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한 번째 편지
김 영 강
그림 : 정 해 정
4회
첫 애를 낳을 즈음에 어머니가 오셨다. 시어머니께서 휴가를 받아 산후조리를 시키기로 되어 있었는데 어머니가 오신 것이다. 그땐 방 두 개짜리 아파트로 옮겼었다. 그냥 그대로 살 수도 있었으니 어머니가 오시기 때문에 옮긴 것이다.
어머니는 딸을 붙들고 서럽게 우셨다. 그 당시, 옥희는 너무나 말라 있었다. 보이는 건 부른 배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며칠 동안이나 딸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또 배를 어루만지며 울고 또 울었다.
“그 예쁜 얼굴이 도대체 이게 뭐냐? 얼마나 고생을 했으면 이 꼴이 됐냐?”
사실 그때 옥희는 자신의 생활이 힘이 드는지 어떤 지도 모르고 살았다. 그리고 자신이 그렇게 말랐다는 사실도 몰랐다. 그냥 자꾸 눈물이 났었다.
나중에는 사는 꼴이 이게 뭐내면서 울었다. 어머니 생각에는 딸이 완전히 속아서 결혼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모양이었다. 더구나 “너는 실패다. 실패야.” 라는 말까지 했다. 실패라는 말에 옥희는 화가 났다. 엄마라는 사람이 딸한테 실패라니? 딸이 울어도 엄마는 위로를 해주어야 하는 사람 아닌가? 더구나 사윗감으로 점찍어 결혼을 시킨 사람은 엄마이다. 친정엄마의 입장에서는 너무 실망이 커서 그럴 수도 있다고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미국이라고 하니 영화에서 본 넓고 화려한 아파트를 상상하셨던 것 같았다. 그러나 실패라는 말은 어머니의 실수다.
“실패라니? 내가 뭐 다 살았어? 앞날이 창창한데 엄만 그게 무슨 소리야?”
말은 그리했지만 옥희의 눈은 울고 있었다.
딸 셋을 낳았다. 사실 옥희는 애를 하나만 낳고 끝내려고 했다. 그러나 그게 계획대로 안 되었다. 둘 낳고는 반드시 끝내려고 계획했는데 예기치 않게 셋째가 생겼다. 시어머니 말씀대로 우선 틈틈이 영어 공부부터 했다. 다행히 한국서부터 영어는 웬만큼 했기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직업센터에 가서 컴퓨터를 열심히 배웠다. 바로 그때가 산업화 바람이 불어 컴퓨터 시대가 열리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셋째를 낳는 바람에 직장 생활은 미루어졌으나 전문직을 향한 그녀의 실력은 늘어갔다. 나중엔 직업센터에서 보조 선생 역할을 하며 월급까지 받았다.
회사가 합병을 해 타주로 이전하게 되었을 때, 남편은 당장 굶어죽기라도 할 것처럼 얼굴이 사색이 되어 안절부절못했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내색이 심했다.
“아이구 어떡하지, 아이구 어떡하지”를 연발하면서 이리 돌아눕고 저리 돌아누우며 한숨을 푹푹 쉬어댔다. 워낙 든든한 회사였기에 그녀가 받은 혜택이 아주 후해, 직장을 그만둔다 해도 생활에는 별 지장이 없는 상황이었다. 살림의 규모를 늘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집도 처음 산 집에서 그대로 살고 있다. 두 딸은 이미 출가를 한 후였고 막내도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시기였기에 옥희는 차라리 잘된 것 같았다. 나이가 들수록 능력의 한계를 느껴 가끔은 이제 그만둘 때가 됐나 보다 하고 생각을 했었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계산을 이미 다 해본 옥희다.
딸들도 적절한 시기에 잘 그만두게 된 것이라고 엄마를 위로했다. 회사가 계속 그대로 있었더라면 본인의 의지로는 그만두지 못했을 것이라고 하면서 그동안 엄마 고생했는데 이제는 자기네들이 생활비를 보태겠다고 해 말만 들어도 흐뭇했다. 그런데 남편은 밉살스런 소리를 하며 옥희 속을 긁었다.
“왜 애들보고 생활비 얘기하고 그래?”
남편은 참 이상한 면이 있다. 무슨 때에 아이들이 비싼 선물이라도 하면 그것을 마음 아파하는 것이다. 다음엔 이렇게 비싼 것 하지 말라고 아주 정색을 하고 말한다. 카드에 금일봉이라도 들어있으면 카드만으로도 족하니 돈은 도로 돌려주려 한다. 옥희는 남편에게 한바탕 난리를 쳤다.
