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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토렴』 평설
고독 사랑 생명 구원의 소설미학
이 명 재
(평론가. 중앙대 명예교수)
새로운 작가와의 만남
우리가 처음겪는2020년 코로나 사태 속에서 지루하게 방콕-집콕하는 동안 필자는 생소한 김익하 작가와 새롭게 만났다. 정기 구독하는 《창조문예》에서 눈여겨보던 작가의 연재소설을 평설해 달라는 출판사의 요청을 받은 계기 때문이었다. 역시 독자들 반응이 좋고 해서 단행본으로 펴낸다는 데 동의하며 다시 진지하게 통독하였다. 덕분에 필자는 팬데믹이라는 조심스럽고 답답한 몇 달을 소설 읽기 재미와 문학의 힘에 흐뭇한 시간을 함께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미 불혹의 나이테가 넘도록 문학평론에 임해온 문학도로서 테리 이글턴이 지칭한 담론의 관리자 같은 평설자라기 보다 성실한 독자로서 여러분과 대화하는 자리에 섰다.
김익하 작가의 『토렴』은 2019~2020년 사이 1년 남짓 월간 종합문예지 《창조문예》에 연재된 장편소설이다. 이 작품은 작가 자신 연재물로서는 처음인지라 작가 나름대로 마음먹고 공력을 들여서 쓴 역작이다. 솔직히 말해서, 이 작품을 통해서 숲속에 가려진 보석 못지않은 존재로 여겨졌다. 강원도 삼척 태생인 이 작가는 일찍이 오영수 선생 등으로부터 소설을 익히고 1980년에 현대문학 추천작가로 등단한 중견 연륜이다. 이미 창작집 『33년 만의 해후』 밖에 최근에는 멀리 고려 시대 큰선비의 삶을 다룬 장편 역사소설『소설 이승휴』로도 유명하여 그 저력을 가늠하고 남는다.
김익하 작가는 장편 『토렴』을 통해서 이전의 자신 단편들에 비해서는 물론 여느 소설가들과도 차별화된 작품 성향을 드러내서 주목된다. 무엇보다 요즘 소설가들 거의가 현대 시민사회의 일상처럼 도시인 중심의 인물 사건을 다루는 경우와 대조된다. 으레 외국 유학쯤을 다녀온 남녀 인물을 등장시켜 국내외 사업을 펴는 직장에서의 갈등과 회사 상호간의 계략적인 경쟁이나 젊은이들의 사랑 이야기들과는 바탕이 다르다. 가난하고 궁핍하되 정겨운 옛 서민들이 임시방편으로 찬 음식을 데운 물로 헹궈서 끼니를 대신하던 방식을 지칭한 『토렴』이라는 제목부터 인상적이다. 그만큼 이 작품은 현대적이고 성공한 엘리트층의 화려한 삶보다는 가난하고 고단하게 살아온 서민층의 곡진한 삶을 정성 들여서 쓴 서사로서 빛나 보인다.
파란만장한 삶의 두 인물 중심 서사
현대소설 작품은 마땅히 독자들 스스로 작가와 대화하듯 속속들이 읽으며 감상해야지 옛이야기처럼 줄거리를 잡아 설명하기란 모순이다. 그럼에도 얼기설기 복잡하게 얽힌 내용을 간추려서 이해를 돕고 평설의 가닥도 잡을 겸 요악해 보면 이렇다.
이 작품의 기본 서사적 얼개는 어릴 적부터 불우한 처지로 자라거나 힘겹게 살아가는 중에 시나브로 외로운 신세로 전락해 버린 두 사람 삶을살필 수 있다.장편소설 『토렴』의 중심인물은 어릴 때 홀어머니 곁을 떠나 고아 신세나 다를 바 없게 성장한이동우이고, 부차적 인물은 남편과 사별한 후에 자식들마저 뿔뿔이 흩어진 채 외톨이 촌로 신세로 전락한합죽할미이다.
이동우는 전쟁고아로서 남의 집 정미소 기술자로 일하던 아버지(이종식)가 정미기피댓줄에 걸린 사고로 숨을 거두자 어린 나이로 홀어머니와 남겨진다.졸지에어린 아들의 양육 책임을 지닌 채 과부가 된 동우의 어머니(정순임)는 식당 주방보조로 일하던 중에 아들을 고등학교까지 공부시켜준다는 서봉태의 꼬임에 넘어가 첩으로 가게 된다. 그러나 무식한 중농사꾼인 서봉태는 이동우를 서성표라고 개명 입적시킨 후 심한 주벽에다 폭군처럼 구타하고 농사일에 혹사시킨다. 결국 초등학교만 보내고 나서 중학 진학 약속을 어긴 데다 모진 매질에 못 견딘 이동우(서성표)는 어머니와 약속한 다음 서봉태 집을 빠져나와 서울로 피신한다.
