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목정보 – 문지방 신앙 11월호 원고
개신교와의 대화 4 - 개신교 신자들과 어떻게 대화할 것인가?
송용민 신부
(인천교구 삼산동 본당 주임/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한국의 종교인구 비율통계(2005년)를 보면 천주교와 개신교를 포함한 그리스도교(기독교) 인구가 한국의 전체 종교인구들(52%) 가운데 3분의 1에 해당되는 29.3퍼센트를 차지한다. 여기에 불교인구(22.8%)를 더하면 한국인들의 절반은 종교를 갖고 있고 그 중에 절반을 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 불교의 특성상 종교적 행위를 두드러지게 하지 않고 산다는 점을 감안하면 한국인들 가운데 세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그리스도인이고, 그 중에 종교적인 삶을 활동적으로 하고 이들은 대부분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해도 될 듯싶다. 이런 통계가 젊은 세대로 내려가면 이제 한국에서는 교회(개신교)나 성당(천주교)을 다니는지 안 다니는지 둘로 양분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의 종교가 불교, 개신교, 천주교 신자들로 분포되어 있지만 종교 간의 갈등은 상대적으로 적은 편에 속한다. 하지만 불교가 특성상 타종교에 대하여 크게 관심을 갖지 않거나 관대하고, 가톨릭이 보편적 성격 때문에 타종교와의 대화를 소중히 여기는 반면 한국 개신교의 경우에는 공격적인 선교와 배타적인 구원관을 지닌 교파들 때문에 적지 않은 갈등이 생기기도 한다. 몇 해 전에 정권차원에서 일부 개신교 교파를 비호하다가 불교계와 갈등을 겪은 것은 얌전히 잘 지내는 불교의 심기를 건드렸기 때문이지 불교가 공격적인 선교를 하다가 갈등을 겪은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천주교와 개신교의 경우는 좀 다르다. 같은 그리스도인이면서도 다른 종교처럼 인식된 두 교파 사이에는 미묘한 갈등과 긴장관계가 숨어 있다. 일단 천주교는 로마 가톨릭교회가 가진 단일성 덕분에 선교 과정에서 발생하는 개신교인들과의 갈등에 대해 그렇게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는다. 이른바 ‘장자의식’은 ‘오면 좋고, 안 오면 그만 혹은 손해’란 생각으로 천주교인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다. 최근에는 가톨릭의 오랜 전통과 교회의 글로벌한 단일성 때문보다는 천주교가 가진 낮은 부패지수나 사회에서의 인지도 때문에 천주교를 찾는 사람들이 많다지만, 천주교 신자들의 ‘장자의식’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구교 신자들이나 성직자와 수도자들은 이런 가톨릭의 장자의식에 대하여 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다. 개신교 신앙에 대한 오해와 편견은 물론 가톨릭을 일방적으로 옹호하려는 자기중심성을 공고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목의 현실을 생각하면 이 점은 단순하게 여길 문제가 아니다. 실제로 많은 신자들은 자신이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에 대하여 자부심을 느낄지언정 왜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지 그 이유가 불분명하다. 그냥 글로벌 시대에 교회의 단일성과 보편성, 전통 속에서 가족들이 지켜온 신앙을 이어받거나, 역사 속에서 진리를 찾고 증언한 많은 이들의 신앙의 표양들 덕분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정작 가톨릭 신앙의 진수가 무엇인지 물으면 대부분의 신자들이 겉으로 드러나는 몇 가지 표상들만을 이야기할 뿐이다. 가령 성체성사, 고해성사, 성모님 공경, 묵주기도, 성직자들의 독신제도, 수도자들의 삶 등 가톨릭의 특성을 외면적으로 드러내는 몇 가지 점에 관심을 기울일 뿐이다. 하지만 가톨릭의 이러한 특성들은 곧바로 개신교의 공격 대상이라는 사실에 당혹감을 감출 수가 없다. 개신교의 신앙 전통이 종교 개혁이후 이러한 가톨릭의 특수성을 비판하면서 성장해왔기 때문에 대부분 가톨릭과의 차별화를 통해 정체성을 세우려는 개신교 신자들의 의식 때문이다.
