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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에 도착한 날, 하늘의 색은 어두웠다. 청명한 파란색은 아니더라도 어둡지만은 않기를 바랐던 마음이 조금 시무룩해졌다. 완도의 바다를 보기 전까지.
그날, 흐린 하늘을 대신해 바다가 그 색을 담았다. 완도의 바다를 본 순간 사랑했던 이가 생각났다. 낯선 그곳에서 나는 그리움을 보았다.
완도, 익숙하지만 낯선 이름
이른 새벽 용산역에서 기차에 몸을 실었다. 두 시간 남짓 달려 눈 내리는 광주송정역에 도착했다. 흐린 하늘은 금세 하얀 눈을 뿌려댔다.
남쪽이라 따뜻한 날씨를 기대했건만 ‘완전 꽝이로구나’라고 생각하며 역 앞으로 나섰다. 이미 대동문화재단 조상열 박사와 허경화 국장이 도착해 함께 온 투어 일행을 맞이했다.
광주 송정역에서 완도까지는 차로 약 2시간 거리. 창 밖을 보며 눈 내리는 전라남도를 바라보았다. 전라남도 완도. 누구나 들어봤지만 의외로 한 번도 안 가본 사람이 많은 곳이다.
특산품은 김과 미역이고 하늘빛을 닮은 바다로 유명한. 일명 ‘섬의 고장’으로 265개의 크고 작은 섬들이 모여 이룬 다도해의 중심이라 불린다.
‘완도’라는 이름은 무슨 뜻일지 문득 궁금해졌다. “완도” 입술이 웃는 모양으로 시작해서 동그란 모양으로 끝난다.
그래서일까? 청해진이 해체된 이후 벽골군으로 강제 이주된 유민들이 고향을 생각하면 웃음이 절로 나오는 섬이라 해서 ‘빙그레 웃을 완(莞)’을 써서 완도라 했다는 설이 있다.
이외에도 초목이 무성하여 왕골이 우거진듯해 ‘왕골 완(莞)’자를 써서 혹은 궁원 재목을 생산하는 국원이라 해서 원(苑)도가 다시 완도로 바뀌었다는 등 이름에 따른 이야기가 많다.
삼국사기에서도 완도를 조음 섬(助音島: 좋은 섬)이라 명명한 것을 보면 살기 좋은 곳임은 틀림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 서린 버스 창을 소매로 닦고 보니 어느새 눈이 그치고 흐린 하늘에 이따금 찬바람만 불었다.
TV 속으로, 청해포구 촬영장
청해포구가 한번에 내려다 보이는 촬영장 전경
멈춘 눈과 함께 버스도 멈추었다. 버스에 내려서 본 하늘은 여전히 흐렸지만 처음보단 애정이 갔다. 아마도 눈 앞에 펼쳐진 촬영장의 초가지붕과 청해포구의 앞바다 덕분이리라.
청해포구 촬영장은 드라마 <해신>, <주몽>, <태왕사신기> 등은 물론이고 <해적: 바다로 간 산적>, <명량> 등 유명한 영화들의 촬영지다. 입장료는 저렴하다. 성인기준 5,000원. 청소년과 군인, 국가유공자는 3,000원이고 어린이와 경로는 각각 2,000원과 4,000원이다.
단순한 촬영지를 넘어 교육과 체험에 도움이 될 만한 요소도 많다. 1만여 년 전 화석으로 변한 규화목이라던가, 각종 수목과 분재, 기암석 등을 배치하여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뿐만 아니라 한쪽엔 전통 놀이 체험 공간을 만들어 놓았다. 널뛰기와 투호, 제기들이 관광객들의 흥미를 끈다. 잠시 한눈을 판 사이 ‘깔깔’ 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리길래 돌아보니 이미 한참이나 커버린 소녀들이 널을 뛰고 있었다. 찬바람도 녹일 훈훈한 소음이라 인상 한번 쓰지 않고 듣고 있었다.
