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 일치 피정을 다녀와서 (2)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익숙하지만, 개신교 신자들에게는 낮선 피정이라는 형태의 만남은 분명히 새로운 도전이자 시도였다. 개신교에서는 흔히 수양회와 비슷한 프로그램이지만, 분명히 가톨릭의 피정은 독특한 문화와 교회적 흔적들을 안고 있다.
목사님들과 함께 바치면서 나눈 성무 일도는 시편 기도의 아름다움을 '맛나게' 바치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느끼게 해주었다. 비록 몇 명 되지 않은 신부님들의 낮익은 성무일도 음성이었지만, 개신교 목사님들에게는 새로운 기도의 형태를 체험하는 계기였음에는 틀림없다.
피정과 더불어 함께 만나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서로가 간직하고 있는 삶의 체험들을 나눌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이 번 피정은 가치가 있었다. 구세군 사관님으로 참석한 젊은 목회자는 군복과 명령체계에 단련된 신앙 증거의 형식 때문인지, 피정 기간 내내 참석한 수녀님들과 모두에게 즐거움을 선사하였다. 베네딕도 영성에 대한 강의에서도 순명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순명은 가장 큰 자유라는 표현에 주저 없이 알렐루야를 큰 소리로 외쳐 모두의 웃음을 자아냈다. 그렇다 수도 생활에서 순명은 참된 자유를 가져다주는 역설의 신비였으니 말이다.
참여한 여성 사제의 부드럽고도, 격의 없는 모습은 참가자들의 마음을 더 넓게 해주었는지도 모른다. 가톨릭 교회에서 만날 수 없는 사제직이지만, 성공회가 지닌 중용의 원리와, 그들이 품어 안은 전통의 모습이 가톨릭 교회에는 때로 도전으로, 때로는 넓이로 다가올 수도 있었다. 여성 사제가 전체 회의에서 남긴 메세지는 단순했다. 집에서 장로회 목사님, 감리교 목사님, 성공회 신부님 모두가 한 핏줄로 일치하며 살고 있는데, 왜 교회 밖에서는 그런 일이 이뤄지지 않는지가 가장 큰 의문이었다는 것이다. 맞다. 일치란 그렇게 복잡한 일이 아닌데, 교회는 서로에 대해 그토록 벽을 쌓고 살고 있으니 말이다. 아마도 교리는 사람들을 갈라놓을 수 있지만, 신앙과 삶은 하나로 묶어 주는 힘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피정을 마치면서 우리가 찾은 곳은 부산 순교복자 수도회의 순교 박물관이었다. 순교자의 넋과 신앙을 기리기 위한 복자 수도회가 오랜 시간 수집하고 전시해온 작고도 아담하면서, 내실 있는 내용을 담뿍 담은 박물관이었다. 물론 개신교 신자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광경이었다. 순교자들의 유해와 유물들, 그들의 순교와 관련된 여러 문서와 증거들... 들음을 강조하는 개신교 신앙에서 보고 감지하는 대상을 통한 신앙의 본질을 찾으려는 가톨릭 신앙과의 모순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 어쩌면 우리에게 익숙한 성해신앙, 곧 성인들의 유해를 공경하는 신앙이 개신교 목사님들에게는 적지 않은 충격일 수도 있다. 하지만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가 잃어버린 신앙의 반쪽을 찾으려는 이들의 눈빛은 단순히 호기심이 아닌, 때로 아쉬움도 묻어 나옴을 놓치지는 않았다.
순교자 박물관을 거쳐 우리가 최종 목적지로 삼은 곳은 바로 올리베타노 베네딕도 여자 수도원. 부산의 광안리 근처에 숲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수도원이다. 무척이나 뜨거운 햇살 속에서 찾아간 수도원에는 우리를 반갑게 마주해준 수녀님들과 땀으로 적셔진 우리들을 시원하게 녹여주는 시원한 냉차들이었다.
수도원 기념관을 들러 수도회의 오랜 역사와 연길 지역에서부터 시작된 베네딕도 여자 수도회의 살아있는 생생한 역사와 흔적들에 대해 듣고, 수도원 전경을 살펴보았다. 수도원은 작은 숲으로 여러 동의 건물들이 아름답게 감싸져 있었다. 수도자들의 삶을 지켜주고 이들의 내면 세계를 비춰줄 하느님의 창조물을 보는 듯 했다. 수도원을 처음으로 와본 목사님이나, 사제 서품때 피정을 이 곳에서 했었다는 성공회 신부님의 감회 어린 눈빛도 아름다웠다.