그렇다면 개신교 신자들을 만날 때 천주교인들은 어떤 자세로 대해야할까?
우선 가족이나 친척, 가까운 교우 관계에서 개신교 신자가 있다면 그가 어떤 교파에 속해있는 지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한국 개신교의 80%는 장로교 신자이고, 그 외에 감리교나 침례교, 성결교, 순복음교회라고 불리는 오순절 교회, 그리고 아주 드물게 성공회 신자가 있을 수 있다. 자신이 속한 교파를 알고 그 교파의 특성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말해주는 개신교인들은 많지 않아도 분명한 교파의식을 가진 이들이다. 이들 가운데 보수적이고 복음주의적인 장로교에 속한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나 침례교, 성결교, 순복음교회에 속한 이들은 가톨릭에 대해서 대개 부정적인 입장을 취한다. 이들은 가톨릭교회의 특수성이 성경에 증언되지 않은 이단적 요소임을 분명히 하고, 세속화된 종교라는 강한 비판을 버리지 않는다. 물론 장로교인들 가운데 대한기독교장로회(기장)이나 감리교에 속한 신자들은 교리 상 가톨릭에 대하여 다소 유연한 태도를 갖고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한국 개신교인들은 그런 교파의 신학과 성향에 대하여 관심이 별로 없다. 속된 말로 한국 개신교는 다 같은 개신교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이다.
이러한 정통 개신교 신앙을 가진 이들과의 만남 속에서 무엇보다 먼저 교리적 논쟁은 피하는 것이 좋다. 대부분 가톨릭에 대하여 논쟁을 걸어오는 개신교인들은 자신들의 교회에서 편협한 교육을 받고 가톨릭에 대해 오해와 편견을 가진 채로 맞춤형 공격을 해오기 때문이다. 마리아 공경과 관련된 문제는 우상숭배와 관련하여 개신교인들이 가장 예리하게 비판하는 부분이고, 고해성사, 교황제도, 성체신심 등에 대한 비판도 개신교 신앙전통에 비춰보면 일반 천주교 신자들이 설득력 있는 대화를 하기에는 벅찬 주제들이기도 하다. 그런 탓인지 천주교 신자들은 이런 비판에 대하여 답답해하거나 자신들이 갖고 있는 상식적인 수준의 대답 이상은 줄 수가 없다. 그래서 이런 맞춤형 공격을 해오는 이들과 굳이 교리적 논쟁에 시달릴 필요가 없다. 만일 자신이 그만한 지적 능력이 있거나, 자신의 설명을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는 개신교인이라면 성실하게 답변할 책임이 있다. 하지만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교리의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자신이 천주교인으로서 그러한 비판과는 다르게 체험해온 가톨릭신앙의 매력과 아름다움을 전해줄 수 있다. 그것은 논쟁이 아닌 자신의 체험이기 때문에 체험을 비판한다하여도 궁색해질 이유가 없다.