어른들을 소녀로 돌려놓은 널뛰기
왠지 모르게 정겨운 초가지붕
에메랄드 빛 바다가 눈을 사로잡는다.
초가지붕들이 즐비한 저잣거리 앞으로 청해포구가 보인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정말이지 에메랄드 빛 바다였다. 어두운 하늘도 가리지 못한 물색과 전통가옥이 어우러진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니 어쩐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 이 촬영장의 돌담이나 가옥들은 옛날 모습들은 재현해 논 것이지만 청해포구의 지금의 바다는 옛날의 그 바다였으니 말이다.
자갈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를 먼 시절 사람들도 똑같이 들었으리라. 그리고 앞으로도 먼 시대의 사람도 들으리라. 적당한 사색으로 바다를 눈에 담고 온 길을 되짚어 본영으로 향했다. 들어가는 입구부터 마치 타임슬립을 하는 느낌이었다. 각종 촬영을 위해 만든 건물들이지만 당시의 모습을 고스란히 옮겨 놓은 듯했다.
본영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바라본 촬영장
안쪽으로 들어가니 건물을 끼고 작은 연못이 있다. 금붕어들과 잉어들이 사이 좋게 유영을 즐기는 모습이 운치를 더한다. 다시 한번 아까의 그 정겨운 소음이 들린다. 연못 안의 그릇에 동전을 던지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한 사람이 먼저 던지고 실패. 다음 사람이 이어 던지고 실패. 세 번째 사람이 마침내 성공했다. 어린애처럼 손을 올리고 만세를 한다. 여행은 어른도 아이로 만드는 신기한 힘이 있다.
문득 동전 던지기를 하는 어른을 비추는 연못이 젊어지는 샘처럼 보인 건 착각 일테지. 일행에서 잠시 떨어져 나와 촬영장을 둘러싼 산책로를 걸었다. 나의 오른편으로 앙상한 가지들 사이로 바다가 보였다.
지금을 언젠가 겪어본 기분이 들었다. 데자뷰 현상이겠지만 오래전 모습을 재현한 곳에 와있으니 ‘혹시 내 전생은 완도에서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재미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낯선 이곳이 왠지 그리운 기분이 됐다.
고산 윤선도의 흔적을 따라, 보길도
보길도가 눈앞에 보인다.
청해포구 촬영장을 나오니 배가 고파졌다. 음식하면 남도 음식이라는데 아침을 굶고 오길 잘했다. 소박한 간판이 맛집의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완도 특산품 김부터 집밥 같은 밑반찬과 빼놓을 수 없는 떡갈비. 남도의 맛은 별거 아닌 찬들이 별미가 되는 거다. 배가 차면 추위가 기우나니, 바람의 온도가 아까와 다르게 느껴졌다.
한국인은 역시 밥심이다. 아니 반주의 힘인가? 뭐가 됐든 다시 여정을 할 기운을 얻었으니 된 거다. “여러분, 보길도 하면 뭐가 생각나시나요?” 대동문화재단 조상열 박사가 질문을 던졌다. 대답하지 않아도 모두들 ‘고산 윤선도’ 선생을 떠올렸을 것이다.
보길도는 아름다운 자연경관으로 유명하다. 그 절경이 1636년 병자호란 때 제주도로 향하던 고산의 발걸음을 한참을 붙잡았던 모양이다. 지금도 해상국립공원이라 함부로 건물을 증축할 수 없다고 한다.
현재 약 2500명 정도가 거주하는 보길도 곳곳에 묻은 고산 선생의 흔적을 살피기 위해 승선했다. 사실 날씨가 좋지 않아 배가 뜰지 미지수였으나 거짓말처럼 바람이 잔잔해지고 구름 사이로 햇빛이 들기 시작했다. 보길도가 고맙게도 나를 허락 하나보다.
