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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재가수도자 모임 : 씨알예수회 원문보기 글쓴이: 늦빔
예수의 길, 씨알의 길
1. 진리가 뭔데?
예수는 빌라도 앞에서 “나는 진리를 전하러 왔소.”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묻는 말이 바로 “진리가 뭔데?”(요한18:38)입니다. 잠시 예수의 말을 듣고 되물은, 빌라도의 마음을 들여다 봅시다.
첫째 아주 보잘 것 없는 식민지 소국, 유대의 변방에서 씨알(하나님나라)운동을 한 예수라는 청년(?)이 대로마제국의 황제의 대리인 앞에서 당돌하게 진리를 전하러 왔다고 말합니다.
예수의 수난을 그린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선 빌라도는 우울한 지식인의 표상처럼 그려져 있습니다. 좀 사려 깊은 얼굴입니다. 그도 당대의 로마에선 스토아학파의 핵심사상은 수학했을 것입니다. 로마의 상류계급으로서 당대의 철학 즉 인문학을 공부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니 철학도 진리를 가르치는 것이니, 혹 했을 수 있습니다. 뭔가 새로운 철학 사상, 지혜의 말씀을 전하러 오지 않았을까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또 다르게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로마는 오랜 내전과 침략 전쟁을 통해서 지중해 연안을 재패한 말 그대로 제국입니다. 그들은 단순히 군대의 힘만 강한 것이 아니라, 모든 문물이 최고도로 발달한 문명 제국이기도 했습니다. 그 위대한 로마제국의 황제의 대리인 앞에서 변방의 변변치 못한 예언자라는 작자가 진리를 전하러 왔다고 하니- 그것도 무슨 샤먼(무당)처럼 사람들 병을 고쳐 주고, 예언을 한답시고 사람을 몰고 다니는 그였습니다- 얼마나 가당치 않게 보였겠습니까? 그래서 비웃는 투로 ‘그래? 진리가 뭔데? 어디 한 번 말해봐’하고 조롱하는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선 빌라도가 예수를 심문하는 장면은 그것으로 끝납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러분도 예수처럼 ‘나는 진리를 전하러 왔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씨알 사상이 무엇입니까? 예수가 전한 진리의 말씀이 토대가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석의 마지막 강의>라는 책에서도 “공자, 맹자에 사서삼경을 꼭 구약 대접을 해야 합니다”(34쪽)라고 했습니다. 모든 동서양 경전은 구약이요, 그것들은 우리에게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제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누군가가 “진리가 뭔데? 한 번 말해 보시오.”하면 내가 말문이 막힌다는 것입니다. 소위 씨알지기 양성과정을 거쳐서 씨알사상께나 안다고 자부하는 나부터도 ‘진리가 뭔데?’하고 되묻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2. 모름지기 : 믿고 행할 뿐
요즘 시민운동의 중심 화두가 ‘마을과 협동’입니다. 마을만들기와 협동조합 운동으로 의제가 집중되고 있는 양상입니다.
제가 사는 은평구는 그 운동의 중심지인 것만 같습니다. 불광역 부근에 옛 보건원 자리에 사회적경제지원센터부터 시작해서 마을기업사업단, 이모작인생지원센터, 서울시마을공동체지원센터 등이 모여 있습니다. 박원순 시장의 서울시 경영철학의 핵심 가치가 여기서부터 인큐베이팅되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때문에 이런 마을만들기와 협동조합 운동에 관한 교육과 세미나가 경향 각지에서 많이 열리고 있습니다. 강사들은 관련 분야에 교수들과 시민활동가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분 중에서 특별한 분이 눈에 띄었습니다. 이남곡 선생이라는 분입니다. 서울대 법대 출신이신데, 전남 장수에서 동네분들과 동서양 고전을 읽기 시작하시면서 연찬문화연구소를 차리시고 인문학운동을 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의 저서인 <논어, 사람을 사랑하는 기술>이 교보문고에서 인문학 부분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라와 있습니다. 책날개에 이남곡 선생을 소개한 글을 간략히 적어봅니다.
-1945년 전남함평에서 출생
-대학시절부터 민주화운동과 사회변혁운동에 앞장
-1970년부터 농촌지역에서 교육실천연구회 활동과 같은 교사운동
-1979년 남민전 사건으로 4년간 투옥
-지천명의 나이에 모델사회로서 무소유공동체 생활을 시작
-이순의 나이에 무소유사회가 아직은 보편적 목표가 될 수 없다고 생각에 장수에 정착해서 아내와 함께 장류(장류)사업을 하며 보편적인 마을운동을 펼치고 보편적인 마을운동을 펼치고 있다.
