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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목사의 별난 잔소리
맥스 루카도(Max Lucado)
성경
-광석을 캐어내는 광맥-
가족 여행길에 우리는 영국의 한 성(城)을 방문하였다. 정원 한 가운데 미궁(迷宮)이 있었다. 어깨 높이의 산울타리가 막힌 끝에서 막힌 끝으로 사람들을 이끌었다. 미궁을 잘 헤치고 나가면 정원 중앙의 높은 탑으로 들어가는 문에 닿도록 설계되어 있다. 당신이 그날 찍은 우리 가족사진을 보면 다섯 식구들 가운데 넷이 탑 꼭대기에 있는 게 보일 것이다. 흠― 하나가 아직 미궁을 헤매고 있다는 얘기다. 누구겠는가? 나는 관목들 가운데 붙잡혀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는지 알 수 없었다.
아, 그때 위에서 한 음성이 들려왔다. “아빠!” 위를 보니 거기 사라가 탑 꼭대기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아이가 소리쳤다. “길을 잘못 들었어요. 돌아서서 우회전!”
당신은 내가 아이를 믿었다고 생각하시는가? 내가 꼭 아이를 믿어야만 하는 건 아니었다. 자신의 감각을 믿거나 나처럼 헤매고 있는 다른 여행객들의 자문을 구하거나 길바닥에 주저앉아 입을 비쭉거리며 하느님이 왜 나한테 이러시는지 궁금하게 여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사라의 말을 들었다. 그 아이가 나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미로 위에 있었던 것이다. 그 아이는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우리가 하느님한테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하느님은… 하늘들보다 높으시다.”(욥기 22, 12). “야훼는 모든 나라들보다 높으시다.”(시편 113, 4). 무엇이 우리를 헷갈리게 하는지, 그분은 보실 수 있지 않겠는가? 우리가 미로에서 벗어나 집으로 무사히 돌아오기를 바라시지 않겠는가? 그러려면 예수께서 하신 대로 해야 한다.
성경을 의존하라. 당신의 믿음을 의심하기 전에 의심하는 당신을 의심하라. 예수께서 사탄에게 이르셨다. “성경에 사람이 빵만 먹고 사는 게 아니라 하느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먹어야 산다고 하지 않았더냐?”(마태오 4, 4). 여기 사용된 “나오다”라는 말은 “쏟아져 나오다”라는 뜻이다. 이 동사가 현재시제인 것은 하느님이 지금도 당신의 ‘말씀’을 통하여 세상과 적극적으로 소통하신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하느님은 지금도 말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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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예수처럼 되기를 원한다면 시간을 정해두고 하느님과 소통하며 그 말씀을 들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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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신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라. 당신의 감정을 믿지 마라. 당신 생각도 믿지 마라. 당신 친구들도 믿지 마라. 광야에서는 오로지 하느님 음성에 귀를 기울여라.
다시 말한다. 예수가 우리 모델이시다. 사탄이 그를 어떻게 시험했는지 기억하는가? “네가 정녕 하느님의 아들이면…”(루가복음 4, 3). 사탄이 왜 이 말을 했을까? 그리스도가 세례 받으실 때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나를 기쁘게 해주는 아들이다.”(마태오복음 3, 17)라는 음성을 들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네가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냐?” 사탄이 묻고 있다. 그리고 이어서 말한다. “그렇다면 어디 증명해보아라.” 무슨 방법으로든지 네가 하느님의 아들임을 입증해보라는 것이다.
“이 돌들한테 빵이 되라고 명해보아라.”(루가복음 4, 3).
“저 모든 권세와 영광이 …나한테 절만 하면 모두 네 것이다.”(루가복음 4, 7).
“여기에서 뛰어내려보아라.”(루가복음 4, 9)
얼마나 간교한 유혹인가? 사탄은 하느님을 깎아내리지 않는다. 다만 하느님에 대한 의심을 심어줄 따름이다. 그분이 정말로 일하시는가? 땅에서의 일―돌로 빵을 만들거나 높은 데서 뛰어내리는 것―이 하늘에서의 일과 마찬가지로 이루어지고 있는가? 사탄은 우리가 눈치를 채지 못하도록 교묘하게, 우리 눈길을 하느님한테서 자신의 퍼포먼스(일, 결과, 행위)로 돌려놓는다.
예수는 이 미끼를 물지 않으신다. 하늘의 신호도 필요 없고 천둥번개의 도움을 받지도 않으신다. 그저 성경말씀을 인용하실 따름이다. 세 번의 유혹에 세 번의 말씀 선포.
“성경에,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루가복음 4, 4).