우리가 참석한 수녀님들의 낮기도는 150여명의 수녀님들의 아름다운 기도와 천상의 목소리의 향연을 느끼게 하는 순간이었다. 분명히 기도가 아름답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시간이기도 했다. 통성기도에 익숙한 개신교 목사님들에게는 함께 목소리를 맞춰 기도문을 읽고 노래하고, 바친다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지겠지만, 교회의 오랜 전통인 시편 기도를 함께 바치는 행복감이 무엇인지를 느끼게 해주는 시간이기도 했다. 나 역시 습관적으로 바쳐온 성무일도를 다시금 아름답게 바치는 것이 소중한 일임을 깨닫게 한 순간이었다.
낮기도가 끝난 후 우리는 베네딕도 수도회의 전통대로 훌륭한 점심 식사 초대를 받았다. 정중하게 손님 대접을 받은 우리 일행은 행복한 식사 시간을 맞이했다. 우리의 식사와 이후의 시간을 더 행복하게 만들어 준 분은 이해인 수녀님이었다. 이해인 수녀님과의 만남은 특별했고, 추억에 남을 만한 일이었다.
솔직히 개인적으로 이해인 수녀님을 만난 것은 처음이다. 그 분의 시집을 오래 전에 읽어보기는 했지만, 진지하게 그 분의 문학과 신앙 세계를 접하지는 못했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우리 일행을 먼저 맞이해주고, 식당에서 함께 식사를 하면서도 아주 유쾌하고, 때로는 괄괄한 아줌마와 같은 모습으로 이해인 수녀님은 우리를 만났다. 솔직히 2년전 대장암으로 투병하신다는 말을 들었을 때 걱정은 많이했지만. 병마와의 싸움으로 터득한 삶의 지혜들을 우리에게 나눠주시느라 부산한 모습이었다. 대개 수녀님을 만나는 사람들은 그 분의 싯구처럼 소박하고, 조용하고 고매한 모습을 기대하지만, 의외로 이해인 수녀님은 투박하고, 당당하고, 수다스러울 정도로 우리에게 널널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이유도 분명했다. 당신이 고매한 모습을 보이면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어려워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먼저 나서서 벽을 허물어 주면 모두들 편하게 자신을 대한다는 것이다. 어떤 분은 이해인 수녀님과 대화를 나누다가 자신이 마치 이해인 수녀님의 어머니와 대화하는 것 같다고 이야기해서 모두가 폭소를 한 바탕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수녀님은 세월의 흐름을 벗어나지 못했다. 사진에서 본 모습과는 달리 투병 생활을 통해 몸은 많이 변해있었다. 살도 찌셨고, 얼굴도 많이 거칠어지신듯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옛모습을 보여주고, 자신의 글방으로 초대해주고, 직접 사인을 한 책을 한 권씩 나눠주시고, 부채에 자신의 글과 그림을 그려 모두에게 나눠주시는 정성을 보면서 모두가 감탄한 것은 물론이다.
개신교 목사님 한 분이 이해인 수녀님에 대한 지극한 관심과 대화를 잘 이끌어 주신 것도 그렇고, 김희중 대주교님의 주교서품 7주년을 맞이한 즉흥 축시낭송도 수녀님의 인격적인 면모를 엿보게 하는 순간들이었다. 참 고맙고도, 아름다운 만남이었다.
우리의 피정은 이렇게 수녀원 방문과 이해인 수녀님과의 만남을 통해 더욱 풍요로와졌다. 신앙의 언어는 교리와 추상적 논쟁이 아니라, 삶의 언어요, 시의 언어인지도 모른다. 피정은 침묵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체험이기에, 우리 모두는 침묵과 기도 속에서 서로가 찾고 있는 하나의 신앙을 발견한 기회였다. 그리고 모두가 사랑하는 이해인 수녀님의 시와의 만남은 우리가 찾는 하느님에 대한 신비적 갈망을 함께 묵상하는 계기가 되었음에 틀림없다.
앞으로 우리 교회가 하나인 교회를 찾아가는 길은 이런 영적 일치의 기회를 많이 만들어가는 것이란 생각에 참석자 모두가 입을 모았다. 정례적인 일치 피정이 이루어지길 바라면서 모두 아쉬운 이별을 하고, 다음의 만남을 기약했다. 하느님은 우리들의 이런 만남 속에 함께 하셨고, 앞으로 둘이나 셋이 모여 당신을 찾는 이들 가운데 함께 하시리란 확신 속에서 말이다.
첫댓글 두번째 글을 읽으니 참석했던 것처럼 정리가 되네요. 고맙습니다!
일치를 향한 꾸준한 노력이 삶 속에서 스며나올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