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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문예지 「인간과 문학」2018년 여름호
작가재조명·소설편/작품론
김익하의 <설해목雪害木>에 나타난 시점의 미학
-인간과 짐승의 시간, 너무 비극적이거나 희화적이거나
최영자崔永慈. 평론가
1. 선험적 가치 상실과 타락된 세계
김익하의 소설의 묘미는 인간의 비극적 아이러니에 대한 재현성이다. 시점은 인물과 재현된 실제 사이에서 발생하는 미적장치로 작용한다. 고려시대의 문신 이승휴 삶을 재현한 그의 장편소설 <소설 이승휴>는 예술적 미학에 대한 시점의 간극성을 잘 보여준다. 이 소설은 ‘휴휴’와 ‘죽죽선’의 이루지 못한 사랑 이야기를 표면에 담고 있지만, 보다 본질적인 것은 도편수 ‘심치곤’의 시점을 통해 현실과 전도된 혹은 유리된 이상향적 열망의 세계를 제시한다는 점이다. 작가는 결국 혼신을 다해 죽서루를 완공한 심치곤의 눈을 거세함으로써, 주관에 갇힌 시점의 오류를 배제하고자 한다. 이는 작가 혹은 독자가 열망하는 세계에 적용되는 어떠한 주관적 가치나 이데올로기적 시선을 배제하고자 하는 의도로 읽힌다. 작가는 이 같은 시점의 배제를 통해 아이러니의 효과를 자아냄으로써 소설의 미학적 요건에 부합하고자 한다.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김익하의 <설해목雪害木>은 <부황浮黃의 땅>과 함께 《현대문학》의 등단 작품이다. 80년대가 배경인 <설해목雪害木>은 ‘만달’ 노인의 슬프고 아픈 이야기이다. 작가는 ‘설해목雪害木’, 즉 ‘눈에 쓰러진 나무’로 알레고리화된 만달 노인의 시점으로 황폐화된 마을을 독자에게 제시한다. 이는 해방 이후 근대화와 산업화의 역군으로 종주해 온 이 땅의 80년대 아버지에 대한 알레고리의 의미를 담고 있다. 독자는 쓰러져 휑한 나무의 시점으로 주인공 ‘만달 노인’이 걸어온 길과 부조리한 세계를 반영론적 시점으로 투영한다. 하늘을 향해 곧게 치솟아 가던 ‘장송’, 그 장송이 어느 한순간 내려진 눈의 무게를 견뎌어 내지 못하고 휘청거리며 쓰러진 것. 그 뿌리는 생각보다 약해 부러지거나 주저앉을 수밖에 없다. 이는 불철주야 달려온 80년대 아버지들에 대한 거세이며 죽음이다.
이 소설은 이처럼 ‘설해목’으로 상징되는 80년대 아버지의 죽음을 거세된 만달 노인의 시점을 통해 통렬하게 제시한다.
소설이란 무엇일까?
소설이란 사회학이고 인간학이다. 소설은 인간이 놓여진 혹은 처한 사회의 통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G. Lukács)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벗어나, 영혼의 불빛을 잃고 사라져버린 시대에 탄생한 서사문학이 소설이다. 선험적 고향은 상실되었고 로고스는 부정되었고 부친은 살해되었다. 이제 누구든 스스로 길을 찾아 떠나야 하는 방랑자이고 누구든 스스로 살길을 모색하며 제반된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한다. 우리는 이제 영혼으로부터 완전히 추방되었다.