조그마한 보길도 동천항에 내려 곧장 세연정으로 향했다. 고산 선생은 부용동의 자연에 취해 연못을 파고 세연정을 세웠다. 그가 쓴 <보길도지>에 따르면 ‘지형이 마치 연꽃 봉오리가 터지 피는 듯하여 부용이라 이름했다’고 적혀있다. 그 연꽃 같은 형세가 불후의 작품인 <어부사시사>를 탄생시켰다.
수국에 가을이 드니 고기마저 살쪘어라
닻들어라 닻들어라
만경창파에 마음껏 놀아보자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인간을 돌아보니 멀수록 더욱 좋다
-윤선도 어부사시사 중-
‘인간을 돌아보니 멀수록 좋다’는 구절은 그의 삶을 대변하는 것이라. 고산 선생은 특별한 스승 없이 아버지께 학문을 배우고 독서로 교양을 쌓아 벼슬길에 올랐지만 한평생을 유배와 은둔 출사, 귀양을 반복하며 살았다.
그런 선생의 고단했던 삶을 위로하고 마지막 순간을 보낸 곳, 그리고 정치인, 투사, 학자 등 그를 지칭하는 말을 많지만 가장 어울리는 ‘시인’이란 칭호를 붙게 만든 곳 역시 보길도였다.
고산 윤선도 선생이 연못까지 만들었던 보길 윤선도 원림으로 들어가 나도 인간과 멀어져 보기로 했다. 잘 정돈된 길을 따라 걸어가면 그 유명한 ‘세연(洗然)정’이 한눈에 들어온다.
주변 경관이 물에 씻은 듯 깨끗하고 단정하여 기분이 상쾌해지는 곳이란 뜻이 단박에 이해가 갔다. 물이 많이 말랐지만, 그 나름의 운치가 다시 날리는 함박눈과 어우러져 순식간에 내가 고산이 되게 했다.
자연적인 계류를 돌둑으로 막아 연못을 만들고 다시 그 물을 끌어와 네모진 인공 연못을 만들었다. 두 못 사이에 섬을 만들고 정자를 놓아 어느 방향으로 둘러봐도 황홀한 자연을 즐기게 했다. 또 세연정 동쪽에 각각 동대와 서대라는 단을 만들어 무희가 춤추고 악사가 풍악을 울리는 무대로 썼다. 그야말로 시상이 절로 떠오를 수밖에 없었으리라.
세연정 옆에 커다랗게 자란 소나무는 고산 선생이 직접 심은 것이다. 정자의 올라간 문들이 액자 같아서 발이 시린 것도 모르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선생이 쉬이 보길도를 떠날 수 없을 풍경임을 인정했다.
고산의 발을 붙잡은 부용동.
나 역시 조금 더 머무르고 싶은 마음을 겨우 잡고 또 다른 선생의 비밀스러운 공간으로 향했다. 부용동에서 마주 보이는 앞산 기슭에 있는 ‘동천석실’로 말이다.
동백나무와 차나무, 자귀나무와 다른 활엽수들이 우거진 숲을 따라 경사진 길을 10여 분쯤 올랐을까? 커다란 바위들과 갈대가 어우러진 고독한 정자가 드러났다. 세연정이 다른 이들과 어우러져 풍류를 즐긴 곳이라면 동천석실은 선생 혼자서 정막과 고요를 느끼던 곳이다. 울퉁불퉁한 바위와 낭떠러지들이 사방으로 둘러있어 요새 같은 느낌을 받았다.
관광객들이 쉬이 올라갈 수 있도록 암벽에 줄을 느려 뜨려 놓았다. 앞사람이 오르는 걸 보니 별로 높아 보이지 않아 한 손으로 잡고 올라가려다 이내 생각을 고쳐 카메라를 가방에 넣었다.
그런데 먼저 올라간 일행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바른손엔 카메라를 들고 한 손으로 줄을 잡고 오르려다 하마터면 미끄러졌다. 다행히 크게 다치진 않고 손바닥에 타박상 정도만 입었지만, 자칫 바위에 머리를 부딪힐 뻔 하였다. 모두 놀란 가슴을 쓸어 내렸다. 눈까지 내린 마당이라 많이 미끄러웠던 모양이다.
