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화비(斥和碑)는 대원군이 1871년 전국 요처에 세운 쇄국정책의 상징물이다.
주 내용(큰 글자):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오랑캐들이 침범하니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
부 내용(작은 글자): 戒我萬年子孫 丙寅作辛未立
만대자손에게 경계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우다.
중국(1840~1842, 아편전쟁)과 일본(1854년, 가나가와 조약)을 개항시킨 서양은 조선으로 눈길을 돌렸다. 조선은 서해안에 출몰한 서양의 배 이양선(異樣船)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작은 목선만 본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긴 큰 철제 군함을 처음 보았을 때 공포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뒤이어 1866년 병인양요, 1871년 신미양요가 일어났다. 두 사건은 프랑스와 미국이 조선에 상륙하려다 격퇴당한 사건이다.
한편 독일의 상인 오페르트는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다 거절당하자 1869년 아산만에 상륙하여 흥선대원군의 부친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했다. 당시 조선의 실권자 흥선대원군을 압박하려고 벌인 이 사건은 대원군의 분노를 일으켜 쇄국정책을 더욱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대원군은 두차례의 양요와 오페르트 사건이 일어나자 전국에 외세의 침입을 경계하기 위해 1871년 척화비를 세웠다. 그러나 척화비는 1882년 임오군란 후 대원군이 청나라로 끌려가자마자 모두 철거되어 10년 남짓 존재하고 말았다. 조선말기 위기상황에서 각종 제도를 바꾸고 국호까지 바꾸었지만 곧 멸망한 것처럼 척화비도 단명에 끝나고 말았다.
사진의 척화비는 흥선대원군의 사저인 운현궁에 있는 것으로 모조품으로 보인다. 경북 영주군 순흥면사무소는 작은 박물관을 운영하면서 안동도호부에 있던 누각과 함께 각종 비석을 모아두었는데 척화비도 있었다.
동아시아 3국은 시차가 있긴 했지만 모두 19세기에 서양의 개항압력을 받았다. 근거 없는 자존심으로 버티던 청나라는 여기저기 땅을 떼어주면서 휘청거리다가 1912년에 망했고, 16세기부터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적응력을 키웠던 일본은 성공적으로 개항했다. 1868년 메이지유신을 거쳐 20~30년만에 근대국가로 탈바꿈했다.
이후 서양의 침략수법을 학습한 일본은 조선을 강제로 개항시켰고 병합시켰다. 일본의 근대화는 곧 군국주의요 침략국가의 탄생과정이다. 독일, 이탈리아와 연합하여 일으킨 제2차 세계대전은 일본의 근대화, 군국주의 과정이 클라이막스였는데, 그 전조가 조선의 병합이었다.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보여주는 척화비. 격랑이 휩쓸던 19세기 조선의 상징물 척화비. 긍정적 요소와 부정적 요소를 동시에 갖고 있는 역사적 유물이다. 조선왕조 말기의 흐름을 전체적으로 보면, 쇄국정책은 흥선대원군의 옹고집 산물만이 아니라 조선태조 이후 줄곧 중국에 편중했던 사대외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 결과는 조선의 패망이었다고 볼 수 있으니 크게 잘못된 정책이었다.
16세기 세계의 바다를 지배했던 스페인 무적함대와 비슷한 시기에 우리 바다를 지킨 이순신 거북선 함대의 컴퓨터 대결 시뮬레이션 결과는 이순신 함대의 완승이란다. 그런 우수한 전투력을 이어가지 못하고 서양배 몇 척의 침략에 허무하게 무너진 조선왕조.
척화비의 내용이 “서양인을 발견하는 즉시 신원을 확보하고 조정에 보고하여 적절한 조치를 기다리라”는 내용이었다면? 그리고 합리적인 절차에 의해 조선을 찾은 서양인들과 접촉하였다면 우리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우리 민족의 역량을 볼 때 동남아 국가들처럼 쉽게 식민지로 전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에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척화비 기사를 첨부한다. 물론 흥선대원군의 지시에 따라 이루어진 일이지만 조정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참고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된 조선왕조실록은 태조부터 고종 앞인 철종까지 기록분이다. 고종과 순종의 실록은 일제가 주관하여 기록했으므로 제외되어 있다. 다음 기사의 제목인 “경성과 각 도회지에 척화비를 세우다”란 제목을 보면 이해가 갈 것이다. 일제가 주관했으므로 ‘한양’이 아닌 ‘경성’으로 기록돼 있다.
고종 8권, 8년(1871 신미 / 청 동치(同治) 10년) 4월 25일(갑신) 1번째기사
경성과 각 도회지에 척화비를 세우다
진강(進講)을 마쳤다. 하교하기를,
“양이(洋夷)들이 우리의 영역을 침범한 것은 매우 통분할 노릇이다.”
하였다. 우의정(右議政) 홍순목(洪淳穆)이 아뢰기를,
“이 오랑캐들은 원래 사나운 만큼 그 수효는 그다지 많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형세는 미칠 듯 날뛰며 계속 불리한 형편에 처한 보고만 오니 더욱 통분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이 오랑캐들이 화친하려고 하는 것이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으나, 수천 년 동안 예의의 나라로 이름난 우리가 어찌 금수 같은 놈들과 화친할 수 있단 말인가? 설사 몇 해 동안 서로 버티더라도 단연 거절하고야 말 것이다. 만일 화친하자고 말하는 자가 있으면 나라를 팔아먹은 율(律)을 시행하라.”
하였다. 홍순목이 아뢰기를,
“우리나라가 예의의 나라라는 데 대해서는 온 세상이 다 알고 있습니다. 지금 일종의 불순한 기운이 온 세상에 해독을 끼치고 있으나, 오직 우리나라만이 유독 순결성을 보존하는 것은 바로 예의를 지켜왔기 때문입니다. 병인년(1866) 이후로부터 서양놈들을 배척한 것은 온 세상에 자랑할 만한 일입니다. 지금 이 오랑캐들이 이처럼 침범하고 있지만 화친에 대해서는 절대로 논의할 수 없습니다. 만약 억지로 그들의 요구를 들어준다면 나라가 어찌 하루인들 나라 구실을 하며, 사람이 어찌 하루인들 사람 구실을 하겠습니까?
이번에 성상의 하교가 엄정한 만큼 먼저 정벌하는 위엄을 보이면 모든 사람들이 다 타고난 떳떳한 의리를 가지고 있는 이상 불순한 것을 배척하는 전하의 큰 의리에 대해 누군들 우러러 받들지 않겠습니까? 또한 저 적들이 이 소리를 듣는다면 간담이 서늘해질 것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오늘 경연(經筵)에서 한 이야기를 조지(朝紙)에 낼 것이다.”
하였다.【이때에 종로(鐘路)거리와 각 도회지(都會地)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웠다. 그 비문에, ‘오랑캐들이 침범하니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