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법계품의 짜임
이제부터는 우리들도 함께 가야 하는 선재동자의 구법을 면밀하게 밝혀놓은「입법계품」의
전체 의미를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입법계품(入法界品)」이라는 품의 뜻을 하나하나 풀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들 입(入)'자, '법 법(法)'자, '지경 계(界)'자, '가지 품(品)'자, 입니다.
'법계에 들어가는 품'이라는 말입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우리들은 믿음을 좋아하고 따르려고 하지마는 현재는 미혹(迷惑)한 상태에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비록 중생으로서 새까맣게 미혹하고 있지마는 앞으로는 공부를 많이 하여
마음이 밝아져서 깨닫는다는 말입니다.
미혹으로부터 비로소 통달한다는 뜻입니다. 그리하여 중생의 세계에서 부처의 세계로,
불행에서 행복으로, 깜깜한 마음이 환한 마음으로,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실패에서 성공으로 '들어간다(入)'는 의미입니다.
'법계(法界)'는 간단하게 '법의 세계'입니다. 즉 진리의 세계인 것입니다.
진리의 세계는 다른 게 아니고 바로 '우주적인 나'인 것입니다.
온 우주와 혼연히 하나가 된 나의 몸이고 나의 마음인 것입니다. 또 본래로 나는 우주와
하나인 존재입니다.
그래서 '입(入).법계(法界)'라는 것은 본래로 이 우주와 하나인 내가 다시 개인과 사회 전체와
나아가 사물 하나하나에 통철해 들어가는 것입니다.
서로 시원하게 사무쳐서 아무런 걸림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망념으로써 분별하는것이 지혜의 작용으로 변해 가지고, 미혹에 속지 않고 그리하여
어디에도 의지함이 없는 그런 지혜의 경계를 요달하는 것이 법계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지혜라고 하는것, 깨달음이라고 하는것 자체는 어디에 매이고 의지하고 있지 않습니다.
고정되어 있지 않아서 지방마다 장소마다 두루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우리들의 지혜는 저 나무나 풀에도 대지나 허공에도 동쪽이나 서쪽에도 동양이나 서양에도
다 널리 들어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삼라만상 전부가 다 그대로
불가사의한 법이고 진리인 것입니다.
우리 몸에 있는 그 많고 많은 모공(毛孔) 하나하나마다 다 장엄한 불세계가 있고,
또 끝이 없고 그지없이 많고 많은 이 세상의 미진마다 다 부처가 있고 부처의 세계가 있고
진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지혜(智慧)와 범부(凡夫)로 따로따로 떼어놓을 것도 없이 한 몸입니다.
늘 들어 왔듯이『화엄경』에서는 '이것이 진리이고 저것은 진리가 아니다' 하는 그런
분별이 없습니다. 이것과 저것으로 분별할 것이 없으므로 상입(相入)해 있는것입니다.
서로서로 들어가 있습니다. 상즉상입(相卽相入)입니다.
'땅'하고 주먹으로 내 책상을 내리치면 그것에 따라서 온 우주 법계가 흔들리고 진동이
퍼져 갑니다. 아니 '땅'이라는 소리를 만들어 낼 것도 없습니다.
마음 한 번 움직이면 그것 따라 온 우주를 들었다 내렸다 할수 가 있습니다.
내가 미세하기로 미진에 통하고 거대하기로는 우주와 사무쳐 대소(大小)의 소견이 없어집니다.
이 경지가 되는 것이 '법계에 들어가는 것', 입(入).법계(法界)인 것입니다.
그 동안 우리들은 불완전한 우리의 육안(肉眼)으로 보고 듣고 내 인식의 한계에 의지하여
뭔가 발버둥친 것이지마는 여기에 의지하지 말라는것입니다.
이것을 놓아야만 비로소 법계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품(品)'은 경전에서 같은 내용끼리 한데 묶어놓은 부분을 말하는 것인데 요즈음의 장(章)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대체로 양이 많을 때에는 품이라고 하고 글의 길이가 짧을 때에는 분(分)
이라고 합니다. 그래서『화엄경』이나『법화경』에서는 글의 내용에 따라 품(品)으로
구분지었고『금강경』같이 단순한 경전에서는 분(分)으로 나누어 놓았습니다.