유토피아가 사라진 시대에 남은 것은 선험적 가치가 남긴 지저분한 찌꺼기와 불순물이다. 그래도 우리는 골드만이 말한 것처럼 “타락된 사회에서 타락된 형태로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는 이야기”를 계속해 나가야 한다. 이것은 윤리성을 기반으로 하는 소설 양식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이는 소설 양식이 타락된 사회의 문제와 윤리의식의 전도를 통해 궁극적으로 인간이 지향하고자 하는 세계를 보여주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주인공은 선험적 진리나 형식의 예속에서 벗어나 끊임없이 스스로와 사회의 제반성을 인식하고 고민하는 근대의 코기토적 주체와 닿아 있다. 때문에, 소설은 근대성에 입각한 주체의 변증법을 반동 형성에 입각해 재현하는 가장 대표적인 양식이다. 작가가 창조한 세계와 실제 현실 세계가 일치한다면 그것은 이미 소설이 아니며 서정시에서나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런 탓에 소설의 인물은 언제나 서자나 업둥이고 반역자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은 거짓되고 허황한 이야기가 아니다. 소설은 지금껏 인간을 둘러싼 사회 저변의 많은 문제점이나 이데올로기에 천착하면서 이를 통해 새로운 어떤 가치를 지향해 왔다. 이러한 지향성이야말로 소설 형식이 내재하고 있는 미학성이다. 소설은 현실 세계와 주인공이 추구하는 세계와의 사이에서 발생하는 긴장감을 통해 유머humour나 아이러니irony적 상황을 연출하고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소설의 가치에 도달하고자 한다.
소설 미학의 중요한 장치인 아이러니는 소설의 점을 통해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른바 소설에서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이 시점이다. 소설의 시점perspective은 인칭과는 별개의 개념으로, 재현될 세계에 대한 작중 인물의 인식이나 지각을 의미한다. 시점은 인물의 시각에 투영되는 혹은 전경화되는 배경이나 시공간 그리고 보이지 않는 내면의 의미까지를 내포한다. 그런 탓에 관점, 비전, 조망 등의 개념으로 사용된다. 시점은 영화와 같은 시각예술에서도 적용되는데 이는 ‘보다’라는 시각적 의미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역자에 따라서는 ‘point of view’로 쓰이기도 한다. 시점의 중요한 의미는 그것이 다양한 시선의 의미를 내포한다는 점이다. 특히 작가는 등장인물의 제한된 조망도를 통해 놓여진 세계와 욕망을 반영한다. 그런 탓에 등장인물은 보이지 안호은 타자의 시선에 가두어진 인간의 본질적인 운명과도 상통한다. 이런 탓에 시점은 전적으로 서술자의 영역에 속한다. 말하자면 서술자가 그를 어떻게 위치시키느냐에 따라 인물이 사건 핵심의 내부에 있는지 외부에 있는지 판가름나기 때문이다. 이처럼 주인공은 언제나 사회적이고 물리적인 환경 전반에 놓여 있을 뿐만 아니라 작가와 서술자가 어떻게 인물을 배치하느냐에 따라 소설 미학이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시점은 소설의 미학적인 부분과 연관되고 소설의 중심에 있다.
2. 짐승의 시간과 전경화된 시점
<설해목雪害木>의 미학은 서두에 집약되어 있다. 작중 인물 ‘만달 노인’의 시점으로 제시되는 마을의 외부 조망은 작품 전경을 가장 극대화하는 극적 효과를 자아낼 뿐 아니라 그가 처한 현실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장치적 효과이다.
올해는 여느 해보다 보름이나 앞당겨 물레봉에 첫눈이 내릴 만큼 내렸다.
안미리 냇둑에서 써느런 찬물이나마 한 모금 마시려고 머리를 물오리처럼 꼬라박고 있던 만달 노인은 을씨년스럽게 찌푸려진 겨울 하늘과 눈앞에 냉엄하게 버티어 서 있는 가파른 물레봉을 삥 휘둘러보았다. 아직 음지 후미진 곳에는 열흘 전에 내린 첫눈으로 심상성백반尋常性白斑 환자처럼 얼룩져 보이는데, 당장 폭설이라도 뿌리고 싶어 안달하는 하늘이 며칠째 계속 먹구름 덩이를 안은 채 나지막하게 내려 앉아있어 사방은 온통 음산한 잿빛으로 가득했다. 눈이 내려도 적게는 아니 내릴 성싶었다.
진작 만달 노인이 안미리에서 빠져나와 재실齋室 앞을 지나 서너 마장 기어왔을 때, 굴참나무 가지를 방정맞게 타고 앉았던 장끼가 붉은 목덜미를 주억거리며 한낮의 안미리를 쩡쩡 울리는 걸 못마땅하게 바라보았던 일이 조금 전이었다. 곧잘 선인들이 그렇게 예견해 오지 않았던가. 가을 꿩이 높은 나뭇가지에 깃들이는 그해 겨울은 어김없이 장설壯雪이 진다고 말이다. 어찌하였던 장설이 진 긴 겨울, 오히려 그것은 강추위를 계속하는 마른 겨울보다 만달 노인이 기동하는 데는 적잖은 불편함과 부자연스러움을 많이 감내해야 하는 계절이다.
