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전생, 삶의 연결고리
“명상가들은 바로 삶의 이전에 있었던 모든 전생의 과정들을 바로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들은 자기자신들이 전생에 늑대와 같은 동물이었거나 심지어는 나무와 돌멩이였을 때의 자기자신에 대한 전생을 관람한다.”
오랜 옛날, 태평양에 가라앉은 레무리아 대륙을 발견한 영국의 고고학자 제임스 처치우드는 인도의 어느 사원에서 힌두교의 한 승려로부터 지금과 같은 문명이 지구에 6번이나 잇었다는 꿈과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또한 오래된 불교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에도 「전생」에 대한 관념이 매우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삶의 앞과뒤에 삶이 있으리라는 추측은 할 수 있을지라도 아무도 그것을 명확하게 활식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과학이 강조되고 있는 지금에 와서는 이 전생에 대한 추측들이 매우 불합리해 보인다. 왜냐하면 삶의 앞과 뒤에는 꼭 죽음이라는 과정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까지의 과학은 죽음에 대하여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죽음은 살밍 너무나도 개인적은 경험인 것처럼 지극히 너무나도 개인적인 과학인지도 모른다.
티벳에서는 지금가지 14명의 달라이라마가 있어왔다. 그러나 티벳사람들은 그 14명의 달라이라마가 각기 다른 14명의 영혼이 아닌 단 한 사람의 영혼을 육백여년 동안 14번의 탄생과 죽음을 거치면서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것으로 믿고 있다. 달라이라마가 죽음을 맞이하여 돔을 떠날 때마다 티벳의 고승들은 깊은 명상 속에서 낡은 육신을 빠져나간 달라이라마의 영혼이 어느 여인의 자궁 속으로 들어가 거기에서 열달 동안 새로운 몸을 짓고 있는 것을 바라본다고 한다. 그리하여 라마의 사원에서는 달라이라마의 영혼이 새로운 어린아이의 몸을 가지고 이 세상으로 다시나오면 그 달라이라마를 맞이하러 간다고 한다. 그리고 그 어린아이가 3살이 되면 라마승들은 달라이라마가 전생에 사용하던 물건들을 그 아이의 주변에 다른 물건들과 섞어 놓는다. 그러면 그 아이는 전생에 자기가 사용하던 물건들을 정확하게 집어 냅으로써 그 어린아이가 전생의 달라이라마였다는 것을 증명한다.
어린아이들이 놀고 있는 모습을 보면 어떤 아이는 태어나서부터 방긋방긋 잘 웃으며 즐거운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어떤 어린아이는 주위의 작은 변화에도 아주 민감하게 감응하여 자주 울며 얼굴을 찡그린다. 이 제가기 다른 어린아이들의 표정들은 혹시 지금 이전의 , 전생의 삶과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가끔 신문에서 4살도 채 안된 어린아이가 쇼팽의 피아노 곡을 연주 한다거나 또는 고등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어려운 수학문제를 척척 풀기도 한다는 화제거리를 읽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신동이라고 불리우는 어린아이들의 재능도 전생의 삶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안양 근교의 어느 산속에 살고 있는 한 할아버지는 전생에 대하여 매우 흥미있는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그 할아버지가 사람들을 바라보면 사람들의 얼굴에서 전생의 모습들이 저절로 떠올라 지나간다고 한다. 그리하여 어느날 그 할아버지가 버스를 타고 있었는데 주위를 둘러보니까 거기에 사람은 한명도 없고 운전사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동물의 형상을 하고 있어 그 할어버지는 버스 속에서 배를 잡고 혼자 웃었다고 한다.
사실 사람의 모습을 자세히 바라보면 어떤 이는 말같이 생긴 사람, 어떤 이는 토끼처럼 생긴사람 그리고 또 어떤 이는 호랑이와 같이 생긴 사람 등등, 얼굴의 골격에서 동물들과 아주 흡사한 편린들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또한 사람들을 행우에서도 어떤 이는 표범처럼 사납고 어떤 이는 여우처럼 약아빠졌으며, 어떤 이는 새처럼 명랑하게 노래하기를 즐기며, 또 어떤 이는 양과 같이 온순하게 행동한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의 행위를 천성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사람들의 골상과 행위 속에서 세상의 동물들의 모습과 습성이 그대로 박혀 있는 것을 그대로 지나쳐 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해서 사람이 사람 이전의 전생에서 꼭 동물이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아무튼 인간과 동물사이에 우리가 쉽게 부정해 버릴 수만은 없는 연결고리가 있음에 틀림없다.
