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보현산 메시에 마라톤에서 궁수자리와 전갈자리 이후의 대상을 거의 보지 못해 상현에 보현산으로 향한다.
달은 2시에 질 예정이다. 10시에 도착해서 장비를 펼친다. 지난번 밤새 보현산의 칼바람을 함께 맞은 별지기들은 온데 간데 없다. 반달이 비추고 있는 훤한 주차장에 나 홀로 있다. 바람이 그리 매섭지는 않다. 적막한 것 같기도 하고 평화로운 것 같기도 하고...
오늘 보현산과 우주에는 오롯이 수천만 광년의 시공간을 여행한 광자와 나만이 존재한다.
1. Plato와 Alpes
11시에 달을 겨눈다. 문 필터를 낀다. 75배로 달을 본다. 쨍하다. 100배로 본다. 좋다. 플라토와 알프스 부분이 눈길을 끈다. 알프스 계곡의 실개천이 있다는 것을 별하늘지기 초보씨님 글을 보고 알게 되었다.
달의 알프스 계곡과 실개천 안시 관측. http://cafe.naver.com/skyguide/171442
140배 역시 좋다. 200배 가장 좋다. 상이 무너지지도 않는다. 알프스 계곡의 솟아 오른 기둥들이 상현달에 비스듬히 비추는 태양빛으로 인한 입체감이 대단하다. 플라토의 지름이 100km라고 하는데 솟아오른 놈들의 그림자를 보았을 때 1000m는 넘을 것 같다. 인터넷을 뒤져 보아도 별 신통한 자료가 없다.
지난번 하현 때 뜬지 얼마 되지 않은 달은 표면의 일렁임이 심했다. 상현 때 질 준비를 하는 달은 고도가 하현달 보다 상대적으로 높아 일렁임이 없다. 5mm 아이피스 300배로 보아도 좋을 것 같아서 5mm를 아이피스 라인에 추가했다. 다음 상현 때 어떤 모습을 보여 줄지 기대된다.
알프스 계곡의 솟은 기둥들의 모습이 사진으로 본 창조의 기둥과 느낌이 비슷하다. 실체 현미경으로 바나나를 보았을 때의 모습과도 비슷한 것 같다. 처음 몇 번 이것 저것을 보여주고 난 후 현미경은 먼지 덮개를 쓴 채 마냥 자리만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추위에 떨면서 바나나 속 껍질과 비슷하게 보이는 달의 돌덩이에 황홀해 하고 있다. 수천만 광년의 시공간을 날라온 광자를 보려고 추위와 바람을 마다하지 않고 오늘도 나는 광야에 홀로 서 있다.
2. Plato와 아리스토텔레스
분화구들을 달 지도와 비교하며 보는데 가장 크고 인상 깊은 분화구 이름이 Plato이다. 아르키메데스 분화구도 멋지다. 카시니 분화구는 재미있는 모양인데 고대의 현자들 사이에 17세기의 프랑스 천문학자가 위치한 것이 당혹스럽고 씁쓸하다.
원호를 그리는 분화구들의 향연은 코페르니쿠스에서 끝난다. 플라토와 아르키메데스 코페르니쿠스의 거리가 등차수열을 이루고 있고 그 크기들도 비슷하다. 상현 때 코페르니쿠스는 보이지 않고 2~3일 지난 후엔 모습을 보인다. 세 분화구의 하모니가 볼 만할 것 같다.
16세기 과학 혁명의 시기에 중요한 과학자들의 이름이 달의 아름다운 지형에 붙여지지 않은게 아쉽다. 세상은 헛개비 놀음일 확률이 높다는 평소의 생각을 다시 한번 확인해 준다.
갈릴레이와 뉴턴은 우리가 볼 수 없는 달 뒤편의 무슨 지형에 붙어 있다. 케플러 분화구는 코페르니쿠스 분화구 옆에 우리에게 매우 밋밋하게 보이는 지름 30km의 조그마한 분화구에 붙어 있다.
반면에 보름에 군계일학처럼 보이는 지름 100km의 아름다운 분화구에는 케플러의 스승 또는 천문대의 전임자인 것 말고는 과학사에 뚜렸한 업적을 남기지 못한 티코에게 붙여져 있다.
이러한 와중에 플라토와 아르키메데스가 상현달에서 가장 아름다운 지형에 이름 붙여진 것은 불행중 다행인 것 같다. 어쩌면 그리하여 세상은 그럭저럭 굴러가는 것 같다.