그러므로「입(入).법(法).계(界).품(品)」이란 '진리의 세계인 법계로 들어가는 것을
밝혀놓은 경문'이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이렇게 경전의 제목 뿐만 아니라 품의 제목에서도 경문의 내용을 다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화엄경』에서 우리들의 마음의 세계와 우주 법계의 진리를 남김없이
설하였지만 안심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화엄경』의 도리는 너무나도 깊고 넓어서
우리들 인간의 사변으로는 미치지 못하는 불가사의한 경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입법계품」에서는 선재동자라는 구체적인 인물을 내세워서 우리들이 이해하기
쉽게 하도록 해 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화엄경』제 1품부터 38품까지가 성불할 수 있는 이론적인 배경이었다면
제 39품인 이「 입법계품 은 그 이론에 따라 선재라는 한 중생이 실제로 성불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제 1품에서 38품까지에서는 성불의 이론을 배웠으니까 지금부터는 실제로 선재라는
한 동자의 구도의 길을 따라가 보도록 합시다."하고 하며 선재동자를 주인공으로 하여
한 편의 영화를 만들어서 우리들의 눈 앞에 보여주는 격이 된다고 하겠습니다.
오늘날의 학술 모임에서도 이런 예를 많이 따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론적 배경을 먼저 설명한 다음 그 이론에 따라서 드라마로 꾸민다든지 하여 영상으로
재현하여 선명하게 이해시켜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선재동자 하면 항상 떠올려지는 제 53선지식(善知識)입니다.
이 53선지식은 다른 게 아닙니다. 바로 보살이 수행해 가는 계위인 십신(十信),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廻向), 십지(十地), 등각(等覺), 묘각(妙覺),의 대승 52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실제로 선재동자가 만나게 되는 선지식은 모두 55처소의 55인입니다.
이 중에서 문수보살은 두 번 만나게 되고, 44번 째의 변우동자(변友童子)는 법문은 거의
하지 않고 다른 선지식을 소개해 주는 역할만 합니다. 그리고 51번과 52번째의 선지식인
덕생동자(德生童子)와 유덕동녀(有德童女)는 언제나 함께 있기 때문에 한 선지식으로 봅니다.
이렇게 헤아려 보면 선재동자가 만나서 법을 얻게 되는 선지식은 모두 52인이 됩니다.
그리하여 52명의 한 사람 한 사람 선지식을 모두 대승 52위에다가 각각 배대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화엄경』전체 40품 중 보살의 성불을 설명하는 2품에서 38품까지도 대승 52위에
낱낱 배당시킬 수가 있고, 또 선재동자가 만나는 53선지식도 대승 52위를 나타내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불교 경전은 내용뿐만 아니라 형식과 품의 배열도 아주 치밀하게 조직되어
있습니다. 이런 불교적인 지식을 알고 있으면 경을 보는 재미가 훨씬 더 큽니다.
사람은 아는 만큼 느끼게 되고 또 실천할 수도 있습니다.
선재동자는 법을 구하기 위하여 한없이 남행을 합니다.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멈추지 않고 전진만을 합니다. 끝없이 솟아나는 선재동자의
법을 향한 열정을 생각해 보면 우리들이 배워야 할 많은 교훈이 있습니다.
이 중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으로 두 가지를 들겠습니다.
먼저 우리들이 선재동자부터 배울 점은 '선지식(善知識)에 대한 차별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선재동자는 53선지식(善知識)의 처소를 낱낱이 찾아가 법을 구합니다.
그러는 데에 있어서 반드시 훌륭한 분들만 방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대개 많이 배운 사람이나 인품이 훌륭한 사람, 또 널리 소문이 난 사람을
선지식이나 스승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선재동자는 스승을 구하는 데에 있어서 이러한
차별심을 조금도 가지지 않습니다.
53선지식을 일별해 보면 경전상에 나타나는 뛰어난 보살들도 있고 신神들도 있으며
비구,비구니, 장자, 우바이, 왕과 같이 인품이 훌륭한 사람들이 물론 많습니다만
불법(佛法)을 닦지 않는 바라문이나 외도들, 그다지 귀한 일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뱃사공도 있고 심지어는 직업 여성도 등장합니다.
