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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한 번째 편지 김 영 강 그림 : 정 해 정 5회 / 마지막 회 남편은 싱글 친 얘기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사위도 맞장구를 쳐가며 장인의 기분을 한껏 맞춰 주었다. 거기다가 손자 녀석까지 합세를 하여 싱글이 뭐야? 하고 끼어들었다. 아무리 설명을 해도 네 살짜리 아이가 어찌 알겠냐마는 남편은 녀석한테도 자랑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둘째도 눈을 말똥거리며 듣고 있었다. 이제는 두 녀석들이 말을 잘해 의견 소통이 잘 된다. 그리고 어찌나 재잘재잘 말이 많은지, 저녁을 먹으면서도 말하기에 더 바쁘다. 낮에 일어난 일을 몽땅 잊어버렸는지, 옥희도 남편도 아이들 재롱에 빠져 마냥 즐겁기만 하다. 남편의 얼굴에 김동추의 하얀 얼굴이 겹쳐졌다. 그리고 또 다른 상상의 날개가 펼쳐졌다. 그도 이렇게 손주들의 재롱을 보며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으리라는. 김동추에게는 옥희가 편지를 쓰는 대상에 불과했고, 끄덕도 안 하는 옥희에게 백 통의 편지를 보낸 그 자체는 사랑이 아닌 집념일 수도 있다. 만일 그가 옥희를 진정 사랑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한때의 감정에 불과하다. 지금 그는 괜찮은 여자를 만나 아주 잘 살고 있을 것이다. 쌀쌀하기 그지없고 도도하고 교만한 옥희에게 차인 것이 정말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만일 기적이 일어나 옥희라는 여자와 결혼을 했더라면 어떡할 뻔했지? 아휴, 생각만 해도 스트레스다. 초조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면서 만날 아내 눈치만 보다가 바짝바짝 말라 비틀어졌겠지. 아마도, 이런 생각을 하며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을지도 모른다. 옥희는 김동추와의 만남에 기대를 걸고, 옷장 문을 열고 한참 서 있던 자신을 돌아보았다. 거울 앞에 서서 표정까지 관리하고 요리조리 몸매를 비추어 보던 생각을 하니 푸우우 하고 웃음이 터졌다. 다음 날 아침, 한판 붙어보리라 하고 단단히 벼르던 마음은 어디로 사라져버렸는지 옥희는 침묵했다. 남편 역시 마찬가지다. 어쨌든 김동추와 박영선, 그들의 등장이 결과적으로는 피장파장이 된 것인지도 모른다.
박영선 일은 어떻게 알았냐고 하면서 남편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면 그렇지. 그 성격에 안 물어보면 이상하지. 옥희는 남 말하듯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당시는 참으로 씁쓸한 느낌이었으나, 이제는 정말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동안 아무 내색도 안 했지? 나한테 물어볼 수도 있었을 텐데.” 남편의 음성은 차분하면서도 부드러웠다. “다 지난 일인데 뭐 하러 물어요? 그리고 결혼 전 일인데, 무슨 상관있어요? 남자가 결혼 전에 연애도 한 번 못 했다면 그게 더 이상하지.” 부글부글 끓던 속이 하룻밤 만에 어찌 이리 가라앉았는지 옥희도 이상했다. 남편 역시 하룻밤 사이에 딴 사람이 되어 있었다. 박영선과의 과거 때문일까? “그래. 맞아. 현재가 중요하지 과거 같은 건 들먹일 필요가 없지.” “과거 같은 건” 이란 말에 옥희와 김동추도 포함되어 있었으나, 그녀는, ‘뭐야 또? 당신은 내가 김동추하고 정말 연애를 했다고 생각해?’ 하고 따지지도 않았고, 어제처럼 화도 안 났다.
