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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상승과 하강
(요한계시록 8:3~4)
비행기가 날아가려면 두 날개가 필요하듯이 신앙생활도 비상하려면 두 날개가 필요합니다. 신앙생활의 두 날개는 바로 말씀과 기도입니다. 이처럼 신앙생활에는 말씀과 기도가 중요합니다. 계 8:4에 우리가 기도를 하면 이 기도가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 앞에 상달된다고 합니다. 행 10:4에 천사가 고넬료에게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에 상달되다라는 헬라어 원어는 ‘아나바이노’로써 ‘보고가 상사에게 올라가다’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의 상황이 기도를 통해 최고로 높으신 하나님께 보고가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의 기도가 늘 하나님께 상달되기를 기원합니다. 기도가 하나님께 올라가는 것을 상승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기도가 올라가다가 계속 올라가지 못하고 떨어지는 것을 하강이라고 합니다.
우선 기도가 올라가다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지 못하고 떨어지는 경우를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생각과 말이 따로 노는 중언부언의 기도는 올라가지 못합니다. 지나친 세속적 욕심으로 기도하면 올라가지 못합니다. 야 4:3에 야고보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간절한 소원이 없는 형식적 기도, 다른 사람을 의식한 시간보내기 기도,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 나타난 교만한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되지 못합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자기 자랑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런 기도는 아예 올라갈 수 없습니다.
기도가 하나님과의 기쁨의 교제이고 하나님과의 대화인데 하나님에게 도달하지 못하면 참 불행한 일입니다. 기도가 기쁨의 교제가 아니고 중노동이 되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그것은 간절한 소원이 없기 때문이고 응답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응답은 우리에게 기쁨을 줍니다. 기도응답은 우리에게 기도할 의욕을 불어넣어 줍니다. 시21:3~6에서 다윗이 기도 응답을 받은 것을 열거합니다. “주의 아름다운 복으로 그를 영접하시고 순금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셨나이다 그가 생명을 구하매 주께서 그에게 주셨으니 곧 영원한 장수로소이다 주의 구원이 그의 영광을 크게 하시고 존귀와 위엄을 그에게 입히시나이다 그가 영원토록 지극한 복을 받게 하시며 주 앞에서 기쁘고 즐겁게 하시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기도응답의 체험이 없는 사람은 기도할 의욕을 얻지 못합니다. 기도하면 뭐 하나? 기도해 봐야 몸만 피곤하지. 기도는 시간낭비라는 생각이 우리를 지배하면 누가 기도하겠습니까? 우리가 기도응답을 체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약 4:2b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기도한다고 하면서 기도가 아닌 기도를 드릴 때가 많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드리지 않는 기도는 사실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하고도 무엇을 기도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기도는 기도가 아닙니다. 이런 기도는 응답을 받지 못합니다. 기도가 아닌 기도를 드리는 것은 죄를 짓는 것입니다. E. M 바운즈는 가장 나쁜 죄는 무릎을 꿇고 짓는 죄라고 했습니다. 기도응답을 확신하지 않고 시간 때우기 식으로 기도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경홀히 여기는 죄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불신하는 죄입니다.
중요한 것은 기도의 모양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기도의 간절함입니다. 응답을 받고자 하는 간절함이 있어야 구하는 기도라 할 수 있습니다. 간절한 기도로 기도의 응답을 체험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기도의 소원을 가지고 불붙는 기도를 드리고 기도응답을 체험합시다. 이런 소원과 응답이 있으면 왜 기도가 중노동처럼 힘들겠는가? 강한 소원과 응답은 우리를 즐거움으로 기도의 자리에 앉게 합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기도하지 않는 신자였다면 이제부터는 기도하는 신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하나님이 주시는 소원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소원을 주실 것입니다. 소원이 없다면 소원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은 그런 기도는 금방 들어주십니다. 소원을 달라는 기도를 드린 후에 종이와 펜을 들고 여러분 마음 속에 있는 소원을 적어보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소원들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그 소원이 여러분을 기도의 자리에 앉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마음에 소원에 불이 붙어야 기도하게 됩니다. 강한 소원은 간절한 기도를 만들어냅니다. 강한 소원은 기도에 간절함의 날개를 붙여줍니다. 시편 21:3~6 “주의 아름다운 복으로 그를 영접하시고 순금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셨나이다 그가 생명을 구하매 주께서 그에게 주셨으니 곧 영원한 장수로소이다 주의 구원이 그의 영광을 크게 하시고 존귀와 위엄을 그에게 입히시나이다 그가 영원토록 지극한 복을 받게 하시며 주 앞에서 기쁘고 즐겁게 하시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응답을 체험하지 못한 기도자는 기도를 계속할 의욕이 생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응답받는 기도를 체험하지 못할 때 기도는 중노동보다 힘들어집니다. 기도가 응답을 받을 때 기도할 마음이 솟구칩니다. 우리는 그냥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응답을 받기 위해 기도합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난 후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어떻게 응답하시는지 민감하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을 전도하기 위해 기도하였다면 우리는 그 사람의 마음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고 난 다음에 그 기도가 응답되었는지 확인하지 않습니다. 그 기도가 응답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응답된 것을 모르고 지나갈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응답을 확인하기 위해 기도수첩을 사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수첩을 보면 우리가 기도한 소원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조지 뮬러는 평생에 5만 번 기도응답을 받았다고 합니다. 기도응답을 어떻게 계산했을까 하는 것이 의문이었습니다. 조지 뮬러는 그가 기도한 내용을 기록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응답된 기도제목마다 OK라는 표시를 했을 것입니다. 기도가 응답될 때마다 얼마나 기뻤을까요?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요16: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라고 말씀합니다. 기도가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께 닿으려면 세 가지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첫째, 기도는 반드시 향기와 함께 올라가야 합니다. 