집을 나온 동우는 어머니가 써준 주소대로 서울 영등포에 사는 유일한 혈육인 외삼촌을 만난 뒤 백상호의 도움으로 겨우 거처를 얻고 배관기술을 익혀 한동안 아파트 공사업체 사원으로 일한다. 이런 중에 그의 착함과 외로운 모습에 끌린 고아 출신 남현숙이 다가오고 그녀를 길러낸 홍은희 권사 도움으로 결혼한다.하지만 성실한 대신에 학력이 짧고 동료들과 잘 어울리지 않은 탓에 승진에서 누락된 뒤 분노와 절망에 휩싸인다. 그 무렵 접근해온 노조측에 호응하여 회사를 공격한 데모에 앞장선 탓에 해고를 당한다. 그럼에도 잘못을 사죄하는 그를 용서한 회사의 간부인 백상호 도움으로 조그만 남현설비공사를 차려 자리를 잡아 귀여운 딸 미주를 낳고 한동안 행복감에 젖는다. 그동안 동우를 도와주던 백상호가 숨을 거둔 뒤 설비 사업을 도와주던 남준만도 부도를 내고 야반도주한 다음 동우 가족은 위기에 몰린다. 남준만이 발행한 부도수표에 이서한 빚을 못 갚으면 각서대로 장기를 내놓으라고 겁박한 추심원들에 시달린다.
그런 긴박한 처지에서 세 식구는 살림 도구 몇 가지만 챙긴 채 낡은 차로 밤길을 나선다. 우선 생모가 계실 영동의 옛집으로 찾아간다. 친어머니가 낳은 동생 내외로부터 어머니는 3년 전에 위암으로 별세해서 소원대로 본 남편 옆에 묻혔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거기서 어머니가 동우에세 전하라고 남긴 친아버지의 작업복 조각과 제 결혼청첩장을 전해 받고 모정을 새삼 확인한다. 이 작품 전개 내내 어머니에 대한 이동우의 회상이 깔려 있는데, 평소 노후의 어머니를 꼭 모시려던 아들에게 무섭던 의붓아버지가 아닌 친아버지 곁에 잠든 어머니는 큰 감동을 준다. 그러나 며칠 쉬어 가라는 동생 부부의 만류를 떨치고 집을 나선다. 그러곤 며칠 밤낮 공포 속에서 시달린 데다가 공허한 마음에 동반자살을 꾀하던 아내와 딸은 숨을 거두고 만다. 그 결과, 극한적인 심정 속에서 술까지 마신 처지에서 비속인 아내와 딸을 살해한 죄목으로 7년을 복역하게 된다. 수인번호는 2317번.
문제는 오랜만에 형기를 마치고 나온 뒤 그를 반기는 곳 없는 사회에서 동우는 또 다른 고행을 치른다. 교도소에서 교정위원으로 봉사한 등대교회의 윤대현 목사님 권유대로 이희구라는 이름으로 새 출발하려는 그를 사회에서는 반기지 않는 것이다. 그러던 중 뜨내기 일감을 찾아서 겨우겨우 살면서 힘겨우면 드나들던 간이주점에서 양미자의 청혼을 받는다. 주걱턱에 거친 말투인 그녀는모정을 받지 못한 한으로 동거하면서 아이를 갖고 싶다며 목말라하는데도 이동우의 딸에 대한 죄의식으로 불가능함을 알자 고향인 삼척으로 여행을 가자며 앞장선다. 뱃일하던 아버지가 바다에서 숨지자 남매를놔두고 감포 출신 배꾼 정부한테 가버린 어머니도 없고 남동생마저 죽었던 옛집을 찾는다. 그렇게 빗속에 젖은 채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수면제를 먹고 숨진 그녀를 발견한 희구는 졸지에 양미자까지 화장시켜서 뼛가루를 바다에 뿌린 일까지 숱한 고생을 겪는 주인공이다.
