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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청 그리스도인일치촉진평의회
아시아 주교회의 연합회(FABC) -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CBCK)
교회 일치를 위한 아시아 지역 주교 세미나
2006년 7월 17-21일, 서울
교회 일치를 향하는 우리의 현 위치
I.
「하나 되게 하소서」와 교회 일치 운동의 가톨릭 원칙
발터 카스퍼 추기경
서론
아시아 주교대의원회의 후속 교황 권고 「아시아 교회」(Ecclesia in Asia, 1999년)는 광대한 아시아 대륙의 교회에 대해서 논하면서 우선 “아시아에서 하느님 계획의 경이로움”(1항)을 이야기하였습니다. 또한 아시아를 “모든 인류를 위한 약속과 희망의 땅”(1항)이라고 일컬었습니다. 이 권고는 아시아가 힌두교와 불교, 도교, 유교, 신도(神道)와 같은 세계의 주요 종교들의 요람일 뿐만 아니라 그 모든 영적 문화적 부요를 지니고 있다고 칭송합니다. 그러나 아시아 주교대의원회의에서 보는 아시아는 무엇보다도 하느님께서 처음부터 당신의 구원 목적을 드러내시고 성취하신 땅입니다. 아시아에서 믿음의 선조들이 나왔으며, 아시아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셨고, 아시아에서 교회가 탄생했으며, 그리스도교 신앙은 그리스도교 초세기에 이미 중국까지 선포되었습니다. 바로 아시아에서부터 복음이 유럽 땅으로 옮겨 심어진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아시아 거의 모든 지역에서 소수 종교이지만, 지금도 아시아에는 그리스도교 신앙이 숨 쉬고 있습니다. 특히 지난 세기와 오늘날까지도 많은 순교자들이 배출되었으며, 그들이 흘린 피는 새롭게 시작된 세기에 많은 새로운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열매가 되리라 희망합니다.
그러나 「아시아 교회」는 복음화의 과제와 사명을 아시아 교회의 현재와 미래를 위한 우선과제로 이야기하면서, 다른 많은 어려움들 가운데에도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분열을 가장 큰 걸림돌 가운데 하나로 꼽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수가 다른 곳에 비하여 적은 아시아에서 분열은 선교 활동을 더욱 어렵게 합니다”(30항). 이어서 이 권고는 “주교대의원회의 교부들은 ‘그리스도인들의 분열에 대한 불신이 아시아의 복음화에 큰 장애물이 됨을’ 인식하였습니다. 실제로 자신의 종교와 문화를 통하여 조화와 일치를 찾고 있는 아시아의 수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인 사이의 분열을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반증거로 여기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주교대의원회의의 언급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일치 운동에 관한 교령 「일치의 재건」(Unitatis redintegratio)에서 “이러한 분열은 그리스도의 뜻에 명백히 어긋나며, 세상에는 걸림돌이 되고,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여야 할 지극히 거룩한 대의를 손상시키고 있다.”(1항)라고 말한 것을 반향합니다.
분명히 복음화와 종교 간 대화는 아시아의 우선과제입니다. 그러나 위와 같은 확언으로 알 수 있듯이, 교회 일치 대화를 미루어도 된다거나 교회 일치 노력이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우선과제가 아니라는 뜻은 아닙니다. 복음화와 종교 간 대화, 그리고 교회 일치 대화는 마치 형제자매와 같은 관계입니다. 이 둘 가운데 어느 하나를 배타적으로 선택할 수는 없으며, 이들은 불가분적으로 함께 연결되어 있고, 서로를 필요로 하고 또 서로를 전제로 합니다.
이에 비추어 볼 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회칙 「하나 되게 하소서」(Ut unum sint, 1995년)에서 교회 일치의 길은 교회의 길이며(7항), 따라서 교회 일치 과업은 당신 교황직의 우선적 사목 과제의 하나(99항)라고 확언하신 것은 아시아에서 사목 계획을 세우는 데에 근본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께서도 이미 당신 교황직을 시작하시던 첫날 성 시스티나 경당에 모인 추기경들에게 하신 말씀에서 같은 의지와 같은 확신을 표명하셨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도 일치하여 두 분 교황님 모두 우리에게 수난과 죽음을 앞두신 전날 밤 우리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Ut omnes unum sint, 요한 17,21). 그러므로 이러한 유언에 따라 교회 일치 운동은 전체 교회와 세계의 모든 개별 교회의 거룩한 의무이며, 모든 대륙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 개인의 의무입니다. 또한 특별히 교회 일치 운동은 주교들의 의무이며 책임입니다(주교 교령, 16항; 교회법 제383조 3항; 교회 일치 운동의 지침서, 36항 참조).