“애들 힘든 것만 가슴 아프고 와이프는 평생 힘들어도 돈만 벌어오면 된다 그거야? 내가 돈 잘 벌어 오니까 그동안 나하고 살았어? 이제 직장 떨어졌으니 이혼이라도 하고 싶어? 당장 생활의 위협을 받는다 하더라도 남자가 어떻게 그딴 식으로 안달을 해? 왜, 나는 집에서 놀면 안 돼?”
말을 한껏 불려 과장을 해 쏟아내면서 옥희는 남편을 다잡았다. ‘그래, 내가 몸이라도 팔아서 돈만 벌어오면 좋겠지?‘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넘어왔으니 그건 잘 참아냈다.
그런데 남편이 그녀가 번역 일을 맡게 됐다고 하니 어찌나 좋아하는지 옥희는 또 한 번 씁쓸한 기분을 맛보아야만 했다.
그동안 직장 생활하느라 힘들었는데 또 금세 일거리가 생겨 어떡하지? 좀 쉬었다가 일을 맡지 그래.
이렇게 말을 했다 하더라도 번역 일을 안 맡을 옥희는 아니다. 한바탕 난리를 치며 교육을 시켰는데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해가 서산에 걸렸는데도 남편은 들어오지 않았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자신이 처량해졌다. 옥희는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큰딸 집을 향해 차를 몰았다.
“할머니이--” 하고 좋아 날뛰는 손자들을 품속에 안으니, 이게 바로 행복이구나 싶었다. 큰딸은 옥희에게 친구 만나고 오는 길이냐면서 아빠 들어오실 시간 다 됐다고 뜻밖의 말을 했다. 남편은 사위랑 같이 골프를 치러 간 것이었다.
“아까 낮에 이 서방이 아빠랑 통화했거든요.”
옥희가 집구석에 앉아 혼자 지지고 볶고 하는 동안에 남편은 탁 트인 푸른 초원을 훨훨 날아다녔다. 이런저런 망상을 하며 속을 끓였던 자신을 돌아보며 ‘아이쿠, 다행이네.’ 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복잡했던 머리가 이제야 정리가 되었다. 사위의 전화를 받고 ‘얼씨구 좋구나.’ 하면서 골프채를 차에 싣고 막 떠나려는 차에 집배원을 만났을 것이다. 그리고 편지들을 갖고 들어와 겉봉을 훑어보는 중에 옥희가 들어온 것일 게다.
드디어 차가 멎으며 남편과 사위의 모습이 거실 창밖을 통해 시야에 들어왔다. 멀찌감치서 보니 장인과 사위가 같은 또래의 친구 같다. 사위보다는 머리 하나가 더 있는 남편의 큰 키도 오늘 따라 왠지 멀대같아 보여 꼴불견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늘 아버님이 싱글 쳤어요. 싱글”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인사도 생략하고 사위가 한 첫마디였다. 싱글이란 남편이 아직 한 번도 못 쳐본 점수 아닌가? 옥희의 출현이 뜻밖이라는 듯 남편은 잠깐 주춤했다. 그리고 큰 소리로 말했다
“요게 김동추 머리통이다아--- 하고, 때리니까 딱 딱 하고 어찌나 공이 잘 맞던지····.어허어 쏙 씨언해.”
큰 소리로 목청을 돋우고는, 신이 나서 죽겠다는 듯이 그는 골프 치는 시늉을 했다. 큰딸과 사위는 김동추가 누구냐고 물었다. 남편은 “그런 사람이 있다아아--” 하고 노래를 부르듯 뒷말을 길게 늘어뜨리고는 두 팔을 쭉 뻗어 휘두르면서 계속 골프 치는 시늉을 했다. 있는 힘을 다해 진짜 김동추의 머리통을 갈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박영선이 생각을 안 했을 리 만무다. 옛날 추억과 더불어 아내가 어떻게 알았을까? 하는 궁금증도 같이. 그런데도 싱글을 쳤다니 대단하다. 아니다. 남편은 두 가지를 생각을 한꺼번에 못하는 사람이니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오직 골프에만 몰두했을 테니 그렇다.
남편은 참 이상한 면이 있다.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데 옥희가 무슨 말을 하려 하면 “가만있어. 가만있어.” 하고 인상까지 쓰고 손사래를 친다. 아주 강력하게 말을 막는다. 무시를 당하는 것 같아 옥희가 자존심이 상할 정도다. 한 가지에 열중하면 그 외의 것은 눈에도 귀에도 마음에도 안 들어오는 것이다. 열중을 해야 할 특별한 일도 아닌 맨날 보는 뉴스를 보면서도 그런다.
일단 골프가 끝났으니 이제 그의 머리에는 김동추뿐인가? 그렇게 오랫동안 사랑하던 여자, 박영선이라는 이름이 아내의 입에서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태도에는 손톱만치의 변화도 없었다. 입은 닫고 있어도 눈으로 말할 수 있잖은가? 남편에 비해 옥희는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 눈으로 하는 말도 다 감지를 할 수 있다.