합죽할미의 경우, 이희구와는 상이한 대로 영감이 세상 떠나고줄줄이 2남 2녀인 4남매 자식들이 뿔뿔이 곁을 떠나고 소식이 없는 외톨이 신세다. 그녀는 본디 시골의 후미진 굴우물 훈장집 3남매 중 맏딸인데 친정아버지가 여식이라고 공부시키지 않은 채 산골에 사는 안지상에게 시집가서 안이실집이라고 불렸다. 그런데 장남 경수는 일찍이 자동차 운전을 익혀서 활달하게 활동했으나 결혼 후에 가족과 함께 교통사고로 죽는다. 그리고 장녀 경순은 큰 후에 일찍 대처로 나갔다가 황금색 노랑머리로배불러서 고향에 나타나더니 미군을 따라 나라를 떠나고는 소식이 없다. 게다가 작은딸 경미는 잘난 얼굴로 봉제공장의 경리 일을 보다가 사장과 배가 맞아 교도소 밥을 먹고 그 남자랑 외딴섬으로 나간 다음 연락이 끊겼다. 끝으로 남은 막내아들은 몇 번 선을 보고도 퇴짜를 맞고 50쯤에야 필리핀 여성과 짝을 지었으나 반년 만에 집을 나가자 그녀를 찾아 혼낸다고 쫓아간 후 소식 두절이다.
그렇게 어이없는 자식들 꼴을 당한 합죽할미는 스스로 그 집터를 떠나서 이 산골로 나와 사는 터수이다. 그나마 옆을 지키던 누렁이 개마저 암캐를 찾아 나섰다가암캐 주인에게 잡종이라고 맞아 죽고 닭이나 정 주던 고양이마저 죽어 혼자 외롭던 중 제 발로 걸어 들어온 사내(이동우-희구, 이 작품에서 주인공 이름이 이동우, 서성태, 이동우, 이희구로 호칭이 번거롭게 오가지만, 상징적으로 시사하는 바가 흥미롭다)가 외로움을 달래주었다. 그런데 산촌 구석에 함께 묵으며 약초를 캐고 지내던 그가 약초 캐러 다녀온다며 나가더니 소식이 없어 목마르게 기다리던 중이다. 더욱이 찬 새벽에 길을 나서는 그에게 제대로 아침을 해주지 못한 게 마음에 걸린 심정을 작품의 서두서부터 드러내고 있다.
작가가소설 『토렴』에서 ‘기다림’과 ‘정’을 앞자리에 복선으로 배치한 건 이 소설 주제의 골간이 되는 힘을 가진 자들에 상처를 받은 사람끼리 서로 안유하면서 정으로 화합하는 세상을 서원(誓願)하며 그것에 대한 기다림을 상징적으로 드러내자는 의도가 분명해 보인다.
오늘따라 저녁나절 흐름은 속탈만큼 빨랐다.
‘에이그 그놈 정이란 뭔지…….’
정이란 서로 퍼준 마음일 터.
… (중략)…
이희구가 떠나간 뒤로는 끼니도 예사로 건너뛰었다. 입맛도 예전과 다를뿐더러 혼자서 꾸역꾸역 배 채우려고 밥 푸고 반찬 내는 게 그저 성가셨다. 찬밥 덩이건 김치 쪽이건 그저 밥숟갈에 잡히는 대로 아궁이 앞에서 서서 먹거나, 부뚜막에 걸터앉아 한술 떠서 입안으로 삼켰다. 그럴 때마다 이희구에게 끼니랍시고 밥덩이를 토렴해 먹인 마지막 한 끼 식사가 마음 한 녘에서 체증처럼 얹혀 있었다. 그 감정 끝은 그저 아릿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죄지은 듯 찝찝했다. 그게 끝내 마지막으로 이희구에게 차려준 음식이나 다름없게 돼가므로 더더욱 마음에 얹혀 가슴께가 짠하게 저몄다.
가족 해체의 수난자를구원한 손길
이 장편소설의 전개구조는 사람 심성의 선과 악을 대착점에 놓고 갈등을 고조화 하면서 사건을 굴절시켜 탄력을 얻는다. 이를테면 두 주인공인 합죽할미와 이동우는 산파 화물차 운전기사, 방호식, 최 영감, 식당 안주인, 서재숙, 구두닦이, 백상호, 홍은희, 사출기사, 윤대현, 심영달 내외, 트럭운전사, 간이주점 쥔 여자, 양미자 등 가진 건 없으나 부지런히 사는 선한 인간들의 도움을 받지만, 암캐 주인, 민기준, 봉제공장 사장, 서봉태, 외사촌 누이들, 양길구, 안보웅, 김광원, 남준만, 추심원, 감포 출신 배꾼, 약재상 영월 엄가 등 조그마한 이권이라도 쥔 자들이 휘두르는 폭력에 삶이 왜곡되고 상처를 받는 구조로 짜여있다.