교황청 그리스도인일치촉진평의회는 2003년 11월 총회에서 세계적 관점에서 교회 일치 운동을 논의하면서 지역에 따라 교회 일치 운동의 상황이 매우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아시아의 상황은 유럽의 상황과는 다르며 따라서 아시아의 교회 일치 운동에 대해서는 다각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뚜렷해졌습니다. 이에 총회는 일치평의회와 여러 주교회의들에게 세계 각 지역의 구체적인 교회 일치 상황에 적합한 전략과 접근법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협력할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교회 일치 운동의 신학적 토대는 보편 교회 전반에 걸쳐 동일하지만 교회 일치 운동의 원리를 적용할 때에는 지역 교회의 요구에 맞추어야 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작년에 우리는 아프리카에서 두 차례의 세미나를, 라틴 아메리카에서 한 차례의 세미나를 열었습니다. 올해와 내년에는 아시아에 초점을 맞추어, 세계의 미래에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 이 광대한 대륙의 복잡한 교회 일치 운동 상황에서 비롯되는 과제들에 아시아 교회가 적절히 대응할 수 있도록 대비시키려고 합니다.
이 강의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제1부에서는 교회 일치 운동의 신학적 토대를 다루면서 특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일치 교령’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하나 되게 하소서」를 주로 언급할 것입니다. 제2부에서는 오늘날 아시아가 직면한 중요한 교회 일치 문제와 사목적 문제들, 특히 은사 운동과 오순절 운동, 그리고 그들의 개종권유에 대해서 다루겠습니다. 제3부에서는 이러한 도전들에 맞서기 위한 몇 가지 제안들과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할 것입니다. 이는 실제적인 적용에 관한 향후 우리의 논의에서 더욱 발전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일치 촉진을 위한 신학적 토대
1. 교회 일치 운동의 목적
교황 요한 23세께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하시면서 수난 전날 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제로서 아버지께 드린 기도에 나오는 복음의 명령을 염두에 두고 계셨음이 분명합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요한 17,21). 이 기도는 예수님의 유언이며, 돌아가시기 전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남기신 거룩한 뜻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의 일치를 바라신다는 분명한 확언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하나의 교회만을 세우셨습니다. 교회의 하나 됨과 일치는, 결정적으로 보편적인 평화가 실현되고 그분께서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1코린 15,28) 수 있게 당신 백성을 만방에서 모아들이시기를 바라는 하느님의 영원한 계획과 구원 의지에 부합하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교회의 하나 됨과 일치는 한 분이신 하느님,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신 성령, 하나의 세례, 하나의 신앙에 대한 우리의 신앙 고백의 중심에 있습니다(에페 4,4 이하 참조). 그러므로 하나 됨과 일치는 신약의 핵심 용어입니다. 신경에서 우리는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져 오는 교회”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일치는 어떤 부수적인 실재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과 우리 신앙의 가장 핵심에 있으며, 교회의 분열은 하느님의 뜻과 그리스도의 의지에 반대되는 분명한 죄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 일치의 촉진은 교회의 다른 많은 의무에 딸린 부차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목적 사명의 핵심에 뿌리박고 있습니다(「하나 되게 하소서」, 9.20항).
교회 일치를 촉진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에 맞갖을 뿐 아니라 ‘시대의 징표’에도 부합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일치와 평화를 깊이 갈망합니다. 침묵과 명상에 대한 사랑, 조화, 비폭력과 같은 문화적 가치들을 지니고 있는 아시아에서는(「아시아 교회」, 6항) 특히 더욱 그러합니다. 따라서 특히 이곳 아시아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에서 행복한 이들이라고 일컬어지는 평화를 이루는 첫 사람들(마태 5,9 참조)이 되어야 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가르쳤듯이, 교회는 하느님과 이루는 깊은 결합과 온 인류가 이루는 일치의 표징이며 도구(교회 헌장, 1항)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갈라져 있다면 어떻게 우리가 평화를 이루는 믿을만한 일꾼이 될 수 있겠습니까? 교회 일치의 이상은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이 믿게” 할 수 있도록 당신 제자들의 일치를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교회 일치 운동은 교회의 본성 자체에 속하는 세상 선교의 임무에 봉사합니다(선교 교령, 2항).
우리는 공의회가 교회 일치 운동을 성령의 이끄심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합니다(일치 교령, 1.4항). 오해와 후퇴도 있지만 이미 여러 전통의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는 형제애가 재발견되어 눈에 보이는 많은 열매들을 맺고 있습니다(「하나 되게 하소서」, 41항 이하). 무엇보다도 성령께서 시작하신 활동이 성령께서 바라시는 때에 바라시는 자리에서 바라시는 방식으로 완성되리라는 믿음과 희망이 있습니다.