- 이후 몇몇 가까운 벗들과 함께 스스로 성찰하고 서로 소통하기 위해 장수, 익산, 전주, 고아주, 서울 등지에서 인문학 강좌를 열기 시작했다.
- 한때 공자를 ‘봉건제와 군주제 그리고 가부장제의 옹호자’로 평가하여 막무가내 거부감을 가졌으나 <논어>를 연찬 · 강독하면서 ‘아집이 없는 자유인, 실사구시의 과학적 인간, 화광동진이 현실참여적 인간 그리고 소통의 달인’으로서 다시 만나다.
제가 인사도 안해 본 분의 강의를 듣고 너무 짝사랑을 하는 것같으나, 칠십이 넘은 분이 아직도 열심히 공부하시고 활발히 강연을 다니시는 모습이 사표가 될만해서 길게 소개해 드렸습니다.
이 분이 말하는 ‘연찬’에는 핵심 뜻이 하나있습니다. 그게 바로 “우리가, 즉 너나 내나 아는 것이 없으니, 서로 아는 것이 없음을 인정하고 거기서부터 출발해서 앎에 이르도록 함께 노력하자는 것입니다” 연찬(硏讚)이란 ‘학문 따위를 깊이 연구함’이라고 사전에 나와 있습니다. 찬(讚)이 옥편에는 ‘명확히 하다’, ‘밝히다’라고 풀이되어있습니다. 일종의 세미나, 스터디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생각해보면 그렇습니다. 스스로 아는 것이 없음을 인정할 때 거기서 겸손함이 나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반대로 자기가 다 아는 것같은 사람은 교만하고, 그런 사람들이 모이면 서로 자기가 잘 안다고 자기 주장만 하니 싸움밖에 더 나겠습니까? 요즘 기독교계를 보면 그렇지 않습니까? 서로 자기 신학이 제일이고 정통이라고 싸우다보니 수십 개 수백 개의 분파로 나뉜 것이 아니겠습니까?
때문에 협동조합도 그렇고, 마을운동도 그렇고 서로 역지사지하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공자와 같이 제자들 앞에서도 ‘안다고 하는 것이란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밑에서 동문수학하는 학생들은 서로를 벗으로 삼고 지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기에 모이신 씨알지기님들이 서로 씨알사상을 동문 수학하셨으니 ‘안보면 그립고 만나면 애틋하고, 헤어지면 또 보고 싶은’ 그런 사랑하는 벗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공자 인생삼락(人生三樂)이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학교폭력 근절’이라는 프랭카드가 중고교 정문마다 걸려 있는 게 우리 교육의 현실입니다.
결론은 ‘내가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진리인 것입니다. 델포이 신전에 걸린 문구 “너 자신을 알라‘는 말도 소크라테스가 써 먹어서 만고의 진리처럼 되었지만, 그 원래의 뜻이 ’네가 신을 알지 못한다는 그 사실을 알라‘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씨알사상은 진리의 길을 걷는 도정에 있는 진리의 탐구자들이 쓰는 완성되지 않은 원고, 곧 미정고(未定稿)라는 다석의 말을 되새겨할 것입니다. 아직 원고가 탈고가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예수의 남은 고난, 즉 진리의 십자가 길을 걸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박재순 박사님이 다석의 ‘모름지기’와 본회퍼의 ‘믿고 행할 뿐’ 숭산스님의 ‘오직 모를 뿐, 오직 행할 뿐’이라는 핵심 개념들을 탁월하게 비교하신 글이 나오게 된 바탕이 아니겠습니까?
다석은 ‘모름지기’를 ‘모름을 지킨다’는 뜻으로 풀으셨죠. 그 모름지기에 ‘반드시’란 뜻도 있으니 두 개를 연결해 보면 참 절묘합니다. “반드시 모름을 지켜라.”, “모르면서 제발 아는 척 좀 하지 말라.”