만약 우리가 점쟁이에게 간다면 그는 손바닥에 그어져 있는 간단한 자국만을 갖고서도 한 사람의 모든 일생을 시원스럽게 좔좔 이야기 하여준다. 우리는 때때로 이 점쟁이의 이야기를 믿기도 하고, 때때로 미신이라고 애써 불신하지만 사실 손금 하나만을 가지고도 사람의 모든 인생행로를 마치 수학의 해답처럼 늘어 놓을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신기하다.
오른쪽 손의 손금에는 현생의 운명이 그어져 있고 왼손에는 전생의 행로가 그어져 있다고 한다. 그리고 실제로 한 인간행위의 습성이나 운명이 바뀔 대 홍수가 나면 강의 지류가 바뀌듯이 손금도 따라 변화 한다고 하니 이 또한 참으로 놀랄만한 사실이다. 어쩌면 지금 살고 있는 행위의 모든 기억들과 전생의 기억들이 DNA인자에 기록되었다가 손바닥에 기하학의 도식처럼 그 행로가 그려지는 것이나 아닐까?
동양철학에서는 마음을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 모든 동물과 나무, 심지어는 돌멩이까지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사실 마음이란 하나의 기억창고와 같다. 그러나 돌멩이와 나무, 동물들은 자기자신에게 있는 마음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이 마음이란 것은 인간에게 이르러 비로소 기억을 통하여 의식 된다.
원시인의 마음구조는 8비트짜리 퍼스탈컴퓨터와 같이 아주 간단하다. 8비트짜리 컴퓨터는 디스크에 원고지 200매 이상의 정보가 초과되면 모든 정보가 빠그라지면서 아무것도 기억을 해내지 못한다. 원시인의 마음도 이 8비트짜리 컴퓨터와 같고 먹고, 자고, 사랑하고, 친구와 적을 가리고, 자기의 생활주변을 기억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복잡한 정보를 전혀 입력 시킬 수가 없다. 그러나 원시인은 문명인과는 달리 기본적으로 매우 행복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원시인의 마음은 자기가 기억하고 있는 모든 상황을 VTR에서처럼 칼라로 재생하여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명인은 그토록 복잡하고 많은 정보량을 감당 해내기가 힘에 겨워 마음속에서 칼라의 영상이 희미해짐과 동시에 일어난 현상이다. 그리히여 현대인은 꿈 속에서 겨우 칼라의 형상을 재생 할 수 있을 뿐이다. 바로 이것이 문명인에게 일어난 가장 큰 비극중의 하나이다.
우리 인간은 자기자신이 가지고 잇는 마음의 구조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 인간은 마음 안에서의 칼라의 영상을 잃어버렸다. 마음 속에서 1초 사이에 수십만의 시그날이 한꺼번에 지나간다. 갑자기 사고를 당하거나 또는 절벽에서 뛰어녀려 자살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 광경을 불과 수초 사이에 칼로 너무나 생생하게 경험한다. 그들은 불과 수초 사이에 그들이 지나온 일생을 모두 다 마음속에서 재생하여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평상적인 인간의 마음은 마치 고장난 TV에서 빨리 지나가버리는 비정상적인 화면처럼 이 신호를 포착하지 못한다.
명상은 바로 마음속에서 빠르게 진행되는 화면을 VTR에서처럼 정지시키거나 아니면 슬로우비디오기능처럼 바라볼 수 있는 마음에 대한 하늬 조정기술이다. 이 마음에 기억 되어있는 모든 것을 생생하게 바라볼 수 있는 명상가들은 바로 삶의 이전에 있었던 모든 전생의 과정들을 바라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들은 자기자신들이 전생에 늑대와 같은 동물이었거나 심지어는 나무와 돌멩이였을 때의 자기자신에 대한 전생을 관람한다. 그러나 그들이 바라보는 것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의 관람이 아니다. 왜냐하면 마음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에서 벗어 났을 때에만 그 모든 것이 확실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칼 융은 우리 인간의 무의식의 세게를 개인 무의식과 집단 무의식으로 구분하였다. 무의식이란 다름아닌 마음속에서 드러나지 않는 부분을 말한다. 이 개인 무의식은 한 개인에게 일어났던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지만, 집단 무의식은 모든 인류가 인종을 초월하여, 경험한, 공유되어있는 기억이다. 인도의 어느 브라만 승려가 지금가지 지구에 오늘날과 같은 문명이 6번이나 되풀이 되였다고 말한 사실은 바로 이 칼융이 지적하고 있는 집단 무의식에 관계되어 있는 인류의 공유되어 있는 전생일지도 모른다. 만약 인간이 개인적으로 삶과 삶사이를 이어가는 윤회를 하고 있다면, 인류 또한 집단적으로 한 덩어리가 되어 윤회를 하고 있는 것이나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