각양각색의 선지식들이 등장하여 그 나름대로의 법을 선재동자에게 베풀어 줍니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사람들이 더 생생한 지식을 던져줄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어떠한 일이든 한 가지 일에 몰두한 사람은 그것을 통해서 진리를 맛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어떠한 위치에 있든 모든 사람들은 남의 스승이 될 수 있습니다.
또 더 눈을 크게 뜨고 보면 누구에게서나 본받을 점이 있습니다.
공자(孔子)님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子曰, 三人行에 必有我師焉이니 擇基善者而從之오 其不善者而改之니라.
세 사람이 가매 거기에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으니 그의 착한 점을 골라서 따를것이요,
착하지 못한 점은 반드시 가리어서 고쳐 나갈 것이다." -『논어(論語)』-
아무리 위대하고 훌륭한 사람이 곁에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그 사람의 위대한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더 이상 위대하고 훌륭한 사람이 아닙니다.
반대로 남들은 어느 사람에게서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다 하더라도 내가 그 사람으로부터
그 사람의 장점을 발견하고 배우고 있다면 그 사람은 나에게는 훌륭한 스승이 됩니다.
이렇게 널리 선지식을 구할 줄 아는 열려 있는 마음과 안목을 길러가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러면 그 누구라도 내 스승이 될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악한 행위를 하는
사람도 스승이 됩니다. 이러한 사람을 역행보살(逆行菩薩)이라고 합니다.
" 아, 나는 저렇게 하지 않아야 겠다. 저렇게 사는것은 옳은 행동이 아니야."
이렇게 해서 나를 비추어 주는 거울이 됩니다. 선량하게 사는 사람은 모범적이니까
나의 최고의 스승이 되고, 거슬리는 행동을 하는 사람은 나를 돌아보게 하니까 또 나를
제어해 주는 스승이 되는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스승은 도처에 있습니다. 모든 나무들이 지쳐서 잎을 다 떨구고 앙상하게
떨고 있을 때에도 푸른 잎을 간직하고서 세찬 바람을 이겨내며 꿋꿋이 서 있는
낙락장송에게서는 말할 수 없는 절개와 의지를 배울 수가 있고, 또 매순간 흘러 내리는
물가에서 굳건하게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견고한 바위로부터는 흔들림없는 신심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 또 바람부는 대로 애착없이 떠도는 구름으로부터는 인연의 도리를
배울 수가 있을 것이며, 길 가에 이름없이 피어나 말없이 꽃을 피웠다가 소리없이 지는
저 들꽃에서는 겸손과 자족을 배울 수가 있을 것입니다.
가슴을 열고 보면 이렇게 만물은 나를 깨우쳐 주는 훌륭한 스승입니다.
이렇게 열린 마음과 깨어있는 눈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의 자세는 매우 바람직합니다.
선재동자는 바로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스승을 찾아가기 때문에 불법을 공부하는 우리
불자들이 "선재동자, 선재동자"하면서 찬탄하는 것입니다.
옛날 중국의 요순시대 이후에 문왕(文王)이라는 성인(聖人)과 주공이라는 재상이 있었습니다.
이 두 분을 문무.주공이라고도 하는데, 주공도 또한 재상의 지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인(聖人)으로 추앙을 받는 분입니다.
제상으로 있을 때 자기에게 자기에게 조언을 해 주러 사람이 오면, 그 누가 오든지 간에
다 반갑게 맞이하여 주었습니다. 낯모르는 사람이든지 어린 아이든지 노인이든지
불학무식한 사람이든지 간에 전혀 개의치 아니하고 언제든지 달려나가 맞이하였습니다.
"일욕 삼악발(一浴三握髮) 일식 삼포토(一食三哺土)" 한 번 목욕하는데 세 번이나
젖은 머리를 들고 나가서 사람을 맞이하고, 또 한 번 식사하는데 세 번 토하고 나가서
손님을 맞이하였다는 뜻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머리가 길었잖습니까.
목욕을 하고 있다가도 "손님이왔습니다." 하면 하던 목욕을 다 마치지 않고 머리가
젖어있는 채로 나가서 조언을 들었다고 합니다.