우리가 우리의 미래를 어떻게 압니까? 그것이 알고 싶어서 미래를 미리 내다보는 예언자를 신처럼 모십니다. 그러나 아무리 예언자라고 해도 소소한 사람들의 미래를 어떻게 일일이 점칠 수 있습니까?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이 다 맞았습니까? 맞을까봐 두렵네요. 그렇게 미래는 불안을 줍니다. 왜 불안합니까? 모르겠으니까 그럽니다.
그 불안을 떨치는 방법은 오직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게 사는 것입니다. 내 미래를 내가 다 이룰 수 있을 것처럼 날 뛰다가, 결국 무리수를 둬서 재산 날리고 몸져 눕게 되거나 길거리로 내 몰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연예인중에 그런 사람들이 많죠. 언제 인기가 하락해서 수입이 줄지 모르니까 돈이 좀 모아지면 사업에 투자했다가 돈을 날리는 거죠. 미래가 두려웠던 것이죠. 그런 점에서 국민 엠씨 유재석은 현재의 일에 열심을 내는 사람입니다. 자기 일에 매순간 열과 성을 다하고, 쉬는 시간엔 딴 짓 하지 않고 헬스를 열심히 한다고 합니다. 전국 노래자랑의 송해라는 분도 그렇더군요. 노래자랑을 여는 시군에 하루 먼저 도착한다고 하더군요. 다음 날 새벽에, 그 동네 목욕탕에 가서 그곳 주민들과 스킨십을 만든다고 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목욕탕에서 발가벗고 그곳 주민들과 만났으니 무대와 객석에서 만나는 주민들이 더 살갑게 느껴지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매순간을 충실히 사는 자세가 ‘모름지기’의 자세가 아닐까요?
시편 30,9-10 내가 죽은들 주님께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내가 죽어 구덩이에 던져지는 것이 주님께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한 줌의 티끌이 주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까? 한 줌의 흙이 주님의 진리를 전파할 수 있습니까?
주님, 귀를 기울이시고 들어 주십시오.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님, 주님께서 나를 돕는 분이 되어 주십시오.
3. 너는 너답게, 나는 나답게 : 가온찍기 - 각자의 개성을 살리자
아브라함 매슬로우는 심리학자이면서 5단계 욕구설로 유명한 분입니다. 마지막 5단계가 자기실현의 단계라고 합니다. 1단계는 생리적 욕구 2 단계 안전의 욕구 3단계 애정의 욕구 4단계 존중의 욕구이구요. 마지막 단계인 자기실현 단계는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자신의 잠재력을 최대로 실현하는 단계입니다.
자기실현한 사람의 특성
매슬로우는 자기실현적인 삶을 영위한 자신의 친구나 동료로부터, 그리고 역사적 인물들 곧 링컨, 제퍼슨, 아인슈타인, 간디 등 인류의 절정(peak)에 있었던 훌륭하고 건강한 사람들에 대한 특성을 연구하여 자신의 성격이론의 기초를 마련하였습니다. 그는 자기실현을 이룬 사람들로부터 공통된 특성을 발견하였습니다. 즉 다음과 같습니다.
■현실의 효율적 지각 - 자기실현을 한 사람들은 자기 주변의 세계 및 사람들을 명확하고 객관적으로 지각할 능력을 가진다. 이러한 지각은 고도로 객관적이며 치우치지 않은 성장인지에 근거한다. 이들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며 선입관에 치우쳐 상황을 파악하지 않는다.
■자신, 타인, 자연의 수용 - 자신의 강점뿐만 아니라 약점까지도 왜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 들였으며, 실패한 일에 대해서도 지나친 부끄러움이나 죄책감을 갖지 않는다. 또한 다른 사람이나 일반적인 사회의 약점에 대해서도 있는 그대로 수용한다.
■자발성, 단순성, 자연성 - 지극히 개방적이고 솔직하고 자연스럽다. 그들은 생각과 이상에 있어 주관이 뚜렷하며, 그의 행동은 인습에 사로잡혀 있지 않다.
■자신 외의 문제에 초점 - 자신의 인생에 대한 사명감을 갖으며, 자신 밖의 일이나 자신의 범위를 벗어나는 일에 많은 에너지를 쏟는다. 열심히 일하면서, 큰 기쁨과 흥분을 경험한다. 자신이 하는 일이나 방향이 성장가치에 집중되어 있다
■초연함 및 사적 자유 욕구 - 그들도 때로는 고독을 느끼며 그러한 고독에 압도되지 않으면서 사적인 자유를 즐긴다. 자기실현을 한 사람은 독립적이고 자율적이기 때문에 때론 홀로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면서 사색하며, 타인의 지지 및 애정에 매달리거나 요구하지 않는다.
