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산 구곡빙폭/폭포 위에 반짝이던 두 개의 담뱃불
글·사진 손재식 사진작가 (sohnbal@orgio.net)
▲ 구곡폭포는 높이 70m에 달하지만 매년 경사도와 높이가 달라진다.
주머니 속을 뒤져보니 비비 틀린 은하수 담배 두가치가 손에 잡힌다.
밤하늘엔 수없이 많은 별들이 우리의 등정을 축하나 해주는 듯이 반짝일 때 폭포 위엔 두 개의 반짝이는 담배 불이 보였으리라…’
1975년 2월 8일 일본 산악인 하다께야먀 산시로와 함께 구곡빙폭을 초등한 김재근 씨는 위와 같이 등반에 성공한 소감을 75~76년도 한국산악회 연보에 적고 있다.
보고서의 글엔 감정이 극히 절제되고 있는데 그것이 ‘모 아니면 도’를 느끼게 하는 그의 강직한 성품에서 오는 것만은 결코 아닐 것이리라.
말이란 때때로 느낌의 방해물이 될 수 있다. 고된 등반을 해본 사람이라면 그 비비 틀린 담배가 주는 감동의 무게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아주 어려운 일을 성취하는 과정에서 산 친구가 옆에 있다면 그 것은 대단한 행복이 아닐 수 없는데, 김재근은 그런 점에서 행운의 사나이라 할 수 있다.
그 순간을 함께 나눌 친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 아래는 그의 등반을 마치 자기 일처럼 생각하고 지원하던 산악회 회원들이 있었으니 더욱 그렇다.
마음 놓고 등반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여럿의 결집된 힘이 바탕이 된 것이 물론이다.
구곡빙폭의 초등반은 그래서 김재근 씨의 영광이자 어쎈트산악회의 성공이었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
그때의 기억을 그냥 전설로만 둘 수 없는 전완근 씨와 이정환 씨 또한 오늘 구곡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대수롭지 않은 일로 여길 수 없다.
김재근·산시로가 75년 2월 초등반
“밥들 먹었어?”
후배인 정환 씨보다 당연히 늦게 와도 당당할 수 있는 선배 전완근은 말한다.
“아니, 아직도 아침 밥 먹나요? 난 내가 해먹고 다녀…”
일요일도 아닌 날 산에 가려면 마누라 눈치도 봐야 하는데 아직도 선배를 무서워하기에는 정환 씨도 만만한 나이가 아니다.
오래된 포도주처럼 묵은 정이 쌓인 두 사람이지만 이정환 씨는 옛 선배들의 카리스마를 아직 똑똑히 기억하는 세대이기도 하다.
오늘 구곡빙폭의 등반에 불려나온 전완근은 1975년도 이 빙폭을 초등반할 때 대학 4학년으로 팀의 막내격이었다.
어쎈트는 당시 이 등반을 마치 원정등반처럼 준비했다. 대장은 함탁영 씨였고 전병구·김재근·김인식·진경용·전완근·민병국 씨가 대원으로 참가했다.
그리고 모래내 금강 장비점의 김수길 씨와 경희대 산악회 OB인 이영종 씨도 함께 현장에 있었다. 히로시마 산악회의 하다께야먀 산시로는 김재근 씨와 함께 공격조 A파티를 이루었고 전병구씨와 전완근 씨는 B파티 대원이 되었다.
1975년 2월 9일 아침.
영하 12도의 쾌청한 날씨에 김재근 씨의 선등으로 구곡빙폭의 등반이 시작되었다.
전날 오후에 이미 준비해온 아이젠과 새로 도입한 사레와 아이스하켄의 성능 테스트는 물론 빙질의 상태를 점검한 후였다. 지난주보다 고드름이 많이 생겼지만 넉넉한 아이스하켄과 장비로 인해 불안감은 없었다고 해야겠다.
등반은 정확히 10시 30분에 시작하여 완경사 10m를 포함한 하단부 38m의 빙벽을 오르는데 4시간 45분이 걸렸다.
그곳까지 10개의 아이스하켄과 모래내 금강의 ‘ㄱ’자형 하켄 그리고 프런트포인팅 기술이 동원된 결과였다. 첫 마디를 끊은 그 곳은 두께가 20~30cm의 고드름에 묻힌 동굴이었다.
오후 3시 15분 고드름을 깨내고 동굴에 들어간 두 사람은 알파미와 보온병에 담아온 커피로 행복한 점심식사를 한다.
