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문화 연구회 유적답사 - 사직단, 여제단, 석조아미타 여래상
2024년 3월 29일(금), 청도문화 연구회 회원들이 사직단 및 여제단, 석조아미타 여래상을 찾아 나섰다. 오전 9시 청도읍성 서문 주차장에 집합을 하였다. 전날까지 비가 많이 왔기에 걱정을 했으나 이날은 미세 먼지도 별로 없는 화창하고 따뜻한 날씨라 답사하기에 좋은 날이었다.
먼저 찾은 곳이 신봉리 사직단(社稷壇)이었다. 읍성에서 서쪽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는 야산 능선이다. 군데군데 황토길이 발목을 잡았지만 진입하는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봄
- 유적지 유물들을 채집하며
행전 박영환
마음을 모아
발걸음을 옮기니
꽃이 핀다
애타게 기다리고
찾던 님이
꽃비 속에
나 여기 있소
수줍게 손을 흔든다
흙속에 묻혀 있어도
언젠가 찾아올 그 날을 위해
언몸 지키며
기도하던 그대
오늘
발자국 소리에
서로의 손을 맞잡고
봄이 만들어낸 환희에
감격하고 있다.
다음은 2024 청도문화연구회 유적답사 자료집의 내용이다.
사직단은 토지를 주관하는 신인 사(社)와 오곡(五穀)을 주관하는 신인 직(稷)에게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다.
고대 중국의 제도를 기록한 《주례》 〈고공기〉(考工記)에 실려 있는 좌조우사(左祖右社)에 따라 중국의 여러 왕조는 도성(都城)을 건설할 때 궁궐 왼쪽엔 종묘를, 오른쪽엔 사직단을 두었다. 또한 종묘는 수도 한 곳에만 설치하는 데 반해 사직은 수도뿐만 아니라 지방 행정단위인 주현(州縣)마다 설치하였다. 주현의 사직도 관아의 서쪽, 곧 오른쪽에 세웠다.
사직단은 사단(社壇)과 직단(稷檀)을 따로 설치하였으며 사단은 동쪽에, 직단은 서쪽에 위치하였다. 각 단에는 사방으로 계단을 설치하였으며, 단 둘레에는 유(壝)라고 하는 울타리를 치고 그 유에도 사방으로 문을 설치하였다. 부속 건물은 전사청(典祀廳)·집사청(執事廳) 등이 있다. 다만 서울의 사직단은 사단과 직단을 따로 설치하였으나 각 지방에서는 사단과 직단을 하나로 만들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사직이 세워진 것은 이미 삼국시대의 일로,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고국양왕 8년(391년)에 사직을 세우고 종묘를 수리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신라는 선덕왕 4년(783년)에 사직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는 성종 10년(991년)에 처음 수도 개경(현재의 개성)의 서쪽에 사직을 세웠으며, 현종 5년(1014년)에 강감찬이 거란의 2차 침공 이후 파괴되었던 사직의 중수를 건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의 사직은 너비 5장, 높이는 3자 6치 가량으로 사방에 계단을 두었는데, 당의 제도를 따른 것이었다.
조선은 1393년에 한양 천도 후 종묘·사직의 지형도를 만들고, 1395년에 경복궁 서쪽의 인달방(仁達坊)에 사직단을 만들었다. 중춘(仲春)·중추(仲秋)·납일이 되면 대향사(大享祀), 정월에는 기곡제(祈穀祭), 가뭄에는 기우제(祈雨祭)를 각각 행했고, 세종 8년(1426년)에는 사직단 바깥의 북쪽에 사직서(社稷署)를 세워 사직단을 관리했다. 1908년 일제의 강압으로 순종 황제는 사직제를 폐지한다는 칙령을 내렸다. 1911년에는 사직단 부지가 아예 총독부로 넘어가서 일제는 1922년에 사직단 주위에 도로를 내고 1924년에 사직단 일원을 공원으로 만들었다.
조선시대 지방에 산재하였던 사직단은 대부분 사라졌다. 현재 지방에 남아 있는 사직단은 노변동사직단(대구광역시 기념물, 2006년 지정), 남원사직단(전라북도 기념물, 1992년 지정), 보은회인사직단(충청북도 기념물, 2013년 지정), 산청단성사직단(경상남도 기념물, 2005년 지정), 창녕사직단(경상남도 기념물, 2011년 지정), 진주사직단(경상남도 기념물 제291호), 고성사직단(경상남도 기념물 제296호) 등이며,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점심 식사를 하고 합천리 여제단(厲祭壇) 지역을 찾았다.