만달 노인은 또 하나의 어려운 절기가 자신에게 도래하였음을 느꼈고, 그에 따르는 시련도 머지않아 시작될 거라 여기자 몹시 울적해졌다. 노인은 다시 머리를 냇물에다 물오리처럼 꼬라박고 한 모금 찬물을 깊숙이 쭉 들이켰다. 지열마저 이미 식은 계절, 냇둑 옆으로 얕게 흐르는 물은 허기 탓인지 내장이 갈라질 듯 찌릿하니 차기만 했다.
노인은 양쪽 무릎 아래가 몽땅 잘려 겨우 허벅지만 남아있는 다리를 힘주어 앞으로 움직여 나갔다. 흡사 다리를 잘린 메뚜기가 몸체를 뒤뚱거리며 앞으로 애써 나가려는 형상을 연상시켰다. 이젠 허벅지에 덧댄 가죽마저 닳다 못해 지면의 눅눅한 습기가 마냥 축축하게 감촉되는데 촉감이 무딜 만큼 차갑기만 했다.
노인은 언뜻 주변을 살폈다. 오랜 습관이 된 인기척에 대한 경계 빛이 눈까풀 속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노인은 반사적으로 인기척이 나는 반대방향 갯둑으로 바다 바위 게처럼 황망히 기어올랐다. 갯둑으로 올라온 노인은 다급한 상황에 노출된 자신을 방어하려는 듯 갑자기 동작을 멈추고 마을 쪽으로 향해 불안스럽게 눈돋음질하기 시작했다.
-김익하, <설해목雪害木>중에서
<설해목雪害木>의 서두는 주인공 ‘만달 노인’의 시점에서 바라보는 ‘냉엄하게 버티어선 물레봉’과 그 아래 내려앉은 ‘안미리’와 ‘재실’ 마을의 배경이 파노라마처럼 제시된다. 이때 ‘만달 노인’은 외적 조망의 위치에 있다. 이는 노인이 맞닥뜨려야 할 절기적 시간과 배치된다. ‘절기’란 달의 4일과 8일 사이, 즉 월초를 이르는 말로 인생으로 치면 다음을 다시 준비하는 시점이다. 그러나 하반신이 절단된 ‘만달 노인’에게 있어 추위를 감내해야 하는 ‘마른 겨울보다’ 그것에 대비해야 하는 절기의 시간이 더 불편하고 감내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런 탓에 노인의 시점에 투영된 세계가 전망적이지 않은 듯 보인다.
오늘도 노인은 ‘양쪽 무릎 아래가 몽땅 잘려 겨우 허벅지만 남아있는 다리를 움직여’ 안미리를 거쳐 재실 마을까지 이르렀다. 안미리 냇둑에 다다른 노인이 ‘머리를 물오리처럼 꼬라박고’ 물을 마시면서 펼쳐진 산하를 둘러보는 시점은 음산한 잿빛만큼이나 매우 절망적이고 어둡게 다가온다. 거기에 ‘굴참나무 가지를 타고 앉아 방정맞게 주억거리는 장끼의 붉은 목덜미’는 노인의 심기를 더욱 못마땅하게 건드린다. 그것은 곧 닥칠 장설의 긴 겨울과 그로 인해 감당해야 하는 기동의 불편함이 노인에게 무엇보다 큰 부피로 지각되기 때문이다. 고립된 물레봉 산하, 을씨년스럽고 음산한 안미리 냇가와 굴참나무에 내려앉은 장끼의 붉은 목덜미, 외부 조망으로 투시된 이러한 을씨년스러운 전경화는 노인이 인접한 상황과 환유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무엇엔가 잔뜩 움츠려 있고 불안해하는 ‘눈돋음질’은 인간의 병리적 특성이라기보다 동물적 본성을 포착하게 한다. 이러한 노인의 정경은 먹잇감을 찾는 동물적 본성을 환기하게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정작 노인이 불안해하는 것은 그의 시야에 포착된 마을과 사람들인 것이다.