“성경에,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께만 절하고 그분만 섬기라 하였다.”(루가복음 4, 8).
“성경에,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하였다.”(루가복음 4, 12).
생존을 위하여 예수께서 선택하신 무기는 성경말씀이다. 광야에서 그분이 성경 하나로 충분했다면 우리도 그 책 하나로 충분치 않겠는가? 핵심을 놓치지 말자. 사막 같은 이 세상에서 당신과 나에게 필요한 것은 한 권의 책이 전부다. 단, 우리가 그것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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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들의 말을 통하여, 성경을 사용하여, 하느님은 당신의 뜻을 밝히셨다. 오늘도 그러시지 않겠는가? ‘하느님의 말씀’을 펼쳐 읽어라, 당신도 그분의 뜻을 발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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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성경을 읽는 첫걸음은 그것을 이해하도록 도와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내가 아직 그대들 곁에 있어서 이 모든 말을 들려주었거니와 이제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주실 협조자 성령께서는 모든 것을 그대들에게 가르치실 뿐 아니라 내가 그대들에게 해준 말을 상기시켜주실 것이오.”(요한복음 14, 26).
성경을 읽기 전에 기도하라. 당신 생각을 확인하려고 성경을 펼치지 마라. 거기서 하느님의 생각을 찾아라. 기도하면서 성경을 읽어라. 그리고 조심조심 읽어라.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찾으시오, 찾으면 보일 것이오.”(마태오복음 7, 7). 하느님은 “밤낮으로 성경을 곱씹는 자”(시편 1, 2)에게 명을 내리신다. 성경은 대강 읽고 버리는 신문이 아니다. 광석을 캐어낼 광맥이다. “은을 찾아 헤매듯 그것을 구하고 숨은 보화를 파헤치듯 그것을 찾아라. 그래야 눈이 열려 야훼 두려운 줄 알게 되고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알게 되리라.”(잠언 2, 4-5).
여기에 성경 읽기의 요령이 있다. 한 번에 조금씩 성경을 공부하는 거다. 하느님은 전에 만나를 내리셨듯이 당신 메시지를 주시는 것 같다. 한 번에 하루치다. “명령에 명령을, 명령에 명령을! 규칙에 규칙을, 규칙에 규칙을!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이사야 28, 10). 양(量)보다 질(質)이다. 한 구절이 당신 가슴을 칠 때까지 읽고 거기서 멈추어 묵상하라. 그 구절을 메모지나 일기장에 적어두고 틈나는 대로 다시 읽어라.
예를 들면, 어느 날 아침 나는 마태오복음 18장을 읽다가, “어린아이처럼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오.”에서 읽기를 멈추었다. 나는 이 구절을 메모해두고 하루 종일 틈틈이 읽어보았다. 그러면서, 어떻게 하면 어린아이 같을 수 있는 거냐고 하느님께 여쭈었다. 일과를 마칠 무렵, 매사를 서두르고 미리 앞당겨 걱정하는 버릇이 몸에 배어있는 나를 보게 되었다.
하느님이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내가 알 수 있을까? 귀를 기울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을 읽는데 별로 거둘 것이 없더라도 낙심하지 말자. 때로는 공치는 날도 있을 수 있는 거다. 한 아이가 등교 첫날 학교에서 돌아왔다. 엄마가 물었다. “그래, 뭘 좀 배웠니?” 아이가 대답했다. “별로였어. 하지만 내일도 학교에 갈 거야. 그 다음날도 또 다음날도…”
이것이 배우는 사람의 자세다. 성경공부도 이렇게 해야 한다. 한 번에 조금씩, 그렇게 이해하면서 평생을 사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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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한테 성경이 있는가? 읽어라.
이런 식으로 소개된 책을 보았는가? “하느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어서 어떤 쌍날칼보다도 예리한지라 사람의 영혼과 정신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쪼개어 그 마음속 생각과 뜻을 꿰뚫어보십니다.”(히브리서 4, 12).
“살아있고 힘이 있어서…” 성경말씀에 생명이 있다. 맥박이 뛰는 명사들, 약동하는 형용사들, 이리저리 활발하게 돌아다니는 동사들이 그 안에 살아있다. 이 언어들을 통하여 하느님이 당신의 일을 하신다. 하느님한테 성경은 외과의사에게 메스와 같다. 그것으로 우리 속 깊은 데를 건드리신다. 당신은 그것을 느껴본 적 있는가?
