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목정보 9월호 원고
개신교와의 대화 2 - 한국 개신교를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송용민 신부
(인천교구 삼산동 성당주임/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한국천주교 주교회의에서 교회일치운동을 시작한지 10여년이 되었는데 여전히 주위 사람들은 내게 묻는다. 개신교와의 대화가 가능하냐고. 솔직히 나 역시 독일에서 오랜 유학 생활을 하는 동안 갈라진 교회들 상호 간의 일치와 화해의 노력을 못 본 것은 아니지만, 본격적인 일치운동에 뛰어들기 이전까지는 목사님을 개인적으로 알거나, 개신교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대부분의 가톨릭 신자들은 개신교에 대해 오해와 편견이 가득 찬 상식이나 주관적인 판단으로 개신교를 폄하하거나 비난하는 데 익숙하지만, 일치와 화해를 위해 서로를 이해하고 배우는 과정은 소홀히 생각한다. 우리가 여전히 선교 국가라는 입장이 강한 탓일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어 놓은 개신교와의 대화를 더 어렵게 만드는 것은 유감스럽게도 일반 신자들보다도 성직자들이나 수도자들, 미래 사제가 될 신학생들이 개신교에 대해서 일반적인 상식을 넘어서지 못하는 수준의 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개신교에 관해 굳이 알 필요를 못 느끼고, 그것이 사목생활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오히려 일부 배타적이고 과격한 개신교 교단의 행패에 대해 분노하거나, 수준 이하라고 치부하기 일쑤고 그 바람에 ‘장자의식’을 가진 가톨릭 신자들은 한국의 개신교인들을 ‘서자취급’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다행스럽게도 근래에 주교회의에서 부제들을 대상으로 교회일치와 종교간 대화를 위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거나, 신학교에서 교회 일치와 관련된 신학생들을 위한 강좌가 개설되고 있는 점은 고무할 만하다. 나도 개인적으로 특강의 기회가 되면 교회일치와 종교간 대화가 오늘날 문지방 위에 선 신앙인들에게 관심을 가져야할 중요한 주제임을 강조한 바 있다. 서울 대교구 총구역장 피정 때 교회일치운동의 당위성과 현실에 대해 특강을 들은 평신도들이 개신교에 관해 가졌던 오해와 편견을 극복하거나 가톨릭교회가 개신교와 함께 하는 교회일치운동의 방향과 당위성이 무엇인지 배우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사실 한국 천주교 신자들 가운데 교회의 역사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진 신자들은 드물다. 깊은 종교심 덕분에 마음의 평화를 찾기 위한 영신수련이나 교회의 인격적 친교를 중시하기는 해도 보편적인 교회 의식이나 역사의식을 갖기란 쉽지 않다. 그나마 한국 천주교의 역사에 관해서는 늘 순교자들의 삶을 되짚어 보면서 자긍심을 가질만한 순교 역사를 기억하기는 하지만, 초기 교회부터 2천년동안 가톨릭교회가 어떤 과정을 거쳐 우리 민족에게 전래되었는지를 아는 일은 배울 기회도 없고, 굳이 알아야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하는 신자들이 많다. 하물며 같은 그리스도인이면서도 갈라진 형제로 불리는 개신교인들을 이해할 수 있으리란 기대는 갖기 힘들다.
한국 천주교가 조선 후기 유학과 유교 문화가 만들어놓은 계급사회와 정치적 폭정 등의 현실적 모순을 넘어서 보편적 천주신앙이나 평등사상, 고통을 짊어지는 십자가의 신비라는 새로운 세상을 향한 희망 속에서 전래되었다면, 한국 개신교는 천주교 박해가 끝나고 더 이상 쇄국정책을 지탱하지 못한 채 서구 열강의 세력에 문호를 연 근대화 과정 속에서 전래되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특히 19세기 후반 시작된 열강들의 제3세계 선교정책이 때마침 신미양요(1871년) 이후 미국 선교사들에게 선교의 기회를 제공하면서 개신교 선교는 근대화와 맞물려 전개되었다. 미국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들은 근대화의 초석이 된 교육시설, 의료시설, 복지 시설들을 세우면서 당대 지식층들을 교회로 적극 수용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오늘날의 연세대학교, 세브란스 병원, 배재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등은 초기 개신교 선교사였던 알렌(Allen), 언더우드(Underwood), 아펜젤러(Appenzeller) 등을 통하여 세워진 근대적 시설로 개신교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한국 개신교는 특히 한국인의 종교심성 속에 깊이 새겨진 새벽기도의 전통과 무당의 빙의를 통한 종교체험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교세를 확장해나갔다. 정한수를 떠놓고 천지신명께 치성을 바치던 민간신앙은 개신교의 새벽기도회 전통으로 이어져 하나님께 치성을 다하여 기도하면 축복을 받는다는 현세적 논리로 성장했다. 온 몸으로 한(恨)을 풀고 복(福)을 나누는 무당의 굿 정신을 통하여 화해와 치유라는 종교적 논리를 지탱해온 한국 무(巫) 정신은 개신교의 성령대부흥회를 통하여 종교적 체험의 원리로 발전하였다.
