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목정보 4월호 원고)
대화할 것인가? 대결할 것인가?
대화와 소통, 일치와 협력은 21세기를 이끌어가는 패러다임이라고 말한다. 가톨릭교회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65)를 통하여 세상과 대화하고, 소통하기 위하여 현대 세계에 적응(aggiornamento)을 선택한 것도 이러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읽어낸 공의회 교부들과 예언자적인 안목으로 시대의 정신을 읽어낸 일군의 신학자들 덕분이었다. 교회가 자신의 소명을 “시대의 징표를 읽어내고 이를 복음의 빛으로 해석”(사목헌장 4항)하는 것으로 삼으면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봉사와 도구적 역할을 자청한 것도 우리 시대의 요청과 무관하지 않다.
공의회를 통하여 현대 가톨릭교회가 추구한 가장 강력한 종교적 이념은 ‘보편성(catholic)’이다. 보편성은 시대의 정신을 넘어 온 인류를 하나로 묶어 주는 인류의 보편적인 이상(理想)과 갈망에 대한 답변인 동시에, 전통과 관습과 갈등을 겪고 있는 현실의 모순과 오해를 풀어낼 수 있는 대화와 화해의 발로이기도 하다. 어느 시대, 어떤 문화와 가치관, 정신세계 속에서도 인류가 찾는 보편적인 가치들을 그리스도 신앙의 언어로 풀어내려고 노력하는 가톨릭 신앙의 매력이기도 하다.
그래서 가톨릭 신앙은 그 깊이와 넓이에 있어서 다른 종교와는 다른 역동성을 지닌다. 보편적 진리를 찾고 이를 신앙의 언어로 수용하는 진리에 대한 갈망의 깊이가 있는 반면, 비록 가톨릭교회와 가르치는 바와 다르더라도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을 토대로 다른 역사와 전통, 종교적 이념을 놀라운 방식으로 포용하고자 한다.
초대 교회는 유대교 전통의 뿌리를 상실하지 않으면서도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이스라엘 민족이 하느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으며 전해준 전통적인 신앙의 가치들을 수용하였다. 창조신앙과 계약신앙, 십계명의 윤리적 가르침과 예언자들의 전통에서 구원 신앙에 이르기까지 유대교의 전통을 그리스도 신앙으로 창조적으로 수용하고 해석하였다.
고대 교회가 당면한 복음의 증거는 곧바로 그리스-헬레니즘 문화와의 만남 속에서 철학적 이성과의 대화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스도 신앙의 체험은 전혀 다른 문화와 정신적 유산 속에서 발전한 인류의 철학적 이성과 대화하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복음이 철학이 찾는 참된 지혜의 응답임을 많은 교부들이 설파하였다.
가톨릭 신앙이 로마 제국에서 받아들여지면서 신앙은 세상과 대화하기 시작하였고, 순교와 박해 속에서 성장한 강한 종교심은 세상 속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현실의 신앙으로 성장하였다. 교회는 로마의 이교도적 전통을 그리스도 신앙으로 창조적으로 재해석하였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온 민간신심의 전통들을 그리스도교 정신으로 교화시켰다. 중세 가톨릭교회는 독특한 문화와 가치관으로부터 이어온 고유한 신앙 감각을 그리스도교적 신앙 감각으로 변용, 승화시키는 토착화 작업을 지속시키면서 중세의 고유한 가톨릭 신심과 전통을 만들어냈다. 마리아 신심, 성화상 공경, 사제직의 계승, 교회 예술의 창조적 발흥이 동시대의 시대정신이 되었다.
하지만 교회의 세속화는 역사 속에서 순례하는 교회의 죄성을 드러내었고, 교회를 쇄신하고자 하는 갈망은 종교개혁이라는 교회 분열로 이어졌다. 근대의 신심(via moderna)을 통하여 중세의 신적 권위와 제도 교회의 교권과 전통의 한계를 넘어 인간의 자아에 대한 계몽과 새로운 신앙에 대한 열정은 하나인 가톨릭교회의 일치에 심한 상처를 남겼다. 그러나 종교개혁으로 인한 가톨릭의 자기반성은 가톨릭의 내부개혁과 교회의 새로운 재건이라는 결실을 만들었고, 개신교는 가톨릭 신앙이 잃어버린 초대 교회의 정신과 전통을 되찾을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근대의 계몽주의 이후 찾아온 신앙의 위기는 곧바로 무신론과 회의론으로 이어졌고, 종교의 무용성과 계시 사건에 대한 비판은 교회 신앙의 근본적인 위기로 이어졌다. 가톨릭교회는 이런 시대적 위기 속에서 초자연적 신앙에 대한 종교적 열망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제도교회에 대한 강화와 마리아 신심과 같은 가톨릭적 신심을 통해 세상의 유혹에 담대히 맞서 복음을 전하는 시대적 소명을 강조했다.
세계 1, 2차 대전은 인류 역사 안에서 그리스도교 신앙 세계에 커다란 변혁을 일으켰다. 이른바 인간 지성(知性)과 기술의 유토피아가 만들어낸 인류의 참혹한 폐허와 씻을 수 없는 윤리적 죄악(홀로코스트)은 신 없는 세상에 대한 허망한 현실을 마주하게 했다. 인간의 실존적 불안을 직시한 실존주의 철학자들의 경고와 역사 속에서 제도화된 절대적 진리에 뿌리를 내리려던 가톨릭교회의 종교적 교만에 자성의 기회를 주었다.
