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기치로 모여
이사야 62:10~12, 시편 126
히브리서 11:32~12:2, 요한복음 1:19~28
대림절 셋째 주일, 성서주일, 인권주일
20161211
1920년 생으로 올 해 97세가 되는 연대 철학과 명예교수 김형석 박사가 작년에 [예수]라는 책을 냈습니다. 철학 박사들은 으레 신앙이라는 영성을 다루는 부분과는 안 맞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100수를 앞둔 그것도 철학과 교수가 예수에 관한 책을 썼다? 처음에는 비판서인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철학과 교수로만 알고 있었지, 그분의 신앙이력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친구가 그 책을 선물해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비교적 쉽게 그러나 성경 행간에 숨어 있는 예수의 발자취를 잘 그려내었습니다. 단숨에 읽었습니다. 그 중에 첫 번째 파트가 ‘영원한 것을 향한 새로운 출발’인데,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에 관한 부분입니다. 김 교수의 논리에 의하면, 30대 전후의 한 사나이가 목수 일을 하면서 정들었던 나사렛을 떠나 유대 ‘광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습니다.
불교로 말하면 일종의 출가입니다. 예수의 관점에서 보면, ‘영원한 것을 향한 새로운 출발’입니다. 그렇게 출발한 발걸음이 바로 세례자 요한이 외치고 있는 유대 광야로 향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요한은 사해의 서북 지방에 있는 에세네파에 속한 금욕주의자였습니다. 요한은 구약 시대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예언자가 사라진 이후에 400년 만에 예언자로 등장하는 걸출한 인물입니다.
예수님과 먼 친척 관계이기도 하지만, 예수보다 먼저 광야에 나와 사자후를 토하는 정의의 심판의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을 희망의 출구로 봤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희망의 출구가 누구일까요? 어쨌든, 하나님 나라가 건설된다면 아마 요한과 같은 사람을 통해서 일거야,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정의와 진노의 하나님을 선포하고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하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포효하는 설교를 듣고 수많은 사람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군중들뿐만 아니라, 공무원도, 군인들도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요한의 정체가 정말 궁금했습니다. 유대의 원로들이 제사장과 관리들을 보냈습니다. 나중에 바리새인들이 보낸 사람도 나옵니다. 다시 말하면, 요한의 등장과 함께 이스라엘 나라 전체가 들썩이며 세례를 받으니까 원로들과 교계가 나섰습니다.
그의 입을 통해서 그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당신 누구입니까? 요한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그러면 엘리야나 선지자입니까? 그 정도도 못 됩니다. 그러면 당신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그저 나는 이사야 선지자가 말하는 것처럼 주의 길을 예비하고 곧게 하는 광야의 외치는 소리일 뿐입니다. 이름도 빛도 없는 소리에 불과합니다. 이것이 요한의 자기표현입니다.
이름 내기 좋아하고 명예를 드러내기 원하는 한국교계와 정반대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어찌하여 세례를 베풀고 있습니까? 당신이 뭔데,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사람이 왜, 세례를 베풉니까? 나는 물로 세례를 베푸는 사람입니다. 내 뒤에 오실 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터인데, 그분이 오기 전에 저는 물로 길을 예비하는 것입니다. 당신들 가운데 당신들이 알지 못하는 한 분이 섰습니다.
그분이 바로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분이십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조차 풀 수 없는 아주 미미한 존재입니다. 이것을 김형석 교수는 예수님과 요한의 만남으로 정리를 했습니다. 예수님이 유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사자후를 토할 때 직접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과 요한, 두 사람의 눈이 서로 마주쳤습니다. 깊은 침묵 가운데 서로의 사명을 확인했습니다.
서로 야훼 하나님께서 보내셨다는 직감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에게서 신념과 정열에 불타는 눈을 봤습니다. 모든 것을 불사르고도 남을 것 같은 열정이었습니다. 그런 마음의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에 서로는 동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나에게도 세례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렇게 요청을 합니다. 무슨 소리입니까? 제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지요!
그렇지만, 예수님은 전통과 상황과 내용의 측면에서 베풀어 주는 게 좋다고 하셨습니다. 주님도 그에게 고개를 숙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나사렛을 떠나서 유대 광야에서 볼 것을 보았고 만날 사람을 만났습니다. 이런 극적인 만남 가운데 많은 것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람은 만나 보면 알지만, 요한의 입장에서 보면, 뜻밖의 인물을 만났고, 감당할 수 없는 권위에 부닥쳤습니다.