실제로 한국 개신교의 결정적인 발전은 1905년 평양에서 열린 대부흥회를 통하여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이 부흥회는 당시 한국의 농경사회에서 뿌리 깊게 박혀 있던 비복음적 태도들, 즉 매음, 술취함, 방탕, 게으름 등의 한국 사회의 고질병들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치유하고자 하는 외국 선교사들의 계도와 한국 개신교인들의 회심의 체험을 통하여 새로운 전기가 마련된 셈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한국 개신교의 전통인 술과 담배를 금하는 것도 이 부흥회를 통하여 선교사들이 한국 개신교인들에게 요구한 윤리적 회심이나 신앙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요구하는 데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초기 개신교 선교사들은 대체로 미국의 다문화 속에서 청교도 정신을 갖고 세속화에 반대하며 ‘오직 예수 만으로’, ‘오직 믿음 만으로’, ‘오직 성경 만으로’를 외친 배타적인 복음주의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이들은 타문화에 대한 존중이나 적응보다는 복음적 가치를 한국 땅에 옮겨 심는 데 몰두하였기 때문에 한국 천주교에 대한 비판은 물론 한국의 민속 신앙이나 불교와 같은 고유 신앙에 대하여 배타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특히 이미 신앙이 전래된 천주교와는 차별화된 신앙을 전하기 위해 초기 개신교 선교사들은 하늘의 주인을 섬기는 천주(天主) 신앙과는 달리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란 뜻의 ‘기독교’란 용어를 개신교를 지칭하는 용어로 썼다. 아울러 마리아에 대한 공경을 강조해온 천주교 신앙과는 달리 예수를 믿는 종교란 뜻에서 ‘예수교’란 용어를 강조하면서 천주교와 차별화된 선교 정책을 지향했다.
이런 탓에 우리 사회에서는 기독교와 천주교는 마치 다른 종교인양 치부되었고, 충분한 신학 교육과 열린 신앙을 갖지 못한 개신교 일부 목사들에 의해 천주교는 이단이요, ‘마리아교’라는 오명을 받기에 이르렀다. 솔직히 개신교인들이 천주교를 마리아교로 치부하는 데에는 천주교 신자들이 적지 않게 마리아 공경을 마리아 흠숭과 같은 형태로 신앙해온 것과 무관하지 않다. 언젠가 개신교 목사님들 앞에서 가톨릭을 소개하는 강의 끝에 한 목사님이 아무리 천주교가 성모님을 공경하는 것일 뿐 신앙의 대상이라고 하지 않아도 여전히 그들 눈에는 마리아상 앞에서 기도하고, 묵주기도를 열심히 바치며, 성당 마당에 홀로 선 마리아에 대한 천주교 신자들의 태도를 보면 마리아에 대한 신앙이라고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말을 하곤 한다.
한국 개신교는 독특한 선교 역사 속에서 교세를 확장하여 오늘날 전 세계 단위 교회로는 세계 10대 교회 중에 무려 5개의 개교회가 한국에 있을 정도로 급성장하였다. 교회의 대형화는 한국인의 집단의식과 인맥 형성, 이기적 집단주의뿐만 아니라, 교회의 물량주의나 세속화에 한 몫을 해오고 있다. 오늘날 개신교 내부에서 자체적인 정화 운동이나 교회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지만 여전히 대형화된 한국 개신교가 참된 복음적 삶을 우리 사회에서 주도해 나가기 위해서는 일부 뜻 있는 목사들과 교회들의 노력 외에 신앙과 삶을 조화시키며 보편적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는 교회로 환골탈태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등록교인 10만명, 활동교인 5만명의 서울 명성교회.
세계 단위교회 5위의 이 교회를 세운 담임목사 김삼환 목사는 새벽 기도회 전통을 살려서
오늘날의 교회를 성장시켰다고 합니다.
여전히 새벽 기도회에 만명의 신자가 나온다니 상상이 가십니까?
개신교의 열정만큼이나 그들의 보편적 신앙의 열정이 그리워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