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목정보 10월호 - 문지방 신앙
개신교와의 대화 3
개신교 신앙, 어떻게 다른가요?
송용민 신부
(인천교구 삼산동 성당주임/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우리 사회는 전통적인 한국인의 종교심성이 그리스도교 신앙에 뿌리를 내려 성공적으로 토착화된 사례에 속한다. 특히 가톨릭교회 보다는 개신교회가 한국인의 토착신심을 습합하여 놀라울 정도로 선교의 결실을 맺었고, 그 결과로 세계 교회에서도 그 예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단기간 내에 대형교회로 발전하였다. 특히 서구의 선교사들을 통해 복음이 전해진 제3세계 가운데 가톨릭 신자보다 개신교 신자들이 두 배가량 더 많은 경우도 드문 예이다. 개신교의 공격적인 선교와 근대화의 물결과 맞물려 교세 확장은 물론 집단적 가족주의가 발달한 우리 사회에서 개교회 중심으로 인맥을 형성하고 전형적인 축복신앙을 강조한 개신교의 선교가 성공을 거둔 데에는 무시할 수 없는 신앙의 독특성도 한 몫을 했다.
한국에서 개신교는 가톨릭교회와 차별화하는 정책을 통해 하나의 독립된 종교로 이해되는 경향이 짙다. 같은 그리스도교이면서도 그리스도의 한자어인 ‘기독(基督)’이란 말을 개신교 신앙을 대변하는 용어로 전용하다보니 마치 천주교(天主敎)와는 구별되는 기독교란 종교가 별도로 존재하는 것처럼 인식되었다. 그리고 천주교가 초기부터 마리아 공경 신심이 강하여 마치 마리아를 믿는 ‘마리아교’로 오해된 반면 개신교는 정반대로 예수를 믿는 종교란 의미에서 ‘예수교’란 용어를 많이 사용하는 편이다. 대부분 한국 개신교의 80%이상의 주류를 형성하는 ‘장로교’의 간판은 ‘대한예수교 장로회’, ‘대한기독교장로회’로 양분되는 특성을 지닌다.
그런 탓인지 우리 사회에서는 기독교와 천주교를 마치 다른 종교인양 오해하고, 천주교는 기독교의 이단이나 아류인양 치부하는 일부 개신교 교단과 복음주의 신학자들의 입장도 없지 않다. 그러다보니 개신교 신자가 천주교로 교회를 옮기면 ‘개종’이란 단어를 쓰곤 하는데, 사실 말 그대로 따진다면 종교를 바꾼 것이 아닌데도 습관적으로 개종이란 단어가 씁쓸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개인적인 생각에서는 ‘개종’이란 단어보다는 ‘회심’이란 단어를 쓰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한다.
대부분의 한국 천주교 성직자와 평신도들은 개신교의 신앙 전통과 역사에 관하여 잘 알지 못한다. 가톨릭의 오해 속에서 개신교를 서자취급하거나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갈라져나갔기에 그들이 가톨릭교회로 돌아오지 않는 한 교회 일치는 어렵다는 편견도 갖고 있다. 개신교가 가톨릭교회를 일방적으로 비판하거나 이단시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말도 안 된다고 치부하면서도 정작 우리와 개신교의 차별화된 신앙 전통을 이해하는 일은 쉽지 않다.
가톨릭 신앙은 보편성을 토대로 신앙 전통을 이끌어왔다. 하느님의 보편성은 인종, 문화, 언어를 넘어 모든 인간에게 베풀어진 하느님의 구원업적에 관한 통찰로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이 보편성의 원리가 때로는 넓은 포용성을 갖다보니 가톨릭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데 신자들은 혼란을 느끼는 면도 없지 않다. 더욱이 가톨릭의 고유한 교리나 신심 등의 오랜 전통과 그 전통을 해석해온 교회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면 가톨릭 신앙의 풍요로움을 자칫 몇 가지 편협한 교리로 국한시켜버릴 위험이 상존한다. 이 점에 있어서 개신교 신앙이 어떻게 가톨릭 신앙과 차별화된 신앙 전통을 지탱해왔는지를 살펴본다면 도움이 될 것이다.
마르틴 루터(M. Luther)의 종교개혁 이래 개신교는 세 가지 기본적인 신앙 원리에 의해 지탱되어 왔다. 오직 성경만으로(sola scriptura), 오직 믿음만으로(sola fide), 오직 은총만으로(sola gratia). 이 세 가지 원칙은 가톨릭교회가 종교 개혁 당시 지탱해온 전통에 대한 반발로 시작되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첫째로, ‘오직 성경만’을 강조하는 개신교 신앙에는 가톨릭이 초기 그리스도교 신앙을 로마 제국의 이교도적인 제도와 신심의 뿌리 위에 성장시키면서 신앙의 순수성이 왜곡시켰다는 비판과 관련되어 있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이교도 신심과 문명과의 만남을 통해 성경의 내용과는 무관한 인간적 관습과 전통들이 교회의 고유한 전례, 신심, 제도의 요소들에게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다. 가톨릭이 강조하듯 성경의 경전화는 사도 신앙의 전통과 교회의 제도적 전승의 토대에서 이루어졌기에 전승의 가치가 강조되었지만, 게르만족 이동 이후 전혀 다른 이교도 문명과 만나 그리스도교 신앙 전통과는 상관없는 전승적 요소들이 순수한 신앙전통들을 왜곡해온 역사도 없지 않다. 물론 가톨릭교회는 이 점을 토착화의 관점에서 접근하여 수용하고, 이에 대한 자연스런 신앙의 역사성을 지지하는 반면, 개신교는 이를 그리스도 복음의 순수성과 성경이라는 절대 유일한 규범을 훼손하는 세속화의 관점에서 비판한다.