가톨릭교회는 이러한 역사 속에서 교회가 마주한 시대정신과 문화적 갈등들과 때로는 대화하고, 때로는 대결하면서 정체성을 찾아왔다. 보편성은 인간이 찾는 궁극적 가치이지만, 보편성을 찾아가는 여정은 빛과 어두움의 양면성 속에서 여전히 순례해야 하는 교회의 본질을 만나게 해준다.
그렇다면 오늘날 문지방 위에 선 우리 신앙인들은 우리 시대의 정신들과 어떻게 마주해야 할까? 우리는 우리의 그리스도교적 신념과 전통이 다른 종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며, 가톨릭교회와 역사 속에서 갈라진 채 반목과 오해의 벽을 넘지 못하는 개신교인들을 어떻게 마주해야 할까? 물질문명의 놀라운 세속화라는 현상을 신앙의 위기로 바라봐야하는가? 아니면 물질적 풍요 속에서 영적 공허감을 느끼며 영혼의 안식처를 찾는 현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호기(好機)로 여겨야할까?
오늘날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갈림길에 서 있다. 현실 속에서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하여 세상과 맞설 것인지, 아니면 세상에 녹아 들어가 참된 삶의 행복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주는 소금이 되거나 어두움 속에서 빛을 찾는 이들에게 작은 불빛이 되어줄 것인지 갈등하고 있다. 신자들은 한국 사회가 추구하는 행복의 가치기준들을 무시할 수 없으면서도 복음이 요청하는 절대적 자기 비움이나 영성적 의미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한다. 물질적 풍요가 가져다주는 행복과 비교우위를 찾으려는 사회적 기준들을 무시하지 못한다. 그러나 교리교육과 강론대에서 듣는 복음적 요청들은 때로 세상 속에 살면서 대화하지 못하고 대결만 하라고 요구하는 순교의 정신을 강요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필자 역시 본당 신부로 살아가면서 그 동안 학술적인 강단에서 역설했던 신학적 가치들이 현장 교회에서 수용되기에 많은 괴리감이 있음을 고백한다. 사제들이 복음적 삶을 살지 못하면서도 신자들에게 복음적 삶의 가치들만을 요청하는 이율배반적인 삶의 모순을 나 역시 피할 수 없음을 고백한다. 하지만 오늘날 신앙인들은 과거처럼 일방적인 복음에의 열정과 순교만을 강요하기에는 너무 많은 가치들의 혼란을 느낀다. 가톨릭 신앙이 가르치는 오랜 전통들에 대한 재해석이나, 교회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새롭게 적응하고자 하는 교리와 사목에 대한 창조적 이해를 신자들뿐만 아니라 사목자 자신들도 충분히 소화하지 못한다.
신학교 강단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필자 역시 오늘날 사목의 현실이 교회가 추구하는 이상과 거리를 좁히기에는 어려움이 많다는 것에 동의한다. 하지만 역사가 말해주듯 이상은 언제나 현실과의 괴리감 속에서 현실을 되돌아보게 하는 ‘의미기획’의 동기를 일으키는 중요한 잣대를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이 말은 교회가 가야할 길을 분명히 알지 못하면서 현실에 대한 자조적인 비판과 회의는 결코 종교적 삶 안에서 ‘의미’를 추구하는 현대인의 신앙 감각을 채워주지 못한다.
가톨릭 신앙은 현대인이 세상의 다원적 가치 속에서 살면서 참된 의미를 묻고, 찾아가는 의미기획의 여정에 적절한 인도자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가톨릭교회가 인간이라면 누구나 찾는 종교적 삶에 대한 열망, 즉, 영원한 것, 참된 것, 선하고 절대적인 것, 영적인 기쁨과 평화, 희망, 사랑, 믿음과 신뢰라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들을 찾는 종교적 갈망에 해답을 주는 인생의 멘토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가톨릭교회가 오늘날 문지방 위에 선 신앙인들에게 올바른 의미의 체험을 만들어 주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특히 가톨릭 신자들이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처해있는 현실 가운데 가장 혼란스럽게 여기는 세 가지 영역에 대하여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첫 째는 인간의 생명과 공존의 문제, 즉 왜 우리는 생명을 소중히 여겨야 하며, 생명 윤리와 더불어 21세기 화두라고 불리는 생태계 위기에 맞서 환경재앙에 대처해야 하는 지, 둘째로 이 땅에 참된 인권과 정의를 추구하기 위한 가톨릭교회의 노력과 한계는 어디에 있는 지, 그리고 셋째로 현대 사회가 심어준 다원적 가치관 속에서 참된 자유와 의미를 완성시켜주는 종교적 가치들을 가톨릭교회는 어떻게 추구하고 있는 지 살펴봐야 한다. 이러한 노력은 원론적인 교회의 입장을 말하기보다는 그런 교회의 입장이 왜 오늘날 혼란을 느끼는 신자들에게 참된 그리스도인의 길인지를 밝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우리는 다시 한 번 물어야 한다. 21세기 대화와 소통의 패러다임 속에서 우리는 진정으로 세상과 대화하고자 하는가? 아니면 끊임없이 대결하고자 하는가? 이 물음은 우리 교회가 앞으로 나가야할 예언자적 소명을 발견하는 데 중요한 물음이 될 것으로 확신한다.
송용민 신부
(인천교구 삼산동 성당 주임/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