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고, 들리고, 들으시고
(요한복음 8:47)
신앙생활은 하나님과 소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과도 소통이 어려운데 하나님과 어떻게 소통을 하겠는가? 신앙생활의 어려움이 바로 이것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의 소통이 왜 어려울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이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과 소통을 하려면 하나님이 살아계신 인격적 존재라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인간과 인간과의 소통에서 중요한 것이 상대방의 말을 듣는 것입니다. 소통에 있어서 듣는 귀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성도된 우리가 하나님과 소통하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반면에 하나님도 우리가 하나님께 말을 걸 때 들으십니다. 성도인 우리가 하나님께 말을 거는 행위가 바로 기도입니다. 따라서 기도는 성도가 혼자 말하는 독백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쌍방 대화입니다. 과연 하나님과 인간의 소통과정은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첫째,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인간은 듣습니다. 요8:47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라고 말씀합니다. 이 구절에 보면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면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천명합니다. 만일 하나님을 믿는 성도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듣지 못하고 세상 소리만 들으면 그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때로는 교회에서 세상 돌아가는 정보와 지식은 아주 밝은데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는 무지한 성도들을 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교회 안에 있지만 하나님을 믿는 성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약 1:19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태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라고 말씀합니다. 이 구절에서 야고보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고 말씀합니다.
요10:27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목자라고 하셨으며 성도들을 가리켜 양이라고 하셨습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이 구절에서 예수님은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을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기독교인들은 목자를 따르는 양으로서 목자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양이 목자의 음성을 듣지 못하면 잘못된 길로 갑니다. 여기서 목자의 음성은 예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둘째, 말씀이 잘 들려야 합니다. 듣는 것과 들리는 것은 미묘한 차이가 있습니다. 들어도 잘 들리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말씀을 들어도 잘 들리지 않습니다. 인간의 육체 중에서 듣는 것을 관장하는 기관은 귀입니다. 인간의 육체적 기관 중에서 죽을 때까지 작동하는 것이 귀입니다. 귀의 기능이 가장 오래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이가 들면 귀가 잘 안 들려서 보청기를 사용하거나 난청 때문에 치료를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특별히 난청이 오래되면 치매에 걸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으로도 적용될 수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잘 안 들리면 영적으로 치매에 걸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행14:8~10에 보면 바울이 앉은뱅이를 고치는 사건이 나옵니다.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앉아 있는데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이르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지라”라고 말씀합니다. 이 구절에 보면 이 루스드라의 앉은뱅이가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가 왜 이렇게 잘 듣는가를 바울이 보았더니 그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종합해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잘 들리려면 우리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사30:21에 “너희가 오른쪽으로 치우치든지 왼쪽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 할 것이며”라고 말씀합니다. 이 구절에서 네 뒤의 말소리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귀에 들려서 우리가 바른 길로 갈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인생의 올바른 길로 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귀에 들려야 합니다. 말씀이 들리지 않으면 성도는 진리의 길을 걸을 수 없습니다. 말씀이 이렇게 우리에게 들릴 때 깨달음을 얻습니다. 즉 말씀이 들릴 때 신앙생활을 왜 해야되는지 이해가 됩니다.
요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의 영적인 문제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이 그에게 들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예수님과 대화하는 것인데 예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으니 그는 신앙의 기초단계에도 진입하지 못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영적인 진리를 세속적으로 이해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으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대화는 쌍방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으로 소통하시고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로 우리의 이야기를 전달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반드시 들으십니다. 기도는 성도가 천국에 계시는 하나님께 드리는 편지입니다. 만일 성도가 기도를 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우리의 이야기를 들으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야기를 주의깊게 들으시는 분입니다.
흔히 들음에는 4종류의 들음이 있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남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무시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남의 이야기를 들은 체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남의 이야기를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남의 이야기를 공감하며 주의 깊게 참여적으로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상징적으로 공감하며 주의 깊게 들으십니다.
이것에 대하여 시 143:1에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고 주의 진실과 의로 내게 응답하소서”라고 말씀합니다. 이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자신의 간구와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시편에는 이렇게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표현이 아주 많이 나옵니다. 이 구절에서 ‘내 기도를 들으시다’라고 할 때 들으시다는 히브리어로 ‘샤마’입니다. 샤마는 그 본래의 뜻이 듣고 행동으로 옮긴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나의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고’에서 귀를 기울이시다의 히브리어는 ‘아잔’인데 그것은 주의 깊게 경청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게 응답하소서’라고 할 때 응답하소서의 히브리어는 ‘아난’으로 적극적으로 화답하다 혹은 기쁜 마음으로 화답해준다는 뜻을 갖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히브리어의 본래적 의미로 해석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경청하시며 주의 깊게 들으시고 기쁜 마음으로 화답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듣고 난 후에 하나님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행동으로 옮기신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들으심을 잘 표현해주고 있는 것이 시34:6입니다.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성도가 절체절명의 어려운 상황에서 부르짖을 때 하나님은 들으시고 성도의 어려운 환난에서 그를 구원해주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창 21:17에서도 잘 나옵니다. “하나님이 그 어린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이르시되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구절은 배경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씨받이 여인이며 사라의 종이었던 하갈은 자신과 그녀의 아들 이스마엘의 삶이 아브라함의 적자인 이삭이 태어난 후부터 한없이 보잘 것 없는 처지임을 깨닫습니다. 하갈과 이스마엘은 그들에게 주어진 운명의 시련과 불평등에 대해 항거합니다. 그 이후로 그들은 광야 한복판으로 쫓겨납니다. 광야 한복판에서 하갈과 이스마엘은 울며 통곡하며 부르짖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그 어린 아이의 통곡소리를 들으시고 천사를 그들에게 보냅니다. 하갈은 천사로부터 자신과 아들의 새로운 미래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자신의 아들인 이스마엘로부터 시작되는 새 민족의 이야기를 들을 때 그녀는 현재의 두려움과 절망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사면초가의 위기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천사로부터 새로운 용기와 위로를 받아 문제를 해결합니다.
똑같은 사건을 기술한 창16장에서는 하갈이 천사와 대화하며 두려움의 이야기에서 희망의 이야기로 삶의 해석을 전환시킨 사건의 장소를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는 ‘브엘라헤로이’라고 명명합니다. 이 브엘라헤로이는 ‘나를 살피시는 살아계신 이의 우물’이라는 뜻입니다. 브엘세바 광야에서 고통 중에 울부짖는 하갈에게 하나님께서 축복의 메시지를 전해주시고 그들을 좋은 길로 인도해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으로 이야기하시고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로써 우리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아무쪼록 하나님과의 소통이 잘 이루어지는 신앙생활을 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