현대 교회 일치 운동의 기본적인 방법론적 접근은 더 이상 논쟁이나 언쟁이 아닌 교회 일치 대화를 바탕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연히 자문하게 됩니다. 대화란 무엇인가? 대화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교황 바오로 6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도 채택하신 20세기의 인격주의 철학의 주요 용어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 이전의 태도들과는 달리, 대화는 서로 다른 것, 논쟁이 되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공유하는 것, 공동으로 지니고 있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우리가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지니고 있는 것은 사소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경을 공유하고 있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모든 인류의 유일한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공유하고 있으며, 성령에 대한 믿음과 하나의 세례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이 세례를 통하여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고 우리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일치 교령, 3항; 「하나 되게 하소서」, 11-14항). 이 모든 수단은 교회 일치 대화와 종교 간 대화가 질적으로 서로 다른 것임을 의미합니다. 종교 간 대화에는 이 모든 공통된 전제 조건들이 해당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공유하는 것을 강조한다고 해서 우리의 차이를 간과하거나 경시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대화 당사자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자기 교회 공동체의 신앙에 뿌리박고 있어야 합니다. 대화는 사고뿐만 아니라 은총의 교환을 의미합니다(「하나 되게 하소서」, 28항). 따라서 대화는 상대주의나 무차별주의가 아닙니다. 오히려 대화는 진리를 더욱 잘, 더욱 깊이 이해하려는 노력입니다. 대화는 최소한의 공통분모를 바탕으로 만나서 서로 메말라가는 과정이 아니라, 서로 풍요로워지는 과정입니다. 대화는 진리와 삶의 교류이며, 서로 나누고 서로 협력하고 서로에게서 배움으로써 의견을 수렴해 가고 합의에 이르는 것입니다.
교황 권고 「아시아 교회」는 풍요로운 대화를 위한 네 가지 전제 조건을 지적합니다. 첫째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선함과, 가능한 곳이면 어디에서든지 다른 교파의 교회들 또는 교회 공동체들의 신자들과 협력하고자 하는 활기찬 열망 속에서 드러납니다. 둘째는 가톨릭 교회에 대한 충실성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교회 구성원들 가운데 어떤 이들이 보여 주는 결점들을 무시하지 않고 또 그대로 받아들입니다.(수정안 - 무시하거나 부인하지는 않습니다.) 셋째는 분별의 정신입니다. 이것은 선하고 칭찬하기에 합당한 모든 것을 식별하기 위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정화와 쇄신에 대한 진지한 열망이 필요합니다”(「아시아 교회」, 30항).
이러한 의미에서 교회 일치 대화는 다른 이들만 우리에게서 배워가야 하는 일방적인 길이 아닙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우리는 개신교의 신학에서 하느님 말씀의 선포의 중요성과 성경 해석학에 대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반면 그들은 우리에게서 성사 생활과 전례를 배우고 있습니다. 나아가 가톨릭 교회는 주교직과 베드로 직무가 모든 그리스도인을 위한 성령의 은총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으며, 따라서 이를 새로운 영적 형태로 제시하여 다른 교회와 교회 공동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교회 일치 노력의 목적인 완전한 친교는 단순히 갈라진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이 어머니인 가톨릭 교회의 품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 일치 운동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교회에 바라신 완전한 보편성을 향하여 함께 나아가는 순례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그리스도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하나가 되기 위하여 우리도 서로 더욱 가까워집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 일치가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매우 명백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영적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인간 마음과 정신의 일치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강생에 대한 믿음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방식으로 우리에게 오시어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십니다. 승천하신 다음에도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들을 수 있는 말과 가시적인 표징으로 우리 가운데 현존하십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인간적 요소와 신적 요소로 합성된 하나의 복합체입니다(교회 헌장, 8항). 이는 교회 일치 운동의 목적이 가시적인 그리스도인 일치를 완전히 재건하는 것임을 뜻합니다. 공의회는 이를 같은 믿음, 특히 주님의 한 식탁에 참여하는 것을 비롯한 같은 성사 거행, 그리고 사도들의 후계자와 이루는 친교 안에서 이루는 일치라고 설명합니다(일치 교령, 2항). 이러한 일치의 세 끈은 사도행전이 예루살렘의 첫 공동체에 관하여 전해주는 바와 일맥상통합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사도 2,42).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이러한 일치는 결코 획일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충만한 보편성을 의미합니다. 곧 성령의 은총의 충만함, 모든 민족과 문화, 지역 교회, 서로 다른 삶의 방식과 생활 신분의 충만함을 의미합니다(교회 헌장, 13항).