만일 개신교 신자들 가운데 성경에 대해 구체적인 지적을 해오거나, 교리의 지엽적인 문제들에 대하여 논쟁을 걸어오는 경우, 혹은 가톨릭 전체를 싸잡아 비판하는 다소 무식한(?) 비판을 하는 개신교인을 만나면 그 주제에 대하여 굳이 설명이나 변명을 할 필요가 없다. 그럴 때는 성경을 덮고 잠시 그에게 자신이 어떻게 하느님을 만났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으며, 그리스도 신앙이 어떻게 자신을 변화시켰는지 그 체험을 말해달라고 부탁하는 편이 낫다. 그러면 대부분 당혹스러워하는 편은 개신교인의 경우다. 많은 개신교인들 가운데 공격적이 선교를 하는 이들은 성경의 특정한 부분을 교육받아 일반 신자들이 혼란스러워 하는 부분들을 주목하기 때문에 그런 경우 성경을 닫고, 그들이 가진 선교적 열정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이야기해달라고 하는 것이 대화의 물꼬를 트는데 도움이 된다. 그러면 그들이 인생에서 겪은 고통과 시련 가운데 하느님을 만난 체험의 깊이를 느낄 수 있고, 그 점은 대화를 시작한 천주교 신자 역시 상대방에게서 배울 수 있을뿐더러, 자신에게 없는 열정에 대한 존경심은 물론 자신의 신앙체험을 나눠줄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예수님은 성경이나 교리에 갇힌 분이 아니시라 삶의 현장에서 끊임없이 우리를 살게 하시는 은총 그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만일 개신교 신자이지만 분명한 확신이 없는 이들에게는 천주교 신앙에 대한 깊이와 넓이를 잘 소개해줄 수 있는 서적들을 추천해주는 것도 좋다. 요즘은 천주교 신앙을 둘러싼 인생 이야기를 편하게 풀어주는 책들이 많이 소개되어 있다. 그리고 개신교인들과 함께 기도하자고 청해보는 것도 좋다. 싸우자는 이들에게 함께 기도하자고 말하면 당혹해하는 편은 개신교인들이다. 그리고 그들이 우리처럼 정해진 기도가 아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자유기도의 전통을 한편으로는 배워보는 것도 필요하다. 너무 염경기도(소리기도)에 익숙한 천주교 신자들에게는 5분 동안 숨도 안 쉬고 열정적으로 기도하는 개신교인들의 기도가 자극이 될 때도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정통 개신교가 아닌 이단적 요소를 지닌 개신교인들을 만날 때이다. 최근에는 ‘하느님의 교회’란 이름으로 정통 기독교의 요소를 버린 교단들이 나타나고, 특히 이만희라는 교주를 중심으로 시작된 ‘신천지 교회’와 같이 신자들의 약점을 노려 선교하는 교단들이 늘고 있다. 과거 여호와의 증인이나 통일교, 정명석의 JMS와 같이 자칭 재림예수를 자처하는 이들이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며 교세를 확장했지만, 오늘날에는 기성종교에 염증을 느낀 이들을 겨냥하여 교세를 확장하려는 이들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개신교 신자라고 해서 모두 같은 신자는 아니다. 개신교인들 가운데에는 그리스도를 향한 진심어린 헌신을 하며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진솔한 이들이 많으며, 천주교에 대해서도 호의를 갖고 있는 이들도 적지 않다. 내가 만난 목사님들 가운데에는 가톨릭교회에 대해 존경심을 갖고 있으면서도 신자들에게 그런 호감을 표현할 수 없어서 답답해하는 이들도 많다. 한국 개신교의 부패지수를 생각하면 자기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는 개신교인들도 많아지고, 교회의 분열을 넘어 일치를 지향해야 한다는 열린 개신교인들도 많다.
문제는 우리 가톨릭 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개신교에 대한 오해나 편견, 그들만큼 성경에 대한 지식도 없고, 선교적 열정도 없이 주일미사나 판공성사 정도로 의무를 채우는 형태의 습관적인 신앙이다. 가톨릭 신자라고 모두가 세례성사로 구원이 예정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교회헌장’에서도 이 점은 분명히 밝히고 있다. “교회에 합체되더라도 사랑 안에 머무르지 못하고 교회의 품 안에 ‘마음’이 아니라 ‘몸’만 남아 있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 그러나 교회의 모든 자녀는 자신의 뛰어난 신분을 자기 공덕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특별한 은총으로 돌려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여야만 한다. 그 은총에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응답하지 않는다면 구원을 받기는커녕 더욱 준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14항)
교황님이 선포한 ‘신앙의 해(2012년 10월 11일~2013년 11월 24일)’를 시작한 가톨릭 신자라면 한 번쯤 깊이 묵상해볼 문구가 아닌가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