여제는 제사를 받지 못하는 무주고혼(無主孤魂)이나 역질을 퍼뜨리는 귀신인 여귀(厲鬼)에게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조선시대에는 서울과 지방의 각 군현에 여단을 두어 역병을 예방했다. 이 여단은 동쪽의 성황단, 서쪽의 사직단과 함께 관아에서 필수적으로 세우는 제단이었다. 여제는 1908년 일제의 강압으로 사직제와 함께 폐지되었으며, 조선시대 역병관을 보여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여제는 1401년(태종 1) 좌찬성 권근(權近)의 주청을 받아들여 대명제례(大明祭禮)에 따라 처음으로 북교에 여단을 쌓아 여귀(厲鬼)에게 제사 지낸 것에서 비롯되었다. 그 뒤 각 주현에 명하여 여단을 만들어 여제를 지내도록 하였다.
여제단의 일반적인 형태는 네모진 형태의 돌단과 담으로 이루어진다. 여제단에서는 일반적인 의례로 매년 봄·여름·가을에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냈는데, 역병이 도는 해는 수시로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여제단이 존재하였다는 기록은 청도를 비롯한 여러 지방에서 전해지고 있으나 발굴조사를 통해 여제단이 확인된 예는 대구 북구 구수산의 칠곡도호부 여제단이 유일하다. 이는 칠곡지도(1872)의 기록에서 전하는 바와 동일한 위치에서 확인되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청도 향교 다섯번째 자리를 알려주는 기와를 발견했다
청도 향교는 여덟 번이란 이전 끝에 1734년(영조 10) 현재 교촌 자리에 정착했다.
8회 중 사찰들을 활용했던 초창기 3회 이전은 장소와 연대를 알수 없는데 마침 화양읍 고평리에 창건된 네 번째 장소는 1485년(성종 16)에 탁영 김일손(濯纓 金馹孫) 선생이 쓴 중수 기문에 60여년 전에 설립되었다고 했으니 환산하면 1424년경(세종 6)이 되는 것이다. 이때 경상도 도사(都事) 박융(朴融) 선생이 큰 힘을 썼고 군수 이실(李實)이 감독하여 완공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향교도 하천을 건너 제물을 이동하는 중 사망 사고가 생기기도 하였다.
그래서 1568년(선조 원년) 다섯 번째 장소인 화양읍 합천 2리로 옮겼다. 하지만 이곳 마저 동천이 자주 범람했다. 다시 여섯 번째 1626년(인조 4)에 오산 북록으로 옮겼는데 수레와 말소리가 시끄러웠다. 다시 1684년(숙종 10) 일곱 번째 하천리로 옮겼지만 또 도로가 번잡하여 드디어 여덟 번 만에 현재 자리에 정착하여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 청도 합천리 석조아미타여래입상(淸道 合川里 石造阿彌陀如來立像)
청도 합천리 석조아미타여래입상)은 합천리 하천 마을에서 동천 너머 경작지 중앙의 보호각 아래에 봉안되어 있으며, 1994년 9월 29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87호로 지정되었다.
합천리 하천 마을 일대는 절터(대노사)로 추정되나 사찰의 연혁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절터의 흔적은 확인할 수 없으며, 다만 이 일대에서 통일신라 때의 평기와와 무문 전 등이 발견되고 있고 예전에도 연꽃무늬 수막새를 비롯한 통일신라 유물이 수습되었다고 한다.
불신과 광배(光背)가 한 돌로 새겨진 여래 입상이다. 불상은 높이 160㎝이고 광배는 높이 200㎝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카락인 나발이 표현되어 있으며, 그 위로 상투 모양의 육계가 솟아 있다. 얼굴은 훼손이 심하지만 둥글고 가슴과 어깨의 살붙임이 풍부하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통견(通肩)의 옷은 몸에 밀착하여 신체가 더욱 풍만하게 보이게 한다. 옷 주름은 간결하게 표현되어 있으며, 양 다리에도 각각 옷 주름이 표현되어 있다. 오른손은 가슴 위에서 엄지와 검지를 서로 맞대고 있으며, 왼손은 아래로 내려 옷자락을 잡고 있는데 이러한 손 모양 때문에 아미타여래로 추정되고 있다. 광배는 타원형으로 윗부분이 파손되어 근래에 복원하였고 머리 광배와 몸 광배를 굵은 선으로 구분하고 바깥에 불꽃무늬를 새겨 넣었다.
살이 오른 듯 풍만한 가슴과 얼굴 표현, 적당하게 균형 잡힌 신체 표현 등 8세기 후반∼9세기 통일신라 불상의 특징을 간직하고 있다.
박승규 회장께서 기와 전공하신 교수님께 문의한 바 주물 거푸집 부분이라는 의견을 주셨다고 한다.
오늘 청도문화연구회의 답사는많이 배우고 큰 수확을 얻은 하루였다. 특히 많은 준비와 고증을 통해 설명해주신 회장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사진의 대부분은 박충배 국장님과 그리고 회장님이 제공한 것을 활용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조상님들의 자취를 보여 주셨어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