2. “안에 존재한다”는 의미
안타깝게도, 시간이 흐르면서 첫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일치와 모든 이의 합의는 깨어졌습니다. 신약 시대에 이미, 그리고 교회 역사에 걸쳐 많은 분열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많은 것들은 치유되거나 중단되었지만 특별히 세 가지 분열은 아직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5세기의 칼케돈 공의회 이전의 구 동방 교회들의 분열, 제이천년기의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의 분열, 서방 교회 안에서는 16세기의 종교개혁과 그에 따른 여러 분열들입니다.
여기에서 물음이 제기됩니다. 참된 그리스도의 교회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 헌장’은 그리스도의 교회는 가톨릭 교회 안에, 곧 베드로의 후계자와 또 그와 친교를 이루는 주교들과 친교를 이루는 교회 안에 존재한다는 유명한 구절로 응답합니다(교회 헌장, 8항). ‘안에 존재한다’라는 표현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가장 중요한 논쟁거리 가운데 하나입니다. ‘교회 헌장’을 편찬한 주역 가운데 한 명인 G. 필립스는 이 구절의 의미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사람들이 많으리라고 예견한 통찰력이 있었습니다. 분명히 이러한 논쟁은 오늘날까지도 잦아들고 있지 않으며, 이 구절이 제기하는 논점들을 밝히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논쟁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공의회 과정 동안, 그리스도의 교회와 가톨릭 교회를 사실상 동일시하는 ‘이다’라는 표현을 ‘안에 존재한다’라는 표현으로 대체하면서 심각한 교회 일치 문제를 제기하였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교황 비오 12세의 회칙 「신비체」(Mystici corporis, 1943년)는 가톨릭 교회 밖에 있지만 그들의 원의로 교회의 몸은 아니라도 교회의 정신에 어느 정도 속해 있는 개인들을 이미 인정하였습니다. 공의회는 ‘안에 존재한다’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교회 밖에는 개별 그리스도인뿐 아니라 “교회의 요소”들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하였습니다.
공의회는 가톨릭 교회의 눈에 보이는 울타리 밖에도 여러 형태의 성화, 특히 세례 받은 이들을 그리스도의 몸에 결합시키는 성경과 세례가 있음을 인식합니다. 가시적인 가톨릭 교회 밖에는 또한 순교에까지 이를 수 있는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은총이 있습니다(교회 헌장, 15항; 일치 교령, 4항; 「하나 되게 하소서」, 12.83항). 그러므로 공의회는 온전한 교회는 아니지만 다른 교회들과 교회 공동체들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그들이 가톨릭 교회와 완전한 친교가 아니라 단지 불완전한 친교 안에 있더라도, 그 구성원들에게는 구원의 중요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성령께서 그 교회들과 공동체들을 구원의 수단으로 사용하시기를 거절하지 않으시기”(일치 교령, 4항. 교회 헌장, 8.15항; 「하나 되게 하소서」 10-14항) 때문입니다. 가톨릭 교회 밖이 교회적 진공(「하나 되게 하소서」, 13항)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비가톨릭 신자들의 구원의 문제는 더 이상 「신비체」에서처럼 개인들의 주관적 원의만을 바탕으로 주관적으로 대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객관적인 교회적 요소를 바탕으로 제도적으로 대답하여야 하는 문제입니다.
한편으로 공의회는 ‘안에 존재한다’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가톨릭 교회의 가시적 경계 밖에 존재하는 이러한 실재를 위한 여지를 남겨두고자 합니다. 다른 한편 공의회는 또한 그리스도의 교회가 가톨릭 교회 안에 구체적으로 자리한다는 주장을 유지하고자 합니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바로 거기서 세워졌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안에 존재한다’라는 말은 ‘이다’라는 말의 근본 취지를 포함합니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는 더 이상, 가톨릭과 완전한 친교를 이루지 못한 그리스도인이나 공동체와 동떨어져서 자신에 대한 이해를 공식화하지는 않습니다. 자신의 신원을 공식화하면서도 동시에 가톨릭 교회는 이러한 교회와 교회 공동체들과 대화하는 관계를 맺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안에 존재한다’라는 표현을 하나인 그리스도의 교회가 많은 교회들 안에 존재하며 가톨릭 교회는 그 많은 교회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는 다원주의 또는 상대주의 교회론의 바탕으로 삼는 것은 부적절할 것입니다. 그러한 다원주의 교회론은, 예를 들면 정교회들과 마찬가지로 가톨릭 교회가 언제나 지켜 왔으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서도 유지하고자 한 자기 이해에 상충되는 것입니다. 가톨릭 교회는 언제나 그래왔듯이 자신이 구원 수단의 완전한 충만함을 찾을 수 있는 참된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계속 주장하지만(일치 교령, 3항; 「하나 되게 하소서」, 14항), 또한 다른 교회와 교회 공동체들과 대화하는 상황 속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완전히 새로운 교리를 제시하지 않으면서, 승리주의를 버리고 전통적인 자기 이해를 실제적이고 역사적으로 구체적이며 겸손하게 공식화합니다.
