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목정보 5월호 원고
서로 다른 종교끼리 대화가 가능할까요?
송용민 신부
(삼산동 성당주임/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언뜻 우리의 현실을 생각하면 서로 다른 종교끼리 정말로 진솔한 대화가 가능한 지 의문이 들 수 있겠다. 인류의 역사가 종교적 이념 간의 갈등과 투쟁의 역사였고, 실제로 오늘날에도 종교적 배타주의와 근본주의적 태도가 종교 간의 갈등을 부추기면서 인류의 평화 공존을 방해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둘러싼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와의 오랜 갈등과 그로 인한 반유대주의가 낳은 유대인 대학살(Holocaust), 예루살렘 성지를 탈환하겠다는 일념으로 벌인 십자군 전쟁으로 인한 이슬람교와 그리스도교와의 갈등, 같은 그리스도 신앙 안에서 서로 다른 신앙의 해석으로 인해 벌어진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이의 전쟁과 반목, 오늘날에는 아시아 일부 국가에서 이슬람 신도들에 의해 자행되는 무차별한 그리스도인 탄압은 물론 이슬람 근본주의자들과 미국의 제국주의적 정책의 충돌로 인한 종교적, 정치적 갈등 등을 생각하면 종교 간의 대화나 화합은 요원한 이야기처럼 들린다. 비교적 종교 간의 갈등이 표면화되지 않았던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들어 종교 간의 갈등이 일부 개신교인들의 배타적 선교와 타종교의 신념을 우상숭배로 치부하는 극단적 복음주의 정서가 정치세력을 업고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현실도 간과할 수 없다.
‘종교(宗敎)’란 말은 본래 서양에서 ‘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외경심과 종교의례’를 뜻하는 라틴어의 ‘religio’를 일본에서 처음으로 한자 문화권으로 번역할 때 수용되었다. 본래 ‘종교’란 말은 불교 경전에 나오는 ‘부처님의 으뜸 되는 가르침’을 뜻했다. 서양의 종교 전통에서는 ‘으뜸 되는(宗)’ ‘가르침(敎)’이 인격적 신에 대한 믿음으로 강조된 반면을 동양에서는 인간 본성의 근원인 ‘대자연(大自然)’과의 관계 안에서 삶과 죽음의 문제를 풀어내는 것임을 생각하면 왜 동양에서는 종교적 신념들 사이에서 극단적인 갈등이 상대적으로 적었는지 알 수 있다. 가령 도교의 도(道)의 정신이나, 불교의 공(空) 사상, 유교의 인(仁) 사상처럼 동양의 종교들은 인간의 보편적이고 자연적인 종교심을 토대로 자연과의 합일이나 삶의 고통으로부터의 해방, 하늘의 뜻을 땅에서 펼치는 윤리적인 삶이 종교의 관심이었기 때문에 이들 종교 간의 이념적 갈등 보다는 종교적 요소들의 습합이나 혼합, 토착화의 과정을 오랫동안 거쳐 온 것이 사실이다.
종교학자들은 인류 문명이 발생한 지역적 특성 가운데 인간이 찾는 가장 중요한 삶과 죽음의 문제를 풀어내려는 종교의 특성을 구분한 바 있다. 서양의 종교는 고대 근동의 사막형 기후에 토대를 두고 유목 생활을 하던 삶의 방식 때문에 자신들을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지켜줄 절대적인 유일신 신앙이 성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종교적 계율이나 윤리적 명령들도 다른 형태의 신들과 타협하지 않는 인격적인 신과의 절대적인 신뢰 속에서 성장한 유대-그리스도교의 ‘계약 신앙’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하지만 아시아의 몬순형 기후에서 발생한 동양의 종교들은 대체로 땅에서 얻어지는 풍요와 다산 등의 생존에 필요한 요소들에 관심이 컸기 때문에 이들을 수호하고 지켜줄 보호신들, 혹은 다수의 신령(神靈)들의 역할이 중요했다. 초월적 절대신에 대한 믿음보다는 인간의 삶의 영역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신성(神性)의 거룩함(聖)을 일상 속에서 체험하는 일이 동양의 종교에서는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도교의 신선(神仙)이나, 무교와 민간신앙의 신령(神靈)들의 역할, 불교의 보살(菩薩) 신앙, 유교의 성인(聖人) 등은 각기 동양 종교의 전통에서 인간이 세속에서 겪는 다양한 문제들을 풀어내고자 하는 종교적 관심의 표출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동양의 샤머니즘적 전통은 서양의 인격적인 유일신 전통에서 나온 배타적 신관과 어쩔 수 없는 충돌을 겪어야 했다. 그리스도교가 제3세계 선교의 현장에서 선교지의 토착 종교들을 미신으로 치부하고, 그들의 종교적 신념을 이단시하거나, 사탄의 소행으로 치부해버린 역사들을 생각하면 더 그렇다.
