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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교회협의회 신앙직제위원회
세례, 성찬, 직무
<신앙직제 문서 제111호>
서문
세계교회협의회(WCC)는 “성경에 따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 하느님으로 고백하며, 따라서 한 분이신 하느님 성부 성자 성령의 영광을 위하여 공동 소명을 함께 완수하고자 노력하는 교회들의 협력체이다”(헌장).
세계교회협의회는 이렇게 분명하게 정의된다. 이 협의회는 그리스도인들이 무엇을 믿고 실천해야 하는지를 통제하는 보편 권위는 아니지만, 30년 만에 이미 300여 개의 회원 교회를 거느린 주목할 만한 공동체가 되었다. 이 교회들은 다양한 문화적 배경과 전통을 드러내고 수많은 언어로 예배를 드리며 온갖 형태의 정치 제도 아래 살아가고 있지만, 모두 그리스도인으로서 증언하고 봉사하는 일에서 긴밀히 협력하기 위하여 투신하고 있다. 또한 이들 교회들은 가시적인 교회 일치라는 목표를 실현하고자 함께 노력한다.
이러한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는 교회들을 돕고자 세계교회협의회 신앙직제위원회는 일치를 향한 교회들의 노력을 신학적으로 뒷받침한다. 실제로 이 위원회가 협의회 회원들에게 위임받은 임무는, 하느님께서 주신 교회 일치의 선물을 더욱 가시적으로 드러내기 위하여 그들이 받아들이고 수행해야 할 의무를 회원들에게 언제나 제시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위원회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나임을 선포하고, 세상이 믿을 수 있도록 그리스도 안의 공동생활과 예배로 표현되는 하나의 신앙과 하나의 성찬 친교 속에서 가시적 일치라는 목표를 교회들에게 일깨우는 것”(세칙)으로 규정된다.
분열된 교회들이 추구하는 가시적 일치를 이루고자 할 때 본질적으로 선행되어야 할 조건은, 그들이 세례와 성찬과 직무에서 기본적인 합의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직제위원회는 이 세 주제에 대한 교리적 차이를 극복하는 데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여 왔다. 지난 50년 동안 열린 대부분의 위원회 회의들은 이 세 주제를 중점적으로 논의해 왔다.
이 세 보고서는 1927년 로잔에서 열린 제1차 신앙직제대회 이후 50년 동안의 연구 성과이다. 이 자료는 아크라(1974), 방갈로르(1978), 리마(1982)에서 열린 신앙직제위원회 회의에서 논의되고 개정되었다. 이 위원회 총회들 사이에, 세례, 성찬, 직무 실무위원회가 특히 1979년 9월 이후 떼제 공동체의 막스 투리앙의 주도 아래 이 보고서 작성 작업을 해 왔다.
이 교회 일치 문서는 또한 위원회 회원들(교회가 승인한) 사이에 그리고 지역 교회들 사이에 계속되고 있는 협의와 협력 내용도 반영하고 있다. 세계교회협의회 제5차 총회(1975년 나이로비)는 교회들이 연구할 수 있도록 이전 초안(신앙직제위원회 문서 제73호)을 배포하는 것을 허가하였다. 전 세계 거의 모든 지역에 퍼져 있는 서로 다른 전통을 지닌 100개 이상의 교회들이 상세한 의견을 보내 주었다는 사실은 무엇보다도 의미심장하다. 1977년 크레 베라르에서 열린 회의는 이러한 의견들을 자세하게 분석하였다(신앙직제위원회 문서 제84호).
한편 특별 교회일치 자문회의들에서는 특별히 어려운 문제들을 분석하였는데, 1978년 루이빌에서는 유아 세례와 어른 세례에 관하여(신앙직제위원회 문서 제97호), 1979년 제네바에서는 감독(episkopé)과 감독직에 관하여(신앙직제위원회 문서 제102호) 논의하였다. 1979년 샹베시에서는 정교회 대표자들이 초안을 검토하였다. 최종적으로, 세계교회협의회 중앙위원회(1981년, 드레스덴)는 신앙직제위원회에게 최종 수정 문서(1982년 ‘리마 문서’)를 교회들에게 전달하도록 다시 허가하고, 아울러 교회 일치적 수용 과정의 한 중요한 단계로서 교회들의 공식 응답을 요청하도록 하였다.
이 작업은 신앙직제위원회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세례, 성찬, 직무의 주제는 여러 교회일치 대화들에서 검토되어 왔다. 양자 간 대화와 다자 간 대화라는 교회 간 대화의 두 가지 중요한 유형은 상호보완적이고 서로 유익한 것임이 입증되어 왔다. 이는 특히 양자 간 대화들에 관한 포럼의 세 보고서, ‘일치의 개념’(1978), ‘합의문에 대한 합의’(1979), ‘권위와 수용’(1980)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며, 이 보고서들은 신앙직제위원회 문서 제107호에 수록되었다. 따라서 신앙직제위원회는 이 세 주제에 관한 다자 간 논의에서, 양자 간 대화의 구체적인 결과들을 최대한 토대로 삼고자 노력해 왔다. 실제로, 위원회의 임무 가운데 하나는 전체적인 교회일치 운동을 위한 모든 구체적인 노력들의 순수한 결과를 평가하는 것이다.
이 보고서가 나오기까지에는 또한 교파의 차이를 넘어 일치의 과정을 이미 경험한 지역 교회들의 증언이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지역 교회의 일치를 추구하는 일과 보편적 합의를 추구하는 일이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마도 공식적인 연구보다 훨씬 더 영향력 있는 일은 교회 생활 자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들일 것이다. 우리는 인류 역사상 아주 중요한 시기를 살아가고 있다. 교회 일치가 증진되어 가면서, 정의와 평화와 화해를 증진하고자 노력하는 교회들은 세례, 성찬, 직무에 대한 그들의 이해와 실천을 인류 공동체의 쇄신 안에서 그고 쇄신을 위한 그들의 사명과 어떻게 연결시킬 수 있을지 자문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들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오늘날 세계에서 교회들을 통하여 구원하시고 자유롭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명과 분리될 수 없다.
실제로 성경 연구와 교부 연구의 한 결과로, 전례의 부흥, 공동 증언의 필요성과 함께 흔히 교파의 경계를 넘어 교회 일치적 친교가 생겨났으며 그 안에서 이전의 차이들이 이제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따라서 역사적인 논쟁들을 화해시키는 일에서 이 문서의 언어는 여전히 고전적이지만, 그 추진력은 상황과 시대에 상당히 부합한다. 이러한 정신은 또한 이 문서를 우리 시대의 다양한 언어들로 재구성하도록 자극할 것이다.
이러한 노력들의 결과는 무엇인가? 리마 문서가 보여 주듯이, 우리는 이미 상당한 수준의 동의에 이르렀다. 분명 우리는 교회의 가시적 일치를 실현하고 유지하는 데에 필요한 삶의 경험과 신앙의 설명으로 이해되는 온전한 ‘합의’에 이르지는 못하였다. 그러한 합의는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증언 위에 세워지는 친교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성령의 선물인 이러한 합의는 공동의 노력을 통하여 말로 표현되기에 앞서 우선 공동의 체험으로 실현된다. 완전한 합의는 교회들이 일치 가운데 함께 살아가고 함께 활동하는 시점에 이른 다음에야 비로소 선포될 수 있다.
그러나 가시적 일치라는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는 길에서 교회들은 다양한 단계를 거쳐야 할 것이다. 교회들은 서로에게 귀 기울임으로써, 또한 최초의 근원, 곧 “성경이 증언하고, 성령의 권능을 통하여 교회 안에서 그리고 교회를 통하여 전해진 복음의 성전”으로 함께 돌아감으로써 새롭게 축복받아 왔다(신앙직제위원회 회의, 1963).
과거의 적대감에서 벗어난 교회들은 공통의 확신과 관점들 안에서 여러 희망적인 의견 수렴들을 발견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의견 수렴은 신학적 표현의 다양성에도 교회들이 신앙의 이해에서 많은 공통점들을 지니고 있다는 확신을 준다. 그 결과물인 이 문서는 그리스도교 친교의 본질적 요소들에 대한 공통된 그리스도교 성전을 충실하고 충분하게 반영하는 데에 기여하고자 한다. 상호 신뢰 안에서 함께 성장하는 과정에서 교회들은 자신들이 사도들과 또 보편 교회의 가르침과 이어져 있는 가운데 서로 친교 안에 살아가고 있음을 마침내 함께 선언할 수 있을 때까지 이러한 교리적 의견 수렴들을 한걸음씩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이 리마 문서는 신앙직제위원회가 식별하고 규정해 온 중요한 신학적 의견 수렴들을 설명한다. 세례, 성찬, 직무에 대한 교리와 실천에서 교회들이 얼마나 큰 차이를 보이는지 아는 이들은 여기에 제시된 이러한 상당한 일치의 중요성을 인정할 것이다. 사실상 거의 모든 교파들이 위원회에 소속되어 있다. 그러한 매우 다른 전통들의 신학자들이 세례, 성찬, 직무에 대해서 조화롭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은 현대의 교회 일치 운동에서 전례가 없는 일이다. 위원회의 정회원 가운데에는 세계교회협의회에 속하지 않은 다른 교회들과 로마 가톨릭 교회의 신학자들도 있다는 사실은 특별히 주목할 만하다.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이 교회 일치 문서의 일차적인 목적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 문서가 세례, 성찬, 직무를 완전히 신학적으로 다루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적절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이 합의된 본문은 의도적으로, 일치를 향한 상호 인정의 문제에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측면들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골자가 되는 본문은 신학적으로 일치하는 주요 분야들을 제시한다. 덧붙여진 해설은 이미 극복된 역사적 차이점들을 설명하거나 아직 더 연구하고 조정해야 할 쟁점들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모든 발전에 비추어 신앙직제위원회는 이제 교회들 앞에 이 리마 문서(1982년)를 제시한다. 우리는 깊은 확신을 갖고 있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우리의 일치를 점점 더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복음 안에서 우리의 풍요로운 공동 유산을 재발견하게 되어 기쁘게 생각한다. 지금 이 시간으로, 슬픈 분열을 겪었던 교회들이 실질적인 신학적 일치에 이를 수 있게 된 교회 일치 운동의 하나의 때(kairos)로 성령께서 우리를 이끄셨음을 확신한다. 또한 우리 교회들 안에서 하느님께서 주신 교회 일치의 선물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우리가 충분한 용기와 능력을 지니고 있다면 여러 중요한 진전들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
교회일치 노력의 구체적인 증거로서, 교회들은 교회 생활 전반에 걸쳐서 하느님의 전체 백성이 이 문서를 받아들이는 영적 과정에 최대한 폭넓게 참여할 수 있게 하도록 요청받고 있다. 교회 안에서 남녀들이 이 문서를 예배와 증언과 연구에 사용하는 것에 관련된 구체적인 제안들은 이 문서의 부록으로 실려 있다.
신앙직제위원회는 이제 모든 교회들에게 교회회의, 시노드, 협의회, 회의 또는 다른 협의체를 통해서든 최대한 적절한 권위를 지니고 이 문서에 대한 공식적인 응답을 준비하도록 요청한다. 이러한 수용 과정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위원회는 각 교회에서 다음 내용을 가능한 한 상세히 알려 주기를 바란다.
- 이 문서에 제시된 여러 시대에 걸친 교회의 신앙을 어느 정도까지 인정할 수 있는가?
- 다른 교회들, 특히 이 문서를 사도 신앙의 표현으로 인정하는 교회들과 관계를 맺고 대화하기 위하여 이 문서에서 어떤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는가?
- 예배, 교육과 윤리와 영적 생활, 증언을 위하여 이 문서에서 어떤 지침을 이끌어낼 수 있는가?
- 신앙직제위원회가 세례, 성찬, 직무에 관한 이 문서의 자료를 ‘오늘날 사도 신앙의 공동 표현을 지향하여’라는 장기적인 연구 계획에 연결시킨다면, 이 위원회의 지속적인 활동을 위하여 어떤 제안을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각 교회가 보낸 모든 공식 답변을 비교하여 그 결과를 출판하고, 교회들을 위하여 앞으로의 세계 신앙직제대회에서 그 교회 일치적 함의를 분석하고자 한다.
이 질문에 대한 모든 응답은 1984년 12월 31일까지 세계교회협의회 신앙직제위원회 사무국(Faith and Order Secretariat, World Council of Churches, 150 route de Ferney, 1211 Geneva 20, Switzerland)으로 보내야 한다.
세례(Baptism)
I. 세례의 제정
1. 그리스도교 세례는 나자렛 예수의 직무와 그분의 죽음, 그분의 부활에 뿌리를 두고 있다. 세례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주 그리스도와 결합되는 것이며, 하느님과 하느님 백성 사이의 새 계약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세례는 하느님의 은총이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주는 것이다. 마태오 성인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시면서 세례를 주도록 명령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마태 28,18-20). 세례가 초기부터 사도 교회에서 보편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신약의 서간들, 사도행전, 교부 문헌들에서 증명된다. 오늘날 교회들은 당신 백성에게 은총을 내려주시는 주님께 대한 서약의 예식으로 이러한 관행을 계속해 가고 있다.
