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대기업이 부러운 벨기에
벨기에의 문제 중의 하나는 “큰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벨기에 내에는 모든 것이 조그만 해서 그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땅도 작고, 회사도 중소기업 뿐이고… 그래서 벨기에 사람들의 사고도 섬세한 것을 좋아하고, 이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큰 것이 없어서 문제인 나라 얘기입니다.
벨기에 국적의 방송국에서 자체 제작한 TV 프로그램을 보면 소꿉장난 친다는 느낌이 듭니다. 기껏 방송되는 프로그램이 20~30명의 방청객을 뒤에 앉혀 놓고 대담을 하거나 아니면 주부 가요열창 같은 노래자랑 프로그램, 낱말 이어가기 같은 퀴즈 프로그램 등이 주종을 이룹니다. 이런 프로그램들은 조그만 무대 하나만 있으면 되기 때문에 제작비가 싸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신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전국을 대상으로 하는 신문은 아직 본 적이 없고, 기껏해야 생활 정보지 같은 어느 지역 내에서만 발행되는 간이 신문들만 우편함에 공짜로 배포됩니다.
벨기에에서 덩치가 큰 매스컴이 생겨날 수 없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바로 상업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벨기에는 작은 나라지만 인구는 꽤나 많아서 1,000만 명 정도 됩니다. 이 정도면 우리나라의 지역민방처럼 드라마도 자체 제작하는 식으로 돈이 좀 드는 방송 프로그램을 제작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1,000만 명이 또 분리된다는 것입니다. 정확한 비율은 제가 잘 모르지만, 대략 인구의 반은 화란어를 사용하고 있고, 나머지는 불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화란어 아니면 불어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실제로 벨기에 방송국은 화란어 방송국과 불어 방송국이 각각 있습니다. 불어를 쓰는 남부지역에서는 북부지역의 화란어 방송을 외면하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문도 마찬가지고, 생활정보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고 벨기에 TV에서 매번 소꿉장난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소꿉장난만 치면 그마저도 채산성이 없기 때문에 영화, 어린이 만화영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등도 방송하면서 광고 수익을 얻습니다. 이들 프로그램들은 벨기에 방송국에서 자체 제작한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 제작한 것을 수입한 것입니다. 벨기에 채널에서 외국 프로그램들을 방송할 때는 대부분 더빙을 하지 않고 원음 그대로 내보내며, 화면 밑에 화란어 또는 불어로 자막처리를 합니다.
대형 매스컴이 존재하지 않으니까 벨기에에서는 연예인 “스타”가 생길 수 없습니다. 작년 여름에 “놀랍게도” 벨기에에 까드리(K3) 라는 10대 여자 가수 그룹이 생겨서 (중 고등 학생들이 아니라) 초등 학생들 사이에 난리가 난 적이 있었는데, 제가 보니까 노래를 별로 잘 하지도 않는데 의도적으로 벨기에 방송들이 벨기에에도 대중 스타를 하나 “만들어 내기 위해” 엄청 노력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결국 그 그룹도 3개월 정도 반짝 하더니 흐지부지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습니다.
한편, 벨기에 국적의 방송국은 미미하지만, 케이블 방송을 통해 영국 방송, 네델란드 방송, 프랑스 방송, 미국 방송, 독일 방송, 스페인 방송, 이탈리아 방송 등을 여과 없이 시청할 수 있습니다. 특히, 사람들이 영국이나 미국 방송국에서 제작한 프로그램을 많이 시청하기 때문에,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영어를 TV에서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실제로 벨기에 아이들은 초등학교 졸업할 때 정도 되면 특별히 영어 교육을 받지 않았는데도 영어를 꽤나 잘 합니다. 아이들에게 영어를 어디서 배웠느냐고 물어 보면 한결같이 대답은 “TV”를 보면서 스스로 깨우친 영어라고 합니다. 이제 9살인 저희 큰 녀석도 TV에서 “할 수 없이” 영어 만화를 많이 보더니만, 화란어에 영어까지 섞이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벨기에라는 나라는 유럽 대륙의 주변 강대국들의 힘의 균형을 “요리조리(?)” 잘도 이용하면서 살아가는 나라이지만, 주변 강대국의 문화로부터 자국의 독특한 문화를 보호하려고도 엄청 노력합니다. 하지만, 규모가 있는 매스컴이 없기 때문에 국민들은 자국 매스컴보다는 주변국의 매스컴에 더 많이 노출될 수 밖에 없습니다. 외부 세계의 문화가 여과되지 않고 국민들에게 흡수되며, 이는 자국의 문화 보호라는 측면에서 손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인구가 “굉장히” 많아서 장사가 되는 매스컴이 생길 수 있는 것은 이런 점에서 큰 다행입니다.
벨기에 사람들이 네델란드에 대해 부러워 하는 것은 튤립이나 풍차가 아니라 “필립스” 입니다. 필립스가 훌륭한 회사이기 때문에 부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대기업”이기 때문입니다. 벨기에는 대기업이 없기 때문에 그 밑에서 튼튼한 줄을 잡고 똘똘하게 세계와 싸우는 중소기업이 있을 수 없으며, 결국 국가 전체적으로 산업 경쟁력이 약하다는 것입니다. 벨기에에도 괜찮은 중소 기업들이 있어서 세계무대에서 잘 싸우고 있지만, 벨기에 자체의 산업 구조에서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조화가 없기 때문에 한 순간에 쓰러질 수 있다는 위기감이 항상 존재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는 규모가 큰 전자회사, 자동차 회사, 제철회사, 정보통신 회사가 있으며, 또한 그 밑에 딸린 중소기업이 무지 많다고 벨기에 녀석들한테 이야기하면 무척 부러워합니다. 외국에서 먼저 한국의 대기업에 대한 재조명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며, 우리 국내에서도 산업 구조 측면에서 대기업에 대해 긍정적인 면을 바라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인 것 같습니다. 벨기에 같은 잘 사는 나라도 가지지 못한 것을 우리는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2002. 07.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