이러한 실제적이고 겸손한 관점은 ‘교회 헌장’ 8항에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공의회는 여기에서 ‘안에 존재한다’라는 구절을 사용함으로써 교회의 가시적 경계 밖에 있는 교회의 요소들뿐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죄인들과 죄의 구조도 인식하고 있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자신의 울타리 안에 죄인들이 있으며 그 결과로 교회의 영적 본성이 갈라진 형제들이나 세상을 온전하게 비추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분열의 죄를 어느 정도 지니고 있으며 하느님 나라의 성장을 더디게 합니다(일치 교령, 3항). 그런가 하면, 갈라진 공동체들이 때때로 계시된 진리의 일부 측면을 특별히 발전시켜 왔기 때문에 가톨릭 교회는 분열의 환경 속에서 자신의 고유한 보편성을 온전히 실현할 수 없었습니다(일치 교령, 4항; 「하나 되게 하소서」, 14항). 그러므로 교회는 정화와 쇄신을 필요로 하며 끊임없이 참회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교회 헌장, 8항; 일치 교령 3항 이하 참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회개와 쇄신 없이는 교회 일치가 이루어질 수 없다고 여러 번 강조하셨습니다(「하나 되게 하소서」, 28항; 34항 이하; 83항 이하).
이러한 자기 비판적이고 참회적인 관점이 교회 일치 운동의 길을 위한 토대를 이룹니다(일치 교령, 5-8항). 여기에는 편견과 비난의 극복, 기억의 정화, 개인의 회개와 지속적인 쇄신, 형제애와 사랑, 성경 공부, 기도, 삶의 성화 등이 있습니다. 따라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영적 일치 운동이 교회 일치 운동의 핵심이라고 확언합니다(일치 교령, 8항; 「하나 되게 하소서」, 15-16.21-27항). 전례주년에서 영적 일치 운동의 중심이 되는 것은 매년 1월 18-25일 또는 성령강림대축일 전 주에 거행하는 그리스도인 일치 기도 주간입니다(「하나 되게 하소서」, 24항).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가까워지는 만큼 우리도 서로 가까워질 것입니다.
3. 기본 원리인 친교
공의회는 친교라는 용어와 이른바 친교의 교회론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교회 일치 운동의 개념을 더욱 심화시켰습니다. 세계주교대의원회의 1985년 임시 총회는 친교의 교회론이 “공의회 문헌의 핵심적이고 기본적인 개념”이라고 하였습니다. 실제로 공의회는 교회가 성삼위이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친교의 표상 또는 이콘이라고 정의합니다(교회 헌장, 4항; 일치 교령, 2항). 친교-일치는 그 기원인 삼위일체의 표양에 따라 획일성이 아니라 다양성 안의 일치, 일치 안의 다양성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세속적 의미에서 친교는 공동체를 이루고자 하는 개인들의 바람에서 비롯된 인간 공동체라는 ‘수평적’ 방식으로 이해됩니다. 이러한 의미의 친교는 원칙적으로 자유롭고 동등한 협력자들이 한데 모임으로써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근본적이고 참된 신학적 의미에서 친교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친교를 가리키는 그리스어 koinonia(코이노니아)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코이노니아의 본래 의미는 공동체가 아니라 참여입니다. 동사 koinoneo는 ‘함께 나누다, 참여하다, 공동으로 가지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예루살렘의 초기 교회는 빵 나눔과 기도로 코이노니아를 이루었습니다(사도 2,42). 그들은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습니다(사도 2,44; 4,33). 바오로 사도에 따르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1코린 1,9), 복음과(필리 1,5), 성령 안에서(2코린 13,13), 믿음 안에서(필레 6절), 고난과 위로 안에서(2코린 1,5.7; 필리 3,10) 코이노니아를 이룹니다. 베드로의 첫째 둘째 서간은 앞으로 올 영광에 대한 코이노니아(1베드 5,1), 하느님의 본성에 대한 코이노니아(2베드 1,4)를 이야기합니다. 요한의 첫째 서간은 아버지와 또 그 아드님과 나누는 코이노니아, 그리고 그 결과로 우리가 서로 나누는 코이노니아를 이야기합니다(1요한 1,3). 이러한 친교의 토대와 척도는 성부와 성자의 일치입니다(요한 17,21-23).