‘허벅지만 남아있는 다리를 힘주어’ 마을을 향해 움직이려는 순간 노인은 마을 쪽에서 자신을 향해 오는 어떤 징후를 동물적인 감각으로 포착한다. 포수의 눈에 포획된 짐승처럼 노인은 ‘불안한 눈돋음질’을 하며 자신을 향해 좁혀 오는 포획망에서 도망치려 한다. 그것은 자신을 동물처럼 포획하여 괴롭히려는 마을 아이들의 돌멩이 세례에 대한 그물망임을 노인은 일찌감치 파악하고 있다. 그러한 탓에 마을은 관망하는 노인의 시점은 내내 두려운 것이다. 노인을 향한 안미리 마을의 폭력은 이미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노인의 ‘빛나던 안광이 사라지고 먼 곳을 초조히 내다보며 무엇인가에 응시하는 버릇이 생’겨 있었던 것이다. 불미스러운 일로 마을로부터 추방당한 후 노인은 그처럼 짐승이나 다름없이 살아왔지만, 그는 정작 자신에게 잠복되어 있는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러한 노인의 인간에 대한 연민과 욕망이 차라리 비애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그가 위치한 전망 탓이다. 인간이면서 인간의 세계에 편입되지 못하고 흡사 짐승의 눈으로 그들을 두려워하며 그족을 응시해야 하는 우스꽝스러운 현실이 노인이 직면한 상황인 것이다.
언제였던가, 한번은 새벽에 길 떠난 노인이 오후에서야 안미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랫동안 움집을 지었던 노인 몰골은 짐승,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만달 노인은 구걸의 말을 꺼내기도 전 조무래기들에게 돌멩이 세례를 받고 쫓겨 온 적이 있었다. 이마에 혹이 났고 등이 아리고 쓰렸다. 그래도 조무래기들의 공격쯤은 개보다 약과였다. 개들은 소리 없이 달려들어 옷을 갈기갈기 찢어놓는가 하면 콧등이고 뺨이고 닥치는 대로 물어뜯기 예사였다.
-김익하, <설해목雪害木>중에서
불구의 몸이 된 후 아내와 자식을 잃고 믿었던 양아들의 배신으로 모든 것을 잃은 노인은 오히려 산속으로 추방돼 갔다. 이후 동강 난 몸으로 혼자 움집을 지으며 살았으나 그는 여전히 불편한 몸을 이끌고 마을로 내려왔다. 이미 ‘짐승의 몰골’로 변한 노인에게 마을 조무래기들은 돌멩이 세례를 하곤 했던 것이다. 아이들의 돌팔매에 맞아 터져도 만달 노인은 자신의 분노나 비애를 속 시원하게 발설하지 않았다. 거기에는 마을의 개들마저 노인을 짐승을 대하듯 물어뜯었다. 마을 공동체로부터의 이러한 집단적 배제는 노인의 인간으로서의 기력을 박제화해 버렸고, 그러한 탓에 노인은 인간보다도 짐승의 세계에 가깝게 편입되어 있다.