장편소설 『토렴』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거의가 사회에서 행복하고 성공한 사람들이 아니라 불우하게 살다가 실패한 루저의 군상들로 그려져 있다. 위에서 든 이동우=서성표= 이희구를 흔히 크게 성공한 인물로 부르는 주인공이라 하지 않고 중심인물로, 합죽할미를 부차적인 인물로 지칭한 이유이다. 그들은 숙명처럼 주어진 열악한 환경에서 잘 견뎌온 선의의 피해자들이긴 해도 여느 양달에서 빛나는 존재이기보다 응달에 가려진 인간상이다. 그러기에 이렇게 인간사회의 뒤안길에 가려있는 여리되 따스하고 진실된 인간의 모습을 소설로 조명해낸 김익하 작가의 노고를 높이 산다. 이런 접근은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자세가 아닐 수 없다.
이 작품에는 이동우처럼 불우한 고아 출신이 여럿 등장하고 있어 이채롭다. 우선 동우의 아버지도 전쟁고아 출신이었고 어머니와 하나뿐인 외삼촌 정영남도 고아원에서 자란 오누이이다. 동우와 결혼해서 딸을 키웠던 남현숙 역시 친부모를 모르던 사람이다. 그 밖에 동우랑 같은 공장에서 심부름하고 함께 지내던 양갈구 또한 어머니조차 없던 고아였다. 고아란 6·25전쟁의 산물이기도 하지만, 현대에서는 인간 생명의 경시 상징으로 유비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모두 결손가족으로서 가족 해체의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가장을 잃은 이동우 모자에게 아들을 교육시켜 주겠다며 재혼해서 속이고 학대한 서봉태나 남의 부도수표에 이서한 빚보증을 장기 적출로 대신하겠다고 겁박한 추심원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그런가 하면, 여러모로 기가 꺾인 채 어려움에 처해 있는 이동우 등을 격려하며 구원의 손길을 내민 은인을 만난다. 오래전에 부활절 새벽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포대기에 싸여 있던 채로 데려다 키운 업둥이딸 남현숙(미주 엄마)을 자기 집에서 하숙하던 동병상련의 이동우와 결혼시켜준 홍은희 권사가 그 하나이다. 이어서 잊지 못할 또 하나의 은인은 7년 동안 수감생활을 하던 이동우(서성표)에게 교도소 교정위원으로 위촉되어 상담봉사 활동 중에 만난 윤대현 목사이다. 등대교회에서 시무하던 목사께서는 특히 수감자(서성표) 본인의 일가족이 죽음에 이른 사정을 자서전식으로 쓴 글로 최우수상을 받은 내용에 감동한 나머지 각별한 격려를 해주었다. 되도록 글쓰기 재능을 살려 나갈 것과 앞으로 새 출발을 할 사회에서의 이름을 보다 밝음 지향적인 이희구라고 지어주기까지 했다.
김익하 작가의『토렴』은 적어도 갸륵한 주제의식이나 귀한 제재에다 다채로운 문체면에서 한국 서사 미학에 바람직한 의미를 지녔다. 워낙 취약한 주동인물들은 사무친 사회생활의 외로움 속에서도 나름대로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다. 작가 또한 선의의 일부 작중인물들과 더불어 사회의 약자층에 따스한 인정과 위안을 주는 휴머니티를 보여주었다. 어릴 적부터 너무나 외로운 결손가족 식구들의 불우한 삶에 사랑하는 마음으로 속 깊은 자기 추스르기를 통한 생명 중시의 메시지와 구원의식을 곁들여서 따스한 인간의 정을 나눈 기회를 제공했다.따라서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해서 가뜩이나 여리고 어두운 고아와 결손가족에 해를 입히는 비정한 인간들의 무관심과 횡포 처지를 역지사지(易地思之)로 반성하고 배려하는 자세를 가다듬어야 할 것 같다.