계8:3~4에 기도는 향기와 함께 올라가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와 합하여 보좌 앞 금 제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4절에 나와 있는 향연이라는 말은 향기로운 냄새나 연기를 뜻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기도할 때 반드시 제물을 함께 드렸습니다. 성전에 가서 기도할 때도 먼저 제물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제물의 향을 기도와 함께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향기로운 제물은 무엇일까요? 에베소서 5:2에 그 답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향기로운 제물로 묘사합니다. 따라서 제물을 드린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늘로 올라가는 제물의 향은 예수 그리스도가 제물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는 향입니다. 이처럼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드려야 하늘로 올라갑니다. 따라서 기도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 기도가 하늘로 올라가려면 겸손이 있어야 합니다. 겸손은 기도를 시작하게 하는 힘입니다. 겸손은 하나님 외에 어떠한 것도 의지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겸손은 오직 하나님만이 일을 성취하시는 분임을 인정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오직 겸손한 자만이 기도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자가 기도에 날개를 달 수 있습니다. 자신의 지혜와 능력을 의지하는 사람은 기도할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이 정도는 기도하지 않아도 내 힘으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 사람들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좋게 말하면 자신감이지만 엄밀하게 말하며 교만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교만에 속합니다. 시편127:1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힘으로 집이 세워지는 것 같아도 지나고 나면 허물어져 있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또한 겸손은 회개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께 회개하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기도가 하늘로 올라갑니다. 교만하면 기도는 하늘로 올라가지 못합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가 나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자기의 공로와 자기 자랑을 늘어놓는 교만한 기도였습니다. 이러한 기도는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습니다. 반면에 세리는 가슴을 치면 회개하며 기도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기도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셋째, 우리의 기도가 하늘로 올라가려면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간절함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하나는 마음에 불타는 소원이 있어야 하고 또 다른 하나는 절박함이 있어야 합니다. 강한 소원은 간절한 기도를 만듭니다. 아울러 절박함도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간절한 기도를 만듭니다. 사람들은 낭떠러지와 같은 절박한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간절한 의지와 소원을 갖습니다. 그것이 바로 간절한 기도로 연결되어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간절한 소원이 있는 자는 그 소원을 이루시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성도는 간절한 소원으로 심령에 불이 붙어야 기도의 자리에 앉습니다. 심령의 불은 기도의 불로 이어집니다. 기도의 불은 확산되는 습성이 있습니다. 한 사람에게 기도의 불이 붙으면 옆 사람에게 번집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 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시편63:1~2)본문 1절에서 다윗이 주를 간절히 찾았다고 했는데 어떤 성경(KJV)은 일찍(early) 찾았다고 번역하였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찾는 갈망으로 새벽같이 주를 찾았습니다. 하루의 첫 시간을 기도로 드렸습니다. 간절한 기도는 마음뿐만 아니라 몸도 동참하는 것입니다. 간절한 목소리가 동반됩니다. 무릎을 꿇기도 하고 두 손을 들기도 합니다. 간절한 기도는 이처럼 우리의 전인격이 동원되는 기도합니다. 간절한 기도는 가벼운 활동이 아닙니다. 어린아이 때부터 기도를 배워야 하지만 기도는 어린 아이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담아서 드려야 합니다. 골방에서 드리는 기도는 전인을 드리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간절한 기도를 드린 구약의 사람은 엘리야 선지자였습니다. 약5:17-18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 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았습니다. 우리와 달라서 남다른 기도를 드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도 엘리야처럼 기도할 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 사람이었습니다. 나중에 비가 오기를 기도할 때에도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기도하는 모습은 간절한 기도의 표현이었습니다. 엘리야는 기도하면서 일곱 번이나 구름이 생기는지 확인하였습니다. 일곱 번 만에 손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일곱 번 기도했다는 것은 포기하지 않고 기도한 것을 의미합니다. 신약에서는 수로보니게 여인이 간절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이 두로 지방에 숨어 계실 때에 수로보니게 여인이 찾아왔습니다. 더러운 귀신들린 어린 딸을 고쳐 달라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의 발아래에 엎드렸습니다. 그녀의 간절함이 행동으로 나타났습니다. 간절한 기도는 자신을 낮춥니다. 그리고 딸을 고쳐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여자를 멸시하는 말씀을 하였습니다. 막7:27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라고 말씀합니다. 개 취급을 받는 수모를 받으면 포기합니다. 그러나 그 여자는 멸시와 수모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간절한 기도는 포기하지 않는 기도입니다. 막7:28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포기하지 않는 간절한 기도로 응답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간절한 기도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목도하고자 하는 강한 열망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강한 소원을 가져야 합니다. 간절한 기도는 간절한 소원에서 나옵니다. 소원을 수첩에 적으시기 바랍니다. 그 소원을 마음에 새깁시다. 그 소원이 이루어지기까지 간절히 부르짖어야 합니다. 누가복음11:9~1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마다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말하신 다음에 간절한 태도로 기도할 것을 세 번 반복하여 다르게 말씀합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표현을 반복하였습니다. 간절함은 기도를 계속하게 하는 힘입니다. 간절함이 없는 기도는 안개처럼 사라지고 맙니다. 간절함이 없는 기도는 껍데기와 같습니다. 간절함이 없는 기도는 기도라고 할 수 없었습니다. 기도의 불을 붙이는 것이 간절한 마음입니다.