3. 너무 비극적이거나 희화적인
만달 노인은 마을에서 추방되기 이전 한때 건장한 안미리 구성원이었다. ‘노인’은 해방되자 일본인에게 잃었던 임야 열 정보를 되찾아 황량한 산야에 소나무 묘목을 심고 너구리처럼 살면서 미칠 만큼 나무를 돌보았다. 노인에게 마지막 희망이 있다면 이제는 최만수의 소유일망정 그가 평생을 일구어 온 소나무에 대한 열정이었다. 그런 ‘만달의, 치산에의 열망처럼 기름진 땅에서’는 부쩍 자랐다. 그러던 어느 해 겨울 폭설이 심하게내려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소나무들이 딱딱 소리치며 허리를 꺾’으면서 부러졌다. 만달 노인은 그러한 ‘소나무의 눈을 통째로 맞아 비틀거리면서도 노루와 멧돼지처럼 산속을 헤집고 다니’다 ‘눈 쌓인 솔밭에서 뿌리가 썩은 등걸처럼 쓰러졌다.’ 가사 상태에서 마을 사람들에게 구조된 ‘만달 노인’은 동상으로 아랫도리를 자를 수밖에 없었다. 이후 아내는 집을 나갔고, 마지막 희망을 걸었던 아들 명기는 월남 전쟁터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왔다. ‘산짐승이나 진배없이 살던 만달 노인에게 어느 날 아들 명기와 의형제를 맺었다는 ’송찬우‘라는 인물이 찾아온다. 노인은 그를 수양아들로 맞아들여 결혼까지 시켰지만 결국 그로 인해 젊음을 투자해 얻었던 모든 것을 송두리째 잃고 그들이 남긴 채무까지 떠안고 마을에서 추방되었다. 그런 노인을 지탱하게 한 것은 물레봉의 소나무였다. 소나무는 그가 공을 들인 만큼 자라주었고 스스로 누군가를 배신하지 않았을뿐더러 이미 타인의 소유가 돼버렸지만, 노인의 주변에서 가장 훼손되지 않은 가치를 지닌 유일한 것이었다.
“네놈들이 나무를 베, 나무를? 아직은 어림 없지럴. 내가 눈을 빤히 뜨고 있는 한, 네 깐 놈들이 다신 안 그리겠다고 싹싹 빌 때까지, 주릴 틀며 다짐을 받을 티여.”
(중략) 잘던 눈송이가 훨씬 굵어졌고 온 천지 가득 눈밭이었다. 노인은 이리저리 눈을 헤치며 쓰러져있는 소나무 둥치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끽, 끼익, 끽……. 만달 노인은 짐승같이 울부짖었으나 이제 허리를 가눌 수 없게 심한 허기를 느꼈다. (후략)
-김익하, <설해목雪害木>중에서
음침하던 날씨는 눈을 내리기 시작했다. 노인은 안미리 마을의 행차에서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하고 움집으로 돌아가려던 찰라 계곡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나무 벌채 소리를 듣는다. ‘썩은 소나무의 등걸처럼 구르다시피 내려간 계곡에서’ 노인은 ‘자기의 손끝으로 자라난 그 청청한 소나무’가 벌채된 것을 목격한다. 소나무를 벤 벌목꾼들은 이미 돌아간 뒤였다. 노인은 쓰러진 소나무 둥치를 끌어안고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굴렀다. 그런 노인의 몸뚱이 위로 눈이 차올랐고 노인은 의식을 잃어갔다. 그런 노인의 희미한 망막 사이로 쓰러진 ‘설해목’이 들어왔고, 노인은 여전히 쓰러진 ‘설해목’을 일으켜 세우려는 의지를 놓지 않는다. 그러한 노인의 불분명한 시선 사이로 ‘연꽃처럼 일렁이는’ 노인의 상여가 ‘해로가薤露歌를 따라’ ‘아스라이 스쳐’ 간다. 쓰러진 ‘설해목’과 더불어 임종하는 노인의 이 마지막 장면은 끝내 노인이 인간으로서 추구했던 어떤 가치에 대한 열망과 의지를 보여준다.
이는 <설해목雪害木>의 가장 극적인 장면으로, ‘설해목’은 노인의 전 인생을 아우르는 알레고리적 장치이자, 이 텍스트의 서사를 이끌어 내는 강력한 힘으로 작용한다. 노인의 기형화되고 박제된 모습은 ‘안미리’로 형상되는 타락된 인간 사회의 모형을 환기하게 한다. 노인이 의지를 갖고 스스로 문제점을 인식하고 타개해 나가기에는 현실이 너무 비극적이거나 희화적이다. 이럴 때 인간의 의지는 타인의 웃음거리밖에 전락하지 않는다. 노인의 비애는 어쩌면 끝까지 인간의 시간에 대한 향수와 꿈을 버리지 못한 데 있다. 그것이 아이들의 돌 세례를 받으면서까지 안미리 마을로 매일 불구의 몸을 이끌고 내려오는 이유였다. 어쩌면 노인에게 있어 인간으로서의 신념과 의지는 완전한 짐승의 본성으로 살아가는 데 걸림돌로 작용했는지 모른다. 그것이 인간과 짐승의 시간, 그 어디에도 편입될 수 없었던 노인이 독자로 하여금 비애의 정서를 유발하게 하는 이유이다.