II. 세례의 의미
2.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새 생명의 표지이다. 세례 받은 이는 세례로써 그리스도와 그분 백성과 일치된다. 신약 성경과 교회의 전례는 그리스도의 풍요로움과 그분이 주시는 구원의 선물을 나타내는 여러 표상들로 세례의 의미를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표상들은 때때로 구약 성경에 나오는 물의 상징적인 사용과 관련된다. 세례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함(로마 6,3-5; 콜로2,12), 죄를 씻음(1코린 6,11), 새로 태어남(요한 3,5), 그리스도께서 비추어 주심(에페 5,14), 그리스도를 입음(갈라 3,27), 성령으로 새로워짐(티토 3,5), 홍수에서 구원됨(1베드 3,20-21), 노예 신분에서 탈출함(1코린 10,1-2), 성이나 인종, 사회 신분의 모든 장벽을 뛰어넘는 새로운 인류로 해방됨(갈라 3,27-28; 1코린 12,13)이다. 상징들은 여러 가지이지만, 그 실재는 하나이다.
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
3.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부활에 동참하는 것을 뜻한다. 예수님께서는 요르단 강으로 내려가시어 모든 의로움을 이루기 위하여 죄인들과 함께 세례를 받으셨다(마태 3,15). 이 세례로써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로 분명히 드러난 ‘수난 받는 종’의 길을 시작하셨다(마르 10,38-40.45). 세례로 그리스도인들은 자유롭게 하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잠긴다. 그 안에 그들의 죄가 묻히고 ‘옛 아담’이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히며 죄가 힘을 잃는다. 따라서 세례 받은 이들은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니며 자유롭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온전히 하나 된 그들은 그분과 함께 묻혀 지금 여기에서 부활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 안에서 새 생명을 얻으며, 궁극적으로는 자신들도 그리스도처럼 부활하여 그분과 하나 될 것을 확신한다(로마 6,3-11; 콜로 2,13; 3,1; 에페 2,5-6).
나. 회개, 용서와 정화
4.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에 동참시키는 세례는 죄의 고백과 마음의 회개를 의미한다. 세례자 요한이 준 세례는 그 자체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였다(마르 1,4). 신약은 세례를 맑은 물로 몸을 말끔히 씻는 정결례, 온갖 죄에 물든 마음의 정화, 의화의 행위로 제시함으로써 그 윤리적 의미를 강조한다(히브 10,22; 1베드 3,21; 사도 22,16; 1코린 6,11). 따라서 세례 받은 이들은 그리스도께 용서받고 정화되고 성화된 이들이며, 세례 경험의 일부로서 성령의 이끄심 아래 새로운 윤리적 방향을 제시받는다.
다. 성령의 선물
5. 성령께서는 세례 받기 전이나, 세례 받을 때에나, 세례 받은 후에도 사람들의 삶 속에서 활동하신다. 바로 이 성령께서 예수님을 성자로 드러내셨고(마르 1,10-11) 오순절에 제자들에게 권능을 베푸시고 그들을 일치시키셨다(사도 2장). 하느님께서는 모든 세례 받은 이들에게 기름을 부으시고 성령을 약속하시며, 그들에게 인장을 찍으시고, 하느님의 자녀로서 상속받을 으뜸가는 몫을 그들 마음에 새겨주신다. 성령께서는 그들이 하느님 영광을 찬미하며 완전히 구원으로 들어갈 최종 구원에 이르기까지 그들 마음에 신앙의 삶을 키우신다(2코린 1,21-22; 에페 1,13-14).
라.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결합됨
6. 우리 주님께 순종하여 베풀어진 세례는 우리가 함께 제자가 되었다는 징표이며 인장이다.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모든 시대 모든 장소의 교회와 결합된다. 따라서 신앙 안에서 우리를 그리스도께 결합시키는 우리의 공통 세례는 일치를 위한 기본적인 유대이다. 우리는 한 백성이며, 각자가 있는 곳에서 그리고 온 세상에서 한 분이신 주님을 고백하고 섬기도록 부름 받는다. 세례를 통하여 우리가 공유하게 되는 그리스도와의 일치는 그리스도인 일치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세례도 하나이고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에페 4,4-6). 하나이며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 안에서 세례의 일치가 실현될 때, 치유하시고 화해시키시는 하느님 사랑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참된 증언이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께 결합되는 하나의 세례는, 분열을 극복하고 친교를 가시적으로 드러내야 할 모든 교회의 소명이다.
해설 6. 교회들이 그들의 다양한 세례 관습들을 하나의 세례에 대한 참여로 서로 인정할 수 없다는 사실과, 상호 세례 인정에도 실제로는 분열되어 있다는 사실은 교회의 증언이 균열되어 있음을 더욱 심각하게 드러내 왔다. 때때로 어떤 곳에서는 교회들이 성, 인종, 사회적 지위의 차이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이 나누어지게 함으로써 세례에 따른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참된 일치를(갈라 3,27-28) 문제 삼고 그 증언을 심각하게 훼손해 왔다. 세례의 일치를 회복할 필요성은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에서 참된 협력 관계를 실현하는 데에 중심적이기 때문에 교회 일치 운동 임무의 핵심이 된다.
마. 하느님 나라의 표지
7. 세례는 이 세상 한 가운데에서 받은 새로운 삶의 실재를 시작하게 하며, 성령의 공동체에 참여하게 한다. 세례는 하느님 나라와 앞으로 올 세상에서의 삶의 표지이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은총을 통하여 세례는 온 삶을 포함하고, 모든 나라로 확대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는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모든 언어로 고백할 날을 미리 앞당기는 역동성을 지닌다.
III. 세례와 신앙
8. 세례는 하느님의 선물이며 그 선물에 대한 우리 인간의 응답이다. 세례는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도록 성장하는 것을 지향한다(에페 4,13). 세례 안에 구체화되고 공표된 구원을 받기 위하여 신앙이 필요하다는 것을 모든 교회가 인정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몸의 책임 있는 지체가 되기 위해서는 개인의 헌신이 필요하다.
9. 세례는 순간의 경험뿐만 아니라 전 생애에 걸친 그리스도를 향한 성장과도 연관된다. 세례 받은 이들은 성령의 힘으로 더더욱 눈부시게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가면서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부름 받는다(2코린 3,18). 그리스도인의 삶은 필연적으로 계속 노력하는 삶이며 또한 은총을 지속적으로 체험하는 삶이다. 이러한 새로운 관계 안에서, 세례 받은 이들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와 그분이 사랑하시는 세상을 위하여 살면서, 하느님의 새 창조가 드러나고 하느님께서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때를 희망하며 기다린다(로마 8,18-24; 1코린 15,22-28.49-57).
10. 세례 받은 신자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생활 안에 성장해 나가면서 인류가 새롭게 되고 자유롭게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지금 여기에서 모든 인간을 자유롭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함께 증언할 공동 책임이 있다. 이러한 공동 증언의 배경은 교회와 세계이다. 증언과 봉사의 친교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인 세례의 완전한 의미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든 백성에게 주시는 선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하는 세례가 개인의 성화를 요청할 뿐만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도록 노력하도록 그리스도인들을 장려하는 윤리적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인정한다(로마 6,9 이하; 갈라 3,27-28; 1베드 2,21-4,6).
IV. 세례 예식
가. 신자 세례와 유아 세례
11. 유아 세례가 사도 시대에 행해졌으리라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지만, 개인의 신앙 고백에 따른 세례가 신약 성경에서 가장 분명하게 입증되는 세례 형태이다.
역사에 걸쳐 세례 예식은 다양한 형태로 발전되어 왔다. 일부 교회들은 교회 안에서 교회와 함께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 자녀를 기를 준비가 된 부모나 보호자들이 데려 오는 유아들에게 세례를 준다. 다른 교회들은 개인적으로 신앙을 고백할 수 있는 신자들에게만 세례를 준다. 이러한 교회들 가운데 일부는 유아나 어린이들을 예식에서 봉헌하고 축복할 것을 장려한다. 그러한 예식은 대개 자녀를 선물로 주신 것에 대하여 감사드리며, 어머니 아버지가 그리스도인다운 부모가 될 것을 서약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모든 교회는 다른 종교에서 왔거나 신앙이 없었다가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교리교육을 받는 신자들에게 세례를 준다.
12. 신자 세례와 유아 세례는 모두 신앙 공동체인 교회 안에서 이루어진다. 스스로 응답할 수 있는 사람이 세례를 받을 경우 개인의 신앙 고백은 세례 예식의 필수적인 한 부분이다. 유아 세례의 경우 개인의 응답은 훗날로 미루어진다. 두 경우 모두, 세례 받은 사람은 신앙에 대한 이해를 키워가야 한다. 자신의 신앙 고백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의 경우에는 신앙에 대한 인격적인 응답을 계속 성장시켜야 하는 지속적인 요구가 언제나 따른다. 유아의 경우에는 훗날에 개인의 고백이 있어야 하며, 이러한 고백을 이끌어낼 수 있도록 그리스도교적으로 양육된다. 모든 세례는 죽음에까지 이르는 그리스도의 충실하심에 뿌리박고 있으며 그러한 충실하심을 선포한다. 세례의 배경은 교회의 삶과 신앙 안에 있으며, 전체 교회의 증언을 통하여 신앙 안의 모든 삶의 토대인 하느님의 충실하심을 지향한다. 세례 때마다 전체 회중은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재확인하며 증언하고 봉사하는 환경을 조성할 것을 다짐한다. 그러므로 세례는 언제나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배경 안에서 거행되고 발전되어야 한다.
해설 12. ‘유아 세례’와 ‘신자 세례’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 나이에 상관없이 세례를 주는 교회들과 스스로 신앙 고백을 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세례를 주는 교회들 사이에 실질적인 구분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두 형태의 세례 모두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계획을 실현하는 것이고 신앙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진 신앙의 응답을 표현하는 것임을 인정할 때, 유아 세례와 신자 세례의 차이는 덜 두드러지게 된다.
유아 세례의 관습은 공동 신앙과 자녀가 부모와 공유하는 신앙을 강조한다. 유아는 불완전한 세상에 태어나 그 불완전함을 공유한다. 세례를 통하여 복음의 약속과 요구가 유아에게도 부여된다. 세례 받은 이의 개인적 신앙과 교회 생활에 대한 충실한 참여는 세례가 충만한 열매를 맺는 데에 필수적인 것이다.
신자 세례의 관습은 신앙 공동체 안에서 그 공동체를 통하여 하느님 은총에 응답하고 세례를 받고자 하는 개인의 명백한 신앙 고백을 강조한다.
두 형태의 세례 모두 그리스도교 양육을 지향하는 유사한 책임 있는 자세를 요구한다. 그리스도교 양육이 지속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재발견한다면 서로 다른 입교 관습을 서로 받아들이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유아 세례와 신자 세례의 전통을 결합시키는 일부 교회에서는, 유아 세례를 받고 나중에 신앙을 고백하는 형식과 유아 때에 봉헌되고 축복받은 다음 신자가 되어 세례를 받는 형식 모두 교회 입교를 위하여 동등하게 선택할 수 있는 방법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례는 다른 교회들에게 그들도 상호 관계에서나 교회 일치 논의에서 동등하게 선택할 수 있는 방법들을 인정할 수는 없는지 결정하도록 권고한다.
13. 세례는 반복될 수 없는 행위이다. ‘재세례’로 해석될 수 있는 어떤 관습도 행해서는 안 된다.
해설 13. 특정한 형태의 세례를 고집하거나 다른 교회의 성사와 직무의 진정성에 심각하게 의문을 제기해 온 교회들은 때때로 다른 교회 전통에서 온 이들을 성찬에 온전히 참여할 수 있는 신자로 받아들이기 전에 그들에게 다시 세례 받을 것을 요구해 왔다. 교회들이 더욱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를 받아들이며 증언과 봉사에서 더욱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면서, 다른 교회들의 성사의 완전성을 문제 삼거나 반복될 수 없는 세례성사의 특성을 손상할 수 있는 모든 관행을 삼가고자 한다.
나. 세례 - 도유 - 견진
14. 하느님의 구원 활동에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파스카 신비는 오순절의 성령의 선물과 불가분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하는 것은 성령을 받는 것과 불가분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온전한 의미의 세례는 이 둘을 모두 의미하며 모두 실현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선물의 표지를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지에 관하여 서로 다른 견해를 지니고 있다. 여러 다른 활동들이 성령을 받는 행위와 연관되어 왔다. 어떤 이들은 물로 하는 예식 자체로, 다른 이들은 성유의 부음이나 안수로 성령을 받는다고 생각하며, 많은 교회들은 이것을 견진이라고 부른다. 또 다른 이들은 예식 전체에 걸쳐 성령이 활동하신다고 보므로 이 세 가지 모두가 성령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교회는 그리스도교 세례가 물과 성령의 세례라는 데에 동의한다.
해설 14. (가) 일부 전통들에서는 세례로써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묻히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일치되듯이, 도유를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은 기름부음 받으신 성자에게서 오순절 성령의 선물을 받는다고 설명한다.
(나) 그리스도의 몸에 결합되는 세례가 그 본성상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성찬 나눔을 지향하는 것이라면, 세례 받은 다음 영성체를 허락받기까지 그 사이에 어떻게 또 다른 별개의 예식이 개입될 수 있는가에 관한 문제가 제기된다. 유아에게 세례를 주지만 그러한 예식을 거치기 전에는 성찬 참여를 허가하지 않는 교회들은 그들이 세례의 결과를 충분히 이해하고 받아들여 왔는지 숙고하고자 하는 것이다.