박영선과의 연애담을 털어 놓을 수도 있건만 남편은 암말 안 했다. 잠깐 주춤하더니 그는 한 가지 물어봐도 되냐고 아내한테 되물었다. 말투가 아주 부드러웠다. “뭔데요? 얼마든지 물어봐요.” 약간은 계면적인 웃음을 띠면서 그가 물었다. “그 남자 뭐하는 사람이야?” 하고. 싸움의 불씨를 자신이 던진 사실을 남편은 모를 것이다. 옥희는 더 이상 따지지 말고 그냥 끝내기로 작심했다. 타 오르려고 하는 불을 겨우 껐다. 어쨌든 사건의 발단은 편지 한 장이 불씨였으까. 그러나 음성은 커졌고 말 마다마디에는 짜증이 잔뜩 묻어 있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그 새끼가 그 남자로 불려졌다. “뭐하는 사람인지 나야 통 모르지. 40년 전에 공대 학생이었다는 것밖에. 그담엔 모르지이---. 어떻게 됐는지.” '죽었는지 살았는지' 하려다가 옥희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제야 아차 싶었는지 남편은 “아, 참 그렇구나.” 하고 순순히 받아넘겼다. 그런데 이어진 다음 질문이 걸작이었다. “잘생겼어?” 옥희는 피식하고 웃음이 터졌다. 그녀는 박영선이가 자신보다 더 아름다우리라는 생각이 앞서지만 아무런 감정 개입이 없다. “아니 쪼끄맣고 못생겼어. 너무너무 쪼끄매.” 사실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녀는 김동추한테 미안했다. 잘생겼다 하더라도, 이제는 편지 백 통 이야기를 남편에게 솔솔 불었던 신혼 때의 그 옥희가 아니다. “그래? 정말?” “정말이지 그럼---. 근데 이 나이에 그런 걸 왜 물어요. 정말 애 같아.” 이번에는 박영선이 한몫한 것 같은 소리가 이어졌다. 고개를 삐딱선에 태우고 얼굴을 맞대면서 남편이 또 술수를 쓰는 것이다. “이게 다 아직도 내가 당신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 아니겠어?” 씽긋 웃는 표정도 말투도 옥희한테는 느끼했다.
‘유치하기는····. ’ 하는 소리가 입 안에서 뱅뱅 돌았으나 뱉지는 않았다. 7월 30일을 일주일쯤 앞두고, 옥희는 뮤직센터에서 열린 유명 피아니스트의 연주회에 갔다. 남편은 클라식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 친구랑 동행이었다. 모처럼 정장을 한 참말로 오랜만의 나들이었다. 친구랑 둘이서 한껏 행복하게 연주회를 관람하고 우루루 몰려나오는 관중들에 섞여 주차장을 향하는데 누가 뒤에서 불렀다. “옥희 씨.” 하고. 남자 목소리였다. 옥희는 돌아서서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분명히 바로 뒤에서 불렀는데 모두들 와글거리며 옥희를 지나쳤다. 같이 가던 친구도 “분명히 불렀는데.” 하고 그 자리에 섰다. 그때 아주 작은 몸집의 남자가 미소를 띄우며 옥희 앞에 나타났다. 김동추였다. 옥희는 그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40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으나 그는 예전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타임머신을 타고 옛날로 도로 돌아간 듯했다. 하얀 테 안경도 그대로 끼고 있고 낯 색도 창백했다. 초청장을 받은 후부터 계속해서 김동추의 환영에 사로잡혀 있었던 탓인지, 정말 예상치도 못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생각이 갈팡질팡했으나 그녀는 김동추와의 만남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만나고 보니 너무나 담담했다. 김동추 역시 담담하게 그녀를 대했다. 40년 만에 우연히 만난 사람들이 어떻게 그리 쉽게 알아볼 수가 있느냐며 감탄하는 친구와 함께 그들은 저쪽 나무 밑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초청장 받았다는 얘기를 시작으로 대화가 술술 잘 이어졌다. 김동추와의 일을 다 알고 있는 친구가 중간에서 거들었다.
“옥희가 초청장 받고 지금, 그날만 손꼽이 기다리고 있는데, 이렇게 미리 만났네요.” 보통 때 같으면 펄쩍 뛸 옥희다. 그런데 그녀는 그냥 가만있었다. 그들은 일어날 생각도 않고, 또 다른 데로 자리를 옮길 생각도 않고 그 자리에 앉아 얘기를 계속했다. 입담 좋은 친구가 있어 얘기가 더 잘 풀렸다. 김동추는 독신이었다. 60이 되도록 결혼을 한 번도 안 한 것이다. 옥희의 가슴에 파도가 일었다. 죄를 지은 것처럼 김동추에게 미안했다. 꼭 하고 싶었던 말, 그때는 참 미안했단 애길 하려고 하는데 어디서 “동추 씨. 동추 씨”하는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까지 거기 있으면 어떡해요? 빨리 가야죠.”하는 소리와 함께 웬 여자가 뛰어오고 있었다. 얼굴은 안 보이고 형상만 보였다. 몸집이 컸다. 모습이 눈에 익었다. 여자의 목소리가 하도 커서 뮤직 센터가 쩡쩡 울렸다. 옥희의 침대도 흔들거렸다. 꿈이었다. 40년 동안에 한 번도 김동추 꿈을 꾼 적은 없다. 