모국어의 진진한 맛을 담아낸 문장
필자는 이 장편소설을 읽으면서 이 작가의 남달리 숨겨진 모국어 사용에 공감하고 문장력에 매력을 느꼈다. 후미진 농촌 아니면 퇴락한 산촌이나 어촌을 즐겨 취해서만이 아니다. 작가에게 개성적인 문장력이란 기본조건인데 김익하에게는 나름의 저력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가난 속에서도 따스한 인정을 실은 데다 이를테면, 작은아들이 부질없이 나이 듦을 계수기에 비기며 유머 감각까지 곁들인 표현이 마음에 든다.
작품 전체나 이 글의 몇 군데에서 인용한 대문도 그렇지만 다음 문장의 보기가 참고 된다.
이제 막냇자식 하나만 ‘나도 앨 낳는 여자요’ 그런 증거나 대듯 물증처럼 곁에 남았다. 그 자식이 아비 없는 집안의 기둥이고 안이실집이 뒤를 기댈 유일한 벽이었다. 그런데 외양으로 보면 사내로 흠잡을 수 없이 멀쩡한데, 선본 여자마다 어김없이 퇴짜를 놓았다. 퇴짜 맞을 때마다 아들은 회전기기의 계수기 숫자처럼 덜컥덜컥 자동으로 나이가 올라갔다. 그러니 일에 찌든 얼굴이 나이보다 앞서 속절없이 늙을 수밖에 없었다. 며느리에게 수발을 받아야 할 처지에 아들 뒷바라지까지 하다 보니 안이실집도 중년에서 벗어나 마지막 섶에 오른 누에처럼 나이에 주저앉았다.
자식들 변고 때마다 이빨을 악물어서 그런지 큰어금니들이 뒤로부터 차례로 빠지고 뿌리가 깊은 작은어금니와 앞니만 남았다. 틀니를 박자니 비용도 만만찮아 그대로 두었더니 양 볼이 빠진 이 자리로 함몰하듯 오므라들어 원치도 않은데 이웃에서 합죽할미라 불렀다. 어릴 때 부르던 이름은 시집오며 잃었고, 가족 구성원이 해체되니 이젠 안이실집이란 택호마저 버렸다. 그도 자식들 때문에 폭삭 늙어 그리됐으니 늘그막 팔자에선…
김익하 작가가 소설 작품 곳곳에서 구사한 문장에는 이처럼 그 적절한 비유부터 우리 일상에선 손쉽게 듣지 못하는 예스러운 어휘들을 통해서 글을 감칠맛 있게 빚음을 본다. 자식들 걱정 때문에 속을 끓인 나머지 치아가 빠지고 폭삭 늙어버린 것 같다는 하소연이 실감 나고 구수한 여운을 남긴다. 며느리에게 수발을 받아야 할 늘그막에 외려 아들 뒷바라지를 했다는 것이다. 그는 적어도 예전과 요즘에 걸쳐서 다채롭게 쓰이던 모국어에 적지 않은 조예를 가지고 천착해 온 듯싶다. 그러기에 이 장편소설의 곳곳에서 걸맞게 활용된 어휘들을 골라서말미에 첨부하여독자들께서 손쉽게 접근해 보도록 한 것으로 안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 한 가지 첨가할 바는 이채롭게 서양 문자와 기호의 시각성을 들어서 후기 모더니즘식으로 구사한 실험적인 표현도 수긍이 간다는 점이다. 작품의 마무리 부분에서 기다리다 쓰러진 합죽할미가 정신을 차릴 무렵 이희구가 붙들어 앉힌모습을 “L문자에 &부호가 한 방향으로 바짝 붙은 모양새였다.”고 표현한 대목들이다.
떠남과 돌아옴의 휴머니티
장편소설 『토렴』은 작품의 구성상 주인물인 이희구가 더 넓고 약초가 많은 곳을 찾아 합죽할미의 산골 집을 떠난 모티프로 시작해서 뒤늦게 돌아오는 이야기로 마무리되어 있다. 한창 젊은 시절에 배관기술자로 바삐 살아온 그가 아내와 어린 딸을 여읜 죄로 7년의 수감생활하고도 다시 한 여성을 죽음으로 몰아간한참 후부터는 이산 저산을 찾아다니며 약초를 캐서 생활비를 마련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이번 나들이에서는폭설 때문에 약초 캐기를 포기하고 돌아오는 길에약초값을 외상으로 맡겨둔 돈을 받으러 갔다가 낭패를 보고 돌아온 셈이다. 오랜만에 찾아간 약재 상회에서는 이미 남의 돈을 챙겨서 야반도주한 영월 엄가를 찾아 제천, 금산을 거쳐서 허탕을 치고 늦게 돌아온 길이다. 그를 기다리다 길가에 쓰러진 합죽할미를 그가 구하게 된 일이다. 이희구는 작품의 마무리 부분에서 겨우 고비를 넘긴 그녀에게 외친다.