그리고 오후 3시 30분부터 다시 등반을 시작하여 레더를 이용해 수직벽을 돌파하는 도중 갑자기 김재근 씨의 왼손에 경련이 일어났다.
그는 다시 후퇴하여 홀 안으로 들어왔으나 이번엔 오른손이 꼬이기 시작했다. 두 팔이 마비된 상태로는 선등이 무리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상단은 산시로가 선등을 이어받았다.
산시로는 상단의 급경사 부분을 2시간 30분 만에 끝내고 오후 6시 25분에 정상에 섰다. 그리고 김재근 씨가 그 뒤를 이어 정상에 선 시각은 7시 15분이었다.
두 사람이 오른쪽 능선을 넘어 폭포 아래에 도착했을 때는 완전히 어두워진 밤이 되었고 다음날 새벽에야 서울로 돌아올 수 있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구곡폭포 아래에는 가겟집 한 가구만 있었고 등반을 하러 온 산악인도 만나기 쉽지 않았다.
지금처럼 선등자가 떨어뜨리는 낙빙을 아랑곳 하지 않고 바로 뒤이어 오를 만큼 많은 산악인들이 몰려든 것은 80년대 이후에 생긴 풍경이다.
▲ 초등반 때와 달리 마치 총탄 세례를 받은 듯한 폭포의 상단을 오르는 이정환 씨.
초등 때처럼 동굴에서 점심 해결
오늘은 바람이 세차게 불 뿐만 아니라 야영 팀이 오기 전이어서 주차장엔 사람들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날씨는 만족스럽지 않더라도 시간은 잘 잡은 셈이다. 그런데 발랄하게 생긴 아가씨가 차에서 내리더니 정환 씨에게 꾸벅 인사를 한다.
지원차 합류한 한미나 씨다. 그는 홈페이지를 보고 제발로 굴러들어온 1년생 어쎈트 회원이다. 알고 보니 정환 씨도 그 옛날 <산>지의 광고를 보고 입회했었다.
굳이 따지자면 두 사람은 공채로 산악회에 입회한 선후배 지간이 되는 셈이다.
“인터넷 산악회를 찾아갔었는데 위험을 느꼈어요. 그래서 전통 있는 산악회를 찾았지요.
여기서는 솔직히 목숨 맡기고 해요.”
그녀의 말로 미루어 사전에 미리 정보를 분석하는 생활이 몸에 익은 세대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제는 산에 푹 빠져 들어가고 있음이 감지된다.
“어디로 가지?”
“왼쪽으로 곧장 올라갈까?”
“아니 오른쪽으로 갑시다. 그래서 29년 전 초등반 때처럼 저 동굴에 가서 점심 먹고 계속 등반하지요.”
오늘의 등반대장은 이정환. 세컨은 전완근 씨다. 신형 무기로 무장한 몸집 굵은 정환 씨가 먼저 느릿느릿 오른다.
산전수전 겪은 산꾼에게서 볼 수 있는 몸놀림이다. 완경사를 10여m 오른 후 스나그를 한 개 박는다.
“따악 따악 따악….”
돌리기만 하면 쉽고 든든히 박혀버리는 스크류 대신 오늘은 스나그가 참 잘 울린다.
동굴에 올라선 후에 썩어서 흔들리는 오래된 나이프 하켄에 확보하고 고드름에도 슬링을 감은 뒤 스크류 하나를 또 박는다. 뒤이어 오르는 전완근 씨의 발걸음이 약간은 싱겁다는 듯 가볍다.
빙벽에선 매번 초등반이 이루어진다. 같은 방향으로 흘러내리는 물일지라도 전년도와 똑같이 얼음이 얼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완근 씨 역시 당시의 동굴의 위치를 정학하게 가늠하지 못한다. 늑골 부상으로 오늘 현장에 참석하지 못한 김재근 씨가 왔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동굴에 올라 미나 씨가 메고 온 보따리를 풀자 빵, 치즈, 커피 등이 나온다. 씹고 마시고 하는 동작이 선 채로 이루어지니 점심시간은 금세 끝나고 만다.
초등 당시 고드름을 깨고 그 안에 들어 앉아 하이커들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흡연을 즐기는 맛이 클라이머들만의 특전이라 생각했던 김재근 씨처럼 정환 씨도 동굴에 몸을 숨겼다가 다시 빠져나와 고드름을 헤치고 오른다.