(다) 세례는 계속 재확인되어야 한다. 세례를 재확인하는 가장 분명한 형태는 성찬례의 거행이다. 해마다 기념하는 파스카 신비나 다른 이들의 세례식 등에서 세례 서약을 갱신할 수도 있다.
다. 상호 세례 인정을 향하여
15. 점차 교회들은 세례 지원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했거나 유아 세례의 경우에는 교회(부모, 보호자, 대부모와 회중)가 그러한 고백을 하고 나중에 개인의 신앙과 서약으로 확인되었다면, 상대 교회의 세례를 그리스도께 결합되는 하나의 세례로 인정하고 있다. 상호 세례 인정은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세례의 일치를 표현하는 중요한 표지이자 수단으로 인식된다. 가능하면 교회들은 상호 인정을 언제나 명시적으로 표명하여야 한다.
16. 신자 세례를 주는 교회들과 유아 세례를 주는 교회들은 그들의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그들 관습의 특정한 측면들을 재고해야 한다. 전자의 교회들은 어린이들이 하느님 은총의 보호 아래 있다는 사실을 더욱 가시적으로 표현하고자 할 수도 있으며, 후자의 교회들은 무분별한 세례의 관습이 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고 세례 받은 자녀들이 그리스도께 더욱 투신할 수 있도록 길러야 할 책임을 더욱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V. 세례의 거행
17. 세례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물로 베풀어진다.
18. 세례의 거행에서 물의 상징적 차원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하며 축소시키는 일이 없어야 한다. 물에 잠기는 행위는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묻힘과 부활에 참여한다는 실재를 생생하게 표현할 수 있다.
해설 18. 일부 신학 전통들에서 볼 수 있듯이, 물의 사용은 생명과 축복에 관련된 모든 긍정적인 연상과 더불어 옛 창조와 새 창조의 연속성을 뜻하며, 따라서 인간뿐만 아니라 온 우주를 위한 세례의 의미를 드러낸다. 또한 물의 사용은 창조의 정화, 곧 세상에서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모든 것의 죽음을 나타낸다.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의 몸으로 결합된 이들은 새로운 삶에 동참하는 사람이 된다.
19. 초세기에 그러했듯이, 세례를 통한 성령의 선물은 부가적인 방식으로, 예를 들어 안수나 기름 부름 곧 도유로 표시될 수 있다. 성호를 긋는 것은 하느님께서 당신 사람으로 삼으신 이들을 완전히 구원하실 때에 오게 될 것의 일부이자 보증이신 성령의 약속된 선물을 상기시킨다(에페 1,13-14). 그러한 생생한 표시들의 회복이 전례를 풍요롭게 하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20. 모든 전반적인 세례 예식 안에는 적어도 다음 요소들이 포함되어야 한다. 세례에 관련된 성경 구절의 선포, 성령 청원, 죄의 포기, 그리스도와 삼위일체에 대한 신앙 고백, 물의 사용, 세례 받은 사람이 하느님 자녀로서 또 교회의 구성원으로서 새로운 신원을 획득하여 복음의 증인이 되도록 부름 받았다는 선언이다. 일부 교회들은 성령의 선물로 세례 받은 이라는 인호를 받고 영성체에 참여하지 않고는 그리스도교 입교가 완성되지 않는다고 여긴다.
21. 세례 예식의 맥락에서 성경을 바탕으로 세례의 의미를 설명하는 것이 적절하다(곧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동참, 회개, 용서, 정화, 성령의 선물, 그리스도의 몸으로의 결합, 하느님 나라의 표지 등).
해설 21. 최근의 논의 결과, 세례가 행해지는 사회문화적 배경이 조장하는 오해들에 더욱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음이 지적되었다.
(가) 세계의 일부 지역에서는 세례 예식에서 이름을 지어주는 관행이 세례와 명명 관습 사이에 혼란을 일으켜 왔다. 이러한 혼란은, 그리스도교가 주류가 아닌 문화들에서 세례 받은 이가 그 문화의 전통에 뿌리박지 않은 그리스도교 이름을 지녀야 하는 상황에서 특히 더 해로운 것이다. 세례에 관련된 규정을 만들 때에 교회들은 세례의 참된 그리스도교적 의미를 강조하고 세례 받은 이들이 외국식 이름을 갖게 됨으로써 지역 문화에서 불필요하게 소외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여야 한다. 자신의 문화에서 유래된 이름은 세례 받은 이가 그 문화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하는 동시에 세례의 보편성, 세계 모든 민족에 퍼져 있는 하나이고 거룩하며 보편되고 사도로부터 이어 오는 교회에 통합됨을 드러낸다.
(나)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여러 거대한 다수 교회들에서 유아 세례는 명백하게 무분별한 방식으로 흔히 이루어진다. 이 때문에 신자 세례를 주는 교회들은 유아 세례의 유효성을 인정하기를 더욱 꺼리게 된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그러한 다수 교회들 안에서 세례의 의미에 대한 더욱 비판적인 성찰이 있어야 한다.
(다) 일부 아프리카 교회들은 다른 교회들의 세례를 인정하면서도 안수를 통하여 물 없이 성령의 세례를 행한다. 이러한 관습에 대해서, 그리고 물로 주는 세례와의 관계에 대해서 연구할 필요가 있다.
22. 특별한 경우에는 다른 이들도 세례를 줄 수 있지만, 세례는 통상적으로 성직자가 집전한다.
23. 세례는 교회의 공동생활과 예배에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으므로 통상적으로 공적 예배 중에 집전됨으로써 회중이 자신의 세례를 상기하고 이제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성장시켜야 하는 이들을 자신들의 친교 안으로 따뜻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세례성사는 초기 교회의 관습대로 부활 대축일이나 성령 강림 대축일, 주님 공현 대축일과 같은 대축일에 거행하는 것이 적절하다.
성찬(Eucharist)
I. 성찬의 제정
1. 성찬례는 주님께서 교회에 주신 선물이다. 바오로 사도는 “사실 나는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전해 주었습니다. 곧 주 예수님께서는 잡히시던 날 밤에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또 만찬을 드신 뒤에 같은 모양으로 잔을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너희는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1코린 11,23-25. 마태 26,26-29; 마르 14,22-25; 루카 22,14-20 참조)라고 썼다.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활동하시는 동안 사람들과 나누신 식사는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포하고 실현한다. 군중을 먹이신 것은 그 표징이다. 예수님의 최후 만찬에서는 하느님 나라의 친교가 예수님께서 곧 겪으실 고통과 연관되어 있었다. 부활하신 다음 주님께서는 빵을 나누어 주시면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현존을 알리셨다. 따라서 성찬례는 예수님의 지상 생활 동안에, 그리고 부활하신 다음에 사람들과 나누신 이러한 식사들을 하느님 나라의 표지로서 언제나 계속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억압의 땅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과월절이나 시나이 산에서 계약을 맺은 다음 한 식사를(탈출 24장) 성찬례의 예표로 본다. 성찬례는 교회의 새로운 파스카 식사이며 새 계약의 식사로서,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마련해 주신 이 식사는 당신 죽음과 부활에 대한 기념이며 또한 어린 양의 잔치에 대한 선취이다(묵시 19,9).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하느님 백성으로 남아 있으면서 이 성사적 식사 안에서 당신을 기억하고 만나도록 명령하셨다. 예수님의 최후 만찬은 상징적인 언어와 행동들이 사용된 전례적 식사였다. 따라서 성찬례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예수님께서 당신 사람들을 ‘끝까지’(요한 13,1) 사랑하신 그 사랑을 가시적 표징들로 우리에게 전해 주는 성사적 식사이다. 성찬례는 주님의 만찬, 빵 나눔, 거룩한 친교(영성체), 거룩한 전례, 미사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어 왔다. 성찬례 거행은 교회 예배에서 언제나 중심적인 행위를 이룬다.
II. 성찬의 의미
2. 성찬례는 본질적으로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권능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은총의 성사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이루는 친교를 통하여 이러한 구원의 선물을 받는다. 빵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 성찬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당신과의 친교를 허락하신다. 하느님께서 친히 개입하시어 그리스도의 몸에 생명을 주시고 각 지체를 새롭게 하신다. 그리스도의 약속에 따라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된 모든 세례 받은 이는 성찬례를 통하여 죄의 용서에 대한 확신과(마태 26,28) 영원한 삶에 대한 약속을(요한 6,51-58) 받는다. 성찬례는 본질적으로 하나의 완전한 행위이지만, 여기서는 성부께 드리는 감사, 그리스도께 대한 기념, 성령의 청원, 신자들의 친교, 하느님 나라의 식사라는 측면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가. 성부께 드리는 감사인 성찬
3. 언제나 말씀과 성사를 모두 포함하는 성찬례는 하느님의 위업을 선포하고 기념하는 것이다. 성찬례는 창조와 구원과 성화를 통하여 이루어진 모든 것, 인간의 죄에도 하느님께서 지금 교회와 세상 안에서 이루시는 모든 것, 하느님 나라를 완성하시면서 이루실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커다란 감사를 드리는 것이다. 따라서 성찬례는 교회가 하느님의 모든 은혜에 감사를 표현하는 찬양(berakah)이다.
4. 성찬례는 교회가 모든 피조물을 위하여 바치는 찬미의 큰 희생제사이다. 하느님께서 화해시키신 세상이 매 성찬례마다 현존하기 때문이다. 빵과 포도주에, 신자들 개개인에, 또 신자들이 자신과 모든 이를 위하여 바치는 기도 안에 세상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신자들을 당신께 일치시키시고 당신의 중개에 그들의 기도를 담으시어 신자들이 변화되게 하시고 하느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들어 주도록 하신다. 이 찬미의 제사는 오로지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다. 신자들은 땅의 산물이며 인간 노동의 열매인 빵과 포도주를 신앙과 감사 안에서 아버지께 봉헌한다. 그러므로 성찬례는 세상이 지녀야 할 참모습을 보여준다. 곧 창조주께 봉헌과 찬미의 노래를 바치고,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보편적 친교를 맺으며, 성령 안에서 정의와 사랑, 평화의 나라를 이룩하여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나. 그리스도께 대한 기념인 성찬례
5. 성찬례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대한 기념, 곧 모든 인간을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단 한 번에 성취되었으며 여전히 유효한 그분의 희생 제사를 보여 주는 살아 있고 효과적인 표징이다. 성찬례에 적용되는 성서적 개념의 기념은 하느님 백성이 성찬 전례를 거행할 때 하느님 활동이 바로 그 자리에서 유효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뜻한다.
6.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모든 피조물을 위하여 당신께서 이루신 모든 일들(강생, 섬김, 직무, 가르침, 수난, 희생, 부활, 승천, 성령 파견을 통하여)과 함께 친히 이 기념에 현존하시면서 당신과 친교를 나눌 수 있게 허락하신다. 성찬례는 또한 그분의 재림과 궁극적인 그 나라를 미리 맛보는 것이다.
7. 당신 교회가 기쁘게 거행하는 이 기념 안에 그리스도께서 친히 활동하시며, 따라서 이 기념은 재현이며 선취이다. 기념은 단지 지나간 것과 그 의미를 회상하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전능하신 행위와 약속들을 교회가 효과적으로 선포하는 것이기도 하다.
8. 재현과 선취는 감사와 전구로 표현된다. 교회는 하느님의 전능하신 구원 활동을 감사하고 기억하며, 하느님께 이러한 행위의 은혜를 모든 인간에게 주시기를 간청한다. 감사와 전구 안에서, 교회는 대사제이며 중개자이신(로마 8,34; 히브 7,25) 성자와 결합된다. 성찬례는 영원히 살아 계시며 우리를 위하여 중개하시는 그리스도의 유일한 희생제사의 성사이다. 성찬례는 하느님께서 세상 구원을 위하여 하신 모든 일에 대한 기념이다. 그리스도의 강생과 생애와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통하여 하느님의 뜻으로 이루신 바를 하느님께서 반복하시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유일하며 반복되거나 연장될 수 없다. 그러나 성찬의 기념으로 교회는 우리의 대사제이신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전구 기도를 바친다.
해설 8. 가톨릭 신학에서 성찬례를 ‘속죄의 희생제사’로 언급하는 것은 중개로서의 성찬례의 의미에 비추어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이해는, 단 하나의 속죄, 곧 십자가의 유일무이한 희생제사만이 있으며, 이는 성찬례에서 실현되고 온 인류를 위한 그리스도와 교회의 전구를 통하여 아버지 앞에 바쳐진다는 것이다.
기념에 대한 성경의 개념에 비추어 모든 교회는 ‘희생제사’에 관한 오랜 논쟁들을 재검토하고, 다른 전통들이 왜 이 용어를 사용해 왔거나 거부해 왔는지 더욱 깊이 이해하고자 해야 할 것이다.
9. 그리스도께 대한 기념은 그리스도인의 모든 기도의 토대이며 근원이다. 따라서 우리의 기도는 부활하신 주님의 지속적인 중개에 의존하며 그러한 중개와 결합된다. 성찬례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그분과 함께 살아가고 그분과 함께 고통 받으며 그분을 통하여 기도할 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 주시며, 의화된 죄인인 우리는 기쁘게 또 자유롭게 그분의 뜻을 수행한다.