나도 두 손으로 단단히 줄을 부여잡고 동천석실로 올랐다. 이 정자는 신선이 사는 곳을 부르는 이름인 동천복지에서 유래했다. 과연 그리 정한 이유를 고개를 전경을 보니 알 수 있었다. 동천석실은 부용동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있다.
주벽 산자락이 낙선재를 둘러싼 형태여서 정말이지 연꽃이 핀 형태처럼 보였다. 고산 선생은 석실 옆에 있는 반석에서 차를 달여 마시며 부용동의 모습을 보며 1년 내내 핀 연꽃을 즐겼으니 신선이 따로 없는 삶이었겠다. 선생은 반석 바로 앞에 있는 두 바위 사이에 도르래를 달아 산 아래와 연결해 필요한 물건과 음식을 날랐다.
그야말로 세상, 그리고 인간과 멀어져 살기를 소망했던 것이다. 동천석실 바로 아래에 또 작은 정자가 하나 있는데 그곳에선 어린 아내가 지냈던 곳이라고 한다. 은둔을 추구한 선생이겠지만 그의 아내는 아주 외로웠겠다.
범인인 내가 감히 평생을 유배와 당쟁에 시달린 선생과 가족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겠느냐마는 겨울 갈대와 바위, 가시나무로 둘러싸인 동천석실을 마지막으로 돌아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완도의 랜드마크, 완도 타워
완도에서 먹는 회는 정말 신선했다.
보길도에서 고산 윤선도의 발자취를 따라 일정을 마치고 다시 배를 완도로 돌아가기 위해 동천항으로 향했다. 그사이 해가 지고 있었다. 흐린 날씨도 조금씩 밝아지고 신선이 지나기라도 하는지 구름 사이로 이따금 햇빛이 비추었다.
배에 올라 보길도를 바라보니 고산 선생처럼 나도 돌아가는 발걸음을 돌려 머무르고 싶었다. 그렇지만 완도의 특산품인 김보다 더 유명한 완도의 야경을 보기 위해선 떠나야만 했기에 가벼운 손 인사로 아쉬운 마음을 달랬다.
동천항에서 완도 화흥포항까지 배로 40여 분이 걸리기에 잠시 눈을 붙였다. 따뜻한 배 안에 있자니 노력하지 않아도 절로 눈이 감겼다. 정말 오랜 시간이 걸릴 줄 알았는데 금세 완도에 도착했다.
아까까지 분명 좋아지던 하늘이 해가 지고 배에서 내리니 거짓말처럼 다시 눈을 뿌려대기 시작했다. 안돼! 야경을 볼 생각에 잔뜩 기대했던 나는 처음 완도에 도착했을 때보다 조금 더 절망적인 기분이 됐다.
가뜩이나 추운데 눈까지 내리다니 야경이고 뭐고 숙소로 당장 돌아가고 싶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완도의 랜드마크라는 완도타워를 봐야 덜 억울하지 싶어 버스에서 내렸다.
옷깃을 세우고 걸으니 잔뜩 흐린 구름을 헤치고 완도의 야경이 조금씩 눈에 들어왔다. 잘 보이진 않았지만 추위로 움츠린 마음을 펴기에 충분히 분위기 있는 모습이었다.
완도타워에서 바라본 야경은 환상적이었다.
어두운 밤바다와 집집마다 켜진 불빛이 대조를 이룬다. 앞을 보니 잎을 떨군 나무들 사이로 완도타워가 드러난다. 완도타워는 연중무휴다. 단 하절기인 6월과 9월엔 22시에, 동절기인 10월에서 5월에는 21시에 영업시간이 종료된다. 입장료는 어른 기준 2,000원이라는 저렴한 가격에 운영되고 있다.