깊은 밤, 외로운 당신이 성경을 읽는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를 떠나지 않고 버리지 않으리라.’ 하셨습니다.” 이 문장이 당신 어깨에 얹힌 손처럼 당신을 위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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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감(感)’에 근거하여 자기의 바보짓을 정당화하고 있다. “아내를 속이라고… 사장한테 거짓말하라고… 이웃집 여자하고 시시덕거리라고… 하느님이 나를 이끄시는 것 같아.”
무슨 소린가? 하느님은 사람을 당신의 ‘말씀’에 거역하라고 인도하시지 않는다. 그분은 당신의 가르침을 스스로 거스르지 아니하신다. “하느님이 나를 이끄신다.”는 말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다. 그분을 희롱하지 마라. 당신의 죄를 하느님의 인도로 위장하지 마라. 하느님은 누구를 속이라고, 해치라고, 자기 이익을 위하여 거짓말하라고 당신을 이끄시지 않는다.
그분은 성경말씀을 통해서 그리고 성실한 사람들을 통해서 당신을 인도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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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실화다. 내 고백이다. 나는 법을 어겼다. 더 고약한 것은 내가 그것을 멈추고 싶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범죄행위는 내가 모르게 시작되었다. 나의 출근길은 남쪽으로 가다가 교차로를 만나 거기에서 좌회전하게 되어있다. 아침마다 나는 길고 긴 시간을 길고 긴 줄에서 길고 긴 신호등을 기다리며 투덜거려야 했다. “좀 더 나은 길이 있을 텐데.” 며칠 뒤, 나는 그 길을 찾아냈다. 교차로까지 거리가 반마일쯤 남았을 때 쇼핑센터 뒤로 난 골목길을 본 것이다. 한 번 해볼 만한 시도였다. 깜박이를 켜고 급한 좌회전으로 굼벵이처럼 기어가는 출근 행렬을 등졌다.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커다란 쓰레기통들 사이로 골목길을 달렸다. 결국 해내었다! 골목길은 몇 분 만에 다른 출근자들보다 훨씬 빨리 동쪽 가로수 길로 나를 데려다주었다.
나는 내가 자랑스러웠다. 그 뒤로 늘 다른 출근자들을 앞섰다. 아침마다 길게 늘어선 차들이 기다리고 있는 동안 나는 나만 알고 있는 비밀 루트로 들어섰고 그때마다 어깨가 으쓱거려졌다. 그동안 아무도 그 길을 발견 못한 것이 좀 이상하긴 했지만 어쨌거나 내 공로다!
하루는 아내 드날렌이 내 차를 함께 타게 되었다. “당신이 왜 나와 결혼했는지 그 이유를 알게 해주지.” 교차로를 향해 가면서 내가 말했다. “저 길게 늘어선 차들 보이지? 저 지루한 차량행렬 말이야. 하지만 나는 아니올시다. 꽉 잡아요!”
사파리의 사냥꾼처럼 4차선에서 1차선으로 돌진하여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내 좁은 비밀 고속도로에 진입하였다. “어때, 내 솜씨가?” 아내의 존경어린 반응을 기대하며 물었다.
예상 밖으로 아내의 반응은 그게 아니었다.
“당신, 교통법을 어긴 것 같은데?”
“뭐라고?”
“방금 일방통행 길을 거꾸로 왔어.”
“아냐, 그럴 리가?”
“돌아가서 당신 직접 봐요.”
아내가 하라는 대로 했다. 그녀가 옳았다. 길에 세워진 표시판을 내가 놓쳤다. 내 은밀한 고속도로가 가면 안 되는 길이었다. 커다란 쓰레기통 바로 뒤에 ‘진입금지’라는 팻말이 서 있었다. 그제야 사람들이 왜 나를 그런 눈으로 보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들이 나를 시기하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그들 눈에는 내가 뻔뻔스러운 무법자였다.
그러나 나의 진짜 문제는 법을 몰랐을 때 무슨 짓을 했느냐가 아니다. 지금, 법을 알고 나서 내가 어떻게 하고 싶어 하는지, 그게 문제다. 그 골목을 이용하고 싶은 마음이 싹 가셨다고 생각하시는가? 아니다. 내 마음 한 구석은 여전히 그 지름길로 가고 싶다. (이 글을 읽는 교통순경 여러분, 용서해주시오!) 아침마다 내 마음속에서 누가 이런 말을 주고받는다.
“그건 불법이야.”
“하지만 한 번도 안 걸렸어.”
“그래도 법은 법이지.”
“그 법이 나 같은 모범시민을 위해서 만들어진 건 아니거든. 게다가 그렇게 해서 절약한 5분을 기도하는 데 바칠 수 있다고!”
“차 안에서는 기도 못하나?”