4. 아이러니적 반어와 낯선 시간 속으로의 표류
‘만달 노인’의 기형적인 형상은 80년대 우리 아버지들의 자화상에 대한 알레고리다. ‘잘린 메뚜기의 형상’이나 스스로 ‘짐승’을 자처하는 기형화된 노인은 인간과 짐승. 주체와 대상, 이성과 감성이 전도된 현실을 희화하고 있다. 그는 스스로 마을 제일 높은 곳에다 움막을 지어 건재함을 보여주었으며, 마을 아이들의 몰매와 마을 사람들의 비웃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안미리와 재실과 물레봉을 꾸준히 오갔다. 이렇게 파편화되고 희화된 현실적 세계는 잘린 메뚜기처럼 더 이상의 도약이 불가능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만달 노인’은 끝까지 현실세계에 주저앉지 않으려는 인간으로서의 의지를 잃지 않으려 했다. 이는 ‘만달 노인’이 취할 수 있는 현실에 대한 저항이나 부정성의 한 형식이라 볼 수 있다.
이쯤 되면 난관에 직면하는 것은 ‘만달 노인’이 아니라 그의 조망 안에 있는 마을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물레봉 언저리에서 마을을 굽어보는 ‘만달 노인’의 시선으로 인해 마을 사람들은 점차 감금돼 버리기 때문이다. 이는 ‘시선이 곧 권력이다’라고 말한 제러미 밴덤의 말처럼 마을 사람들은 이제 그의 시점 안으로 포획돼 있다. 그들은 이제 짐승에게 포획된 인간처럼 ‘만달 노인’을 두려워해야 한다. 이러한 상황적 아이러니는 주체와 대상 간의 전도적 가치로 이어진다. 이는 텍스트 박에 위치에 있는 독자의 시선마저 당황하게 한다.
<설해목雪害木>의 미학은 바로 전도된 시점에서 발생하는 아이러니적 상황이다. 이를 통해서 서사는 안과 밖과 사건들이 한데로 응축되면서 단편소설로서의 미학을 단발마적으로 보여 준다. ‘만달 노인’이 처한 속수무책의 상황, 그에 비견되는 전도된 시점은 탐욕과 속임수가 난무하는 타락된 세계에 대한 이탈이자 저항의 한 형식임을 아이러니적 반어를 통해 재현하고 있다. 이를 통해 독자는 비애의 한 형태인 파토스적 긴장에 직면한다. 비애는 한마디로 문학작품의 허약한 주인공이 고통을 겪는 장면에서 발생하는 극적 효과이다. 이 때문에 비애는 문학작품을 통해 독자가 느끼는 효과를 발생한다. 노스럽 프라이의 말을 빌리면 비애는 우리와 동일한 수준에 있는 개인을 그가 속해 있는 집단으로부터 배제되는 데서 발생한다.
해방되었을 때 서른다섯 살이었던 노인이 ‘칠십 인생’이 되었으니 이 소설의 시간적 시점은 80년대쯤으로 유추된다. 그러한 탓에 <설해목雪害木>은 패배화되고 희화화된 만달 노인의 시점을 통해 아이러니적 비애감을 자아냄으로써 아버지의 몰락으로 대변되는 80년대 집단적 비애의 정서를 이끌어낸다. 노인이 당면한 비애의 정서는 박제되고 기형화된 80년대 아버지들에 대한 알레고리의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다. 80년대의 문학정신의 핵심이었던 부정성과 탈중심과 같은 새로운 모더니티의 개념은 전통적 가치를 붕괴시켰고, 산업화의 역군으로서 지탱해 온 거대한 부목과 같았던 80년대 아버지들에 대한 상징적 거세로 이어졌다. 그로 인해 당대 주체들은 ‘낯선 시간 속으로’(이인성) 표류하거나, 음울한 세계로 침잠하는 집단적 비애의 정서를 자아냈다.
그러한 관점에서 김익하의 <설해목雪害木>은 가정의 붕괴와 체제의 와해로 이어진 80년대 주체들에 대한 알레고리를 탁월하게 묘파한 작품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