1층에 특산품과 크로마키 포토존, 영상 시설이 있다. 영상시설은 ‘건강의 섬’, ‘Slow City’, ‘완도의 소리’를 주제로 구성하여 시각과 청각을 모두 만족시키는 완도 소개공간을 마련했다.
나는 전망층으로 바로 올라갔다. 이미 어두울대로 어두워진 완도의 야경이 궁금했다. 전망층에는 쌍안경이 있어서 다도해의 아름다운 전경은 물론 날이 맑을 때는 영암의 월출산과 제주도까지 볼 수 있다고 한다. 또한 카페가 마련돼 있어 커피와 함께 완도의 전경을 즐기기 좋다.
추운 눈길을 헤치며 올라온 나는 따뜻한 차를 사서 전망층을 천천히 돌았다. 어두운 완도의 바다가 왠지 차분히 마음속으로 들어왔다. 자연이 아름다운 완도에 이런 높은 건물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관광객들이 한 번쯤 들려 즐기기 좋은 곳이다.
개인적으로 역시 해질 때 온다면 야경을 보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가 아닐까 한다. 완도타워를 마지막으로 첫날의 일정을 마무리했다. 숙소인 원네스리조트로 가니 포크송이 흘러나온다. 크리스마스 장식과 눈 오는 밤, 통기타 소리 그리고 즉석 라이브 공연 보컬의 목소리가 왠지 오래된 영화 같은 느낌이 들었다. 촌스럽지만 편하고 낯설지만 그리운 완도 같은 기분 좋은 밤이었다.
제2의 청해진 시대, 장보고 대교
절로 눈을 뜨게 만든 완도의 아침
공기가 좋아서인지 피곤한 기색 없이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객실에 커다랗게 난 창을 바라보니 이제 막 오늘의 해가 뜨고 있었다.
어제보다 맑은 날씨 덕분에 제법 먼 곳에 있는 김 양식장까지 선명하게 보였다. 파란 바다에 이제 막 일어난 태양의 붉은 빛이 비쳤다. 두 색이 섞여 파스텔 톤의 분홍을 만들었다. 아름다운 아침은 이런 장면을 두고 하는 말이겠지.
간단한 아침을 먹고 짐을 챙겨 숙소를 나섰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장보고 대교가 있다고 해 가보기로 했다. 바다를 가로지르는 다리의 위용에 입이 떡 벌어졌다. 햇살까지 눈 부셔서 더욱 웅장해 보였다. 지난 12월 6일 개통식을 가진 이 거대한 다리는 해상왕 장보고가 열었던 청해진 시대의 재현을 노린다.
약산도와 고금도를 잇는 약산 대교, 완도읍과 신지도를 연결하는 신지 대교, 고금도와 강진군 마량면을 이어주는 고금 대교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지도와 고금도를 있는 이 장보고 대교까지 완공되면서 완도의 큰 섬 4개의 육로시대가 열렸다.
육지로 나가려면 배를 타거나 돌아가 1시간 이상 걸렸지만 이제는 30분이면 갈 수 있게 됐다고 한다.
장보고 대교는 높이 90여 미터, 총 4.3 킬로미터로 공사에만 7년이 걸린 어마어마한 다리다. 그야말로 옛날 무역으로 바닷길을 연결했던 장보고의 위용을 그대로 담아낸 대교가 아닐까. 장보고 대교를 통해 완도의 사는 주민들과 육지에 사는 관광객들의 원활한 교류를 기대할 수 있겠다.
해상왕 장보고를 만나다, 장보고 기념관
장보고의 업적을 확인했던 기념관
완도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몇몇 있지만, 그 중에 빼놓을 수 없는 위인이 바로 장보고다. 흔히 ‘해상왕’이라고 부르는 장보고는 신라시대 해상진출과 교역 활동에 있어서 새로운 기원을 이룩하고 대표한 인물임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장보고를 부르는 이름은 네 가지나 되는데 신라측 기록에 활보, 즉 궁복 또는 궁파, 장보고라 돼있다. 이는 다시 말해 그 당시 신라 관습상 평민은 성을 갖지 못했고 장보고 역시 귀족이나 왕족 출신이 아니었다는 이야기. 성조차 가지지 못한 평민이 신라시대 해상무역의 중심이 되어 ‘해상왕’이라는 칭호까지 얻었다.