간절한 소원으로 뜨거워진 마음에서 간절한 기도가 나옵니다. 간절함이 없는 기도는 열을 잃은 태양과 같고 향기가 없는 꽃과 같습니다. 기도를 간절하게 만드는 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소원입니다. 소원을 갈망이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갈망은 소원보다 더 간절함을 담고 있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목도하고자 하는 갈망이 있을 때에 우리는 간절한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시63:2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를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다윗은 성소에서 간절히 기도할 때에 주의 영광을 보기를 갈망하였습니다. 주의 영광을 목도하는 것이 우리의 갈망이 되어야 한다. 이 갈망이 얼마나 컸는지를 시63:1에서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육체와 영혼이 함께 갈망하였습니다. 시42: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 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심한 갈증을 느낄 때에 하나님을 갈망하게 됩니다. 영혼의 갈증을 풀어주실 분은 오직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시143:6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내 영혼이 마른 땅 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셀라). 마른 땅이 물을 사모하듯이 영혼이 주를 사모하였습니다.
다윗이 왜 위대한 왕이 될 수 있었는가를 알려주는 부분이라고 생각됩니다. 다윗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갈망한 자였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다윗처럼 갈망하는 자를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향하여 말씀하시기를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다윗이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고 했을까요? 다윗은 하나님을 만나기를 갈망하는 자였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11:5~7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 달라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그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기도의 간절함을 가르치기 위하여 비유를 사용합니다. 밤중에 여행 중인 친구가 갑자기 찾아왔는데 대접할 떡이 없었습니다. 요즘은 냉장고가 있어서 갑자기 찾아온 친구에게 대접할 음식이 있기 마련입니다. 하다못해 가게에 가면 라면이라도 사와서 대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는 먹을 수 있도록 음식이 항상 준비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문화는 찾아오는 손님을 환대하는 문화였습니다. 손님을 환대하는 것은 의무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는 먹을 수 있도록 음식이 항상 준비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마침 음식이 없는 상황에 친구가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할 수 없이 자기 집에 찾아온 친구를 대접할 음식을 얻기 위해 옆에 사는 친구의 집을 두드려야 했습니다. 이미 늦은 시간이 되어서 다들 잠을 자는 시간이었습니다. 잠자는 친구를 깨워야 했습니다. 잠자는 친구를 깨우는 것이 미안한 일이었지만 밤중에 찾아온 친구를 대접하는 것은 그에게 너무나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염치불구하고 잠자는 친구의 집을 두드렸습니다. 잠을 자는 친구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문밖에서 떡 세 덩이를 꾸어달라는 친구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자다가 일어나는 것이 얼마나 귀찮은 일인가? 지금은 자고 있으니 줄 수 없다고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계속 이어졌던 것 같습니다. 모른 척하고 잘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이러다가는 잠을 자는 식구들이 다 깨게 될 지경이었습니다. 끈질기게 두드리는 소리에 할 수 없이 일어나 역을 주게 됩니다. 누가복음 11: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라고 말씀합니다. 밤중에 찾아온 친구를 대접하기 위하여 끈질기게 문을 두드리는 친구의 요청에 견디지 못해 침대에서 일어나서 떡을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문을 두드리는 친구의 행위를 간청함이라는 단어로 표현하였습니다. 간청함은 ‘아나이데이안’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이 단어는 끈질기게 조른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부끄러움이 없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끈질기게 조르려면 부끄러움이 없어야 합니다. 뻔뻔함이 있어야 합니다. 얼굴에 철판을 깔아야 합니다. 체면 차릴 것 다 차리고는 조르지 못합니다. 간청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가 응답이 될 때까지 우리는 뻔뻔할 정도로 부르짖어야 합니다. 아 마 잠을 자던 친구는 문을 두드리는 친구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한 번 문을 두드리면 열어줄 때까지 두드리는 성격인 것을 알고는 침대에서 일어나 그의 요구를 들어주었을 것입니다. 문을 열어줄 때까지 두드리는 간청 곧 간절함이 기도하는 자의 태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가르쳐주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을 귀찮게 졸라대는 기도를 드려서 하나님께서 나의 절실한 기도를 반드시 들어 주신다는 것을 증명하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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