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는 몸 1, 2] 박선영 × 유지영
몸은 내가 살아온 날들의 역사이고 살아갈 날들의 가능성이다
과거는 기록으로만 남겨지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기억되는 순간들이 있다.
엄마와 나는 딱, 서른 살 차이다. 한 살 한 살 엄마 나이에 가까워질수록 엄마 ‘몸’이 말하던 그 시간 앞에 서 있곤 한다.
엄마가 오십일 때, 나는 스무 살이었다.
내가 이미 건너온 시간이다. 여성이 오십 줄에 들어서면 몸이 얼마나 많은 말을 하는지 직접 내 몸이 이야기할 때, 나는 엄마 생각에 속절없이 무너진다.
밤새 주책없이 흐르는 땀으로 속옷이 젖고, 자꾸 달아나는 잠을 붙잡기 위해 홀로 뒤척이던 엄마의 갱년기 시간을 스무 살의 내가 알 수도 없었고, 몸을 누군가와 이야기한다는 걸 경험해보지 못한 엄마는 묵묵히 홀로 견디셨을 것이다.
엄마가 칠십일 때. 나는 마흔 살이었다.
고단하다 못해 부서질 만큼 몸뚱어리 하나로 세상을 살아왔고, 가부장제 사회에서 늙어갈수록 삶의 구석으로 밀쳐진 엄마의 몸은 당신이 살아온 역사가 고스란히 새겨져 있었다.
생각처럼 움직이지 못하는 늙은 몸은 자식들에게 그저 미안하다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던 슬픈 몸으로 세상을 마무리하셨다.
“...몸을 통해 비슷하게나마 겪어본 일이라면 그 앎이 수월해지기 때문이다. 여기에도 함정이 있다. 우리의 경험은 저마다 조금씩 다르기에 그 앎에도 한계가 있고, 공허할 때도 있다. 남의 경험 앞에서 내 경험을 말하는 일은 어쩌면 쉬운 방법일 수도 있다. 어떤 고통을 얕보지 않고 또 과장하지도 않고 정확하게 접속해서 듣는 일의 어려움을 생각한다....” (p 102)
작년 가을 글쓰기 모임에서 나는 <몸의 서사(敍事)> 에 대해 쓴 적이 있다. 이 글을 쓰면서 다시 읽어보았다. 안전하다던 집 안에서 이제 막 봉긋하게 솟아있던 젖가슴을 만지던 그악스러운 손의 기억으로 툭 끊긴 열두 살의 몸, 만원버스에서 아랫도리를 훑으며 바로 하차해서 뒤통수가 오버랩 되어 얼굴을 기억할 수는 없지만, 한없이 작고 움찔했던 열다섯 살의 몸, 소주와 안주로 범벅이 된 입 냄새를 풍기며 입으로는 정의를 이야기하지만 몸으로 나를 납작하게 했던 남자들의 술버릇에 하얗게 질리던 스무 살의 몸.
글은 30년 전에 머물러있지만, 내 삶은 그 이후에도 늘 조심해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에 대한 내재된 공포와 처음 겪어보는 임신과 출산, 완경, 갱년기로 이어지는 몸의 역사였다.
“한 개인이 자신의 고통과 기억에 대해 말하는 것. 그게 가장 어려운 발화라고 생각해요. 나의 상처와 고통을 마주보는 목소리를 기록하는 것이 그 이야기를 듣는 이들에게 가지는 의미가 너무 크다고 생각하고요” (p 316)
나는 엄마의 몸에서 보이지 않는 지난한 노동과 ‘정상가족’이라는 명분을 지키기 위해 요구되어진 희생 위에서 ‘만’ 지탱되었던 사회가 결국 돌보지 않은 돌봄을 보았다.
나는 나의 몸에서 내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만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뿌리 깊은 가부장제와 혼인이라는 제도에서 ‘미친년’이 되지 않고는 충분히 발화할 수 없는 몸을 읽는다.
그리고 이제 열아홉 살이 된 딸의 몸에서 늘 다이어트에 짓눌리고 날씬해야하는 강요된 몸을 지켜본다.
“몸은 내가 살아온 날들의 역사이고 살아갈 날들의 가능성이다”
내가 지나온 몸의 구석구석에는 더 내밀하고 아직은 용기를 내지 못해 드러내지 못한 장면들이 더 있다. 결코 내 잘못이 아니라고 머리로는 끄덕이지만 날 것 그대로 흘리기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마음의 근육이 더 단단해지고, 내 경험을 양분 삼아 우리 딸이 덜 헤맬 수 있다면 머지않은 그날에 다시 <나의 몸>을 쓸 수 있으리라 다짐을 해본다.
“몸에 대한 최초의 기억은 무엇인가요?”
“당신의 몸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이 책이 던진 질문으로 아무튼 책방에서는 2021년 서로가 말하는 몸이 되는 프로그램을 기획해 볼 예정이다. 우리가 우리를 말할 수 있을 때, 작지만 그 목소리들이 모여 큰 울림으로 서로의 삶을 응원하리라 확신한다.
※ 책소개 : 강영선
제주시 아라동에서 책점방 [아무튼, 책방]을 운영하고 있음
독립출판물+블라인드북+헌책+인문학
아무튼 책을 읽고, 팔고, 글을 쓰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