법을 알기 전에는 평화로웠다. 그런데 법을 알고 나자 속에서 소동이 벌어졌다. 나는 지금 찢어진 사람이다. 한편으로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 눈은 ‘진입금지’를 읽는데 몸은 그 지시를 따르려 하지 않는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와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별개 문제다. 차라리 법을 몰랐더라면 좋았을 것을!
어쩐지 귀에 익은 소리라고? 그럴 것이다. 많은 사람이 이와 같은 우왕좌왕을 경험하면서 살고 있다. 그리스도에게로 나오기 전까지 우리 모두 이런저런 지름길을 알고 있었다. 불륜은 쾌락을 안겨주는 지름길이고, 속임수는 성공을 가져다주는 지름길이고, 허풍은 대중의 인기를 모으는 지름길이고, 거짓말은 권력을 손에 넣는 지름길이다.
그러다가 우리는 그리스도를 보았고 은총을 보았고 그리고 표시판을 보았고…
우리는 여태까지 지름길을 가면서 ‘진입금지’ 팻말을 보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 그것을 보고 있다. 당신은 안다. 나도 안다… 차라리 팻말을 보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하지만 이제 보았다. 법이 무엇인지를 안다. 어쩔 것인가?
우리의 이런 갈등은 저 옛날 바울로한테도 있었던 모양이다.
“우리는 율법이 신령한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니올시다. 나는 그냥 한 인간, 죄에 종으로 팔린 한 인간일 따름이에요. 나는 내가 하는 짓을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은 하지 않고 오히려 미워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자기가 원치 않는 일을 하고 있는 거니까 최소한 율법이 좋은 것임을 스스로 알고 있다는 얘긴 되겠지요. 하지만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실제로 하는 건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죄올시다. 내 속에 그러니까 내 몸 속에 선이 살아있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어요. 선한 일을 하고 싶은데 그럴 힘이 없으니까요. 스스로 원하는 선한 일은 하지 않고 거꾸로 원치 않는 악을 행하고 있는 겁니다. 스스로 원치 않는 일을 하고 있으니 결국 그 일을 하는 것이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죄라는 얘기올시다.
“여기에서 나는 한 가지 원리를 발견했어요. 나는 선을 행하고 싶지만 악이 결코 나를 혼자 있게 놔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 속의 가장 깊은 자아는 하느님의 법에 기꺼이 동의하지만, 내 이성의 법과 싸우는 다른 법이 이 몸속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아, 나라는 존재야말로 얼마나 불쌍한 물건인지!”(로마서 7, 17-23).
영혼의 내전(內戰)이다.
이 전쟁을 수행함에 있어서 두 가지 진실이 있다. 하나는 당신의 신분이다. 당신은 하느님의 자녀다. 다른 하나는 당신의 무기다. 하느님 말씀이다.
공격당할 때 우리는 과연 하느님의 말씀에 효력이 있는지를 의심하는 성향이 있다. 내가 일방통행에서 그랬듯이 핑계거리를 찾는다. “나 같은 선량한 시민이 아니라 무법자들을 위해서 존재하는 게 법이다.” 법의 존재이유를 따지면서 법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로는 단호하게 말한다. “율법은 거룩한 것이요 계명 또한 거룩하고 옳고 좋은 것입니다.” 거룩하다(holy)는 말의 뿌리는 “다르다”는 의미를 가진 ‘하기오스’(hagios)다. 하느님의 법이 거룩한 까닭은 그것이 다른 세계, 다른 영역, 다른 관점에서 왔기 때문이다.
내가 택했던 골목길의 ‘진입금지’는 어찌 보면 다른 영역에서 온 것이었다. 시청 교통정책실의 생각은 내 생각과 다르다. 그들의 관심은 공동의 선에 있고 내 관심은 나의 편리함에 있다. 그들은 무엇이 시민에게 가장 좋은지를 생각한다. 나는 무엇이 나에게 가장 좋은지를 생각한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시민들이 안전할 것인지를 안다. 나는 어떻게 하면 내가 빨리 갈 것인지를 안다.
나 기분 좋으라고 법을 만든 게 아니다. 나 안전하라고 법을 만든 것이다.
하느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우리 눈에는 지름길로 보이는 것이 하느님 눈에는 재난이다. 그분이 우리에게 법을 주시는 것은 우리를 기분 좋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주기 위해서다. 무엇과 씨름해야 할 경우, 우리의 머리가 아니라 하느님의 지혜를 신뢰해야 한다. 그분이 설계하신 세상이다. 우리한테 무엇이 필요한지, 우리보다 그분이 더 잘 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