이러한 친교의 성사적 토대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게 되고(1코린 12,12-13; 로마 12,4-5; 에페 4,3-4 참조),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하나가 되는(갈라 3,26-28) 하나의 세례입니다. 친교의 정점은 성찬례 거행입니다. 따라서 신학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본문은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 10장 16-17절의 말씀이었습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그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우리 모두 한 빵을 나누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은 한 성찬의 빵 안에서 이루는 코이노니아가 교회의 한 몸 안에서 이루는 코이노니아의 원천이며 표징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한 몸인 성찬은 그리스도의 한 몸인 교회의 원천이며 표징입니다. 실제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마지막으로 남기신 회칙의 제목은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Ecclesia de eucharistia, 2003)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하느님과 이루는 친교는 또한 신자들 사이에, 특히 고통 받는 신자들과 나누는 친교에도 영향을 줍니다. 그러므로 코이노니아/친교는 신학적 차원은 물론 공동체적이고 사회적인 차원도 지닙니다. 이를테면 친교의 수직적 수평적 차원이 있습니다. 우리는 일용할 빵도 나누지 않으면서 성찬의 빵을 나눌 수는 없습니다. 성사들은 교회의 토대이며, 성사적으로 세워진 교회가 성사들을 거행합니다. 그러나 성사적 친교는 공동체적이고 사회적인 행동을 통하여 드러납니다.
지난 40년 동안의 대화를 돌아보면 놀라운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대화가 미리 계획되어 이루어진 적이 없음에도 놀라운 방식으로 의견이 수렴된다는 것은 매우 경이로운 일입니다. 모든 대화는 친교라는 주요 개념을 바탕으로 발전됩니다. 모든 대화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가시적인 일치를 친교-일치로 규정하며 그 이해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친교라는 하나의 실재의 여러 측면들에 대해서 서로 강조하는 부분이 다릅니다. 따라서 하나의 공통된 기본 용어인 코이노니아/친교에서 서로 다른, 때로는 반대되는 친교-교회론이 발전된 것입니다.
우선, 동방 교회들의 성찬 교회론을 살펴봅시다. 정교회에 대한 출발점은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 10장 16-17절에 따른 성찬의 교회론, 그리고 교회가 성찬을 위하여 모인 모든 지역 교회 안에서 실현된다는 교회적 친교와 성찬적 친교의 내적 연관성입니다. 정교회에게 이것은 주교를 중심으로 모여 성찬을 거행하는 지역 교회를 의미합니다. 한 분이신 그리스도와 하나인 교회가 모든 지역 교회에 현존하므로, 어떤 지역 교회도 따로 떨어져 존재할 수 없습니다. 모든 지역 교회는 반드시 필연적으로, 성찬을 거행하는 다른 모든 지역 교회들과 코이노니아/친교를 이룹니다. 그러므로 보편 교회는 교회들의 친교-일치입니다.
모든 지역 교회는 온전한 의미에서 교회이므로, 주교보다 더 높은 교회 직무나 권위는 있을 수 없습니다. 초기부터 관구장 대주교좌나 총대주교를 우위에 두어 왔을 수 있지만 교회 안의 모든 권위는 합의체적으로 실현됩니다. 다시 말해, 수석 주교는 자기의 형제 주교들의 친교와 합의 안에서만 결정을 내릴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베드로의 직무는 합의체적으로, 그리고 교회의 합의 구조 또는 협의 구조와 관련해서만 수행될 수 있습니다. 정교회 쪽은 언제나 「사도 규범」(Canones Apostolorum) 제34조를 언급합니다. 이 조항에 따르면, 수석 주교는 다른 주교들과 일치해서만, 또한 다른 주교들은 수석 주교와 일치해서만 중요한 결정을 내릴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정교회들은 로마에 ‘사랑의 수좌’[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로마인들에게 보낸 서간」(Ad Rom.), 서론]가 있다는 것을 일반적으로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를 대체로 명예 수위권으로 이해하며 교회법적으로는 어떠한 수위권도 거부합니다. 그들은 이러한 개념만이 제일천년기에 부합한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역사적으로 사실인지 여부는 또 다른 문제로서, 우리는 마땅히 이러한 질문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의 교회론은 우리가 동방교회들과 계속 공유하고 있는 제일천년기의 공통 토대에서 갈라져 나간 것으로서, 새로운 방식으로 교회를 이루게 됩니다. 종교개혁의 이해에 따르면, 교회는 하느님의 말씀이 순전히 선포되며 복음에 따라 성사들이 집전되는 곳입니다(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 제7조). 따라서 성인들의 통공(communio sanctorum)은 개별 지역 공동체 안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신자들의 회중(congregatio fidelium)과 동의어가 됩니다. 종교개혁에서 교회에 대한 이해는 회중을 바탕으로 하고 중심으로 삼습니다. 지역 회중의 예배 모임은 교회의 가시적 실현이며 표현으로서 교회를 구성하기에 전혀 모자람이 없습니다.
