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의 참된 의미
이사야 60:1~14, 시편 97, 98
갈라디아서 4:1~7, 마태복음 2:1~12
성탄일, 송년주일
오늘은 성탄일입니다. 성탄의 은총이 여러분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오늘 주신 구약 이사야서는 빛으로, 영광으로 오신 주님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신약 마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직접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약 성경 서신서 갈라디아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 갖는 신학적 의미를 하나님의 유업을 받을 아들 됨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먼저 갈라디아서를 보겠습니다.
1. 갈라디아서 4:1~7
4장 4절을 보면,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그랬습니다. 때가 차서, 그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구약 성경에서 예언한 대로, 그런 뜻입니다. 둘째는 그 당시 민중들이 바라던 대로, 그런 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민중들의 바람이 만나는 지점, 거기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입니다. 갈라디아서는 그런 주님의 탄생을 뭐라고 표현했습니까?
5절에 보면,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를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랬습니다. 바로 앞에 나오는 갈라디아서 3장 22절에 보면,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그랬습니다. 율법 아래에 있다는 말은 죄 아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 죄에서 우리를 속량하고, 구원하고, 하나님의 아들로 살게 하려고, 그래서 아들 된 우리에게 하나님의 아들의 영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 결과 우리도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7절이 결론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그랬습니다. 다시 말하면, 죄를 극복하지 못하고, 죄의 수렁에 빠져서 허우적대며 살아가는 인간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삼아 주시고 아들의 영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의미입니다.
그렇게 아들이 되면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면, 더 이상 종이 아니기 때문에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아빠라고 인격적으로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동시에 하나님의 유업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유업이 뭘까요? 이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의미를 말하면서, 사도 바울은 아들 됨과 하나님의 유업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아들 됨과 성령을 통한 하나님 아버지와의 인격적인 교제와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에게 유산으로 물려주실 유업을 이야기 하고 있는데, 이것을 잘못 알게 되면, 개인적인 영성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사도 바울이 말하는 유업은 무엇인가? 아들 됨을 통해서 얻는 하나님의 유산,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들로 삼아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면서 정말 주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2. 이사야 60:1~14
이사야 60장 1절에 보면,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그랬습니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구원의 빛이요,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입니다. 갈라디아서 바울의 말씀과 다르지 않습니다. 죄에 빠져 있는 인간을 속량하고, 즉 구원하고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 하나님 나라의 유업의 자리에 서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동일한 맥락으로 말씀한 다음에, 좀 더 진전된 이야기를 합니다. 2절입니다.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그랬습니다. 어둠과 캄캄함은 그 당시 현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남의 나라의 침탈과 강점으로, 식민지로 있으면서, 그 당하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죄악으로 얼룩진 인간사회의 현실입니다. 우리 사회가 그것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바로 앞에 나오는 59장 9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정의가 우리에게서 멀고 공의가 우리에게 미치지 못한즉 우리가 빛을 바라나 어둠뿐이요 밝은 것을 바라나 캄캄한 가운데 행하므로” 11절입니다. “우리가 곰 같이 부르짖으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울며 정의를 바라나 없고 구원을 바라나 우리에게서 멀도다.” 그랬습니다.
정의와 공의가 사라진 어둠과 캄캄함, 그런 현실 속에서 그리스도는 빛으로 구원으로 생명으로, 정의와 공의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그 구원의 빛, 속량의 빛, 정의와 공의의 빛이 생명으로 올 것이기 때문에 민족아, 무리들아, 세상 모든 것들아 다 그분께로 나아오라, 그랬습니다. 주님께서도 예루살렘 입성 가운데 민중들이 소리치지 않으면 돌들이라도 소리칠 것이다 하셨습니다.
여러분 오늘 주신 갈라디아서 4장 1절과 2절에 가면,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를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었나니” 그랬습니다. 원래는 주권자였습니다. 원래는 모든 것의 주인이었으나, 그러나 너무 어려서, 그래서 종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아들의 영을 통해 즉 성령을 통해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주권자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바울이 말한 것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우리를 종의 자리에서 주인의 자리로 하나님의 아들의 자리로 신분을 옮기는 사건이고, 그 신분의 변화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보면 기독교의 본질이 되는 성탄의 의미를 통해서 우리 국민이 종이 아니라, 주인이라는 외침은 너무도 성서적입니다.
그런 주권자의 외침을 통해서 이사야 선지자가 말하는 정의, 공의, 생명, 평화, 구원, 해방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이전의 율법주의에서 주지 못하는 자유와 해방을 주는 사건으로 통찰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주인으로 등극되는, 그 주체성을 자각하는, 그래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뭐라고 합니까?