10.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나날이 살아가면서 우리를 거룩한 산 제물로 봉헌한다(로마 12,1; 1베드 2,5). 하느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이러한 영적 예배는 성찬례로 더욱 풍성하게 되고, 그 안에서 우리는 사랑으로 거룩해지고 화해하여 세상에서 화해의 일꾼이 된다.
11. 우리 주님께 결합되어 있고 모든 성인과 순교자와 친교를 이루는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날인된 계약으로 새롭게 된다.
12. 그리스도께 대한 기념은 성찬례의 내용 그 자체이듯이 또한 선포된 말씀의 내용 자체이기도 하므로, 성찬례와 말씀은 서로를 보강한다. 성찬례 거행은 말씀 선포를 포함하는 것이 적절하다.
13. 성찬례 제정 때에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위가 성찬례 거행의 핵심을 이룬다. 성찬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성사이며, 그분의 실재적 현존의 성사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끝까지 당신 백성과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을 다양한 방식으로 성취하신다. 그러나 성찬례를 통한 그리스도의 현존 방식은 고유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성찬례의 빵과 포도주를 두고 “이는 내 몸이다. … 이는 내 피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것은 참되며, 이 진리는 성찬례가 거행될 때마다 실현된다. 교회는 성찬례 때에 그리스도께서 실재로, 살아서, 능동적으로 현존하신다고 고백한다. 성찬례에서의 그리스도의 실재적 현존이 개인의 신앙에 의존하지는 않지만,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식별하기 위해서는 신앙이 요구된다는 데에는 모두 동의한다.
해설 13. 많은 교회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성찬례의 빵과 포도주가 실재적이고도 신비로운 방식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 곧 충만하게 현존하시는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된다고 믿는다. 빵과 포도주의 표징 아래 가장 심오한 실재는, 우리를 먹이시고 우리의 전존재를 변화시키고자 오시는 그리스도의 전존재이다. 일부 다른 교회들은 성찬례에서의 그리스도의 실재적 현존을 인정하면서도 그 현존을 빵과 포도주의 표징에 분명히 연관시키지는 않는다. 본문 자체에서 표현하고자 한 의견 수렴 안에서 이러한 차이를 수용할 수 있을지 여부는 각 교회가 결정할 몫이다.
다. 성령 청원인 성찬례
14. 성령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성찬 안에서 우리에게 실제로 현존하실 수 있게 하시며, 성찬례 제정 때에 하신 말씀에 담긴 약속을 실현하신다. 그리스도의 현존은 분명 성찬례의 핵심이며, 따라서 성찬례 제정 말씀에 담긴 약속은 성찬 거행에 근본적인 것이다. 그러나 성찬 사건의 궁극적 기원이며 궁극적 완성은 하느님 아버지이시다. 강생하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성찬례의 살아 있는 중심이시며, 그분을 통하여 그분 안에서 성찬례가 이루어진다. 성령께서는 성찬례를 가능하게 하고 계속 유효하게 하시는 무한한 사랑의 힘이시다. 성찬례 거행과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의 관계는 예수님의 역사적 말씀이 현존하고 살아있게 하시는 분인 성령의 역할을 드러낸다. 예수님께서 성찬 제정에서 하신 약속에 힘입어 기도의 응답을 확신하는 교회는, 성찬 사건이 실재가 될 수 있도록 곧 모든 인류를 위하여 당신 생명을 주시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실재적 현존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성령을 보내 주시기를 아버지께 기도한다.
해설 14. 이것은 그리스도의 성찬 현존을 영적으로 추상화하는 것이 아니라 성자와 성령의 불가분적인 일치를 밝히는 것이다. 이러한 일치는 성찬례가 주술적이거나 기계적인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아버지께 바치는 기도라는 것을 분명하게 해 주며, 아버지께 대한 교회의 전적인 의존을 강조한다. 전례에서 성찬 제정 말씀 곧 그리스도의 약속과 에피클레시스(epiklesis) 곧 성령 청원 사이에는 고유한 관계가 있다. 성찬 제정 말씀에 관련하여 성령 청원은 다양한 전례 전통에 따라 서로 다른 위치를 지닌다. 초기 전례에서는 완전한 ‘기도 행위’로써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실재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여겼다. 공동체에, 또 빵과 포도주라는 요소 위에 성령께서 내려오시기를 간청하는 것이다. 그러한 이해를 재발견한다면 빵과 포도주가 어느 순간에 예수님의 몸과 피로 축성되는가 하는 어려운 문제를 푸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15.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성사적 표징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말씀과 성령의 권능 덕분이다. 이 성사적 표징은 친교를 위한 것이다.
해설 15. 교회 역사에 걸쳐, 성찬례 안에 그리스도께서 실재적이고 유일무이하게 현존하시는 그 신비를 이해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들이 이루어져 왔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현존을 설명하려고 하지 않고 그저 믿는 것으로 만족한다. 다른 이들은 성령과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진 변화, 더 이상 평범한 빵과 포도주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바꾸는 그 변화를 강조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또 다른 이들은 실재적 현존에 대한 설명을 발전시켜 왔다. 그러한 설명은 신비의 의미를 완전히 규명했다고 주장하지는 않지만 잘못된 해석들에서부터 그 의미를 보호하고자 한다.
16. 성찬례의 모든 행위는 ‘성령 청원’의 특성을 갖는다. 성찬례는 성령의 활동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성찬 전례의 말씀들 안에서 성찬례의 이러한 측면이 다양하게 표현된다.
17. 새 계약의 공동체인 교회는 거룩해지고 새로워지며 정의와 진리와 일치로 나아가고 세상에서 자신의 사명을 완수할 힘을 얻기 위하여 확신을 갖고 성령을 청원한다.
18. 성령께서는 성찬례를 통하여 하느님 나라를 미리 맛보게 해 주신다. 이로써 교회는 새 창조의 생명을 받고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확신을 얻는다.
라. 신자들의 친교인 성찬례
19. 교회 생활을 풍요롭게 하시는 그리스도와 맺는 성찬의 친교는 또한 교회인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맺는 친교이다. 어떤 장소에서 같은 빵과 같은 잔을 나누는 것은 모든 시대 모든 장소에서 성찬례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또 참여하는 다른 이들과 일치를 이루게 하며 또 그러한 일치를 드러낸다.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가 온전하게 드러나는 것은 바로 성찬례에서이다. 성찬 거행은 언제나 전체 교회와 관련되어 있으며, 전체 교회는 각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성찬 거행에 관련되어 있다. 한 교회가 자신이 전체 교회의 표현임을 주장하려면, 다른 교회들의 이해와 관심사들을 진지하게 고려하면서 자기 교회의 생활을 정립할 수 있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해설 19. 초기부터 세례는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몸과 하나 되고 성령을 부여받는 성사로 이해되어 왔다. 어느 한 교회에서 세례 받은 신자와 그들의 성직자들이 성찬례에 참여하고 그 거행을 집전할 수 있는 권리를 다른 성찬 모임의 집전자나 구성원이 문제 삼는다면 성찬례의 보편성은 그만큼 흐려진다. 세례 받은 어린이들이 주님 만찬에서 영성체에 참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오늘날 여러 교회에서 논의되고 있다.
20. 성찬례는 삶의 모든 측면을 포함한다. 성찬례는 온 세상을 위하여 바치는 대표적인 감사와 봉헌의 행위이다. 성찬례 거행은 하느님의 한 가족 안에 형제자매로 간주되는 모든 이들 사이에 화해와 나눔을 요구하며, 사회 경제 정치 생활에서 적절한 관계를 추구하도록 촉구하는 끊임없는 도전이다(마태 5,23 이하; 1코린 10,16 이하; 1코린 11,20-22; 갈라 3,28).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나누는 만큼, 모든 유형의 불의와 인종주의, 분리정책, 자유의 제한을 근본적으로 물리쳐야 한다.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하느님의 은총이 성찬례를 통하여 인간의 인격과 존엄성에 속속들이 작용하여 그것을 회복시킨다. 성찬례는 신자들을 세계사의 중심 사건에 참여하게 한다. 그러므로 성찬례에 참여하는 우리가 세계의 상황과 인간의 상황을 지속적으로 개선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모순된 이들이다. 인간의 역사에서 화해시키시는 하느님의 현존 앞에 우리의 그러한 행위는 모순이며, 성찬례는 이러한 모순을 일깨워준다. 사회의 온갖 불의한 관계, 인간의 교만에서 비롯된 수많은 분열, 물질적 이해와 힘의 정치, 또한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정당화될 수 없는 교파의 대립이 집요하게 계속된다면 우리는 끊임없이 하느님 심판 아래 놓이게 된다.
21.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는 성찬의 친교에서 비롯되는 연대, 그리고 서로와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책임 있는 관심은 전례에서 구체적으로 표현된다. 곧 죄의 상호 용서, 평화의 인사, 모든 사람을 위한 전구, 함께 먹고 마시는 친교, 또 빵과 포도주를 병자들과 죄수들에게 가져다주는 일이나 그들과 더불어 거행하는 성찬례로 표현되는 것이다. 성찬례에 들어있는 이러한 모든 사랑의 표현은 당신을 종이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증언에 직접 연결되며, 그리스도인들은 그분의 이러한 섬김에 동참한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의 상황 안으로 들어오셨듯이, 성찬 전례도 인간의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상황에 가까이 있다. 초기 교회에서는 남녀 봉사자들의 직분이 성찬례의 이러한 측면을 특별하게 표현했다. 성찬 식탁과 가난한 이들 사이에서 봉사하는 그러한 직분은 구원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현존하심을 적절하게 입증한다.
마. 하느님 나라의 식사인 성찬례
22. 성찬례는 창조의 마지막 갱신으로 약속된 하느님 통치를 내다보게 하며, 그것을 미리 맛보게 한다. 이러한 갱신의 표징은 하느님의 은총이 드러나고 인간이 정의와 사랑과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모든 곳에서 세상 안에 드러난다. 성찬례는 교회가 이러한 표징들에 대하여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 나라가 올 것을 기쁘게 경축하며 선취하는 잔치이다(1코린 11,26; 마태 26,29).
23. 갱신을 약속받은 세상은 성찬 거행의 전 과정에 자리 잡고 있다. 세상은 교회가 온 피조물을 위하여 아버지께 드리는 감사 안에, 교회가 대사제이며 중개자이신 그리스도와 일치되어 세상을 위하여 기도하는 그리스도께 대한 기념 안에, 또한 교회가 성화와 새 창조를 간청하는 성령의 선물을 비는 기도 안에 자리 잡고 있다.
24. 그리스도 몸의 지체들은 성찬례를 통하여 화해를 이루어 사람들 사이에서 화해의 봉사자가 되고 부활의 기쁨의 증인이 되도록 부름 받는다.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활동하실 때에 세리와 죄인들을 찾아 가시고 그들과 더불어 식탁의 친교를 나누셨던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성찬례를 통하여 소외된 이들과 연대를 이루도록, 또 모든 사람을 위한 삶을 사시고 희생하셨으며 이제 성찬례를 통하여 당신을 내어 주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징표가 되도록 부름 받는다.
25. 성찬 거행 자체가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사명에 교회가 동참하는 한 본보기가 된다. 이러한 참여는 복음 선포, 이웃에 대한 봉사, 세상 안의 충실한 현존과 같은 일상의 형태로 나타난다.
26. 성찬례는 온전히 하느님의 선물이므로, 그리스도인들을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변화시키고 이로써 그분의 효과적인 증인이 되게 하는 새로운 실재를 현 세대 안에 가져온다. 성찬례는 선교사들을 위한 소중한 양식이며, 사도 여정 중에 있는 순례자들을 위한 빵과 포도주이다. 성찬 공동체는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당신 생명을 주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말과 행동으로 고백할 수 있는 자양분과 힘을 얻는다. 성찬 회중은 한분이신 주님의 식사를 나누는 한 백성이 되므로 가시적인 울타리 밖에 있는 사람들도 모아들일 수 있도록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신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당신 잔치에 초대하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이 한 식탁에 둘러 앉아 같은 빵을 먹고 같은 잔을 나눌 만큼 완전한 친교로 일치되지 못하는 한, 그들의 선교 증언은 개인 차원에서나 공동체 차원에서 모두 약화된다.
III. 성찬례 거행
27. 성찬 전례는 본질적으로 하나의 전체로서, 역사적으로 볼 때 그 순서와 중요성에는 차이가 있지만 다음과 같은 요소들로 구성된다.
- 찬미가
- 참회 행위
- 용서의 선언
-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지는 하느님 말씀의 선포
- 신앙 고백(신경)
- 온 교회와 세상을 위한 전구
- 빵과 포도주의 준비
- 창조와 구원과 성화의 경이로운 일들에 대하여 아버지께 드리는 감사(유다교 기도 berakah 전통에서 유래됨)
- 신약 전승에 따른, 그리스도의 성체성사 제정 말씀
- 교회를 세운 구원과 수난, 죽음, 부활, 승천과 성령강림이라는 위대한 행위들에 대한 기념
- 공동체와 빵과 포도주 위에 성령 청원(에피클레시스)(성찬례 제정 말씀 전이나 기념 후에, 또는 두 번 모두. 또는 성찬의 ‘성령 청원적’ 특성을 적절하게 표현하는 성령께 대한 다른 언급)
- 하느님께 대한 신자들의 봉헌
- 성인들의 통공에 대한 언급
- 주님의 재림과 하느님 나라의 명확한 현현을 위한 기도
- 전체 공동체의 아멘
- 주님의 기도
- 화해와 평화의 인사
- 빵 나눔
- 그리스도와 교회 각 구성원과 친교를 이루어 먹고 마심
- 마지막 찬미
- 축복과 파견
28. 성찬 거행과 성찬의 친교를 통하여 일치로 나아가는 최선의 방법은 여러 교회들 안에서 가르침과 전례에 관련하여 성찬례 자체를 새롭게 하는 것이다. 교회들은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성찬의 일치에 비추어 자신들의 전례를 검토해 보아야 한다.