장보고는 완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도 이곳에서 보낸 장보고는 당나라 강소성 서주에서 무령군중소장으로 활약했다. 이후 신라로 돌아와 청해진을 설치하고 해적을 소탕했으며 동북아 해상무역을 장악했다. 그 무대가 청해, 즉 지금의 완도다.
장보고 기념관은 그런 그의 업적을 기리고 해양개척 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해, 또 이곳을 찾는 이들이 역사와 문화의식의 중요함을 느끼고 배우는 교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건립했다고 한다.
유난히 파란 오늘의 하늘이 장보고가 호령했던 신라의 청해진 앞바다 같았다. 총 2층으로 지어진 이 건물은 1층엔 영상실과 기획전시실 등이 있고 2층엔 상설전시실이 있다. 매주 월요일 휴관하며 입장료가 어른 기준으로 1,000원이다. 우리나라 바다 역사를 위해 자녀들과 함께 방문해도 부담 없겠다.
기념관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건 바로 커다란 배다. 사실 우리나라에선 아직까지 신라시대 배가 출토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여러 학자들이 11세기 고려시대의 배와 일본, 중국의 배, 문헌에 적힌 신라시대 배를 추정하여 고증을 거쳐 복원해 전시했다고 한다. 본격적인 전시물을 관람하기 전 준비된 영상을 시청했다.
내용은 역시나 장보고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과 업적에 관한 것이다. 그리 길지 않은 영상은 장보고에 대해 쉽고 간결해 좋았다. 보고 나니 시쳇말로 국뽕을 제대로 맞은 느낌이다. 작은 이 완도에서 태어난 평민이 그 당시 바다를 두 손에 쥐었다. 그런 역사를 가진 나라가 우리나라다! 영상실에서 나와 2층으로 올라갔다.
상설전시관에 들어서는데 굉장히 신선했다. 보통 기념관이나 유물 전시관하면 좌르륵 유물들을 늘어놓고 설명문을 달아놓는 조금은 지루한 체계다. 그런데 장보고 기념관은 달랐다.
갈대를 형상화한 LED 조명으로 장식하고 전시 구조 또한 모형, 영상 정보, 검색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관람객이 직접 체험하고 참여하도록 유도했다. 기존의 단편적인, 일방적인 전시구조를 탈피해 흥미와 관심을 높였다. 전시실을 다 둘러보고 밖에 나오니 하늘과 바다가 같은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가끔은 소녀가 된다, 장도
바다와 섬이 조화를 이룬 장도
장보고 기념관에서 차로 멀지 않은 곳에 장도가 있다. 장도는 해발고도 약 30미터정도이며 면적도 그리 크지 않은 작은 섬이다. 썰물 때는 완도와 걸어서 통행이 가능할 정도로 가깝다. 밀물 때어도 수심이 2미터가 되지 않는다고 하니 산책하기 좋은 코스다. 장도는 청해진 시대의 유적지이기도 하다.
성곽의 흔적이 남아있다고 해 방문하려고 했다. 그런데 오늘따라 날씨가 유난히도 맑아 바다에 비치는 햇빛이 파도가 칠 때마다 윤슬로 부서지고 있었다. 겨울바다, 그것도 이렇게 맑고 깨끗한 바다가 눈앞에 있는데 다른 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한참을 사진을 찍고 보니 어느새 일행과 멀어졌다.
이제는 자신의 소명을 다한 동그란 부표들
당황한 것도 잠시, 둘러보니 이미 장도 주변 마을 경관에 마음을 빼앗긴 몇몇 분들이 보였다. 함께 장도로 향하던 그때, 입구 바로 앞에 있는 작은 특산품 가게에서 할머니 한 분이 “어디서 오셨어?”라고 말을 거셨다. 정직하게 걸린 간판에는 ‘노인사회활동수행기관’이라 작게 적혀있었다.