■인식의 신선함 - 자기실현을 주위의 세계를 늘 새로움, 놀라움, 경외심을 갖고 받아들이고 경험하는 능력이 있다.
■신비 혹은 절정경험 - 강렬한 무아경, 놀라움, 경외심, 즐거움의 경험을 한다. 이러한 경험을 하는 동안 그는 극도로 확신에 차고, 명확하고 강력한 힘을 느끼며, 경험은 강화되고 그 강도가 절정에 달하게 된다.
■사회적 관심 - 성격의 구성요소로서 보편적으로 갖추는 동정과 공감을 보여 주는 사회적 관심을 가진다. 그들은 타인을 마치 자신의 형제처럼 대한다.
■소수의 깊은 대인관계 - 자기실현을 한 사람은 많은 사람들과 우정을 나눌지 않을지라도 소수의 사람들과 깊은 대인관계를 맺는다.
■민주적 성격구조 - 지극히 관대하여 모든 사람들을 받아 들이며 인종적이거나 종교적 혹은 사회적 편견을 갖지 않는다.
■창의성 - 자기 분야에 있어서 창의성과 독창성을 갖고 있으며, 모든 활동 속에서 적응력이 있고 자발적이며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관습적 문화화에 대한 저항 - 자발적이고 독립적이며 자부심이 매우 강하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일정한 틀에 맞춰 생각하라고 강요하는 사회 · 문화적인 압박에 자유스럽게 저항한다. 그들은 사회의 규범에 공공연하게 반대하지 않으며 사회적 관례를 고의적으로 모욕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들은 문화의 엄격한 격식과 요구에 따르기보다 자신의 개성에 따라 행동한다
칼 융의 ‘자기실현’과 ‘개성화’와 다석 유영모의 귀일(歸一)사상
칼 융은 자기실현을 인간의 궁극적 목적이라고 했습니다. 자기실현은 전일성(wholeness)과도 연관성이 있습니다. 전일성이란 유기적인 것으로 여러 분리된 부분들이 통합적인 방식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우리 몸이 유기체로 대표적입니다. 왼 손이, 오른 손이 더 기능이 좋고 쓰임을 받는다고 시기하거나 질투를 합니까? 건강(health)이라는 단어는 고대 색슨어 “hal”에서 왔다고 합니다. 여기서 전체라는 “whole"말이 생겼다고 합니다. 우리 몸은 어느 부분이 아프면 전체가 고통을 당합니다. 성경에도 잃은 양 한 마리가 나머지 아흔아홉 마리보다 더 귀하다고 했습니다. 양 한 마리를 잃으면 양 백마리라는 숫자가 상징하는 전체성(totality)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각 유기체의 진정한 본질과 삶의 목표가 무엇인지 알려주는 것은 각 유기체 안에 깊은 곳에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마치 무엇이 건강하게 만드는지 아는 내적 중심(inner Center)이 각 사람 안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다석 유영모의 ‘가온찍기’가 생각나는 부분입니다.
만약 우리의 의식적 인격이 이 내적 중심과 관계를 맺게 되면 우리의 의식적 인격이 평화롭지 못하거나 사회에 잘 적응이 안된다고 해도, 온전한 인격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할 것입니다. 건강을 얻기 위해 하는 운동은 적응이나 마음이 평화보다는 괴로운 시련일 수 있다.