“할머니! 정신을 차려 보세유.”
이희구는 간신히 정신을 차린 합죽할미에게 바투 다가갔다. 그리고 상체를 일으켜 세워 왼쪽 팔에 기대게 했다. L문자에 &부호가 한 방향으로 바짝 붙은 모양새였다. 어미가 새끼를 보듬어 안 듯, 그녀는 그제야 그 품에서 가까스로 두 눈을 밝게 떴다.
“이걸 드시고 정신 차리셔야 해유, 할머니-.”
숟가락으로 토렴한 음식을 천천히 떠먹이기 시작했다. 이웃에 온기를 건넬 수 없도록 마치 찬 밥덩이 같이 식을 대로 식었던 두 사람이 뜨거운 정을 안은 채 이승과 저승에서, 한 사람은 눈 감고 다른 한 사람은 눈 뜨고 마주하지 않는 것만도 사람이 받을 지복이었다. 그게 하늘의 뜻일지도 몰랐다. 인간이 마지막으로 위탁한 곳이고, 그리 서원誓願해 왔으므로…….
석 달 뒤 소리 소문 없이 봄비가 내렸다.
겨우내 마른 가지에서 연둣빛 잎도 피어났다. 꽃필 나무순에도 꽃눈까지 맺혔다. 불어온 봄바람이 그 짓을 했다. 벚나무빚자루병이 아니면 꽃 필 꽃눈이 분명할 테다. 그로부터 봄이 더욱 깊어져서 비에 젖은 나뭇잎보다 개복숭아 꽃잎이 가슴을 더욱 때릴 듯 그리 화사한 날, 나뭇가지 사이로 합죽할미네 집 툇마루가 멀찍이 보였다. 등 굽은 그녀가 서툰 가위질로 낡은 재봉틀 의자에 앉은 이희구 웃자란 옆머리를 더듬더듬 치고 있었다. 목소리는 먼 곳까지 들리지 않지만, 무슨 얘기 뒤끝인지 둘은 마주 보고 엇비슷한 표정으로 끼득거렸다. 그 모습이 합죽할미와 막내아들 같기도 하고, 정순임과 이동우 같게 보이기도 했다.
마무리 부분 가운데 마치 영화화면처럼 전경화(前景化)된 장면은 흡사 이희구가 평생 타지를 떠돌며 고생하면서도 노후의 친어머니만은 모시려던 효도를 보는 듯하다. 이미 친부모를 여읜 이희구와 친자식 네 남매를 잃은 합죽할미의 조합은 그대로 서로가 고독한 결손가족의 바람직하고 새로운 모델로 여겨진다. 이제 중년인 이희구는 합죽할미를 양자처럼 봉양하다가 장례까지 치르고는 그 집에서 주인처럼 살리라 싶다. 그래서 독자로서 바라노니 중년 주인은 윤대현 목사님이 희구한 약속대로 이희구는 문학가로 귀의하거나 기독교인으로 거듭나서 먼저 보낸 처자에 못다 한 사랑과 부모께 못한 효도를 함께 이뤄가길 기대한다. 〈『창조문예』 2021년 1월호〉
첫댓글 김익하 회장님의 장편 소설[토렴]
지난 세월 먹을 것을 찾아 다니 던 가난한 삶 그 시절 속 이야기를 눈이 내리듯이
아니 비가 오는 듯이
찬 바람에 언 두 손을 비비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간 냄새에 흠뻑 져저 봅았습니다.
또 좋은 작품으로 즐겁게 해 주세요!
건강 하세요
고맙습니다.
불통의 계절입니다.
좋은 글 찾아 유랑하고 있습니다.
좋은 글 쓰시길 성원합니다.
절절히 가슴에 와 닿는 내용입니다. 오늘 또 우연히 김익하 선생님의 소설 두편을 읽어 내려가면서 어쩜 그 인간의 운명을 기쁘게도 슬프게도 독자의 가슴을 쓸어 내리게도, 섬세한 문장으로 만들었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작품 살펴주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