할머님은 이어서 “추운데 들어와서 커피 한잔들 혀~”라며 구수하게 우리를 유혹했다. 장도가 나를 부르고 있었지만 우리 할머니 같은 자글한 눈 주름과 달달한 믹스커피가 더 끌려 나도 모르게 신발을 벗고 있었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니 비슷한 연령대의 할머님 몇몇이 둘러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다. “어디서들 왔어요?” 아까 우릴 이끈 할머니가 묻는다.
“서울에서 왔어요. 어휴, 추운데 여기들 모여서 뭐하세요?” 라고 대답하니 다른 할머니께서 “아, 울 용돈 벌고 있지~”하며 까르르 웃으신다. 그 웃음이 어째 갓난아이보다 순수해 보일까 싶다.
또 다른 할머니께서 부연 설명을 해주신다. “장도 노인 일자리회에서 만들어 준거여. 한달 쓱 돌아가면서 여기서 김도 팔고, 미역도 팔고 그려. 그라면 이십 만원 쓱 나와. 근디 나오는 날 다 써부러~ 왜냐믄 그걸로 술 사 묵고 그려.” 마지막 말에 다같이 와르르 웃음이 터진다.
이야기인즉 노인 일자리 창출을 위해 국가에서 특산품 판매장을 만들고 마을 어르신들이 돌아가며 운영을 한다고 한다.
물건이 떨어지면 다시 채워주고 할머님들은 한달 단위로 번갈아 가며 가게를 지키신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매출과 물량을 파악해야 하기 때문에 일종의 테스트를 거쳐 선발된다고 한다. 소정의 월급이 나오는데 그걸로 어르신들 용돈벌이를 하시는 모양이다.
자식들 다 키워 보내고 적절하신 노인을 위한 좋은 정책이란 생각이 들었다. 표면상으로는 한 분씩 돌아가며 가게를 운영하지만 사실 사랑방이나 다름없단다. 혼자 있으면 심심하니 모여서 주전부리도 드시고 관광객들과 담소도 나누고 하신단다.
찬 바닷바람도 완도 할머님들의 따뜻한 마음까지 얼리지 못했다. 그녀들이 나눠준 커피와 고구마 말랭이가 꽤 오래 기억에 남을 거 같다. 진부한 말이지만 소녀 같은 할머니들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사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여행은 이런 뜻하지 않는 만남이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이루어진다. 비록 장도 안으로 들어가진 못했지만, 완도의 노쇠한 소녀들의 삶에 들어갔으니 더 즐거운 시간이었다.
국내 유일의 난대림, 완도 수목원
남도 최대 수목원인 완도수목원
그녀들과 만남을 뒤로 하고 다시 투어 버스에 올랐다. 국내 유일의 난대림 수목원이라는 완도 수목원에 가기 위해서다. 완도 수목원은 남부지방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아열대 온실이 있다.
상왕봉에 조성된 이곳은 상록활엽수로는 세계 최대의 집단 자생지라고 한다. 시간 별로 산책 코스를 즐길 수 있어서 일정에 맞게 관람하기 편하다.
수목원에 도착하니 우리를 인도할 가이드가 우리를 반겼다. 자신을 ‘찔레꽃’이라 소개하며 웃는 모습이 들판에 핀 찔레꽃 같았다. 관람객들을 위해 코스를 안내하는 가이드들의 닉네임을 꽃으로 정하다니 재미있는 아이디어다.
말하는 꽃 한 송이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수목원의 총면적은 2,000헥타르가 넘는다고 한다. 쉬이 그려지지 않는 넓은 범위다.
500여 종의 식물들이 있는 온실
산책로가 잘 조성되어 있다.