저는 지금까지 예수님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면 자기 십자가를 메고 따라오라”하신 말씀의 뜻이 “누구든지 하나님과 하나가 되려면, 곧 전일성, 전체성을 갖고자 하면 고통을 감내할 마음을 먹으라”는 뜻이라는 걸 이제사 깨닫게 됩니다. 온전한 인간이 되려면 개별적인 자아(ego) 역시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합니다. 고통을 받지 않고 의식적 인격 및 집단의 요구와 사회의 기대에 순응하려는 욕구는 전일성에 이르고자 하는 내적 중심의 욕구와 충돌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래서 전체와 하나가 되려는 사람은 예수와 같이 십자가의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히틀러 시대 독일 공군 조종사의 예-적응에 실패해서 병이 들고 나중에 자살)
그러므로 무작정 마음의 평화를 찾는 것은 오히려 건강하지 않다는 징표입니다. 요즘 힐링 열풍이 부는데 성찰해 볼 부분이 있습니다. 개인이 병든 사회에 적응한다면 그는 그 병의 일부가 됩니다. 그러므로 그가 진정한 의미의 건강성을 되찾으려면 내면으로부터의 움직임 안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칼 융은 전일성을 향한 이러한 운동을 “개성화(individuation)”라고 불렀으며, 그것을 모든 진정한 건강성의 근원이라고 보았습니다. 개성화는 우리가 온전하고 독특한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입니다. 이것은 의식적 인격과 무의식적 인격의 종합을 의미하며, 의식의 중심인 자아(ego)와 우리의 마음의 깊은 곳에 있는 중심(inmost Center)처럼 작용하는 자기(Self)라고 부르는 전체 인격 사이의 관계를 확고히 하는 것을 뜻합니다. 개성화는 전일성을 향해 나아가도록 이끄는, 살아 있는 과정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승에서 완성될 수 없다고 합니다. 다석의 미정고(未定稿)라는 말이 생각나지요? 개성화는 우리의 중심(가온)에서 시작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온전하게 되기 위한 ‘결정’을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생명력이 우리에게 뿜어 나올 때 가능합니다. 이것이 중용 즉 ‘줄곧뚫림’이 아닐까요? 유기체는 그 유기체의 적절한 목표를 추구하고 그것이 개성화입니다. 도토리는 나중에 큰 상수리나무로 자랍니다. 우리는 그것을 개성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도토리는 항상 상수리나무가 되지 소나무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교육은 개성화와는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본성 속에 있는 모든 것은 그 자체를 실현하고자 한다. 그것이 바로 개성화가 의미하는 모든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석 유영모가 동광원에서 강의한 내용을 녹취한 것을 풀어서 책으로 낸 것이 <다석의 마지막 강의>인데 그 첫 장이 <맹자의 진심편>에 대한 강의를 한 것입니다. 잠깐 그 분의 말씀을 들어 볼까요?
“그런데 그런 속에까지 우리 마음은 사람의 신명입니다. 사람들이 신명 없이는 못 살아요. 내 속에 있는 신명은 곧 내 마음이다. 그럼 맹자한테 우리가 배울 것이, 내 마음은 신명이다. 우주를 지배하시는 천지신명이 아닌지 모릅니다. 이 마음이라는 게 하늘에서 얻어가지고 온 마음인데 얻어 가지고 와서 내가 사는 동안에 줄곧 속에 있는 마음인데, 그 마음을 다해서 찾아 볼 것같으면 천성(天性)이라는 걸 안다. 천성을 알 것 같으면 하늘을 안다. 하늘을 알면 알았지 하늘을 안다는 게 우주를 안다든지 이런 소리들밖에 안 되는데 하느님을 안다는 말은 아닌지 몰라요. 그렇지만 여기 맘이라는 게 신명이라 이러는 겁니다. 신명이 하느님은 아니에요. 그러나 하느님에 가깝습니다. 해나 달이 신(神)은 아니에요. 밝은 게 신이 아니에요. 그러나 어두운 것보다는 해, 달의 밝음이 하느님에 가깝습니다. 그래 내 마음은 신명이다. 곧 내 가진 이 몸뚱이 속에 신명이 있다고 하는 이 말씀은 대단히 귀한 말씀입니다.
(중략)
이 마음을 다하면 천성이라는 성품을 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욕심 같아서는 성품, 성품 아지 말고 ‘바탈’이라고 하자는 거에요. 우리의 본바탈! 바탈이란 뜻은 그걸 받아서 그대로 하겠다는 겁니다. 이 세상에 나올 때 그걸 받아서 나왔어요. 그 받아서 나온 게 우리 바탈이에요. 올 가지고 올바로 사는 것을 아는 그 바탈을 가지고 그대로 태어났습니다.