전례 개혁 운동을 통하여 교회들은 주님 만찬을 거행하는 방식에서 더욱 가까워졌다. 그러나 우리의 공통된 성찬 신앙에 거스르지 않는 어떠한 전례의 다양성은 건전하고 풍요로운 현실로 인정받을 수 있다. 공통된 성찬 신앙에 대한 확신이 전례나 실천의 획일성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해설 28. 신약 시대부터 교회는 예수님께서 최후 만찬에서 사용하신 빵과 포도주라는 요소들을 계속 사용해
온 것에 매우 큰 중요성을 부여해 왔다. 빵과 포도주가 일상적인 것이 아니거나 구하기 힘든 세계의 일부 지역들에서는 지역의 음식과 음료를 사용함으로써 성찬례를 일상생활에 한층 더 잘 정착시킬 수 있다는 주장들이 때때로 나오고 있다. 주님 만찬에서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불변적 요소는 무엇인지, 또 교회가 자기 권한으로 결정할 수 있는 요소들은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더욱 연구할 필요가 있다.
29. 성찬례 거행 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모으시고 가르치시며 기르신다. 성찬으로 초대하시는 분도, 이를 집전하시는 분도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백성을 이끄는 목자이시며, 하느님 말씀을 선포하는 예언자이시고, 하느님 신비를 기념하는 사제이시다.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성직자가 성찬례를 거행한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찬례 거행을 주재하는 이는 그 예식이 회중이 만들어냈거나 소유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드러낸다. 성찬례는 당신 교회 안에 살아 계시는 그리스도에게서 선물로 받은 것이다. 성찬 집전자는 하느님의 주도를 대리하며 보편 교회에서 그 지역 공동체와 다른 지역 공동체들의 친밀한 관계를 드러내는 사절이다.
30. 그리스도교 신앙은 주님 만찬을 거행함으로써 더욱 깊어진다. 그러므로 성찬례를 자주 거행해야 한다. 신학과 전례와 관습의 많은 차이들은 성찬례 거행의 빈도와 관련이 있다.
31. 성찬례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축하므로 적어도 매 주일마다 거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성찬은 하느님 백성의 새로운 성사적 식사이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자주 영성체할 것을 권장하여야 한다.
32. 일부 교회들은 성찬례 거행 후에도 축성된 빵과 포도주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속 현존하신다고 강조한다. 다른 교회들은 거행 행위 자체와 영성체 행위 중에 빵과 포도주를 섭취할 것을 주로 강조한다. 축성된 요소들은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 다루어야 한다. 이러한 요소들을 보관하는 관습에 관련하여, 각 교회는 다른 교회들의 관습과 신심을 존중해야 한다. 교회들의 관습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생각하고, 또한 동시에 일치를 모색하는 현재의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할 수 있겠다.
- 한편으로, 특히 설교와 가르침에서, 축성된 요소들을 보관하는 근본 목적은 병자들과 불참자들에게 나누어 주기 위한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 다른 한편으로, 성찬 거행에서 사용된 요소들을 존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병자 영성체를 위하여 사용할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섭취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33. 이 문서에서 나타나듯이 상호 이해가 점점 증대되는 덕분에 일부 교회들은 서로 성찬의 친교를 더욱 증진시키고 그리스도의 갈라진 백성이 주님 식탁에 함께 둘러앉아 다시 일치를 드러내는 날을 앞당길 수 있을 것이다.
직무(Ministry)
I. 하느님의 온 백성이 지닌 소명
1. 깨어진 이 세상에서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하느님 백성으로 삼고자 부르신다. 이를 위하여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선택하셨고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독특하고 결정적인 방식으로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온 인류의 본성과 조건과 동기를 당신 것으로 삼으시고, 당신을 모든 인간을 위한 희생 제물로 내어 주셨다. 예수님의 봉사의 삶과 죽음과 부활은 복음의 기쁜 소식과 성사의 선물로 계속 세워지는 새로운 공동체의 토대가 된다.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을 하나의 몸 안에 결합시키시고 그들을 증인으로 세상에 내 보내신다. 교회에 속해 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하느님과 친교를 이루어 살아간다는 뜻이다.
2. 교회 생활은 죄와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단 한 번에 성취된 그리스도의 승리를 바탕으로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용서를 베푸시고, 회개로 이끄시며, 파멸에서 구원해 주신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람들은 하느님을 찬미하고 이웃에게 봉사할 수 있게 변화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들은 자유와 상호 용서와 사랑이 가득한 새로운 삶의 근원을 찾는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들의 마음과 정신은 그리스도의 승리가 드러나고 모든 것이 새로워질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지향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사람이 이러한 친교를 나누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다.
3. 교회는 자유롭게 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힘으로 살아간다. 성령이 예수님께 내려오신 것은 예수님의 세례에서 입증되며, 부활 후에도 바로 이 성령께서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이들에게 내리시어 그들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셨다. 성령께서는 모든 사람을 신앙으로 부르시며, 여러 은총으로 그들을 거룩하게 하시고, 그들에게 복음을 증언할 힘을 주시며, 희망과 사랑으로 봉사하도록 힘을 실어 주신다. 성령께서는 교회가 진리 안에 머무르게 하시며 구성원들의 연약함에도 교회를 지켜 주신다.
4. 교회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그 예표가 되도록 부름 받는다. 교회는 세상에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또한 그리스도의 몸으로 현존하는 그 자체로 이 사명을 완수한다.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왔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구원하셨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에게는 기쁜 소식을, 잡혀간 이들에게는 해방을, 눈먼 이들에게는 다시 볼 수 있는 눈을, 억압받는 이들에게는 해방을 선포하셨다(루카 4,18).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 다가갈 새로운 길을 열어 주셨다. 이렇게 하느님과 친교를 이루어 사는 교회의 모든 구성원은 그들의 신앙을 고백하고 희망을 말하도록 부름 받는다. 그들이 돌보는 사랑을 증언하고자 한다면 모든 사람의 기쁨과 고통을 자기 것으로 삼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은 억압받는 이들과 함께,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더불어 약속되어 있는 그 자유와 존엄을 향하여 노력해 가야 한다. 이 사명은 다양한 정치 사회 문화적 배경에서 수행되어야 한다. 이 사명을 충실하게 수행하기 위하여 그들은 각자의 상황에서 적절한 형태의 증언과 봉사를 찾아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하느님 나라의 기쁨과 영광을 세상이 미리 맛보게 할 것이다.
5. 성령은 공동체에 다양하고 상호 보완적인 은사들을 주신다. 이러한 은사들은 모든 사람의 공동선을 위한 것이며 공동체 안에서 세상을 향한 봉사의 행위를 통하여 드러난다. 말과 행동으로 복음을 전하는 은사, 치유의 은사, 기도의 은사, 가르침과 배움의 은사, 섬김의 은사, 지도와 순종의 은사, 영감과 환시의 은사 등이 있다. 모든 구성원은 공동체의 도움을 받아 그들이 받은 은사를 발견하고, 교회를 건설을 위하여, 또 교회가 파견된 세상에 봉사하기 위하여 그 은사들을 사용하도록 부름 받는다.
6. 교회들은 하느님 백성의 소명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에서는 동의하지만, 교회 생활을 어떻게 정립해야 하는지에 관한 이해에서는 차이를 보인다. 특히 성품 직무의 지위와 형태에 관해서 큰 차이가 있다. 이러한 차이를 극복하고자 노력하는 교회들은 모든 하느님 백성의 소명이라는 관점에서 일할 필요가 있다. 다음 질문에 대한 공통된 대답을 찾아야 한다. 하느님 뜻에 따라, 또 성령의 인도 아래, 복음을 전파하고 사랑의 공동체를 세우려면 교회 생활을 어떻게 이해하고 규정하여야 하는가?
II. 교회와 성품 직무
7. 용어의 차이는 논의 중인 문제 가운데 하나이다. 교회의 성품 직무에 관한 논의에서 혼란을 피하기 위해서, 앞으로 이 글에서 다양한 용어들이 어떻게 사용되는지 분명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겠다.
가) ‘은사’(charism)는 성령께서 공동체 건설과 그 소명의 완수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몸의 어느 지체에게 주시는 선물들을 말한다.
나) 가장 광범한 의미의 ‘직무’(ministry)는 하느님의 모든 백성이 개인으로, 지역 공동체로, 또는 보편 교회로서 부름 받은 봉사를 말한다. 직무는 이러한 봉사가 지니는 특정한 제도적 형태를 뜻하기도 한다.
다) ‘성품 직무’(ordained ministry)라는 말은 특정 은사를 받고 교회가 성령 청원과 안수를 통한 성품으로 봉사직에 임명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라) 많은 교회들은 ‘사제’(priest)라는 말을 특정한 성직자를 뜻하는 용어로 사용한다. 이러한 사용이 보편적이지는 않기 때문에 이 문서 17항에서 실질적인 문제들을 논의할 것이다.
가. 성품 직무
8. 교회가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근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의존한다는 사실을 공적으로 또 계속적으로 책임지고 지적하고 이로써 은사의 다양성 안에서 일치의 중심이 될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가장 초기부터 서품되어 온 그러한 사람들의 직무가 교회 생활과 교회의 증언을 형성한다.
9. 교회에는 언제나 특정한 권위나 책임을 맡은 이들이 있어 왔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하느님 나라의 증인으로 선택하고 파견하셨다(마태 10,1-8). 열두 제자들은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루카 22,30)이라고 약속받았다. 초대 공동체에서 열두 사도들에게 특별한 역할이 부여된다. 그들은 주님의 삶과 부활의 증인이다(사도 1,21-26). 그들은 기도와 가르침, 빵 나눔, 선포와 봉사로 공동체를 이끈다(사도 2,42-47; 6,2-6 등). 열두 제자와 다른 사도들의 존재 자체가 처음부터 공동체 안에 역할이 분화되어 있었음을 보여 준다.
해설 9. 신약 성경에서 ‘사도’라는 용어는 다양하게 사용된다. 이 말은 열두 제자들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더 넓은 의미의 제자들에게도 사용된다. 바오로와 다른 여러 사람들도 사도로 불리는 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선포하도록 그들을 파견하셨기 때문이다. 사도들의 역할은 교회를 세우고 선교하는 것이다.
10.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들을 새로운 이스라엘의 대표로 부르셨다. 이로써 그들은 하느님의 모든 백성을 대표하며 동시에 공동체 안에서 특별한 역할을 수행한다. 부활 후에는 공동체의 지도자들이 된다. 사도들은 교회 전체와 교회 안에서 특정한 권위와 책임을 맡은 이들을 모두 예시한다고 할 수 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사도들의 역할은 유일하며 반복될 수 없다. 그러므로 사도들과 성직자들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성직자들의 직무는 사도들의 직무를 토대로 한다.
11.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을 선택하고 파견하셨듯이, 지금도 성령을 통하여 사람들을 뽑으시고 성품 직무로 부르신다. 사절이며 대사로서 성직자들은 공동체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대리하며 그분의 화해의 메시지를 선포한다. 지도자요 교사인 그들은 율법과 예언을 완성하신 스승이며 예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에 복종하도록 공동체에 촉구한다. 최고 목자인 예수 그리스도 아래 목자인 그들은 다가올 하느님 나라를 기다리면서 하느님의 흩어진 백성을 모으고 이끈다.
해설 11. 성품 직무의 기본적인 실재는 처음부터 있었다(8항 참조). 그러나 실제적인 형태의 성품과 성품 직무는 복잡한 역사의 과정 안에서 발전되어 왔다(19항 참조). 그러므로 교회들은 자기 교회의 성품 직무의 특정한 형태가 예수 그리스도의 뜻과 제정에 직접 연결된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12. 신앙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은 성직자이든 평신도이든 모두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 한편으로 공동체는 성직자를 필요로 한다. 그들의 존재는 공동체에 하느님의 계획을 상기시키고, 교회는 그 사명의 원천이며 일치의 토대인 예수 그리스도께 의존하고 있음을 일깨운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공동체를 건설하며 그 증언을 강화하는 일에 봉사한다. 교회는 그들에게서 성덕과 사랑의 관심의 모범을 추구한다. 다른 한편, 성품 직무는 공동체와 따로 떨어져서 존재하지 않는다. 성직자들은 오로지 공동체 안에서 공동체를 위해서만 그들의 소명을 수행할 수 있다. 그들은 공동체의 인정과 뒷받침과 격려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13. 성품 직무의 주요 책임은 하느님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며 성사들을 집전하고 예배와 선교와 사목을 통하여 공동체 생활을 인도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을 모으고 세우는 것이다.