국토의 최남단에 위치한 지리적 특성으로 1년 내내 푸르름을 자랑하는 난대림과 다도해의 경관이 어우러진 천혜의 자연조건을 간직하고 있다. 보유 수목은 3,145종이고 난대성 식물을 포함한 자생 식물이 709종이라고 하니 굉장히 큰 규모다.
붉가시나무, 황칠나무 등 750여 종의 희귀 난대식물이 분포하는 국내 최대의 난대림 자생지이자 유일한 난대 수목원이라고. 단순히 관람을 위한 수목원이 아닌 산림을 보호하고 증식시키며 수목자원에 대한 학술적인 연구까지 함께 진행하기 위해 설립했다고 한다.
가이드의 설명과 자연경관을 함께 즐기다 보니 남부지방에서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아열대 온실에 도착했다. 온실 앞에 커다란 바위가 있었는데 가까이 가보니 ‘아이고 바위’라는 안내문이 보였다.
우스운 이름이 붙은 이유가 무엇일까 하고 봤더니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옛날 이곳에 살던 사람들이 생계를 위해 땔감을 주워 지게에 지고 내려오다가 이 바위에 앉아 “아이고~ 힘들다.”라고 푸념하며 쉬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이야기다.
제주도가 아닌 곳에서도 한라봉이 자란다.
각종 선인장을 볼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이 수목원을 조성할 때,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 수목원 직원들이 나무를 하나하나 심다가 지쳐 “아이고, 집에 언제 가냐?”해서 붙여진 명칭이라는 이야기다. 뭐가 됐든 재미있는 이름임은 틀림없다.
거대한 온실 안으로 들어가니 밖과는 다른 온도에 두텁게 걸쳤던 외투를 벗었다. 온실에는 약 500여 종의 열대, 아열대 식물들과 각종 선인장이 전시되어 있다.
따뜻한 나라에 가면 볼 수 있는 대왕야자 나무가 제일 먼저 보인다. 망고와 극락조화, 금호 등 독특한 모양새의 식물들을 찍느라 카메라가 쉴 틈이 없었다. 특히 여러 종류의 선인장이 즐비한 전시관은 이국적이라 오래 머물렀다.
인공 시내와 적절한 배치가 동남아의 작은 열대림을 옮겨 놓은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우리나라에 이렇게 잘 조성된 온실은 드물다. 다양한 식물과 체험까지 즐길 수 있는 수목원은 더욱 없을 것이다.
거대한 야자수도 온실에서 볼 수 있다.
수목원을 떠나기 전, 햇살이 눈에 들어왔다.
작별 혹은 재회의 인사, 안녕. 완도
수목원을 마지막으로 완도 투어의 일정이 모두 끝났다. 1박 2일의 일정으로 완도의 매력을 다 보기엔 불충분한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시간을 내 찾고 싶은 곳이다. 아마도 이 푸른 바다가, 이 맑은 공기가 그리고 이 아름다운 자연이 나를 다시 완도로 돌려놓을 거 같다.
익숙하지만 생소했던 전라남도 완도. 일에, 사랑에, 삶에 치어 각박하고 바쁜 생활에 잠깐 멀어지고 싶은 당신, 낯선 완도에 오라. 이곳을 떠날 땐 그 낯섦이 그리움으로 변해있을 것이다. 안녕, 완도. 그리고 언젠가 다시 안녕? 완도.
[ 출처 : 뚜르드몽드(2018년 2월호)/ 글과 사진 유새린기자, 취재협조 대동문화재단 ]
첫댓글 완도.. 은근히 자주 가는 곳이 되었네요.. ㅎㅎ
그러게요~ 남도섬으론 제일 많이 다녀온듯~ ㅎ
오래전 가봐서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다시 가구 싶네요^^
잘 다녀 오셨어요?
마음의 결정도 하시구요? ^-^
@오로지 남쪽나라로 go go~^^
@레인 ㅎㅎㅎ
한번도 안가봤는데 너무좋으네요
으잉! 여태? 이런이런~ 가시자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