(중략)
우리 갈 길을 다 걷기 전에는 그걸 내버려서는 안돼요. 나올 적에 먼저 가지고 나온 그것 가지고 그대로, 거기 있는 일름(命)대로 그대로 전진해야 나가야 합니다. 종당 목적지에 다 가도록 그것을 가지고 가요. 이 천성을 찾는 것을 하자고 하는 거에요. 우리의 천성, 이 바탈, 우리 가진 바탈. 그럼 그 바탈이 뭔고 하니, 그 성품 그것이 뭔고 하니 우리 마음이 게으르지 않으면 우리가 자라는 대로 모든 올이 들어가서 내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올이 들어가서 되는 게 우리의 학문 지식이 되는 것입니다. 많은 지식을 배워서 넣었다고 하는 건 그 사람이 많이 배웠으니까, 석사다 박사다 그러는 것은 많은 올을 죄 싸 가졌다는 겁니다. 우리 바탈이란 건 올이란 올은 죄다 갖추고 가졌다는 거에요. 이제 올을 생각할 때에 우리 마음이라는 게, 사람의 신명이라는 게, 모든 올이란 올은 진리라는 진리를 죄다 갖추었다 이겁니다.
(다석 마지막 강의, 31-35쪽)
4. 삶을 배우는 지혜의 학교 : 씨알학교
- 물질로 하는 운동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씨알운동
간디의 ‘나의 진리실험 이야기’
씨알 함석헌이 번역하신 <간디 자서전>의 부제가 ‘나의 진리실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실험하면 우선적으로 ‘실험실’이 생각납니다. 실험실은 현실과 좀 떨어진 것같습니다. 실제로 적용하기 전에 먼저 맞나 틀리나 실험해본다는 의미가 강합니다. 그러나 간디의 실험실은 안전한 공간이 아니라 고통을 동반한 영국의 식민지 인도의 ‘현실’이었습니다.
“내가 뜻하는 것은 자서전을 쓰려는 것은 아니다. 나는 다만 나의 수많은 진리 실험의 이야기를 해보자는 것뿐이다. (중략) 정치적 분야에서의 나의 실험은 인도뿐만 아니라 ‘문명화된’ 세계에는 어느 정도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이 나에게는 별 의미가 없다. 그 일들 덕에 얻게 된 ‘마하트마’(위대한 영혼)란 칭호는 더군다나 내게 의미가 없다. 내가 정말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나만이 알 수 있는 영적인 분야에서 한 실험들이다. 내가 정치적 분야에서 일할 수 있는 힘을 얻은 곳은 바로 여기이다. 만일 이 실험들이 참으로 영적이라면 내 자랑의 여지란 있을 수 없다. 그것들은 단지 나의 겸손만을 키울 뿐이다. 과거를 돌이켜보며 반성을 하면 할수록 나는 한계를 더욱 절감할 뿐이다.
내가 성취하려는 것, 지금껏 30년 동안 성취하려고 몸부림치고 애써 온 것은 자기실현이다. 하나님과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고 봄이다. <모크샤>(구원, 생사해탈)에 도달함이다. 나는 이 목적을 달성하려고 살며 움직이며 존재하는 것이다. 내가 말로나 글로나 행하는 모든 것, 그리고 내가 정치적 분야에서 한 모든 모험은 다 이 한 목표를 지향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면 누구나 할 수 있다고 믿어온 사람이기 때문에, 나의 실험은 골방에서 되어진 것이 아니고, 드러내 놓고 한 것이다.”(간디자서전 서문, 함석헌 번역)
저는 간디가 영국에서 변호사 시험에 합격해서 우쭐해서 인도로 돌아갔을 때와 또 첫 법정에서 두렵고 떨려서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그 이후 실의에 빠져서 법정이 설 수 없었던 그 때의 심정을 생각해 봅니다. 결국 인도에서 변호사업을 할 수 없으니까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도 상회에서 고문변호사가 필요하다는 정보를 얻고, 가족을 남겨두고 혈혈단신 아프리카 대륙 남단의 도시로 향하는 모습과,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도착한 영국신사 차림의 간디가 일등칸에서 그 무지막지한 영국인 차장에게 발로 차이며 쫓겨나는 광경을 생각해 봅니다. 간디는 그래도 부당한 조치에 항의하다가 쫓겨난 것입니다. 잘못된 관습과 문화에 적응하길 거부한 것입니다. 이등칸으로 가지 않으려고 의자 모퉁이를 꽉 붙잡고 버텼습니다. 그래서 고통이 시작되었습니다. 지금까지의 간디는 영국 식민지에 순응하는 건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함석헌 선생의 말처럼 갑자기 하나님의 발길질을 당한 것입니다.