해설 13. 성품 직무만 이러한 임무를 수행하는 것은 아니다. 성품 직무와 공동체는 서로 깊이 관련되어 있으므로 모든 구성원은 이러한 기능을 수행하는 데에 참여한다. 실제로 모든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을 모으고 세우는 데에 쓰인다. 그리스도의 몸의 모든 지체는 하느님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데에 참여할 수 있으며, 그 몸의 성사 생활에 이바지할 수 있다. 성품 직무는 공동체의 생활과 증언의 일치를 위한 중심을 마련하면서 이러한 기능을 대표적으로 수행한다.
14. 성품 직무가 그리스도와 그 몸의 지체들 사이의 깊고 모든 것을 포용하는 친교의 가시적 중심이 되는 것은 특별히 성찬례 안에서이다. 성찬례를 거행하는 가운데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모으시고 가르치시고 기르신다. 식사에 초대하시고 그 식사를 주재하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시다. 대부분 교회에서 이러한 주재는 성직자가 상징하고 표현한다.
해설 14. 신약 성경은 성찬례 규정에 관하여 거의 언급하고 있지 않다. 성찬례를 누가 주재하였는지에 관한 명시적인 증거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성품 직무가 성찬례 거행을 주재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성품 직무가 교회 생활과 증언의 일치를 위한 중심을 마련하는 것이라면, 성직자가 이러한 임무를 맡는 것은 적절하다. 이것은 공동체를 이끌 임무, 곧 사도 메시지에 담긴 진리와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관련하여 공동체 생활을 감독하고(episkopé) 공동체가 깨어 있도록 격려하는 것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나. 성품 직무와 권위
15. 성직자의 권위는 아버지에게서 권한을 받으시고(마태 28,18) 서품 행위를 통하여 성령으로 이를 부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비롯된다. 이러한 행위는 공동체 안에서 특정한 개인을 공적으로 인정함으로써 일어난다. 예수님께서는 섬기는 분으로 오셨기 때문에(마르 10,45; 루카 22,27), 선별된다는 것은 섬기기 위하여 축성된다는 뜻이다. 성품은 본질적으로 성령의 선물을 위한 기도로 성별된 것이므로 성품 직무의 권위는 서품된 이의 소유가 아니라 몸을 지속적으로 함양하기 위한 선물로 이해되어야 한다. 성직자는 그 몸 안에서, 그 몸을 위하여 서품되었기 때문이다. 하느님 앞에서 책임의 특성을 지니는 권위는 전체 공동체와 협력하여 행사된다.
16. 그러므로 성직자는 독재자나 비인격적인 기능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하느님 말씀을 바탕으로 지혜롭게 사랑으로 지도하도록 부름 받기는 했지만 그들은 상호 의존과 상호성으로 신자들과 결합되어 있다. 그들이 공동체의 응답과 인정을 추구할 때에만 그들의 권위는 고립과 지배의 왜곡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공동체에 헌신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권위를 세상에 보여주신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권위를 드러내고 행사한다. 그리스도의 권위는 유일한 것이다. “그분께서는 율법 학자들과는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다”(마태 7,29). 이러한 권위는 “목자 없는 양들”(마태 9,36)에 대한 사랑이 이끄는 권위이다. 이것은 그분의 섬기는 삶과 궁극적으로는 그분의 죽음과 부활로 확인된다. 교회 안의 권위는 이러한 모범에 일치되고자 할 때에만 참된 것이 될 수 있다.
해설 16. 여기서 두 가지 위험을 피해야 한다. 권위는 공동체를 존중하지 않고서는 행사될 수 없다. 사도들은 신자들의 경험과 판단에 관심을 기울였다. 다른 한편, 성직자들의 권위는 공동체의 의견에 좌우될 만큼 축소되어서도 안 된다. 그들의 권위는 공동체 안에 하느님의 뜻을 드러낼 그들의 책임에 있다.
다. 성품 직무와 사제직
17.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새 계약의 유일한 사제이시다. 그리스도의 삶은 모든 사람을 위한 희생 제물로 바쳐졌다. 이에 따라, 교회 전체는 하나의 사제직으로 그려질 수 있다. 모든 구성원은 자신의 존재를 ‘산 제물’로 바치고 교회와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전구하도록 촉구 받는다. 성직자들은 모든 그리스도인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사제직과 교회의 사제직에 모두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사제라고 적절히 불릴 수 있다. 말씀과 성사를 통하여, 그들의 전구를 통하여, 그리고 공동체에 대한 사목적 인도를 통하여, 신자들의 왕답고 예언자다운 사제직을 강화하고 형성하는 특별한 사제의 봉사를 수행하기 때문이다.
해설 17. 신약 성경은 ‘사제직’이나 ‘사제’이라는 용어를 성품 직무나 성직자를 지칭하는 데에 사용하지 않는다. 신약 성경에서 이 용어는 한편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사제직에,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세례 받은 이의 왕답고 예언자다운 사제직에만 사용된다. 그리스도의 사제직과 세례 받은 이의 사제직은 각기 나름대로 희생과 전구의 기능을 한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내어 주셨듯이, 그리스도인들은 ‘산 제물’로 자신의 온 존재를 바친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앞에서 중재하시듯이,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와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전구한다. 그러나 이 두 사제직의 차이를 경시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단 한 번에 당신을 유일한 희생 제물로 봉헌하셨으나, 신자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하여 하신 것을 하느님의 선물로 끊임없이 받아야 한다.
초기 교회에서 ‘사제직’과 ‘사제’라는 용어는 성찬례를 집전하는 성품 직무와 성직자들을 가리키는 데에 쓰이게 되었다. 그 용어들은 성품 직무가 예수 그리스도와 전체 공동체의 사제적 실재에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 용어들이 성품 직무와 관련하여 사용될 때, 그 의미는 구약의 희생제사의 사제직, 그리스도의 독특한 구원 사제직, 하느님 백성의 공동 사제직과는 합당하게 구별된다. 바오로 성인은 자신의 직무를 “다른 민족들이 성령으로 거룩하게 되어 하느님께서 기꺼이 받으시는 제물이 되게” 하기 위한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제직”(로마 15,16)이라고 일컬었다.
교회 안에서 남성과 여성의 직무
18.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는 곳에서 인간의 장벽은 무너진다. 교회는 새로운 인간의 모습을 세상에 전하도록 부름 받는다. 그리스도 안에는 남자도 여자도 없다(갈라 3,28). 남자와 여자 모두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봉사에 함께 이바지하여야 한다. 교회는 남성이 수행할 수 있는 직무는 물론 여성이 수행할 수 있는 직무도 발견하여야 한다. 남자와 여자의 상호 의존을 반영하는 직무의 포괄성에 대한 더욱 깊은 이해가 교회 생활 안에 더욱 폭넓게 표현되어야 한다.
교회들은 이러한 필요에 동의하기는 하지만 여성에게 성품 직무를 허가하는 문제에 관해서는 서로 다른 결론을 내린다. 점점 더 많은 교회들이 여성 서품에 반대할 아무런 성서적 신학적 이유가 없다고 결정하고 있으며, 그에 따라 그 가운데 많은 교회들이 여성 서품을 실시해 왔다. 그러나 많은 교회들은 이와 관련한 교회의 전통이 바뀌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해설 18. 여성 서품을 실시하는 교회들은 복음이나 직무에 대한 그들 교회의 이해를 바탕으로 그렇게 하고 있다. 교회의 성품 직무가 한 성에만 제한된다면 완전성이 결여된다는 깊은 신학적 확신에 근거한 것이다. 이러한 신학적 확신은 지난 몇 해 동안 여성들에게도 성품 직무를 허가해 본 그들의 경험으로 더욱 강화되었다. 그들은 여성이 받은 은사가 남성의 은사만큼 광범위하고 다양하여 여성의 직무도 남성의 직무와 똑같이 성령께서 충만하게 축복하신 것임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결정을 재고해야 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하였다.
여성 서품을 실시하지 않는 교회들은 여성 서품에 반대해 온 지난 19세기 동안의 전통의 힘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교회들은 이 전통이 교회에서 여성의 참여를 덜 존중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그들은 또한 교회에서 여성의 역할에 대한 그들의 확신과 이해의 중심에는 인간의 본성과 그리스도론에 관련된 신학적 문제들이 있다고 믿는다.
여러 교회와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실질적이고 신학적인 문제들에 대한 논의는 모든 교회의 교회 일치적 친교 안에서 공동 연구와 성찰로 보완되어야 한다.
III. 성품 직무의 형태들
가. 주교, 사제, 부제
19. 신약 성경은 교회 안에 있을 모든 직무에 대한 청사진이나 지속적인 표준이 될 만한 하나의 직무 형태를 규정하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신약 성경에는 여러 장소와 시대에 따라 각기 다른 다양한 형태들이 나타난다. 성령께서 교회의 생활과 예배와 사명을 계속 이끄심에 따라 이 초기의 다양한 형태들 가운데 어떠한 요소들은 더욱 발전되어 더욱 보편적 형태의 직무로 정착되었다. 2세기와 3세기 동안 주교와 사제, 부제라는 삼중 형태가 전 교회에 걸쳐 성품 직무의 형태로 정립되었다. 그 이후 여러 세기 동안 주교와 사제, 부제의 직무는 실제로 실천되는 과정에서 상당한 변화를 겪었다. 교회 역사의 어떤 위기의 순간들에는, 일부 지역과 공동체에서 이러한 지배적인 삼중 형태가 아닌 다른 구조에 따라 지속적인 직무 기능이 퍼지게 되었다. 때로는 이러한 다른 형태들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신약 성경에 의존하기도 하였다. 다른 경우에는, 환경의 변화에 따라 변하는 직무의 재편성은 교회의 권한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20. 교회 역사에서 삼중 직무의 변천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삼중 직무가 가장 처음 언급된 경우는 지역 성찬 공동체에 관한 것이다. 주교가 그 공동체의 지도자였다. 주교는 말씀을 선포하고 성찬 거행을 주재하기 위하여 서품되고 임명되었다. 주교를 중심으로 그의 임무를 보좌하는 사제단과 부제들이 있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주교 직무는 전체 공동체 안에서 일치의 중심이었다.
21. 그러나 그 기능은 곧 변화되었다. 주교는 동시에 몇몇 공동체들에 대하여 감독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첫 세대에서 사도들은 더욱 광범한 교회에서 감독권을 행사하였다. 그 후에는 티모테오와 티토가 일정한 지역에서 감독 기능을 수행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나중에 다시 이 사도직 임무는 주교들을 통하여 새로운 방식으로 수행된다. 그들은 몇몇 성찬 공동체로 구성된 지역 안에서 생활과 증언에서 일치의 중심이 된다. 그 결과, 사제와 부제들에게 새로운 역할이 부여되었다. 사제들은 지역 성찬 공동체가 지도자가 되고, 주교들의 보좌인 부제들은 더욱 넓은 지역에서 책임을 부여받는다.
해설 21. 초기 교회에서는 바오로와 같은 선교사들의 순회 직무와, 복음을 받아들인 지역들에서 지도자들의 지역 교회적 직무가 모두 존재했다. 지역적 차원에서, 조직 형태는 환경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사도행전은 예루살렘에서는 열두 사도와 일곱 봉사자, 그 이후에는 야고보와 원로들이, 안티오키아에서는 예언자들과 교사들이 있었다고 언급한다(사도 6,1-6; 15,13-22; 13,1).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들은 사도들과 예언자들과 교사들을 언급하며(1코린 12,28),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도 마찬가지로 봉사자 또는 일꾼을 언급하고 있다(로마 16,1). 필리피서에서는 감독과 봉사자라는 세속 용어들이 그리스도교 교역자들에게 사용되었다(필리 1,1). 이러한 직무 가운데 일부는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부여된다. 어떤 이들은 안수로 임명되었지만, 다른 경우들에는 이러한 임명 절차에 대한 암시가 없다. 명칭이 어떠하든 이러한 직무들의 목적은 하느님 말씀을 선포하고, 복음의 본래 내용을 전달하고 수호하며,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신앙과 규율과 봉사를 증진하고 강화하며, 그들 안에 또 그들 사이에 일치를 지키고 촉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역사의 발전과 위기 단계에 걸쳐 이러한 일들이 언제나 직무의 본분이 되어 왔다.
22. 신약 성경에 유일한 직무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고 성령께서 여러 차례 상황의 요구에 맞게 그 직무를 변형하도록 교회를 이끄셨고 또 다른 성품 직무의 형태들이 성령의 은사로 강복되기도 했지만, 주교, 사제, 부제의 삼중 직무는 오늘날 우리가 추구하는 일치의 표현이며 일치에 이르는 수단이 된다. 역사적으로 이 삼중 직무는 초세기 교회 안에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형태였으며 오늘날에도 많은 교회들이 이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교회들은 사명과 봉사를 수행하면서 주교와 사제, 부제의 역할과 기능 안에서 성품 직무의 임무를 다양하게 표현하고 수행할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23. 그리스도의 몸이며 종말론적인 하느님 백성인 교회는 다양한 은사나 직무를 통하여 성령의 작용으로 형성된다. 이러한 은사들 가운데 감독 직무는 몸의 일치를 표현하고 수호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모든 교회는 하느님의 교회가 되고, 그리스도의 한 몸이 되며, 하느님 나라 안에서 모든 이의 일치의 징표가 되기 위하여 어떠한 형태로든 이러한 일치의 직무를 필요로 한다.