플라토 주위에 아리스토텔레스 분화구가 있는데 하현 때는 어떨지 모르겠는데 상현에는 크기만하고 볼품없다. 좀 고소하다.
사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천문학보다는 생물학에 좀 더 큰 영향력이 있다. 그 집안이 마케도니아의 유명한 의사 가문이기도 하다.
플라톤의 <티마이오스>는 고대의 우주론이라고 할 수 있다. 케플러가 세상에 이름을 얻게 된 게 <티마이오스>에 나오는 다섯 개의 정다면체에 외접하는 구들의 지름과 그때까지 알려진 다섯 개 행성의 궤도 지름과 동일함을 밝혀낸 것이다.
케플러의 결론은 세상에 존재하는 완전체인 정다면체와 같은 비율로 구성된 다섯 행성을 가진 태양계는 완전체라는 것이다. 뭐 지금 생각하면 좀 황당한 면이 있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과학혁명의 시대에 일급의 과학자들의 사고는 아리스토텔레스보다 플라톤에 가까웠다는 것이다.
갈릴레이가 지동설을 논리적으로 설득해가는 과정을 그린 <두 우주 체계에 관한 대화>는 사실 갈릴레이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과의 사상투쟁을 하는 스토리로 전개된다. 교회당국의 검열을 의식하며 조심스럽게...
아르키메데스는 과학사 뿐만 아니라 수학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는 <원추곡선론>을 저술했는데 이 책에서 원뿔을 이러 저러한 방향으로 잘랐을 때 원,타원,포물선,쌍곡선이 나옴을 보이고 그 성질들을 증명했다.
우리는 현재 천체의 운동들은 이러한 곡선들의 궤도를 따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상현달이 지평선에 가까워지면서 어두워지는 하늘에서 점점 밝아지는 헤라클레스와 뱀주인 자리를 차의 한편을 바람막이 삼아 도널드 의자에 앉아서 본다.
박명에 잔별들이 사그러지는 모습을 도널드 의자에 누워서 보는 것을 좋아했다. 상현달이 지면서 잔별들이 하나 둘 나타나며 향연을 할 채비를 하는 모습을 앉아서 보는 것도 좋다.
상현에 관측하는 재미가 두 개가 생겼다.
3. 뱀 주인자리 (14개) 2시간
2시에 달이 지고 바로 m5를 겨눈다. 처녀자리의 다리 끝에서 호핑하는데... 힘들다. 40분 가까이 낑낑거린다. 돕을 차에 실으면서 빠졌는지 도트 파인더 베이스 나사가 없다. 도트파인더가 베이스에 걸쳐만 있는 상황이다. 유격이 있다. 어두운 지역에서 도트피인더로 겨냥하고 파인더로 보이는 별이 내가 의도한 그 별인지 확신이 서지 않으니 호핑이 엉성해 지는 것 같다.
이러다간 오늘도 죽 쑬 것 같아 5를 포기한다. 2시45분에 헤라클라스 자리 13을 시작으로 92를 파인더로 찾는다. 다음은 지난 번에 죽도록 고생했던 12번이다. 10번을 쉽게 찾고 12번을 찾는다. 그런데 헉... 파인더로 보인다. 3시4분이다.
3시15분에 9번을 끝으로 뱀주인 자리를 모두 찾고 초반에 헤맨 5번으로 간다. 이제는 어느 정도 도트파인더와 광학파인더의 유격을 알게 되어 차이만큼 보정해 가면서 첫 별을 찾는다. 이번에는 뱀 자리 알파별에서 호핑을 시작해서 찾아간다. 너무나 싱겁게 3시20분에 찾는다. 처음 시도한 호핑이었는데 다음에도 이렇게 찾아가야겠다.
4. 전갈자리 (12개)
지난 번에 하나도 보지 못한 전갈자리다. 4시에 4번을 시작으로 구상 성단들인 80,19,62를 찾는다. 그런데 모두 파인더로 보인다. 너무 싱겁다. 호핑이 어렵지도 않다.
백조자리 대상들을 찾고 7번과 6번을 파인더로 찾는다. 전갈 자리는 모두 파인더로 찾아 지는구나....