저는 간디가 기차에서 내팽겨쳐서, 어느 시골 간이역에서 밤을 지새면서 다음 기차를 기다리며 벤치에 앉아서 떨고 있는 것을 또 생각합니다. 그 밤이 바로 인도의 운명을 바꿀 위대한 영혼(마하트마) 간디가 탄생되는 ‘영혼의 어두운 밤’이 아니었을까요? 새벽 이슬을 맞으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간디는 평생을 어린 시절 유모가 가르쳐준 힌두교의 성인이며 신인 ‘라마’의 이름을 만트라처럼 읊조렸다고 합니다. 아마 그 벤치 위에서도 ‘라마나마’를 수천번을 읊조렸을 것입니다. 그가 총에 맞아 쓰러졌을 때도 ‘오, 신이여’하고 외마디 소릴 했을 정도였으니까요.
“이미 오래 전 나의 이성과 감성은
신이 지니신 최상의 속성과 그 이름을 ‘진리’로 파악하였다.
하지만 지금 나는 그 ‘진리’를
라마라는 이름으로 인식한다.
예나 지금이나 그 이름은
극도로 어려운 시련에서
나를 건져내 주곤 한다.
나의 어린 시절, 나의 보모는 나에게
무섭거나 슬퍼질 때마다
라마라는 신의 이름을 반복해서 부르라고 가르쳤다.
그 이후로 나이가 들고 아는 것이 늘어가면서
그것은 나에게 제 2의 본능처럼 되어 버렸다.
비록 실제로 발음을 하지 않더라도
하루 24시간 내내 그 이름은 내 마음 속에 있다.
그 이름은 나의 구세주이고
나는 항상 그 이름 위에 머물러 있다.
라마를 항상 마음 속에 모시고 있는 사람은
어떠한 특징을 나타내는가?
그런 사람은 숨 쉴 때마다
신의 이름을 상기한다.
그런 사람의 라마는 그 사람의 육신이 잠들었어도
언제나 깨어 계시고,
그 사람이 무엇을 하든지
늘 함께 계신다.
이처럼 믿음이 깊은 사람에게는
이 거룩한 관계의 상실이
곧 죽음을 의미한다.”(간디 명상록, 183-184쪽, 열린 서원)
나는 간디와 같이 씨알학습모임은 우리의 현실, 즉 ‘삶’속에서 진리를 실험하는 학교가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왜 다 아는 간디를 갖다가 붙이냐 하면 우리가 다석이나 유영모를 알려면 간디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간디의 그 영성적인 면을 철저히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함석헌을 알 수 있습니다. 식민지 시대 조선 젊은이들이 같은 처지에 있는 간디 얘기를 몰랐겠습니까? 유영모, 함석헌, 이현필 모두 간디를 흠모하고 그에게서 배우고자 했습니다. 함 선생님이 간디 자서전을 왜 번역했겠습니까? 함 선생님이 ‘싸우는 평화주의자’라는 말씀을 들은 것도 간디의 비폭력 사상을 한국적 상황에서 적용해 나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룬트비의 ‘삶을 배우는 학교’
“왕립 덴마크 평민대학이 이 목적에 기여할 것임을 믿으시는 바로 그 순간 지상의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이 그렇듯 처음에는 아주 불완전할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러면서도 총체적인 완성 능력을 고려하면 어디까지나 현실적인 이 학교가 우리 것이 될 것이라는 즐거운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이미 말했던 것처럼 이제 마무리를 지어야겠다. 그러나 가능한 한 아주 친절하고 솔직하게 국민의 목소리를 그 이면에 담고 있는 삶을 배우는 학교의 교과 과정―비록 그것이 국민의 본성과 역사적인 경험 모두를 담고 있지만 국민의 목소리에는 거스르는 교과 과정―에 대한 나의 신념들을 표명하고 나서 말을 끝낼 것이다.