24. 이러한 삼중 형태는 분명 개선될 필요가 있다. 일부 교회에서는 성찬 공동체 안에서 단체 차원의 지도력이 축소되었다. 다른 교회들에서는 부제들의 기능이 전례 거행을 보조하는 역할로 축소되어, 교회의 봉사 증언에 관해서는 아무 기능도 수행하지 않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사제 직무와 주교 직무의 관계는 수세기에 걸쳐 논의되어 왔으며 주교 직무에 사제가 참여하는 정도는 많은 교회들에게 교회 일치 면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이나 아직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공식적으로 삼중 형태를 가지지 않았던 교회들도 사실상 그러한 본래의 형태를 어느 정도 유지하였다.
25. 따라서 전통적인 삼중 형태는 모든 교회에 문제들을 제기한다. 이 형태를 유지하는 교회들은 이 세상에서 교회가 가장 효과적으로 증언하기 위해서 그러한 형태에 잠재된 것을 어떻게 충분히 발전시킬 수 있을지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삼중 형태를 갖고 있지 않은 교회들도 이러한 임무에 역시 참여해야 한다. 나아가 그들은 이렇게 발전되어 온 삼중 형태가 그들이 받아들일 만한 강력한 근거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나. 교회 안에서 성품 직무를 수행하기 위한 지침들
26. 이와 관련하여 세 가지 중요한 고려 사항이 있다. 성품 직무는 개인적이고 단체적이고 공동체적인 방식으로 수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품 직무는 개인적이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백성 사이에 현존하신다는 것을 가장 효과적으로 알릴 수 있는 사람은 복음을 선포하고 삶과 증언의 일치 안에 주님을 섬기도록 공동체를 이끌기 위하여 서품된 사람이기 때문이다. 성품 직무는 단체적이어야 한다. 공동체의 관심사를 대변할 공동 책임을 나누어 맡은 성직자단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성품 직무와 공동체의 긴밀한 관계는 공동체적 차원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곧 성품 직무의 수행은 공동체 생활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하느님의 뜻과 성령의 인도를 발견하는 데에 공동체가 효과적으로 참여할 것을 요구한다.
해설 26. 이러한 세 측면은 통합되어야 한다. 여러 교회에서 이 가운데 한두 측면만 지나치게 강조하고 다른 측면을 경시하고 있다. 일부 교회들에서는 성품 직무의 개인적 차원이 단체적 공동체적 차원을 감소시키며, 또 어떤 교회들에서는 단체적 공동체적 차원이 지나치게 중요하게 부각되어 성품 직무의 개인적 차원이 축소되기도 한다. 각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자기 교회의 성품 직무의 수행이 어떤 식으로 어려움을 겪었는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1927년 로잔에서 열린 제1차 세계 신앙직제대회에서 작성된 권고의 바탕에는 이러한 세 차원에 대한 이해가 있다. “(i) 주교직, 사제 회의, 신자 회중이 각각 초기 교회 구성에서 차지했던 역할 (ii) 주교와 사제, 회중의 통치 체계를 그리스도교의 큰 교파들이 수세기 동안 받아들여 왔으며 오늘날에도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 (iii) 많은 사람들이 주교와 사제, 회중 체계를 교회의 질서 정립에 핵심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이러한 몇 가지 요소들이 모두 연구를 더욱 필요로 한다는 조건이 있지만 다시 일치된 교회 생활의 질서 속에서 적절한 위치를 차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27. 성품 직무는 교회 안에서 이 세 가지 차원이 각각 적절히 표현될 수 있도록 구조적으로나 교회법적으로 정립되어 실천되어야 한다. 지역 성찬 공동체의 차원에는 단체 안에서 활동하는 성직자가 필요하다. 모든 구성원이 공동체의 생활과 의사 결정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것을 특히 강조하여야 한다. 지역 차원에서는 또한 일치를 위하여 일하는 성직자가 필요하다. 단체적 차원과 공동체적 차원은 정기적인 교회 대의원 회의를 통하여 표현된다.
다. 주교, 사제, 부제의 기능
28. 그렇다면 주교와 사제, 부제의 기능과 직함에 대해서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성품 직무에 대한 상호 인정을 위해서 이 질문에 똑같은 대답을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기능에 대한 다음과 같은 생각들을 임시로 제시할 수 있다.
29. 주교들은 교회 안에서 감독과 연속성과 일치의 대표 사목자들로서 말씀을 선포하며, 성사를 집전하고, 규율을 실행한다. 주교들은 자신이 부름 받은 지역에 대하여 사목적으로 감독한다. 그들은 교회 가르침과 예배와 성사 생활의 사도성과 일치에 이바지한다. 그들은 교회의 선교를 이끌 책임이 있다. 주교들은 자기 지역의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더욱 넓은 교회에, 또한 보편 교회를 자기 공동체에 연결시켜 준다. 주교들은 사제들과 부제, 전체 공동체와 친교를 이루는 가운데, 교회 안에서 직무 권위를 질서 있게 승계시킬 책임이 있다.
30. 사제들은 지역 성찬 공동체에서 말씀과 성사의 사목 봉사자이다. 그들은 신앙의 설교자이고 교사이며, 사목적 관심을 기울이고, 세상이 믿게 되고 교회의 모든 구성원이 새로워지고 강해지며 봉사할 자격을 갖추게 될 때까지 회중의 규율을 돌볼 책임이 있다. 사제들은 특히 신자들이 그리스도교의 삶과 직무를 준비할 수 있도록 할 책임이 있다.
31. 부제들은 세상의 종이 되어야 할 소명을 교회에 보여 준다. 사회와 개인의 수많은 필요에 대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투쟁함으로써 부제들은 교회 생활에서 예배와 봉사가 서로 의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모범이 된다. 그들은 회중의 예배에서 책임을 수행한다. 예를 들어, 성경 독서나 설교, 기도 지도를 들 수 있다. 그들은 회중을 가르치는 일을 돕는다. 그들은 공동체 안에서 사랑의 봉사를 수행한다. 그들은 행정 업무를 수행하며 관리의 책임을 맡은 이로 선임될 수 있다.
해설 31. 많은 교회들에서 오늘날 부제의 필요, 존재 이유, 지위와 기능을 확신하지 못하는 경우가 상당히 있다. 어떤 의미에서 부제직이 성품 직무의 일부로 여겨질 수 있는가? 부제직이 교회의 다른 봉사직(교리교사, 음악 봉사자 등)과 어떻게 구분되는가? 이 직무들은 서품되지 않는데 왜 부제는 서품되어야 하는가? 부제들이 서품된다면, 완전한 의미에서 성품을 받는 것인가 아니면 사제 성품을 위한 첫 단계로 성품을 받는 것인가? 오늘날 많은 교회들에서는 부제직을 그 나름의 품위를 지니고 생활을 위하여 실천되어야 하는 성품 직무로 회복하려는 경향이 강하게 드러난다. 교회들이 서로 더 가까워짐에 따라, 현재 다양한 형태와 다양한 이름으로 존재하는 이 봉사 직무도 통일될 것이다. 부제 직무를 직제화하는 데에 차이점들이 있다고 해서 성품 직무의 상호 인정에 방해가 되는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라. 다양한 은사들
32. 성령의 권능 안에 살아가는 공동체는 다양한 은사들로 특징지어진다. 성령께서는 공동체 생활을 풍요롭게 하는 다양한 은사들을 주시는 분이시다. 그 효과를 드높이기 위하여 공동체는 이러한 몇몇 은사들을 공적으로 인정한다. 어떤 은사들은 공동체 생활에서 지속적으로 필요하겠지만, 어떤 것들은 일시적으로 필요할 것이다. 수도 공동체의 남녀들은 교회 생활에 특별히 중요한 봉사를 수행한다. 그 자체로 은사인 성품 직무는 이러한 다양한 은사들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성품 직무는 공동체가 성령께서 주신 은사들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돕고 공동체 구성원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봉사할 수 있도록 준비시킬 것이다.
33. 교회 역사에서 복음의 진리를 보존할 수 있는 사람들이 예언자적이며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들밖에 없던 시기들이 있었다. 새로운 추진력은 흔히 특별한 방식으로만 교회 생활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때때로 개혁은 특별한 직무를 요구했다. 성직자들과 전체 공동체는 그러한 특별 직무의 도전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IV. 사도 전승의 계승
가. 교회의 사도 전승
34. 신경에서 교회는 스스로 사도로부터 이어옴을 고백한다. 교회는 사도들과 또 사도들의 선포와 연결되어 살아간다. 사도들을 보내신 그 주님께서 지금도 교회 안에 계속 현존하고 계신다. 성령께서는 하느님 나라 안에 역사가 완성될 때까지 교회를 사도 전승 안에 지켜 주신다. 교회에서 사도 전승은 사도들의 교회의 항구한 특징들의 연속성을 의미한다. 곧 사도 신앙에 대한 증언, 복음의 선포와 참신한 해석, 세례와 성찬례 거행, 직무 책임의 전수, 기도와 사랑과 기쁨과 고통 안의 친교, 병자와 가난한 이들에 대한 봉사, 지역 교회들 사이의 일치와 주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은사의 나눔을 말한다.
해설 34. 그리스도의 삶과 부활의 증인이며 그리스도에게서 파견 받은 사도들은 복음을 처음으로 전파한 이들이며, 교회 생활을 구성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말씀과 행적의 전승을 처음으로 전달한 이들이다. 이러한 사도 전승은 역사에 걸쳐 계속되며 교회를 그 기원인 그리스도와 사도단에 연결시켜 준다. 이러한 사도 전승 안에, 교회가 계속 그리스도 안에서 생활하게 하고 사도들이 전한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에 언제나 충실하게 하는 직무의 사도 계승이 있다. 사도들이 임명한 봉사자들과 또 교회의 감독들은 사도 전승의 이러한 계승의 첫 수호자들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에서 사제들과 부제들과 단체적 친교를 이루어 초기 교회의 주교들을 통하여 계속되어 온 직무의 사도 계승을 증언하였다. 그러므로 전체 교회의 사도 전승과 사도 직무의 계승은 구분되어야 한다.
나. 사도 직무의 계승
35. 사도 계승의 일차적 표현은 교회 전체의 사도 전승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러한 계승은 교회가 동참하는 그리스도의 사명의 항구함과 계속성의 한 표현이다. 교회 안에서 성품 직무는 사도 신앙을 보존하고 실현할 특별한 임무가 있다. 그러므로 성품 직무의 합당한 계승은 역사에 걸쳐 교회가 지속되고 있음을 드러내는 강력한 표현이다. 이는 또한 신앙의 수호자로서 성직자의 소명을 강조한다. 교회들이 합당한 계승의 중요성을 소홀히 한다면, 사도 전승의 연속성에 대한 개념을 바꾸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다른 한편, 성품 직무가 사도 신앙의 선포를 적절히 수행하고 있지 못한 교회에서는 직무 구조를 개혁할 필요는 없는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36. 초세기 동안 성장했던 교회의 특별한 역사적 상황에서 주교들의 계승은 복음과 공동체 생활의 전달과 더불어 교회의 사도 전승을 표현하는 여러 방법 가운데 하나였다. 이러한 계승은 사도 신앙과 친교의 연속성에 이바지하고 이를 상징하며 수호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해설 36. 초기 교회에서 주교직과 사도 공동체의 유대는 두 가지로 이해되었다. 로마의 클레멘스는 주교의 사명을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파견하신 것,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신 것과(「코린토인들에게 보낸 서간」 42; 44) 연결 지어 생각했다. 이로써 주교는 사도들의 계승자가 되고, 교회 안에서 사도적 사명의 영속성이 보장된다. 클레멘스가 기본적으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사도 계승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현존의 역사적 연속성이 교회 안에 보장되게 하는 수단들이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는(「마그네시아인들에게 보낸 서간」, 6,1; 3,1-2; 「트랄레스인들에게 보낸 서간」, 3,1), 사제들에 둘러싸인 주교를 통하여 교회 안에 항구히 현존하시는 분은 열두 사도들에 둘러싸인 그리스도라고 하였다. 이냐시오는 사제들과 부제들 가운데 주교를 중심으로 모인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사도 공동체가 성령 안에 실제로 드러난 것으로 본다. 따라서 사도 계승의 표징은 역사적 연속성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실제적이며 영적인 실재를 드러낸다.
37. 주교직을 통한 계승을 실천하는 교회들 안에서, 역사적으로 주교직의 형태를 갖고 있지 않은 교회들에서도 사도 신앙과 예배와 선교의 연속성이 보존되고 있다는 인식이 증대되고 있다. 이러한 인정은 ‘주교’라는 직함이 있든 없든 주교 직무의 실재와 기능이 이러한 많은 교회들 안에 보존되어 왔다는 사실로 더욱 뒷받침된다. 예를 들어, 그러한 교회 안에서 서품은 언제나 직무상 임무를 전수할 권위를 교회가 인정한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38. 이러한 생각이 주교직의 중요성을 감소시키지는 않는다. 오히려 주교직을 갖고 있지 않은 교회들이 주교직 계승을 교회의 연속성과 일치의 보장까지는 아니더라도 징표로는 인정할 수 있게 한다. 오늘날 교회들은, 일치 협의에 참여하는 교회들을 포함하여, 전체 교회 생활의 사도성의 징표로 주교 계승을 기꺼이 받아들일 의사를 표현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자신의 전통에서 수행해 온 직무가 기존의 주교직 계승 전통에 통합되기 전에는 무효하다는 주장은 어떤 것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한 교회들이 주교직 계승을 수용한다면, 주교직을 실시하는 교회들이 잃어버린 일치를 찾는 더욱 폭넓은 과정 안에 그러한 수용이 포함됨으로써 전체 교회의 일치를 더욱 촉진할 것이다.
