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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벌레의 성지』(시산맥, 2022)
낮은 자세
민구식
용고새를 올리고 나면
한쪽 무릎을 꿇고
다른 한쪽은 세우고
용마루에서 소피를 하셨다
낮은 자세로 비는 것이라고
‘가장 높은 곳이지만
낮은 곳으로 가는 시작이 용마루 아니겄냐?‘ 하셨지
이엉들이 차분해지면
빗물도 잘 받아준다고 하시며
지붕이 건실해야
지붕 아래 것들도 착해지는 것이라고
경건하게
신과 대화를 하신 아버지의 자세로 인해
집안은 안녕해졌지
~~~
‘동물의 왕국’을 보다 보면, 호랑이 사자 등 맹수들은 새로운 곳으로 이동할 때마다 그곳에 배설물을 뿌려 자신의 영역을 표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시에서도 오랜 농경시대의 제의적 풍습이 재현되는 풍경을 만나니 우선 흥미롭다. 초가지붕에 이엉을 엮어 용마루를 얹고 나서, 그곳에 무릎꿇고 앉아 경건하게 소피를 보는 아버지 모습이, 아들 눈에는 신기하게 보였던가 보다.
"가장 높은 곳이지만/ 낮은 곳으로 가는 시작이/ 용마루 아니겄냐?“
집안을 든든히 건사해오던 아버지의 단순한 동작과 말씀이 아들의 눈과 귀에 번쩍, 천둥번갯불처럼 각인되었을 것이다. ‘용고새’, ‘용마루’, ‘이엉’ 등 어릴 적 친숙하던 단어들이 사라진 농촌 풍경은 지금 어떻게 변했는가. 초가지붕이나 농기구들은 민속박물관에나 가야 볼 수 있는 휘귀한 유물이 되고 말았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지붕이 건실해야 / 지붕 아랫것들도 착해진다"하시며 신과 묵묵히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어찌 보면 일견 단순한 행위 같지만, 신화적 주술적 의미로 따져보면 심오한 의식이 아닐 수 없다. 무릎 꿇고 천지신명께, 지난 한 해 동안의 농사에 감사드리듯, 소피를 내려놓는 모습은 밀레의 '만종'에 등장하는 부부의 경건한 모습과 겹쳐 보이기도 한다. 조왕신 성주신 등 집안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온갖 신들에게 부정타지 말고 안전하게 잘 지켜주십사, 간절히 드리는 기도야말로 가장으로서 가장 신성한 제의가 아닐 수 없다.
이 시에서 '지붕'은 가장을 의미하는 상징어라 할 수 있다. 민구식의 이번 시집에는 아버지의 애환에 얽힌 시들이 다수 등장한다. 「늙은 소」, 「아버지의 지게」, 「오일장을 벼리다」, 「충청도 남자」, 「늙은 동무」, 「연자방아 소」 등이다. 짚 등을 엮어서 이엉을 만들어 지붕을 튼튼히 덮는 일은 월동준비로 너나 없이 하던 세시풍속의 하나였는데, 지금은 까마득한 옛추억이 되어버렸다. 짚풀은 집안의 여러가지 농기구를 만드는 기본재료이기도 했으니, 농경문화의 맥이 도시화 정보화 첨단산업시대를 거치면서 어느 순간 갑자기 흔적을 감추고 말았다. 사라져가는 풍습들, 사라져가는 언어들 특히 향토색 짙은 토박이말 등은 멸종위기식물이나 희귀동물처럼 순식간에 소멸해가는 추세이다. 다시금 이런 토박이말을 새로이 부활시키는 것, 이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언어 파수꾼인 시인의 또 다른 소중한 소임인지도 모른다.
"오래전 고향 느티나무 아래
질마에 후리채가 묶인
눈 가린 소
느린 하루를 돌고 있습니다
당겨지는 고삐는 늘 재촉
평생을 벗어 놓지 못한 멍에
적당한 구속이 다행이었다는 자위를 포장하며
아버지의 공전 지름은 협소해져 갔습니다"
-「연자방아 소」 부분
고향의 말을 이어간다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되새기며 문화 유산의 뿌리를 든든히 다지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고향은 존재의 뿌리인 동시에 영혼과 정신의 자궁이기도 한 까닭이다. 향토색 짙은 시를 쓴 백석 같은 경우, 고향의 풍물과 세시풍속 생활도구 전통예절뿐만 아니라, 음식문화에 대한 각별한 애정도 잊지 않았다. 이 점에 있어서 『자벌레의 성지』는 다름 아닌 시인이 태어난 고향 하늘에서 몸소 체험한 자신의 거룩한 聖地라 아니할 수 없다. 경건하게 무릎꿇은 아버지의 행위가 신화의 무릎이 되고 오랜 역사 전통의 무릎이 되고, 문화예술을 튼실하게 일구어가는 정신문화의 무릎도 된다는 것, 이것도 이번 신작 시집의 귀중한 덕목이라 할 수 있으리라.
“바랑 하나 없이
삿갓 지팡이도 없이
푸른 몸 하나로 접었다 펴며
수직을 오른다
삼보일배
일보삼배
먼 길 빈틈없는 축지법
어느 성지에서 멈추려나
푸른 따라 하늘길 재는 척척“
-「자벌레의 성지」 부분
-나병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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