내가 마음속에 두고 있는 학교는, 문법 학교가 죽은 언어들에 기초하고 있는 것처럼 대단히 과학적으로 수학에 기초하고 있는, 사회를 죽음으로 이끄는 이 끔찍한 공장이 국민들의 목소리를 빙자해 우리가 필요로 하고 있는 삶을 배우는 학교인양 떠들썩하게 선전되고 있지만 않는다면, 독일 교수의 사회복지에 대한 지식쯤이야 조용히 미소를 지으면서 넘어가고 싶지만 이제는 나도 거의 그럴 수 없는 지경에 이른, 남자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세워진 중등 학교이다. 어떤 저자도 국민의 목소리 혹은 그것으로 통용되는 것에 거스르는 처지에 있으면서, 나의 펜이 느끼는 것보다 심한 무력감을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 새로운 중등 학교가 덴마크 평민대학에 이르는 길을 가로막고 있지는 않는다면, 나는 차라리 내가 그런 것들은 전혀 못 본 척해 버리고, 국민의 목소리를 바로 잡거나 아니면 오해를 청산하는 일은 경험과 평민대학에 맡겨두고픈 마음이 굴뚝같다. 그런데 그러기는커녕, 나는 남학생들을 가르치는 그와 같은 수학 학교가 어떤 방식으로도 덴마크 평민대학을 대신하거나, 아니면 후자의 이로운 결과들 가운데 단 하나라도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만 한다.”
“위험이 있는 곳에 구원 또한 있다”.
“그러나 시인은 남아 있는 것을 일으켜 세운다”.
(삶을 배우는 학교 (1838) 김성오역, 처음처럼 36호)
덴마크가 왜 행복지수가 세계 1위인지 그룬투비의 글을 읽고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그리고 왜 그룬투비가 덴마크 국민의 영혼을 깨우쳤는지도 이 짧은 글을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룬투비가 제창한 ‘삶을 배우는 학교’, 왕립 덴마크 평민대학은 지금 덴마크 ‘자유학교’로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또 홍성 풀무학교의 교육이념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풀무학교 교훈인가요? 그 학교에 안 가봤지만 교실마다 “위대한 평민”이라는 글귀가 붙여져 있다고 합니다.
풀무학교를 설립한 이찬갑 선생이 바로 이승훈, 유영모, 함석헌이 스승으로 있던 오산학교 출신입니다. 또 함석헌 선생과 같은 무교회주의자 그룹에 속하셨습니다. 그러니 그룬투비의 ‘삶을 배우는 학교’의 이상이 씨알정신 속에 이어져 있는 것입니다. ‘가나안농군학교’는 그룬투비 정신을 제대로 이양하지 못하고 덴마크 경건주의의 율법적인 측면에 매인 면이 있는 것같아요. ‘칫솔에 치약을 5미리 두께 이상 바르지 말라’하는 등 정신보다 형식적인 면을 가르친 점이 없지 않습니다. 가나안농군학교를 모델로 한 새마을운동도 그렇고요. 왜 우리가 초등학교 때 국민체조로 덴마크 체조를 했는지 알 것도 같습니다. 여러분에게 오마이뉴스 서연호 대표가 취재한 “덴마크에서 배우자‘라는 기사를 검색해서 읽어 볼 것을 추천합니다.
박재순 씨알님이 제 강의를 들으실 때마다 ‘제소리’가 없다고 지적하셨습니다. 그러고보니 오늘 강의도 죄다 남의 이야기뿐인 것같습니다. 아직 열매를 맺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아니, 껍질이 부서지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오늘 마지막으로 제소리를 내는 것으로 끝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끝까지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의 제소리
하나, ‘씨알농장’을 도시의 마을마다 건립합시다 : 도시 속에서 ‘삶’을 배우는 학교. 진리를 알기 위해 연찬하는 학습모임을 만듭시다. 씨알을 싹 틔웁시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됩시다.
물질이 아니라, 프로그램이 아니라, 시스템이 아니라 스스로 민중들과 함께 진리의 실험을 하는, 삶으로부터 배우는 학습모임을 합시다. 자기 집에서, 주민센터나 마을회관에서, 평생학습관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학습동아리를 만듭시다.
둘, 자기가 사는 마을마다 마을형 기업, 협동조합형 기업을 세우고 만듭시다.
셋, 저는 이왕에 말이 난 김에 씨알사상학습모임 “너는 너답게, 나는 나답게”(줄여서 ‘너나답게’)를 개설하고자 합니다.
요한복음 16,13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듣는 것만 일러주실 것이요,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첫댓글 다시 함께 하여 주셔서 가까이 만날 수 있어서 너무 고맙습니다. 또한 방대한 글도 고맙습니다. 융과 그룬트비 그리고 간디를 가까이 친구하고 계심을 알겠습니다. "너나답게" 그리고 함께 어우러져!!!
감사합니다. 함 씨알님의 노고를 주님께서 아실 것입니다.
그럼 셋 째 토요일에 대학로에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