그래서 중세시대 지나치게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 인간적 관습이 신앙전통을 대신하는 무분별한 성사 남용이나 신심과 제도의 발전이 개신교 종교 개혁가들에게는 그리스도 신앙의 순수성을 훼손시키는 행위로 비춰진 것이다. 그래서 개신교는 가톨릭이 성경과 같은 권위를 인정하는 교회의 거룩한 전승(聖典) 역시 성경에 토대를 두지 않은 것은 올바른 전통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개신교는 오직 성경을 중심으로 하느님의 계시진리를 이해하려는 입장을 지지하면서 성경에 대한 관심과 애정, 그리고 말씀에 대한 충실성을 강조해왔다. 그들이 가톨릭의 신심과 제도, 영성과 전통적 요소들, 가령 마리아 공경과 성인공경 전통, 교계제도, 전례적 요소와 성상과 성물을 등 거부하는 것도 이런 그들의 고유한 신념과 무관하지 않다.
둘째로, ‘오직 믿음만’을 강조하는 개신교 신앙에는 믿음의 실천과 선업(善業)을 강조해온 가톨릭 신앙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다. 이미 마르틴 루터는 중세 가톨릭의 지나친 인간 자유의지의 협력과 죄에 대한 보속을 강조해온 신앙 전통이 사도 바오로가 로마서에서 비판한 율법적 요소라 보고 참된 구원은 인간이 율법을 지키는 의지에서가 아니라 구원을 주시는 하느님을 향한 믿음의 절대성을 통해서만 확보된다는 신념을 지지했다. 특히 중세시대 죄에 대한 보속이 지나치게 무겁고, 죄의 벌에 대한 공포가 신심의 중심을 차지하면서 가톨릭교회의 지나친 윤리적 책무와 의무가 신자들의 순수한 믿음 생활을 통한 구원 체험을 저해하는 요소로 비판되었다. 개신교인들이 어떠한 경우에도 믿음을 강조하고, 인간의 이성적 전통 보다는 신앙의 절대성에 대하여 우선순위를 두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특히 이성적 전통을 중시해온 가톨릭 신앙과는 달리 하느님을 향한 인격적 믿음과 체험에 대한 강조는 개신교인들이 통성기도나 감성적 체험을 신앙생활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계기가 된 것도 사실이다.
셋째로, ‘오직 은총만’을 강조하는 개신교 신앙에는 가톨릭교회가 강조하는 성사적 신앙, 즉 표징을 통해서 구원의 효과를 드러내고자 하는 성사의 남용과 교회의 지나친 간섭에 대한 비판이 들어있다. 하느님의 은총의 무상성을 가톨릭교회가 거부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개 가톨릭 신앙은 세상의 볼 수 있는 표징들을 통해 하느님의 업적과 구원 효과가 전달된다는 성사(聖事)적 중개성을 강조한다. 볼 수 없는 하느님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셨듯이, 그리스도의 구원 업적과 그 현존을 드러내주는 것은 바로 교회이고, 이 교회가 신자들의 일상 속에서 구체적인 상황마다 일곱 가지 성사의 표징들을 통해 그리스도의 구원효과를 전달한다고 가톨릭 신앙은 강조한다. 그 결과 교회는 언제나 하느님 은총을 수용하고 전달하는 중개자이고, 가톨릭교회 밖에서는 하느님의 은총이 전달되지 않는다는 오랜 신념을 지켜왔다. 그러나 종교 개혁가들은 하느님의 은총의 무상성을 로마 가톨릭교회가 제도라는 이름으로 묶고 이를 관리하며 은총을 중개해주는 교계제도와 교도권의 역할을 강조하다 보니 하느님 은총의 풍요로움과 자유와 해방을 목표로 하는 은총의 특성을 막아버렸다는 비판을 하기에 이르렀다.
오늘날 개신교 신자들이 교회의 간섭 없이 직접 하느님을 체험하고 싶어 하고, 교회의 성직자나 교계제도를 통하지 않고 하느님과 은총의 직거래를 선호하는 입장은 이러한 개신교의 고유한 신앙 전통의 뿌리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가톨릭교회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이후 이러한 개신교의 전통에 대한 비판을 받아들여 상당부분 개신교 신앙 전통을 수용하고, 이에 대한 긍정적인 가치를 받아들인 면도 없지 않다. 하지만 개신교의 ‘오직~만으로’의 신앙 전통이 지나치게 신앙을 배타적이고 편협한 영역으로 몰아세웠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특히 한국 개신교가 지닌 보수적 배타성도 개신교의 전통적인 신앙 원리에 ‘복음주의’라는 배타적인 신앙전통에 뿌리를 내리다 보니 가톨릭 신앙과의 신앙 대화의 어려움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다.
가톨릭의 포용성이 과연 어디까지냐는 일선 사목자들의 볼멘 소리가 개신교인들에 대한 대화를 가로막는 면도 없지 않지만, 개신교 신앙의 이면에는 가톨릭에 대한 비판과 불만의 반향이 숨겨 있다는 점을 기억하면서 자기 반성적 요소로 생각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안식년때 베를린을 방문했을 때 찾았던 베를린돔입니다.
베를린에서 가장 중심에 있는 성당이라 생각하고 주일미사 시간을 맞춰 갔더니 개신교 교회였더군요.
종교개혁 이후 성당들이 개신교에 의해 바뀌면서 외형은 성당인데 내용이 개신교가 된 곳들이 많습니다.
덕분에 개신교 예배에 본의 아니게 참석하게 된 의미있는 시간이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