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방이 캄캄해서 글 하나 올려볼까요)
서울로 가는 버스 차창 너머에는 온통 백색 하나로 칠해져 있다. 산도, 나무도, 들녘의 모퉁이에 자리 잡고 있는 마을도 눈이 부시도록 희다. 아름답다.
눈에 덮힌 정경들이 나를 아득히 먼 세월을 건너서 유년시절로 데려간다. 토끼를 잡는다면서 산마루를 오르다가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찍던 일도 생각난다. 눈이 녹아서 질퍽거리는 골목을 걷다보면 찢어진 고무신으로 새어드는 얼음물로 발이 시린 기억도 있다. 그리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물이 안으로 스며 든 신발에서 사각사각 소리가 났다. 버스를 타고 서울로 자주 오르내리던 길이라서 흰 눈 아래 숨어 있는 모습들도 선하다. 검은색을 하고 있는 삼포도 있었고, 잎을 떨군 과일나무도 있었다. 붉은 지붕의 마을도, 오물 냄새가 풍겨날 듯한 축사도 있었다. 흰빛으로 가리워진 곳에는 즐거운 기억도, 즐겁지 않은 기억들도 모두 있다. 아름다움으로 덮어 둔 곳에는 아름답지 않은 것도 있었다.
밤 늦게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온통 검정색 뿐인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보이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눈을 차창 가까이 대고 손바닥을 펼쳐서 불빛을 가리고 밖을 보았다. 여전히 검정색 하나이다. 멀리서 깜박거리는 불빛 몇 개가 나타났다가 금방 사라졌다. 아마도 차가 산모퉁이를 돌아가나 보다.
대학을 다닐 때 토요일 밤에 고향인 건천역에 내리면 저 멀리 어둠 속에서 불빛 하나가 깜박거렸다. 소리마저 삼켜버린 어둠이지만 희미한 집의 그림자는 읽어낸다. 나의 고향집이다. 저 불빛은 아마도 어머니가 계시는 방에서 새어나왔을 것이다. 보이지는 않더라도 안경을 콧잔등에 얹고 교리 책을 읽고 있을 어머니의 모습이 훤히 보인다.
역을 벗어나서 들길을 걷는다. 조금만 걸으면 농수로가 나오고 시멘트 다리가 놓여 있다. 다리를 건너면 ‘도랑미기’라고 불렀던 작은 냇물이 졸졸 거리면서 흘렀다. 물소리를 따라 조금만 더 가면 내 키의 두 배는 됨직한 돌무더기가 나온다. 우리 마을의 동구이다. 대구의 학교에 가려 이 길을 따라 정거장으로 걸어가면 어머니는 여기에 올라서서 오래 동안 나를 바라보았다. 밤기차가 산 모퉁이를 도느라 불빛은 모두 사라져 버렸지만 머릿속에는 수십 년 전의 밤길에서 보았던 고향집 불빛 하나가 깜박거렸다. 아름답다. 어둡고 캄캄한 것에 가리원진 것들에는 가슴이 아리게 하는 아름다움도 있다.
보이는 것의 너머에는 보이지 않은 무엇들이 있다. 보이지 않는 것으로 가리워진 뒤에는 기억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그림도 있다.
이내가 깔리면 우리 아파트의 앞 동 건물도 그림자처럼 윤곽선을 잃고 희끄므레 해진다. 겨울이라 창은 꽁꽁 닫혀있다. 창 너머로 바라보고 있으면 점점 검은 휘장처럼 되어서 윤곽마저 스러져 버린다. 이제는 휘장을 뚫고 한 곳에서, 두 곳에서 불빛이 새어나온다. 네모난 창들은 크기도 달랐다. 아직 캄캄하여 검정색 뿐인 창도 있다. 색은 없더라도 몬드리안의 그림처럼 느껴진다.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미지의 세계를 네모로, 세모로, 그리고 색으로, 말했다는 몬드리안의 그림이다.
불빛이 흘러나오는 그 안에는 무엇이 있을까? 보이지는 않더라도 불빛마냥 따뜻한 가족들의 숨결이 있으리라 생각해 본다. 시골집을 떠나와서 학교를 다닐 때의 겨울밤은 너무 길었다. 하릴 없이 길거리로 나와 걸어도 갈 곳이 없었다. 더 짙은 외로움만 몰려왔다. 그때 창문 밖으로 흘러나오는 불빛을 보면 나와는 다른 세계가 느껴졌다. 가족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웃고 있을 모습들을 떠올리곤 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저 창 안에는 무엇이 있을까? 내 기억이 상상을 만들고 내 욕망이 상상에 보태진다. 나는 불빛이 새어나오는 창문이라면 아름다움을 상상한다. 직장에서 귀가한 아버지와, 학교에서 돌아와 자기의 방에서 책을 보는 아이와, 그리고 부엌에서 저녁 준비를 하는 엄마를 떠올린다. 상상은 나의 욕망일 뿐 진실은 누구도 모르는 미지의 세계이다. 가려진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 정말 아름답기만 할까?
첫댓글 그래서 놓친 열차는 아름답다는 말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랜만에 대하는 선생님 글에서 따스함이 전해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