이러한 개념에서 ‘교황 군주제’에 대한 비판이 나오고 감독직과 사목직이 신학적으로 구분될 뿐만 아니라, 가톨릭에서 모든 신자의 보편 사제직과 직무 사제직이 근본적으로 구분되기 시작합니다. 루터는 교리를 판단하는 것이 전체 공동체의 권리라고 말합니다. 지역 회중을 강조하면 가톨릭의 개념과는 다른 교회 일치의 개념에 이르게 됩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개신교 교회 공동체들에서 수용하는 교회 일치 운동의 목적은 합의체적 친교, 또는 독립되어 있지만 서로를 교회로 인정하며, 제대와 설교대의 친교와 상호 인정하는 직무와 봉사직을 가지는 데에 동의하는 지역 교회들의 친교입니다. 이러한 개념은 특히 ‘로이엔베르크 교회 펠로우십’(1973)의 토대가 되며, 루터교 세계 연맹이 추구하는 ‘화해된 다양성’ 모델의 토대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개신교의 교회 친교의 모델은 지역 회중, 지역 교회들이나 교단들의 연계망으로서의 일치입니다.
이제 우리는 가톨릭에서 이해하는 친교는 무엇인지, 또한 우리에게 교회의 친교-일치의 구체적인 의미는 무엇인지 자문해 봅시다. 앞에서 보았듯이, 공의회의 ‘교회 헌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구체적으로 가톨릭 교회 안에, 교황과 또 그와 친교를 이루는 주교들과 이루는 친교 안에 구체적으로 실존한다고 말합니다(교회 헌장, 8항). 이 진술은 교회 일치 대화를 위한 생생한 핵심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일치는 결코 사라지지 않으며 가톨릭 교회 안에 구체적으로 실제로 현존하고 있다고 확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일치 교령, 4항). 교회의 일치는 우리가 여전히 추구해야 하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지금 여기서 갈라져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교회 일치는 우리가 초교파적으로 아직 실현하지 못한 어떤 실재가 아닙니다. 교회의 일치는 이미 가톨릭 교회 안에 실제로 있습니다. 그것은 로마의 주교와 친교를 이루는 많은 지역 교회들 “안에 또 거기에서부터” 존재하는 하나의 교회를 말합니다(교회 헌장, 23항).
선언 「주님이신 예수님」(Dominus Jesus, 2000)은, 가톨릭 교회의 제도적 울타리 밖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의 여러 요소가 있다는 앞서 언급한 개념과 이러한 이해를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지 우리에게 조언해 줍니다. 이 선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가톨릭 교회 안에서만 ‘온전히’ 실현될 수 있다고 확언합니다. 이러한 진술의 논리는, 가톨릭 교회 밖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온전히 실현될 수는 없지만 불완전하게는 실현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교 구조와 참된 성찬을 지니고 있는 동방 교회들의 경우, 가톨릭 교회와 불완전한 친교를 누리고 있지만 참된 개별 교회들이 있습니다(일치 교령, 14항). 종교개혁에서 비롯되어 나온 공동체들에 대해서 「주님이신 예수님」은 그들이 결코 교회가 아니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올바른 의미의 교회가 아니라고 말할 뿐입니다. 긍정적으로 말한다면, 그들은 가톨릭 교회에 비해서 부적절한 의미의 교회라는 것입니다. 성품성사의 결여(defectus)로 성찬 신비 본연의 완전한 실체가 온전히 유지되지 못했습니다(일치 교령, 22항). 그들은 교회에 대해 다른 이해를 지니고 있으며 가톨릭에서 의미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엄격한 신학적 용어로 그들은 교회 공동체라 불립니다.
가톨릭에서 이해하는 온전한 의미의 교회가 된다는 것은 하나의 믿음, 특히 성체성사를 비롯한 같은 성사들, 사도 직무에 함께 온전히 참여한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모든 지역 교회는 온전히 하나의 교회이지만(교회 헌장, 26.28항), 전체 교회는 아닙니다. 하나의 교회는 지역 교회들 안에 또 거기에서부터 존재하고(교회 헌장, 23항), 지역 교회들은 하나의 교회 안에 또 거기에서부터 존재하면서(Communionis notio, 9항) 그 하나인 교회의 모습대로 이루어집니다(교회 헌장, 23항). 따라서 지역 교회들은 하나의 교회의 일부분이나 단순한 지부나 관구가 아니며, 하나의 교회도 지역 교회들의 총합이나 연합체, 또는 지역 교회들이 상호 인정하거나 결속한 결과가 아닙니다. 교회 친교는 지역 교회들의 연계망이나 친교-일치 이상의 것입니다. 하나의 교회는 지역 교회들의 친교 안에 실제로 있지만 그 친교에서 비롯되어 자라는 것이 아니라, 가톨릭 교회 안에 이미 주어져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 둘을 하나로 생각한다는 것은, 하나의 교회와 지역 교회들의 다양성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이 둘은 서로의 안에 존재합니다. 보편 교회는 그 보편성과 일치 안의 다양성, 다양성 안의 일치의 온전한 부요를 표현할 수 있습니다.