이런 일이 한 번 목욕하는데 세 번이나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 같으면 "지금 목욕하고 있으니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조언하려 온 사람에 대한 예의가 그런 것이 아니다." 하여 재상의 자리에 있는 사람이
목욕을 하다가도 달려 나가고 이렇게 하기를 무려 세 번이나 번복하였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식사를 하다가도 "손님이 왔습니다." 라는 말소리가 들리면 입 안에 있던
음식을 삼킬 여유가 없어서 음식을 뱉고 나가서 조언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또 세 번이나 거듭하여 손님에 대한 예의를 다하였다는 고사로 우리들에게 큰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그런 정도로 마음이 진실로 열려 있기 때문에 가히 성인(聖人)이라고
숭상받을 수 있다고 봅니다.
이와 같이 바깥 사물에 대해서 분별심과 차별심을 버리고 누구에게서나 좋은 점을 발견해
낸다면 우리들도 어느 새 선재동자가 되어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스승에 대한 분별심을 가지지 안는다'는 선재동자의 두드러진 특색 다음으로
빼 놓을 수 없는 좋은 태도는 바로 '불굴의 의지'입니다.
선재동자는 법을 구함에 있어서 결코 물러서거나 나태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우리들은 한두 가지 경전을 공부하였다든지, 또는 한두 해 신심을 내고 난 뒤에는
대개 시들해지고 맙니다. '이쯤하면 되었다. 요만큼 한 것도 어딘데...'하는 심정에서
스스로 만족해 하고 더 이상 노력을 잘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선재동자는 그러하지 않았습니다. 어떠한 선지식을 만나든지 어떠한 법을
얻게 되든지 간에 결코 주저하지 않고 물러서지 않고, 불퇴(不退)하는 용맹심으로 정진하여
성불(成佛)이라는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선재동자는 기나긴 세월 동안 별의별 처소에서 온갖 고비를 넘기지마는 한 번도 신심이
떨어지거나 해태심을 내거나 물러서지를 아니하였습니다.
어려움이 계속 닥칠 때마다 신심이 왜 떨어지지 않았겠습니까마는 스스로 채찍을 가하고
또 용기를 갖고 자기 자신을 일으켜 세워 앞으로 앞으로 게속 나아갔습니다.
심지어는 마지막에 만난 미륵보살이 손가락을 한 번 튕기는 소리에 많은 선지식의 처소에서
낱낱이 닦은 온갖 법을 깡그리 잊어 버리게 되는 일이 생겼습니다.
"저는 아무 것도 기억해 낼 수가 없습니다. 어이하면 좋겠습니까?"
"그래, 무슨 다른 방도가 있겠느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수밖에 없지."
이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듣고 나서도 선재동자는 조금도 낙방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법을 구하기 위하여 맨 처음의 선지식인 문수보살을 만나려고 장엄한 발걸음을
내디뎠습니다. 그 험난한 구법의 길을 다시 떠나려고 한 것입니다. 이 엄청난 이야기는
진중하게 살아가지 못하는 오늘의 우리들에게 얼마나 많은 교훈을 주는 것인지 모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나의 인생이라고 하는 작품을 다듬어 가는 데에 있어서 이만한 노력과
끈질긴 추구심과 물러나지 않은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수많은 생명 가운데에서
가장 고급스런 사람이라는 생명을 받아 가지고 나온 이 공덕을 생각해 보면 조그만 장애에
결코 쓰러질 수가 없습니다. '나의 인생'이라는 작품을 걸작(傑作)으로 다듬어 갈 결심을
하였다면 그것을 성공시키기 위하여 끝까지 실천하여야 합니다.
우리들은 그것을 해낼 수 있는 능력이 분명히 있습니다.
누구라도 처음에는 마음먹은 것을 대개 잘 합니다.
처음 학교에 들어가 공부할 때에는 별로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꾼준히 하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따라서 그 결과가 판이하게 나타납니다.
사업 벌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일이 책에 씌여져 있는 것처럼 쉬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나는 이 사업을 반드시 성공시켜야겠다.'고 마음을 단단히 먹으면 신기하게도
방해되는 일이 비켜갑니다.
그리하여 어느 순간, 성공의 정상에 서 있는 자기 자신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딴마음을 품지 않고 일심으로 노력하였을 때에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퇴굴하지 않는 마음으로 법을 구하는 선재동자로부터 이 사실을 깊이
배워야겠습니다.
모든 일은 노력과 끈기입니다.
정성 앞에서는 무쇠도 녹는다고 하였습니다.
날마다 날마다 부처님 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