골프 치는 시늉을 하고 있던 남편이 갑자기 행동을 딱 멈추고 옥희의 눈에 시선을 꽂고는 마디마디를 꼭꼭 누르면서 힘주어 말했다.
“어쩔 거야? 갈 거야? 말 거야. 가고 싶으면 가라구. 얼마든지 가라구. 7월 30일이면 아직 3주 남았으니 그 안에 만나 봐도 되겠네.”
그 전에 만나기라도 한 것 같은 묘한 여운이 맴도는 끝말에 다시금 화가 치솟았다. 웬만큼 잔잔해진 옥희의 감정에 다시금 돌멩이를 던진 것이다. 집이라면 한 판 붙어버릴 텐데 사위 앞이라 어쩔 수 없어 꾹 참았다. 남편을 잠깐 꼬나보고는 맘속으로 소리를 지르는 수밖에 없었다.
아이구, 덩치 값도 못하는 양반아. 당신 나한테 열등의식 있어? 아니면 개 눈엔 똥만 보인다더니 당신이 옛날에 박영선이 이하 여러 여자들하고 놀아난 결과, 얻은 결론이 겨우 그거야?
큰딸과 사위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둘이서 눈빛으로만 표정을 주고받았다. 옥희는 사위를 향해 지극히 부드러운 어조로 말머리를 돌렸다.
“이 서방 배고프지? 저녁 다 됐으니 어서 씻고 와.”
부엌을 향하면서 옥희는 한 번 더 속으로 말했다. 이번에는 조용히.
그래. 갈 거야. 왜 못 가. 꼭 간다고. 당신이 간다면 같이 갈 수도 있어. 가서 멋지게 연극 한 번 하자구.
만일 입장이 바뀌어 박영선이가 그런 편지를 보냈다 하더라도, 아니 남편 눈앞에 나타났다 하더라도 옥희는 저렇게 채신머리없이 굴지는 않을 것이다. 정말 편안한 감정으로 여유 있게 대할 자신이 있다.
식탁에 앉자마자 둘째 녀석이 “와, 함머니 팬케이--익” 하고 목청을 돋우며 눈을 반짝거린다. 두 아이가 할머니가 해주는 음식은 다 잘 먹는다. 그중에서도 할머니 팬케이크인 해물전을 제일 좋아한다. <계 속>
첫댓글 하느님은 왜 그렇게 똑같은 사람을 만드시면서 속은 다르게, 정말 다르게 만드셨는지? ㅎㅎ
질투를 하는거 봉께 아직도 젊고, 사랑이 넘치네.
잘 보고 담회를 기다립니다.
정말이지 사람은 너무나 가지각색입니다.
질투를 하는 걸, 젊고 사랑이 넘치는 걸로 봐주시니 다행입니다. 사실이 그런 것 같아요. 아직도 옥희 남편은 아내를 좋아하나 봅니다.
60 넘아까지 부부가 살다보면 뭐 그리 좋은 감정이 존재하나요? 그냥 그렁저렁 끈끈한 정으로 사는 것 아닌가요?
두 부부가 결국 찾아 간 곳은 딸네집
화목한 가족이란 생각이듭니다.
티격태격하면서도 옥희씨 남편보다 훨 지혜로운 여인입니다.
적반하장 남편은 오히려 큰소리군요.
편지를 손에 쥔 남편 어찌되시려나?
그렇습니다. 옥희가 남편보다 훨씬 지혜롭습니다.
젊어서부터 아내가 매사에 지혜로웠기 때문에 남편이 자신감이 없어 편지 한 장에 그 난리를 친 게 아닐까요?
지금 편지가 남편의 주머니에 들어 있는데, 설마 딸과 사위 앞에서 공개하지는 않겠지요? 그 정도 "쪼다"는 아니기를 바랍니다.
@김영강 우왕, 정말 여자의 역활에 대해 많이 생각해 봅니다.
감정이 기본적으로 흘러가지만, 목까지 치밀어 오르는 그 순간에
이것을 어떻게 하여야하는 지를 용케도 절제하는 힘!
아마도 우리네 어머니들에게서 말이 아닌, 삶을 통해 이어져 내려오는
그 무엇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친정어머니도 함께 동조하시다가도 결국에는 지혜로운 길을 지도하시니까요.
남자들은 여자들이 아니었으면, 아마도 빛이 좀 덜났을테니까요.
@물방울(이선자) "목까지 치밀어오르는 그 순간" 을 어찌 넘기느냐가 정말 중요합니다. 부부지간이라도 할말 안 할말이 있잖습니까?
어찌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삽니까? 우리네 여자들은 물방울님 말씀대로 용케도 절제하는 능력이 있어 참 다행입니다.
이 세상의 남편들은 아내한테 다 고마워하고 살아야 된다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