초등반 때는 아직 누구도 찍지 않은 반반한 얼음이었겠지만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발길과 바일에 찍힌 지금의 폭포는 마치 총탄 세례를 받은 듯하다.
등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기 위해서 다시 내려오니 우리와 같이 호젓한 시간을 찾아서 온 사람이 또 빙벽에 붙었다.
나리뫼산악회의 김종수 씨다. 50을 넘긴 나이인데도 그는 아직도 여전히 선등으로 오른다. 촬영을 위해 그의 줄을 이용하여 새치기 하는 도움을 받는다.
그러나 전완근 씨는 이미 정상에 선 후여서 촬영을 끝내야 했다. 가급적이면 연출을 피하려는 생각이 현장에 오면 항상 생긴다.
다시 한미나 씨의 등반을 촬영하기 위해 거꾸로 하강을 하여 내려가니 언제 왔느냐고 놀란다. 아직 힘이 부족하지만 아이스바일의 감각을 나름대로 익혀가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녀와 속도를 같이 하며 정상에 오르자 미친 듯이 불어대는 회오리바람이 거짓말 같이 사라졌다. 자일을 사리는 전완근 씨와 이정환 씨의 등 뒤로 봄을 예고하는 햇빛이 눈부시게 비친다.
나름의 가치 있는 고전등반과 현대등반
초등반 때 전완근은 선배인 김재근 씨의 등반을 보며 뒤따라 오르고 싶은 욕구가 강하게 일어났었다.
그는 김완덕·최영식·박남식 등과 함께 내설악의 12선녀탕에서 흑선동·수렴동·용아장성 그리고 대청봉·죽음의 계곡·공룡능선을 이어 천화대로 내려오는 16박 17일의 긴 동계등반을 하는 과정에서 모닥불에 비브람을 태워 먹은 상태였다.
그래서 오르고 싶은 욕구가 더 일어났는지도 모른다. 오늘처럼 그가 이곳을 가볍게 올랐다고 할지라도 당시에 가졌던 욕구가 해소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어쩌면 그런 이루어지지 않는 바람이 계속 꿈을 꾸게 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하는 것일 게다.
빙벽등반은 암벽등반과 달리 도구의 예술이다.
암벽은 맨손으로도 오를 수 있지만 빙벽은 맨손만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빙벽등반 기술은 도구의 발전과 그 궤를 같이 한다.
김재근과 산시로가 오전 10시 30분에 등반을 시작하여 8시간 45분 만에 등반을 완료한 것도 새로운 확보물과 아이스바일 그리고 프런트포인팅 기술의 합작이라 할 수 있다. 당시엔 이 등반이 획기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오늘처럼 네 사람이 천천히 올라도 3시간 만에 등반이 끝나며 신장비와 기술로 무장한 톱 클라이머들은 이 70m의 얼음 폭포를 단 몇 분에도 오를 수 있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점점 더 센 자극이 필요하듯이 현대의 등반은 그저 주력(酒力)과 폼만으로는 해볼 도리가 없는 곳까지 왔다. 당연한 발전이고 가야할 길이 틀림없다. 그러나 경쟁과 상업 논리에 소모품화 되어가는 작금의 문화를 등반에 비추어 볼 때 지나온 과거를 한번 돌아볼 필요를 느끼게 한다.
영국의 유명한 팝페라 가수 사라 브라이트만은 클래식과 팝페라가 갖는 장르간의 차이를 비유하면서 훌륭한 음악과 아름다운 음악에는 장벽이 없다고 했다. 그의 예술관에 대입하면 고전적인 등반과 발전된 현대등반은 하나가 하나를 무너뜨리는 게 아니라 나름대로 존재 가치를 잃지 않는다고 믿게 만든다.
그래서 신장비와 신기술로 날듯이 오르지 못하는 클라이머들도 행복지수는 낮지 않은 것일까.
불어오는 바람에게도 고마움을 느낄 수 있는데…. 오늘날의 클라이머들에게 누구보다 일찍 장을 열어준 김재근 씨와 산시로 그리고 어쎈트 회원들의 열정을 다시 한 번 기억해 두어야겠다.
▲ 구곡폭포 아래에 선 어쎈트 회원들. 왼쪽부터 이정환, 한미나, 전완근 씨.
[ 출처 : 월간mountain ]
첫댓글 뭉테기로 떨어지는 낙빙이 위험하쥬
목숨걸고 오르는 분들께 존경이~^-^
ㅋㅋ
한빨데기!
떨어지는기 더위험해유~~
행복한 명절 맞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