원래부터 유업을 이을 주인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주인 됨을 깨닫지 못해서 너무 어려서 종의 신분으로 살아갔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와서, 아들의 영을 주셔서 주인 됨을 깨우쳐 주시고 유업을 잇게 하셨습니다. 그 유업은 하나님 나라의 유업입니다. 주인이 마땅히 누리는 유업입니다. 종에게는 자유도 해방도 구원도 정의도 평화도 공의도 생명도 없습니다. 주인이 되면, 아들이 되면, 그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그 빛을 받았으니, 일어나 그 빛을 발하라, 그랬습니다. 빛을 받은 사람은 일어서야 합니다. 빛은 비추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고 할 때, 그 빛은 등잔 아래에 두기 위함이 아닙니다. 등잔 위에 올려서 빛을 환히 비추기 위함입니다. 그래야 빛의 존재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빛을 받았으니 그 빛을 일어나 비춰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 빛을 전해야 합니다. 종의 자리에서, 죄악 된 자리에서 속량 받아 주인의 자리로, 주권을 회복하는 자리로,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받는 자리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옮겨 주셨으니, 그런 믿음의 눈을 뜬 사람은 그 빛을 사람들에게 비추어서 다른 사람들도 노예로, 종으로 살지 않고 주인으로 당당하게 살게 해야 합니다. 그 빛을 믿는 자들이 하지 못하니까, 누가 외쳐요?
광장에서 많은 시민들이 외치는 것입니다.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그것이 바로 헌법 조문이고, 그것을 단순한 조문으로 두지 않고 살아있는 진리로 사람들의 가슴 속에 불을 지폈습니다. 빛을 발하는 것, 다른 사람들의 가슴 속에 불을 지피는 것,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탄생의 비밀입니다. 이것을 깨우쳐 가는 한, 기독교인은 핍박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지배자가 이것을 그냥 둘 수 있겠습니까? 그런 차원에서 기독교의 진리는 세상 지배 권력과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전략적으로 세상 지배력에 순응해야 할 상황이 생기기도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전략적인 차원입니다. 본래적 의미에서는 지배자가 함부로 지배하지 못하도록, 우리가 주인이고, 주인이 그들에게 나라의 살림을 청지기로 잠시 맡겼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런 주체의식이 성령의 역사처럼 들불처럼 번져갔습니다. 그래서 국민을 개돼지로 취급하던 오만한 지도자들이 달라진 것은 아니지만 놀랐습니다. 물론 본질은 여전합니다. 선거 전으로 돌입하면 옷을 바꿔 입고 나올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권자의 의식을 갖는 일입니다. 그 본질에 대해서 오늘 예수님의 탄생을 증언하는 마태복음에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3. 마태복음 2:1~14
2장 1절을 보면,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 나시매”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 때가 바로 헤롯왕이 통치하던 시대였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1절에서는 “헤롯왕 때에”라고 했고, 2절에서는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라고 했습니다. 헤롯왕이 유대인의 왕으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의 왕이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도 놀랍고, 그 왕이 탄생한다는 얘기를 듣고, 헤롯왕의 태도도 놀랍습니다.
이사야의 예언대로 이제 한 아기가 태어난 것뿐입니다. 그리고 자기는 현직의 왕으로 있습니다. 그 아이가 커서 왕이 되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그런데 헤롯왕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헤롯왕과 예루살렘이 그 소식을 듣고 소동했다고 했습니다. 난리가 났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속마음을 숨기고, 동방에서 온 박사들에게 나도 가서 경배할 터이니, 돌아올 때 태어난 곳을 알려 달라 했습니다.
모세가 태어날 때도 영아들을 학살하면서까지 권좌를 지키고 싶어 했고, 헤롯왕도 두 살 이하의 영아들을 학살해서 왕의 자리를 지키고 싶어 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꿈에 헤롯에게로 가지 말라고, 애굽으로 피신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권력의 중심지에서도 피신시키셨는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한 아기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 아기는 매우 중요합니다.
권력의 힘, 자본의 힘, 명예의 힘 등을 중시하는 사회에서 권력도, 자본도, 명예도 아무 것도 없는 한 아기를 보내 주셔서, 그 생명으로 하여금 새로운 세상을 열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세상을 이사야는 정의와 공평의 세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빛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세상 사람들에게 그 빛을 발하라, 그랬습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그 빛을 별빛을 따라 와서 아기 예수를 경배했습니다.
황금과 유향과 몰약은 임금에게 드리는 예물입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정의와 공평과 생명과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것을 종으로 있을 때는 얻지 못하지만, 주님의 은총으로 내가 주인이 되니 유업으로 얻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어찌 경배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우리는 이 세상의 변화와 성령의 흐름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런 놀라운 섭리가 어떻게 관철되고 있는지를 봅니다.
4. 결론
그래서 우리는 이사야 선지자의 외침처럼, 일어나 빛을 발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기자의 증언처럼, 동방박사가 임금에 준하는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리는, 말 그대로 우리의 왕으로, 우리의 주인으로, 아들의 영으로 우리를 아들 삼아 주시고 주인으로 일으켜 세워 주시고 정의와 공의의 나라를 주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분을 왕으로 모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탄에 우리가 해야 할 신앙고백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