그 때부터 요한은 스스로를 그분에게 맞추고 낮추고 예비하는 길로 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늘 뜻을 전하는 올 곧은 분으로, 그리스도로, 메시아로 갔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을 보라, 그러면서 제자들 중에 일부를 그에게 보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요한을 여인이 나은 자 중에 최고의 인물이지만, 하늘나라에서는 모든 사람이 그보다 위대하다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예수님은 요한을 떠납니다. 만날 사람을 만났고, 이제 떠날 때를 분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가는 길이 요한을 거쳐야 하는 것은 맞지만, 요한과는 맞지가 않았습니다. 요한은 구약의 교훈을 완성시켜 가는 사람이었지만, 하늘나라는 과거를 계승하는 차원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요한이 끝나는 자리에서 예수의 사명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요한이 봐도 신발 끈조차 풀어드릴 수 없는 그 엄청난 예수입니다. 그 예수가 요한을 만났으나 볼 것을 봤으나 어느 순간 그를 떠나, 새로운 나라를 지향해 가는 발걸음을 봤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배여 있는 절대 진리를 보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김형석 교수는 요한과 다른 나라, 즉 요한의 나라, 예수의 나라가 갖는 의미가 본질적으로 다름을 간파했습니다.
저도 몇 년 전에 요한의 나라, 예수의 나라로 선포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김형석 교수의 책을 통해 새롭게 조명해 보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이 자신을 정확히 알고 나는 겨우 주의 길을 예비하고 곧게 하는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일 뿐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진짜는 예수 그리스도가 실현해 내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박정희 ‘메시아주의’에 빠져서 그의 딸까지 대통령으로 선출(?)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그 종말을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예수를 안 믿고 박정희를 믿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어쨌든, 이사야 선지자도 만민을 위하여 ‘주의 기치’를 높이 들라고 했습니다. 진정한 구원과 해방은 그분으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자기 백성을 거룩한 백성, 구원 받은 백성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 분의 기치를 높이 들어 만민을 깃발 아래로 모으라는 겁니다.
앞으로 우리도 깃발을 만들어 거기로 모여 가야 하겠습니다. 61장은 예수님께서 누가복음에서 취임사로 선포한 내용입니다. 주의 영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함이다,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고, 포도된 자를 자유하게 하고, 갇힌 자를 놓아주고,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하나님의 심판의 날을 선포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뒤에 나옵니다.
다시 말하면, 그분이, 주님이 여호와 하나님의 영에 감동되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희년을 선포하고 새로운 세상을 여는데 그 구원의 대장정을 위해, 만민을 위해, 기치를 들라, 깃발을 높이 들고 맞이하라, 그랬습니다. 기치를 든다는 것은 그분을 중심으로 모든 이들이 모여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 우리는 낡은 시대를 청산하고 새로운 시대를 위해 기치를 들었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기 위해서 기치를 높이 들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요한이 든 기치도 예수 그리스도요, 이사야가 든 기치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이 바로 이 세상을 온전히 구할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오늘 주신 히브리서 12장 2절에 보면, 그런 결론으로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랬습니다. 왜냐하면, 12절 하반 절입니다.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그랬습니다. 구원과 해방의 나라를 위해 십자가의 희생을 기꺼이 지셨는데, 그 결과 그 나라의 주인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 주인이 지금 오시는데, 그분을 맞이하며 깃발을 높이 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대림절이고 성탄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사무엘, 그런 믿음의 사람들 이름을 다 열거하려면 시간이 부족할 정도라고 했습니다. 무수히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믿음의 사람들은 예수님처럼, 믿음으로 악한 권력을 이기기도 하고, 정의를 행하기도 하고, 약속을 받기도 하고,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고,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고, 칼날을 피하기도 하고 연약한 가운데 강하기도 하고, 용기를 내기도 했습니다.
여자들은 부활의 소망을 갖기도 하고, 고문을 받되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조롱과 채찍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겪었습니다. 돌에 맞아 죽기도하고, 톱으로 켬을 당하기도 하고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기도 하고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사람들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진리의 사람으로 거듭납니다.
그리스도를 소망하는 사람들은 그분의 깃발 아래로 모여, 그분의 진리를 외치는데, 온갖 고난을 마다않고 나아갑니다. 그래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주요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랬습니다. 히브리서를 쓴 기자도, 세례자 요한도, 이사야 선지자도 결국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에 불과하고, 우리 또한 그런 위치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대림절에 주의 오심을 대망한다는 것은 결국 그분이 오시는 길을 예비한다는 뜻입니다. 온갖 고난이 닥치더라도 달게 받으며,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굽은 길을 바로 세우고, 높고 낮은 땅을 골고루 해야 합니다. 굽은 것을 바로 세우는 일은 정의를 바로 세우는 것을 말합니다. 높고 낮은 땅을 고르게 한다는 것은 평등한 세상을 말합니다.
정의와 평등의 세상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바로 대림절을 기다리는 자의 자세입니다. 열중 쉬어 하면서 주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향해 기치를 들고 십자가를 지고 주의 길을 예비하는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