5. 궁수자리 (14개)
지난번에 마구잡이 호핑으로 실패했던 궁수자리다. 방패자리 감마별을 먼저 파인더 중앙에 놓고 차근 차근 찾아 나간다. 많은 대상들이 파인더로 찾아 진다. 5시20분에 54를 찾고 55를 찾아 가는데 하늘이 하얗게 되어 간다.
55는 작년 메시에 마라톤 때 궁수님이 헤맨 대상이다. 한번도 안 찾아보기도 하고 박명도 시작되니 자신감이 떨어진다. 피곤하다. 오늘은 여기까지...
오늘 찾을 대상은 총 47개였는데 그중 박명 때 55 이후로 7개 대상을 못찾았다. 나름 만족한다.
6. 아쉬움
눈치 채신 분도 있겠지만 이번 후기에 관측 대상에 대한 코멘트가 없다. 이날 관측의 목적이 박명이 되기 전에 찾을 수 있는 최대한 많은 대상을 찾는 것이라 대상들 하나 하나를 정성들여 볼 시간이 없었다.
그러나 사실 더 중요한 원인은 첫 눈에 척 보았을 때도 그냥 밋밋했다. m24의 화려함이나 13의 황홀함을 찾아 볼 수 없었다. 관측하면서 조금은 이상했지만 그냥 호핑을 하며 찾아 나가기만 했다.
관측 끝나고 정리하는데... 2인치 문필터를 계속 끼고 본것이었다. OTL 다음에는 오늘보다 대상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관측이 되겠다는 나름의 위로를 해본다.
7. 소득
호핑에 대해 조금은 눈을 뜬 것 같다. 지난 마라톤 때 처녀자리 은하단을 여행하며 호핑의 질적 발전이 있었던 것 같다.
이번에 2차 호핑 빅뱅이 있었다. 전에는 별 배치로 가는 길을 찾아 갔는데 그것 보다는 파인더 상의 밝은 별을 찾고 성도 상에서 그 별을 확인하고 그 놈을 파인더의 중앙으로 가게 망원경을 움직이는게 조금 더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것 같다.
그리고 처음 밝은 별을 파인더 중앙에 놓고 주위의 밝은 별과의 거리감을 파인더와 성도상에서 확인하면 밝은 별을 밟아 나가는게 편한 것 같다. 파인더 호핑이 익숙해지면 이 과정이 자동으로 되겠지만 당분간은 이렇게 하는 것이 호핑을 처음부터 시계 톱니바퀴 돌아가듯이 짱짱하게 하는 방법인 것 같다.
앞으로 다양한 상황에서 호핑을 해 보아야겠지만 이제는 대상 찾는게 고역이 되기 보다는 하늘의 보물을 찾으러 가는 말 그대로 재미있는 별 소풍이 될 것 같다.
최정규 / 붉은매와단룡님의 돕과 은하수 그리고 나 http://cafe.naver.com/skyguide/171263
내가 생각하는 별보기는 인식론과 존재론의 물음을 별 소풍을 하면서 조금씩 찾아 가는 것이다. 그림의 저 분처럼 말이다.
박명이 시작되며 다시 차벽에 기대어 도널드 의자에 누워 백조자리와 궁수 전갈자리의 잔별들이 사그러지는 모습을 본다. 9월에는 오리온 자리와 시리우스가 연출하던 장관을 3월에 백조자리와 베가가 보여준다.
3시간 정도 집중해서 보아서 그런지 그렇게 힘들지도 않다. 상현을 계속 사랑하리라.
오늘도 지난번처럼 운해 위로 해가 떠오른다. 해가 운해를 빠져 나오고 나서 한참을 도널드 의자에서 새소리를 듣는다. 하산한다.
첫댓글 헉헉..근무중 잠깐 들렀다가 결국...끝까지 못읽고 다음을 기약합니다...읽기도 벅찬 방대한 양을 풀어쓰신 김현우님은 정말 대단하십니다^^~~
ㅋ 반전이 있네요! 문필터~~,
제게는 어려운 글이지만 달에대해서 조금 더 공부한 것 같습니다. 좋은 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프톨레마이오스가 그토록 남고 싶었던 우주중심에서 쫓겨난 인류!
그 외로운 인류를 찾아온 광자를 오롯이 혼자 맞이했네요. ^^
분위기 죽입니다!
대단한 내용입니다.
저도 열심히 해서 좋은 관측자가 되겠습니다.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