상의 단계로 구분한다.
꿈의 해석
프로이트에 의하면 꿈이란 인간의 무의식적 욕망의 발현이다. 그러나 꿈속에서 인간의 욕망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압축되거나 전치(replace)되어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압축이란 여러 장의 사진을 한꺼번에 보는 것처럼 이미지들이 겹쳐지는 현상이며 전치(replace)라는 것은 어떠한 내용을 다른 것으로 바꾸는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떤 유부녀를 사랑하는 한스라는 젊은이가 있다고 하자. 한스는 어느 날 꿈속에서 밤색 테라스가 아름다운 레스토랑과 호사스런 진주 목걸이가 걸려 있는 보석상을 찾아 헤매는 꿈을 꾼다. 그러다가 교통사고를 목격한다. 사고를 당한 남자는 목뼈가 심하게 부러져 죽어 있다. 그는 악몽을 꾼 것이다. 그러나 이 꿈은 악몽이 아니다. 한스의 욕망이 꿈으로 나타난 것이다. 한스가 짝사랑하는 여인의 이름은 브라운 테레사로 그녀의 풍만한 가슴 위에 드러난 진주 목걸이의 이미지는 늘 한스를 괴롭혔다. 그녀의 이미지는 밤색 테라스(브라운 테레사)의 레스토랑, 그리고 진주 목걸이가 아름다운 보석상과 겹쳐지며, 그녀를 소유하고 싶은 욕망은 그녀의 남편을 살해하고 그녀를 뺏고 싶을 정도이다. 그러나 비록 꿈속이지만 이러한 욕구는 양심(초자아, 수퍼 에고)의 검열에 걸려 그녀의 남편은 사고사를 당하는 것으로 대치(replace)된다.
라캉은 이러한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에서 압축과 전치를 야콥슨의 은유와 환유의 이론을 빌려와 재해석하였다. 전장의 구조주의 시학에서 이미 설명한대로 은유란 A=B로 표현할 수 있는 등가의 원리가 작용한다. ‘내 마음은 호수요.’나 ‘노년은 인생의 황혼’등의 표현이 이러한 은유의 예이다. 그런데 이때 마음과 호수, 노년과 황혼처럼 각각의 기표는 서로 겹쳐져서 중첩된 이미지를 나타낸다. 야콥슨은 시란 이처럼 은유에 의해 중첩의 효과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라캉은 바로 이러한 은유의 중첩의 효과가 프로이트가 말한 꿈의 해석에서 압축과 같은 것으로 보았다. 반면에 라캉은 꿈의 해석에서 어떤 장면이 다른 장면으로 대치되는 전치는 어떠한 기표가 인접성에 의해 다른 기표로 대체되는 현상인 환유와 같은 것으로 보았다. 이처럼 라캉은 프로이트가 말한 무의식 또한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음을 밝히고 무의식을 언어처럼 해독할 수 있는 길을 터놓은 것이다.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늙은 비애다.
푸주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시인 릴케가 만난
슬라브 여자의 마음속에 갈앉은
놋쇠 항아리다.
손바닥에 못을 박아 죽일 수도 없고 죽지도 않는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또
대낮에도 옷을 벗는 어리디어린
순결이다.
삼월에
젊은 느릅나무 잎새에서 이는
연둣빛 바람이다.
김춘수의 유명한 <나의 하나님>이란 시이다. 이 시를 <꿈의 해석>을 분석한 라캉의 방식으로 풀어 보자. 어느 날 김춘수는 성당에서 사순제 행사에 참여했다 집으로 돌아간다. 전철 안에서 그는 시종 마음이 무겁다. 십자가에 못 박혀 살점에 피가 뚝뚝 떨어지는 예수님의 모습이 그를 괴롭힌다. 그는 잠시 지하철 안에서 깜박 잠이 든다. 꿈속에 예수님은 늙고 초췌한 모습이다. 늙은 비애이다. 푸주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처럼 축 늘어져 있다. 예수님에 대한 무거운 마음은 젊은 날 읽었던 릴케의 <사랑하는 하나님의 이야기>를 생각나게 했고 릴케가 사랑했던 슬라브 여자인 루 살로메가 떠올랐다. 릴케는 루 살로메 때문에 자살하였다. 마음이 무거운 놋쇠처럼 무거워진다. 하나님=늙은 비애=푸주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놋쇠 항아리(은유 작용) 등으로 사순제 때 보았던 고통스런 하나님의 이미지는 꿈속에서 압축되고 겹쳐진다. 그러나 하나님을 이런 이미지로 보는 것은 신성모독이다. 죄악이다. 마음 한 구석의 수퍼 에고가 작용한다. 무거움을 대체하는 다른 이미지로 전환해야 한다. 무거움의 반대인 가벼움이란 기표가 떠오른다. 대낮에도 창녀처럼 수치스럽게 옷을 벗는 것이 아니라 천진한 벌거벗은 어린아이가 떠오른다. 어린 아이는 순결, 잎새, 연두빛 바람의 이미지와 연결된다. 비로소 안식이 온다. 잠이 깬 김춘수는 한결 가벼운 마음이 된다.