가톨릭에서 이해하는 교회의 친교-일치는 교회의 일치를 보존하고 교회의 정당한 다양성 또한 보호할 임무를 맡은 베드로 직무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표현됩니다(교회 헌장, 13항). 그러나 교황 바오로 6세께서 이미 표명하시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강조하셨듯이(「하나 되게 하소서」, 88항), 친교-일치에 대한 우리 가톨릭의 이해를 가장 구체적으로 표현해 주는 바로 이 베드로 직무가 또한 다른 교회들과 교회 공동체들에게는 큰 걸림돌이 됩니다. 정교회와 개신교의 교회론은 서로 상당한 차이를 보이지만 로마의 수위권에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일치하고 있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이러한 어려움을 인식하시고 회칙 「하나 되게 하소서」(95항)에서 새로운 교회 일치 상황 안에서 앞으로의 베드로 직무 수행에 관한 문제를 제기하셨습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우리는 상당수의 공식 또는 비공식 답변을 받았으며 이를 면밀히 검토하였습니다. 분명히 이 답변들은 새로운 환경, 새로운 개방성과 함께 몇몇 의견 수렴들을 암시하고 있지만 아직 합의에 이른 것은 없습니다. 대부분의 교회와 교회 공동체들은 베드로 아래의 친교가 아니라 베드로와 이루는 친교를 바랍니다. 그들은 각자의 독립이 어느 정도 보장되는, 교회들의 공동체 형태로 친교-일치를 추구합니다. 이와는 달리 우리 가톨릭에서 이해하는 친교-일치는 지역 교회의 합법적 자율성과 이러한 의미에서 지역 교회들 사이의 합법적 다양성을 보장하지만, 같은 신앙과 같은 성사와 같은 사도 직무에 대한 참여로서의 친교입니다.
가톨릭 신자들에게 베드로와 더불어, 베드로 아래에 이루는 친교는 무거운 짐이 아니라 주님께서 당신 교회에 주시는 은총입니다. 베드로는 교회의 일치, 그리고 이와 동시에 각 지역 교회의 합법적 다양성과 자유를 보호하도록 부름 받기 때문입니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황 대 그레고리오의 말을 인용하여 베드로의 영광은 보편 교회의 영광이고 그 형제들의 힘이며, 베드로를 존경한다고 하여 다른 이들이 마땅히 받을 존경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신앙, 도덕에 관한 선언, 규정, 신경 편람』, 3061). 이러한 의미에서, 교황 대 그레고리오도 말하였듯이 베드로의 후계자는 하느님의 종들의 종(servus servorum Dei)입니다(「하나 되게 하소서」, 88항).
이 문제의 근본적인 특성을 인식한다면, 비록 고무적인 발전들이 있지만 앞으로 가야할 길이 아직도 어렵고 멀게만 보인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새 천년기」, 12항). 이 때문에 체념할 필요는 없지만, 우리 자신이 일치의 촉진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필요는 있습니다. 우리가 일치를 ‘실현하거나’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일치는 성령의 선물입니다. 성령께서만 우리 마음을 움직이시고 화해시켜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친교의 영성입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상기시키셨듯이, “우리가 이러한 영성의 길을 따르지 않는다면, 외적인 친교 조직들은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새 천년기」, 43항).
“친교의 영성은 우리의 형제자매들을 위하여 ‘양보하며’, ‘남의 짐을 져 주고’(갈라 6,2), 언제까지나 우리에게 붙어 다니면서 경쟁심과 출세욕, 불신과 시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이기적인 유혹을 물리칠 줄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환상을 갖지 맙시다. 우리가 이러한 영성의 길을 따르지 않는다면, 외적인 친교 조직들은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외적인 조직들은 친교를 표현하고 발전시키는 수단이라기보다는 영혼이 없는 장치, 친교의 ‘가면’이 될 것입니다”(「새 천년기」, 43항). 하느님의 성령은 언제나 충분히 놀랍습니다. 이미 많은 좋은 열매들을 맺은 교회 일치 과정을 시작하신 분은 바로 성령이십니다. 우리는 성령을 믿습니다. 성령께서 당신이 시작하신 일을 잘 마무리해 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래도 결국 우리는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소서, 성령님”(Veni Sancte Spiri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