그런데 요즘 매일 생각을 하다 보니 꿈에까지 그가 나타난 모양이다. 꿈을 꾼 바로 그다음 날이었다. 옥희는 뜻밖의 편지를 또 한통 받았다. 발신인은 김동미였다. 아니, 김동미가 웬일로? 동시에 발신처로 눈길을 주니 김동추가 보낸 편지와 같은 주소였다. 순간, 강한 의문 하나가 번개처럼 번쩍하며 뇌리를 스쳤다. 초대장을 받은 후부터 무슨 까닭인지 김동미가 김동추의 얼굴에 겹쳐져 자꾸만 머리에 떠올랐었다. 봉투를 뜯는 옥희의 손이 떨렸다. 회갑연이 사정이 여의치 않아 취소되었다는 간단한 공문 편지와 함께 김동미가 친필로 쓴 편지 한 장이 들어 있었다. 40년이라는 세월의 벽이 무너져 내렸다. 옥희야, 너무나 긴 세월이 흘러버렸어. 그러고 보니 졸업하고 처음이구나. 네가 깜짝 놀랄 소식 한 가지 전한다. 나, 동추 씨랑 결혼했어. 우리가 먼 친척간인 거, 너도 알지? 그래서 집안의 반대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어. 자세한 얘기는 만나서 할게. 할 얘기가 정말로 너무너무 많아. 옥희야, 내가 그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는 너까지도 사랑했다면 너는 믿을 수 있겠니? 진심이야. 나는 동추 씨가 품고 있는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되었어. 슬픔, 아픔····. 그리고 그의 지병까지도. 동추 씨의 건강이 갑자기 악화돼 회갑연이 취소됐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태가 아주 좋아 의사의 허락 하에 추진한 일이었는데 말야. 지금 병원에 있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꼭 와 주리라 믿는다. 저 만치서 스무 살 적의 김동추가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허약해 손가락으로 톡 건드리기만 해도 쓰러질 것 같았다. 김동미가 슬픈 얼굴로 다가와 그를 부축했다. 고요한 집안 분위기가 갑자기 무거운 침묵으로 변해 옥희의 가슴을 짓눌렀다.
그녀는 큰 숨을 한번 들이쉬었다가 휴우하고 내쉰 다음, 마음을 가다듬고 수화기를 들었다. 그리고 편지 끝에 적혀 있는 전화번호를 조심스럽게 눌렀다. <끝> |
첫댓글 아 정말 동미씨가 좀 목에 가시처럼 걸렸었어요
그래서 동미씨에 대해 물었던 적 있잖아요
아 참 예감이란 참참참
참 잘했네요. 동미씨
두루두루 이리도 넓은 마음을 갖기란 쉽지 않은데
그래도 동추씨 아내복 있습니다
사람의 인연이란 참! 뭐랄까?
결국에는 이렇게 백한 번째 편지가 끝이나는군요.
재밌는 마지막 회입니다.
선생님, 수고 많으셨어욤ㅎㅎ
동미 씨.. 참 순수하고 착하고 등등, 물방울님 말씀대로 두루두루 넓은 마음을 갖춘 좋은 여자입니다. 김동추를 진짜진짜 사랑한 여자입니다.
그가 부잣집 아들이기 때문에 그런 것, 하나도 포함돼 있지 않습니다.
어릴 적부터 한 집에 살면서 너무나 몸이 약한 김동추를 연민의 눈으로 지켜본 결과 그게 그만 진실한 사랑이 돼버린 거지요.
어디서, 연민이 진실한 사랑의 시초라고 한 걸 읽은 적이 있습니다. 백프로 공감합니다.
"사링이 아니고 연민이니 착각하지 마." 이런 말도 드리마에 흔히 나오긴 하지만....
물방울님, 제 소설 재미있다고 해주시면서 끝까지 읽어주시고, 매회 댓글 달아주셔서 고맙습니다.
나는 예상을 했었어, 물방울은 아직 어린애라서...ㅎㅎ
재밌게 자알 읽었네.
다음 연재 소설이 기다려 지는 아침에,
정말 수고 많이했어.
회장님은 가다가 뭔가 빤짝 하고 빛나는 것이 있어요. 자리 깔아도 될 만큼....
제 소설, 항상 재미있다고 격려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리고 많은 분들이 "백한 번째 편지"를 읽어주셔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소설이 갈수록 안 읽혀지는 현실인데도 말입니다.
참, 그리고 이 자리를 빌려서 감사의 말씀을 드릴 게 또 하나 있습니다. 얼마 전에 글마루 이방 저방을 돌아다니다가 제 장편소설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5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건재하고 있어서요. 그때 달린 댓글들을 지금 읽으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감사합니;디.
끝. 정말 깨끗한 끝입니다.
여운이 남는것은 김동미가 김동추을 사랑하는 방법이 관대하다고
처음에는 뭉클했지만......
김동추가 품고 있는 모든 것, 슬픔 아픔 그의 지병 그리고 그의 맘속에 자리하고 옥희까지도 사랑했다는 김동미....
이 세상에는 사람에 따라 사랑하는 방법이 천태만상입니다만, 김동미의 그런 사랑이 참 사랑이라 느껴집니다.
에스터님 말씀대로 관대하고 뭉클한 사랑....
미흡한 소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정말 깨끗한 끝" 이라 하시니 제 마음도 깔끔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