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영하는 무리
(마태복음 21:6~11)
이번 주는 종려 주일입니다. 종려 주일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입성하실 때 무리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한 것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종려 주일을 다룬 내용은 4복음서에 다 기록되어 있지만 특별히 오늘 본문은 대체적으로 종려 주일에 많이 인용되는 본문입니다. 본문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러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큰 무리가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라고 환영하며 외쳤습니다. 여기에 큰 무리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본문에 무리라는 말이 무려 세 번이나 나옵니다(8, 9, 11절).
복음서에는 예수님을 좇아다니는 무리에 대해 번번하게 언급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과연 이 무리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의 속성에 대해서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환영하는 큰 무리도 겉으로 보기에는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서 카펫처럼 깔면서 호산나 찬송부르며 예수님을 환영했지만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무리는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습니다.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이 무리들이 갖고 있었던 문제점을 무엇일까요?
첫째는 시각차입니다.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이날은 유대인들이 유월절 제사를 위해 양을 선택하는 날(Ram selection Day)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특별히 이날을 택하셔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의미는 예수님이 자기 자신을 이스라엘 백성과 전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어린양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자의식인 것입니다.
반면에 오늘 본문에 보면 큰 무리가 나뭇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라고 찬양하면서 예수님을 환영합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나뭇가지라고 하였지만 요한복음에서는 그 나뭇가지가 종려 나무 가지임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2장 12~13에 보면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역사에서 종려나무 가지는 해방과 자유를 상징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알렉산더의 뒤를 이은 셀류코스 왕국에 의해 압제를 당할 때 마카비 형제들이 봉기하여 이스라엘을 식민지의 억압에서 해방시켰습니다. 바로 그때 이스라엘 백성이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며 이스라엘의 해방과 마카비 형제들을 환영했던 것입니다. 그때에 그들은 호산나라고 찬송을 부르면서 종려나무가지를 흔들었는데 호산나라는 뜻은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큰 무리가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 찬송 부르며 예수님을 환영하는 것은 예수님을 로마의 식민지 상태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켜줄 정치적인 지도자로 생각하며 맞아들이는 것입니다. 결국 이 무리들이 마음이 변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인류를 대속케 하기 위해 오셨다는 예수님의 자의식과 이스라엘의 정치적 해방을 바라는 예수님에 대한 군중들의 바램과의 시각차이가 그러한 결과를 빚어냈던 것입니다.
신앙생활 하는데 항상 예수님이 우리를 바라보는 시각과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가 존재합니다. 즉 예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과 우리가 예수님에게 원하는 것의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성숙하고 바람직한 신앙생활은 이 차이가 크지 않고 일치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뜻이 곧 우리의 뜻이 된다는 것입니다.
잘못된 신앙생활은 예수님의 뜻을 의식하지 않고 내 뜻대로 신앙 생활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예수님이 나에게 바라는 것은 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것만 한다면 본질에서 크게 어긋난 신앙생활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예수님의 뜻에 초점을 맞추고 예수님의 뜻을 이 땅에 실현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군중과 무리의 변덕성입니다. 본문 말씀 마태복음 21장 9절 말씀에 보면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히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큰 무리가 환영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23장 18절 이하부터 25까지의 내용을 보면 빌라도가 예수를 놓아주고자할 때 무리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23장 18절에 “무리가 일제히 소리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없이 하고 바라바를 놓아주소서”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21절에는 “그들은 소리질러 이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하는지라”라고 말씀합니다.
저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때 환영하는 무리들과 며칠 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치는 무리들은 그 구성원이 어느 정도로는 겹치지 않았는가라고 해석합니다. 예수님을 환영했던 무리들이 돌변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입니다.
군중들은 본래 그 속성상 이렇게 변덕스러운 것입니다. 노벨 문학상을 탄 엘리스 카네티는 그의 책 ‘군중과 권력’에서 군중의 속성을 변덕성에서 찾습니다. 사실 군중과 무리에 대한 연구는 1825년에 프랑스 학자 구스타브 르몽이 ‘군중 심리’라는 말을 처음 쓰면서 시작됐습니다. 사람들이 모이며 집단적 에너지가 생기기도 하고 집단적 불안이 생기면서 군중심리가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군중심리가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도 있고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도 있습니다.
라인홀드 니이버는 “사람이 개인적으로 있을 때는 도덕적이지만 개인들이 모여 집단을 이루면 집단은 비도덕적이 된다”라고 말했습니다. 라인홀드 니이버의 이 말처럼 사람들이 모여 집단과 군중이 되면 군중심리가 형성되어 비이성적이 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신앙생활을 군중심리에 의지하여 하게 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것을 영적을 판단할 때에도 군중을 따르면 안됩니다. 이러한 신앙을 우리는 냄비신앙이라고 합니다. 냄비처럼 확 열이 올랐다가 또 금방 식어지는 그러한 변덕신앙입니다.
엘리아스 카네티가 지적한 대로 군중의 본질은 그 변덕스러운 이중성에 있습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을 집단적으로 덩달아 하면 안 되고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 선 단독자의 모습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어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거기에 대해 제자들이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예레미야나 엘리야라고 한다고 대답합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대답보다도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신앙은 바로 예수님의 이 궁극적 물음 즉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는 것에 개인적 단독자로서 대답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무리냐? 제자냐?의 문제입니다. 신약성경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을 따르는 두 부류가 존재합니다. 하나는 제자이고 또 다른 하나는 무리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제자라는 말과 무리하는 말이 매우 빈번하게 언급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두 가지 종류의 신앙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되도록 제자로서 따라야되고 무리 중의 하나로 따르면 안 될 것입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제자인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라고 고백합니다. 반면에 예루살렘 입성을 다루는 오늘 본문 마태복음 21장 1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온 성이 소동하여 예루살렘 주민들이 이 사람이 도대체 누구냐고 물어봅니다.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는 11절에서 “무리가 이르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리라”라고 대답합니다. 즉 무리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한 것이 아니고 많은 선지자들 중의 하나인 선지자 예수로 고백했던 것입니다. 제자신앙과 무리신앙은 이렇게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자신들을 위한 목적으로 모여드는 군중을 무리라고 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감동되어 예수를 따라나선 사람들을 제자라고 합니다. 무리는 예수님께 무엇을 얻을까? 궁리하는 사람들이고 제자는 예수님을 위해 어떤 것을 포기할까? 궁리하는 사람들입니다. 제자와 무리의 셈법은 다릅니다. 무리는 자신들의 이익을 계산하지만 제자는 이익보다는 희생을 추구합니다. 길거리에서 공짜로 무엇을 나누어주면 사람들이 많이 몰립니다. 그런 사람들을 무리라고 부릅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오병이어 기적을 일으키셔서 그들의 육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셨는데 그때에 그것을 경험한 무리들이 계속해서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육적인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서입니다. 사실 오병이어 기적 사건은 육적인 의미도 있지만 영적인 의미도 있습니다.
반면에 제자는 예수를 위해 희생할 것을 계산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면서 무엇을 버릴가를 생각합니다. 제자는 예수님을 위해 불편함을 감수합니다. 무리는 그 어떠한 불편도 참지 못합니다.
결국 무리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왔다가 조건과 상황이 바뀌면 언제든지 예수님을 부인하고 예수님을 공격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어떠한 환경이나 조건에 굴하지 않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절대로 부인하지 않고 예수님께 등을 돌리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는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참 제자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우리는 이 어려운 시기에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