하나님=늙은 비애= 커다란 살점=놋쇠 항아리 (무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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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어린 아이=순결=잎새=연두빛 바람 (가벼움)
이처럼 이 시는 십자가에 못 박힌 하나님의 이미지가 은유작용에 의하여 중첩되어 가는 과정에서 무거움에서 가벼움으로 전환(replace)이라는 이항대립의 환유작용이 작용하는 것이다.
첫댓글 보이지 않는 의식너머의 현상을 기호와 정신분석을 이용하여 문학적 은유의 세계까지 사고할 수 있게 한 철학자야말로 정교한 과학철학자가 아닐까 생각되어요. 니코스님이 쉽게 풀어 놓은 해석도 일품이구요.
하지만 역시 철학의 세계는 단순한 것이 아니라서 짧은 한 편의 해석만으로는 잡힐듯 말듯,
on-off 의 연속성상에 있는 것은 분명하네요.
언제, 글방에서 라캉의 이론을 쉽게 풀이한 책을 읽으며 토론에 붙여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저만의 생각인가요.
라캉을 혹평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눈먼 수리공>을 쓴 리차드 도킨스 같은 학자는 라캉을 사기꾼이라고까지 말합니다. 라캉의 이론은 일종의 증명할 수 없는 소설 같은 이야기라는 거죠. 그런데 그가 그렇게 비판한다면 사실 도킵슨이 의존하는 사회 생물학적 이론 역시 증명할 수 없다는 점에서 사기입니다. 라캉의 이론은 구조주의 뿐만 아니라 포스트 구조주의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고 최근 슬라보예 지젝에 의해 다시 부활하는 느낌입니다. 쉽게 풀이한 책이 있나요? 함께 공부해 보죠.
게을러지고 있는 녹슨 창고에 불을 자꾸 비춰줍니다. 그래서 감사합니다. 니코스님...... 덕분에 지난 번에도 인문학에 대해서 잠시 열중할 수 있었습니다......꿈을 많이 꿈니다. 그 꿈을 (고) 고원 교수님께서 활자화 시키도록 많은 격려와 채칙을 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프로이트를 좋아 하게 됐고요....
인문학 책을 많이 읽는 것이 글쓰기에 도움이 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올해는 본격적으로 인문학 공부를 해 볼 생각입니다. 시간이 있으면 함께 하시죠.
신을 경악케 한 사내 라캉을 공부 하고 있군요. 이사내 외모도 죽여주는 디,
요런 얼굴에 담배 연기 날리는 인간이라야 신의 영역에 감히 얼씬 거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국화의 생각.
문학이론에 눈이 떠져 저승문전에서 전공한다고 설칠까 두렵소이다.
얼마 전 프랑스에서 라캉의 혼외정사로 태어난 딸의 아버지에 대한 전기가 화제가 되었는데 전기에 의하면 아버지인 라캉을 자신과 엄마에게 아주 냉정하고 인색했던 인간으로 묘사하였다고 하네요. 라캉의 인간적인 결점을 둘러싼 화제들이 살아있을 때도 끊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라캉 역시 인간이라는 굴레를 벗어날 수 없었던, 어리석은 인간 중의 하나였나 봅니다.
좋은 연구글입니다. 노고에 감사. 무의식의 언어적 구조분석을 통해 억압된 욕망이 어떻게 표출되는지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프로이트나 라캉의 인간성에 대한 기대는 접고요.
연구라기 보다는 이쪽 저쪽에서 귀동냥 한 것을 옮긴 것 뿐입니다. 언젠가 라캉에 대해서 정말 연구라고 할 수 있는 개안을 하기를 기대합니다. 그래서 이번에 라캉의 책을 새롭게 3권이나 주문했는데 도착할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중에 사이 모임에서 한 번 발표하도록 하죠.
라캉을 주변 사람들에게 설명 하려면 이론보다 그에 합당한 예가 중요한 것 같아요. 최소한의 이론과 그에 부합하는 풍부한 예화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적절한 예를 통해 왜 욕망이 생기는지, 욕망이란 무엇인지, 왜 욕망은 채울 수 없는 건지, 등등을 이해시킬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문학. 철학하는 사람들만 이해하는 라캉보다 일반인도 쉽게 알 수 있는 라캉을 기대해 봅니다. 사랑하는 연인이 내 마음과 같을 거라 믿는 것은 <거울단계>와 같은 오인에 해당 될까요? 거듭 부탁하지만 다음 글엔 풍부한 예화를 바탕으로 라캉을 써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선생님의 건투를 빕니다. 건강하시고...
미류나무님 오랜만입니다. 저도 미류나무님이 원하는대로 쓸려고 해도 잘 안되네요. 쉽게 쓴다는 것이 더 어려운 것 같아요. 한 철학자의 사상을 100% 이해하고 일반인을 위해 쉽게 풀어 쓸 수 있는 경지야말로 그 철학을 이해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언젠가 라캉에 대해 그렇게 쓸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그나마 최근에는 여러 바쁜 일이 많아서 손도 못 대고 있네요. 선생님도 건강하시고 가끔 글방에서나마 뵙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