하지만 한국의 종교들도 동양의 종교적 전통의 뿌리 속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종교 간의 갈등은 상대적으로 크지 않았다. 물론 고려시대의 불교 정책이나 조선시대의 억불숭유 정책과 같이 국가 통치의 이데올로기로 종교적 신념이 절대화된 적은 있지만, 그렇다고 한국인의 뿌리 깊은 종교심이 이들 종교들에 의해 사라진 적은 없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샤머니즘의 전통에 뿌리를 둔 독특한 무교(巫敎)적 심성 속에서 발전했다. 학자들에 따르면 한국인의 기층 심성을 형성하고 있는 무(巫)의 정신이 초월적 신성에 대한 갈망과 세속 안의 조화로운 삶에 대한 종교적 욕구로 표출되었다고 한다. 전통적인 무당의 굿에서 보여주는 ‘한 맺힘’과 ‘한 풀이’의 정신이 한국인의 종교 심성 안에 깊이 간직되어 있기 때문에 어떠한 종교도 이러한 기층적인 종교심을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뿌리를 내릴 수 없었다는 것이다. 가령 불교가 사찰의 구조에서 산신각이나 칠성각을 세우고, 민간의 신을 섬기는 일이나, 승려가 점이나 부적 등을 처방하는 것도 무당의 사제 기능을 일부 습합한 것에 속한다. 유교가 종교적 이념으로 자리 잡은 조선시대에도 유교가 풀어내지 못한 내세의 삶과 죽음의 문제에 있어서도 무교적 전통은 왕궁의 여성들과 민간에서는 뿌리 깊은 영향을 미친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한국의 전통 종교들 사이에서도 어떤 이념적인 갈등보다는 보편적인 종교심에 대한 표현을 서로 수용하는 형태로 공존해왔다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절대적 신념에 뿌리를 둔 서양의 종교관이 동양에 전파되면서 종교적 신념이 갖는 배타성이 한국 사회에서는 더 극단적으로 표출되기 시작한 면도 없지 않다. 특히 그리스도교는 한 분이신 하느님에 대한 유일신앙의 전통 속에서 성장하여 다른 종교적 신념들에 대한 배타적인 특성을 역사 안에서 오랫동안 간직해온 터라 다른 종교들과 적지 않은 갈등을 일으켜왔다. 서구의 정복의 역사 이면에는 그리스도교를 부식(扶植)하려는 제국주의적 의도가 따라다녔고, 토착민의 토속 신앙이나 전통적인 민간신심들은 쉽게 우상숭배나 이교도적 요소로 배제된 것도 사실이다.
우리나라의 복음화의 역사를 봐도 그렇다. 자국의 문화를 존중하는 예수회의 선교의 영향을 받은 중국의 초기 선교의 역사에서 유교의 문화적 뿌리를 존중하며 복음을 전하려했던 보유론(補儒論)적 방식과는 달리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고자 세속화를 반대했던 얀세니즘(Jansenism) 전통에 선 파리 외방선교회의 선교로 복음이 전해진 우리 교회의 경우에는 민간 전통과 유교 사상의 질서 속에 녹아든 제사 문제가 커다란 걸림돌이 되었다. 물론 신앙의 눈으로 본다면 우리 선교역사의 초기에 순교자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보여준 열정이 오늘날의 천주교 신앙의 근간을 이룬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면에는 선교사들의 배타성이 보여준 문화충돌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주목할 점은 수많은 순교자들이 목숨 바쳐 구한 신앙은 당시 서구문화의 뿌리처럼 여겨진 배타적 그리스도교가 아니라, 참된 보편적 신앙을 통해 한국인의 마음 속 깊은 종교심을 일으켜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 우리들이 겪는 신앙의 위기는 한국인들 마음 속 깊은 곳에 심겨진 종교심의 뿌리와 신앙에 대한 독특한 감각을 찾지 못하는 데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만일 내가 어떤 종교적 확신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내가 세상을 바라보고 인생을 해석하는 어떤 분명한 가치관이 형성되어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이 어린 시절 교육으로부터 생긴 것일 수도 있고, 내 가치관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쳐온 전통적 가치들과 가정, 학교, 교회와 같은 권위들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의 종교적 확신이 우리나라처럼 다종교 사회에서는 다른 종교적 신념들과의 만남을 피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문제는 다른 종교적 신념들을 내가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신앙의 깊이와 넓이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 다른 종교적 신념을 일방적으로 배제하기도 하지만, 자신의 종교적 신념에 확신이 없는 이들은 혼란과 정체성 위기를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자신이 가진 종교적 심성의 뿌리와 깊이를 볼 줄 아는 사람은 다른 종교적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찾고 있는 종교적 희망에 관심을 갖고 그들과 대화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춘다. 이들은 다른 종교인들이 찾는 것이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면 결국 ‘구원’ 문제와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즉 살고 죽는 문제, 인생의 가장 큰 물음인 죽음으로부터 해방, 내적 평화, 죄로부터의 회심, 동료 인간들과의 사랑의 문제들이 모든 종교의 궁극적 관심이기 때문이다.
내가 진정으로 신앙 안에서 찾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은 다른 이들의 종교적 관심을 존중할 줄 안다. 대화는 상호 존중의 태도에서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종교인이라고 결코 나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아말로 종교 간 대화의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