V. 성품
가. 성품의 의미
39. 교회는 구성원 가운데 일부를 성령 청원과 안수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직무에 서품한다(1티모 4,14; 2티모 1,6). 그렇게 함으로써 교회는 사도들의 사명을 계속하고 그들의 가르침에 언제나 충실하고자 한다. 이 직무에 임명된 사람들의 서품 행위는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유대와 사도 증언을 입증하며, 참된 서품자로서 은총을 주시는 분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임을 상기시킨다. 성품을 통하여 교회는 성령의 영감 아래 신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겸손히 봉사한다. 안수는 성령의 은사를 나타내는 징표로서 직무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계시로 제정되었다는 사실을 가시화하고, 교회가 교회 사명의 근원이신 그분을 의지하도록 상기시킨다. 그러나 이 서품은 서품 전례에 제시된 대로 주교와 사제, 부제의 특정한 임무에 따라 서로 다른 것을 지향할 수 있다.
해설 39. 분명히 교회들은 서로 다른 서품 관행을 가지고 있으며, 이 가운데 어느 한 가지 만이 유효하다고 인정하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한편, 위에서 설명한 대로, 교회들이 사도 계승의 징표 안에서 서로를 기꺼이 인정한다면, 주교가 서품하고 공동체가 참여하는 오랜 전통 또한 인정받고 존중될 것이다.
40. 그러므로 성품은 하느님과 공동체의 행위로서 이로써 서품된 사람은 자신의 임무에서 성령께 힘을 받고 회중의 인정과 기도로 뒷받침 받는다.
해설 40. 성품에 해당하는 본래의 신약 용어는 단순하고 서술적인 편이다. 임명 사실이 기록되어 있으며, 안수가 묘사되어 있고, 성령께 바치는 기도가 있다. 서로 다른 전통들은 이러한 자료를 바탕으로 다양한 해석을 제시해 왔다. 그리스어 cheirotonein과 라틴어 ordo 또는 ordinare의 암묵적인 문화적 배경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음이 명백하다. 신약에서 cheirotonein은 기본적으로 ‘임명’(사도 14,23; 2코린 8,19)이라는 세속적 의미를 차용하고 있으며, 이 말은 본래 사람을 지명하거나 투표를 하기 위하여 손을 뻗친다는 의미에서 파생된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비슷해 보이는 경우들(사도 6,6; 8,17; 13,3; 1티모 4,14; 2티모 1,6)의 행위에 대한 글자 그대로의 설명에 비추어서, cheirotonein라는 말에 안수 행위에 대한 언급이 있다고 본다. 다른 한편, ordo와 ordinare는 로마법에서 파생된 용어로서 평민들과는 구분되는 특별한 지위의 집단이라는 개념을 전달한다. 예를 들어, 로마 원로원을 가리켜 ordo clarissimus라고 하는 경우를 들 수 있다. 이러한 용어들을 사용하는 개념 정립의 출발점은 당연하게 여겨지는 생각과 행위에 강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나. 성품 행위
41. 오랜 초기 그리스도교 전통은 성품을 예배, 특히 성찬례의 맥락 안에 두고 있다. 서품 예식이 그러한 위치를 차지함으로써 성품이 공동체 안의 특정 품계나 서품된 개인의 행위가 아니라 전체 공동체의 행위라는 이해가 보존된다. 안수할 수 있도록 임명받은 이들의 안수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성품 행위는 성령 청원(에피클레시스)인 동시에 성사적 표징이고 은총과 서약에 대한 인정이다.
42. (가) 성품은 새 성직자와 지역 그리스도인 공동체 사이에, 그리고 지향 안에서 그와 보편 교회 사이에 맺어진 새로운 관계에서 그가 성령의 권능을 받을 수 있게 하느님께 청원하는 것이다. 성품 직무가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하느님 계획의 타자성이 여기서 성품 행위 자체를 통하여 인정된다. “성령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요한 3,8 참조). 성령 청원은 교회가 하는 기도가 결실을 얻을 수 있도록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성령께서 새로운 힘들을 작용시키시며, “우리가 청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보다 훨씬 더 풍성히 이루어”(에페 3,20) 주실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실 것임을 의미한다.
43. (나) 성품은 성품 직무의 선물을 주시는 주님께서 이러한 기도를 들어주셨다는 징표이다. 교회의 성령 청원에 대한 응답은 하느님께서 자유롭게 결정하시는 것이지만,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 약속에 충실하신 하느님께서 인간이 예측할 수 없는 역사적 형태로 인간관계 안에 성사적으로 들어오시어 그러한 형태들을 당신 목적에 맞게 사용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서품한다. 성품은 상징적으로 나타난 영적 관계가 말과 몸짓과 형식으로, 또 그것들을 통하여 나타난다는 믿음으로 행하는 하나의 징표이다.
44. (다) 성품은 서품된 사람이 받은 성령의 선물들을 교회가 인정하는 것이며, 교회와 서품된 사람 모두 새로운 관계로 투신하는 것이다. 성품 행위를 통하여 새로운 성직자를 받아들임으로써 회중은 교역자의 은사를 인정하며 스스로도 이러한 은사들에 열려있고자 노력한다. 마찬가지로 서품된 사람들은 이러한 은사를 교회에 봉헌하며 새로운 권위와 책임이라는 기회와 부담에 자신을 헌신한다. 동시에 그들은 다른 성직자들과 단체적 관계를 맺는다.
다. 수품 조건
45. 사람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성품 직무로 부름 받는다. 또한 자신의 삶을 성품 직무에 헌신하라는 주님의 부르심을 개인적으로 인식해야 한다. 이러한 부르심은 가족이나 친구, 회중, 교사, 다른 교회 권위의 권고나 모범, 격려, 지도는 물론 개인 기도와 성찰을 통하여 식별될 수 있다. 이러한 부르심은 타고난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직무 수행에 필요한 특정 개인의 은사와 은총에 대한 교회의 인정으로 승인되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독신자와 기혼자 모두 성품 직무에 쓰실 수 있다.
46. 서품된 사람들은 교회에서 급여를 받는다는 의미에서 직업적 교역자들이다. 교회는 다른 직업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도 서품할 수 있다.
47. 성품 직무의 후보자들은 성경과 신학 공부, 기도와 영성, 그리고 현대 세계의 사회적 인간적 실재들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적절한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 상황에 따라서 이러한 준비는 지속적인 학문 연구의 형태가 아닌 다른 형태를 취할 수도 있다. 훈련 기간은 후보자의 소명을 시험해 보고 강화하고 확인하며 소명에 대한 이해를 수정할 수 있는 시간이 된다.
48. 성품 직무에 대한 첫 서약은 통상적으로 아무 조건이나 기한 없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직무에서 떠난다고 해서 성품과 멀어지는 것은 아니다. 성품 직무를 다시 시작하려면 교회의 동의가 있어야 하지만, 재서품은 필요하지 않다. 하느님께서 주신 직무의 은사를 인정하므로, 모든 성품 직무에 대한 서품은 결코 반복될 수 없다.
49. 수품 조건에 관한 어떤 교회의 규율을 보편적으로 적용 가능한 것으로 보거나, 이를 이유로 다른 교회들의 직무를 인정하지 않을 필요는 없다.
50. 신체의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나 특정 인종이나 사회 집단 출신 사람들을 성품 직무의 후보에서 제외시키는 교회들은 그러한 관행을 재평가해야 한다. 오늘날 교회들이 현대 세계에 접근하기 위하여 시도하는 새로운 형태의 직무에 관한 여러 실험에 비추어 볼 때 이러한 재평가는 특별히 중요하다.
VI. 성품 직무의 상호 인정을 향하여
51. 직무의 상호 인정에서 진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신중한 노력이 필요하다. 모든 교회는 성품 직무의 형태들과 그 본래의 의도에 대한 교회의 충실성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또한 성품 직무에 대한 이해와 관행을 쇄신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52. 교회들이 직무의 상호 인정을 향하여 나아갈 때 다루어야 할 수많은 문제들 가운데 사도 계승의 문제가 특히 중요하다. 교회 일치 대화에 참여하는 교회들이 사도 시대와 이루는 연속성 안에서 말씀과 성사의 봉사 직무를 전달하려는 의도를 서로 확신한다면 각자의 성품 직무를 인정할 수 있다. 이러한 전달 행위는 성령 청원과 안수를 포함하는 사도 전통에 따라 수행되어야 한다.
53. 상호 인정에 이르기 위해서 서로 다른 교회들은 서로 다른 조치들을 필요로 한다.
(가) 주교직 계승을 보존해 온 교회들은 그러한 계승을 유지하고 있지 않는 교회 안에 존재하는 성품 직무의 사도적 내용과 그들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형태의 감독 직무를 인정하도록 요구받는다.
(나) 주교직을 계승하지 않았지만 사도적 신앙과 사명에 충실한 삶을 사는 교회들도 그들 교회의 신앙과 관습과 생활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듯이 말씀과 성사의 직무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교회들은, 주교들의 안수로 사도 교회와 지니는 연속성이 깊이 표현되고 있다는 것을, 또한 그들에게 사도 전승의 연속성이 결핍된 것은 아니더라도 이러한 징표가 그 연속성을 강화하고 심화한다는 것을 깨닫도록 요청받는다. 그들은 주교직 계승의 징표를 회복할 필요가 있다.
54. 남자와 여자를 모두 서품하는 교회도 있고, 남자만 서품하는 교회도 있다. 이 문제에 대한 견해 차이가 직무의 상호 인정에 걸림돌이 된다. 그러나 그러한 걸림돌이 상호 인정을 위한 지속적인 노력에 실질적인 장애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 서로에게 마음을 열면 성령께서 한 교회의 통찰을 통하여 다른 교회에 말씀하실 수 있는 가능성을 인정하게 된다. 그러므로 교회 일치적 사고는 이러한 문제에 직면하는 것을 가로막아서는 안 되며 이를 격려해야 한다.
55. 교회들과 그들의 직무에 대한 상호 인정은 일치를 공적으로 드러내는 합당한 권위의 결정과 어떠한 전례 행위를 의미한다. 그러한 공적 행위의 몇몇 형태들이 제안되어 왔다. 상호 안수, 성찬례의 공동 거행, 특정하게 인준된 의식이 없이 드리는 장엄 예배, 성찬례 거행 중 일치된 본문의 독서 등이다. 어느 하나의 전례 형태가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경우든 상호 인정의 성과를 공개적으로 선포할 필요가 있다. 성찬례의 공동 거행은 분명히 이러한 선포를 위한 자리가 될 것이다.
부록
가. 자료
1. 「세례, 성찬, 직무 안에서 함께 성장하기」(Growing Together in Baptism, Eucharist and Ministry, 제네바, WCC, 1982)는 윌리엄 나자렛이 평신도 연구 모임을 위하여 마련한 토론 지침서이다. 간결하고 저렴하며 실질적인 형태의 이 지침서는 본래 일반 독자들을 대상으로 마련되었다.
2. 「세례, 성찬, 직무에 관한 교회 일치적 전망」(Ecumenical Perspectives on Baptism, Eucharist and Ministry, 제네바, WCC, 1983)은 막스 투리앙 신부가 편집한 신학 평론집으로 교리와 전례를 연구하는 학자들을 위하여 관련된 기술적 문제들을 풍부하게 다루고 있다.
3. 「세례와 성찬: 거행의 초교파적 합치」(Baptism and Eucharist: Ecumenical Convergence in Celebration, 제네바, WCC, 1983)는 막스 투리앙 신부가 편집한 자료로서 사제들과 목사들에게 그리스도교 예배를 위한 적절한 자료와 적용할 수 있는 본보기들을 제시한다. 매우 다양한 예식들은 현재 교회들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전례 쇄신을 보여주며, 합의문에서 권고된 요소들을 통합하는 새로운 초교파적 전례의 세례와 성찬례를 포함한다.
나. 자료의 사용
자료들은 예배나 학습에 모두 사용될 수 있다. 그러한 가운데, 예배와 영성을 깊게 하고 교리를 가르치며 증언을 풍요롭게 하고 그리스도인 일치를 앞당기면서도 정의와 봉사 활동에 참여하기 위한 공동 노력이 교회들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교회일치 차원의 사용
- 일치 협의에서
- 양자 간 대화에서
- 교회 회의들에서: 전국적, 권역적, 지역적 회의들에서
- 다른 교회일치 단체들에서
교회 내부의 사용
- 신학 교육에서
- 교회 관계 위원회들에서
- 교회 회의들에서
- 성직자들의 평의회, 교회회의, 대회에서
- 평신도 연구 모임에서
- 공식 예배에서
모든 교회는 가능하면 언제나 교파와 민족과 문화의 경계를 넘어서 연구 결과를 나누고 비교하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