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를 찾아 떠나는 여행
“내면세계의 여행은 아무런 준비가 필요치 않다. 아니 오히려 거기에는 아무것도 지니고 갈 수 없기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얻은 것들을 모두 버려야만 여행 할 수 있다. 수십년 동안 우리의 기억 속에 저장하고 있는 여러 가지 생각들, 바로 이런 것들을 쏟아버리지 않고서는, 우리는 내면세계에서 길을 잃고 헤매일 수밖에 없다.”
몇 년 전 할리우드의 한 젊은 몽상가가 만든 외계인과 지구소년 사이의 우정을 그린 ET라는 영화가 기억에 떠오른다. 그때 그 영화는 지구촌의 모든 영화관을 휩쓸며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굳게 닫혀있는 사람들의 가슴을 깊은 감동으로 덜리게 하였다. 그러나 이 외계인 ET는 한낱 플래스틱으로 만든 하나의 인형일 뿐이었다. 단지 그 인형이 지구에서 수백광년이나 멀리 떨어진 은하계의 별에서 찾아 왔다는 이유로 해서 사람들의 녹슨 가슴을 때려 울리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 영화는 지금 인간에게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그대로 드러내 주고 있는 것같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자신의 존재로부터 너무 멀리 외부로 여행을 떠났기에 먼 곳에 있는 것이라면 플래스틱 인형이라 할지라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바로 자기자신의 몸 안에 들어있는 존재를 잃어 버렸기에 멀리 잃어 버린 무엇인가를 찾아 외부로 여행을 떠나야만 했던 것이다.
오늘날의 우주과학이 외부에 있는 존재를 찾는 과학이라면 명상은 우리에게 내내 있어왔던 존재를 찾아 여행하는 내면의 과학이다. 우리가 다른 별에 살고 있는 존재들을 찾기 위해서는 거대한 로켓과 우주 통신장비 그리고 우주 항해기술과 다른 여러 가지 조건들을 극복하기 위한 기술들이 필요하지만 내면의 존재를 찾아 떠나는 여행에는 아무 장비도 기술도 필요하지 않다. 아니 오히려 거기에는 아무것도 지니고 갈 수 없기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얻은 것들을 모두 버려야만 여행할 수 있다. 그리하여 명상의 세계에서 가장 무거운 짐은 지식이 된다. 내면세계에서의 여행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생각조차 걸리적 거린다. 수십년 동안 우리의 기억 속에 저장하고 있는 여러 가지 생각들, 바로 이런 것들을 쏟아버리지 않고서는, 우리는 내면세계에서 길을 잃고 헤매일 수밖에 없다.
인간의 마음속에서 이 생각이라는 물질은 우주의 팽창속도와 같이 분열한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아무리 빠른 우주 로켓이라 할지라도 생각이라는 물질의 팽창속도를 따라 잡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마음의 세계 속에서는 출발이 곧 도착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각을 뛰어 넘을 때 마음속에 숨어있는 여러 차원의 세계를 경험한다.
지금 최신 물리학에서는 이 우주에 10차원의 세계가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물리학자들이 추정하고 있는 이 10차원의 세계란 바로 인간 마음의 세계이다. 우리는 3차원 이상의 세계를 상상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 하다. 그러나 루이스캐롤같은 사람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는 동화를 통하여 3차원 이상의 세계를 표현해 보려고 시도하였다.
개미는 2차원의 세계에 살고 있다. 왜냐하면 개미에게는 땅을 기어가도, 나무 위를 올라고도 모든 세계가 2차원적 평면으로만 느껴지기 때문이다. 개미가 나무에서 떨어져도 상처를 입지 않는 것은 개미에게는 3차원적인 의식의 관념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린아이가 때때로 고층 아파트에서도 떨어져도 손가락하나 다치지 않고 기적처럼 살아남는 이유도 어린아이가 3차원적 공간의 세계를 의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 3차원 안에서의 시간과 공간이라는 것을 이 다차원 세계 속에서의 하나의 기하학적인 일면에 불과한 것이다.
마음의 이 3차원 세계로부터 4차원의 세계로 들어간 사람은 영화「백투더 휘쳐」에서처럼 과거와 미래 사이를 기하학적인 평면도형에서 마음대로 여행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노스트라담스와 에드가케이시같은 사람들이 인류의 과거와 미래에 대하여 예언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마음이란 타임머신 속에서 이 4차원의 세계를 기하학적인 평면도형으로 펼쳐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음악가들이나 미술가, 시인같은 예술가들도 어느순간 이 마음속에서 4차원의 세계를 별똥별이 지구를 스쳐 지나가듯이 순간적으로 경험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쥐꼬리만한 경험을 코끼리만하게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확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쥐꼬리만한 예술가들의 경험도 마음의 다차원적인 세계를 조금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 구조 중 한부분에는 생물시계(Bionical clock)라는 기능이 있다. 그리고 이 생물시계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감각세계와 연결되어 있으며, 지구의 자장이나 외게의 다른 별들과도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고 주기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잠자고 있는 동안에도 인간의 두뇌에서 과학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전기적인 활동이 90분 간격으로 되풀이 되고 있다. 우리가 길을 걸어 갈 때 땅에서 항상 수직을 유지할 수 있는 것도 이 생물시계의 작용 때문이다. 그리고 위험이 오면 이 생물시계는 자동적으로 그것을 피하게 한다. 길을 걸어 갈 때 자동차를 피하거나 문을 열고 닫을 때도 그리고 사람끼리 지나칠 때에도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이 생물시계가 작용한다.
그러나 집에 돌아와 위험이 없는 방에 있을 때에는 이 생물시계의 작용이 둔화되어야 한다. 아무 위험이 없는데도 계속 마음속의 어떤 매카니즘이 경계를 하며 작용하고 있다면 그때 우리는 책을 읽어도 그 책어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우리가 똑같은 내용을 책에서 계속 반복하여 읽어야 하는 것도 바로 이 생물시계와 연결된 마음의 회로가 과민하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쉽게 명상에 빠져들 수 없는 것도 이 생물시계가 인간의 감각기관과 결탁하여 외부에서 일어나는 상황의 유기적인 작용을 바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 생물시계는 하나의 리듬형태로 존재한다. 우리는 그것을 바이오 피드백(Bio feedbeck)이라고 부른다. 이 피드백을 완벽하게 느끼고 있는 사람은 외부에서 일어나는 어떤 형태의 소음과도 마찰이 없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게서 일어나는 이 피드백을 읽지 못한 사람은 외부의 작은 자극에도 아주 커다란 충격을 받고 몸서리친다. 호흡명상은 몸과 마음의 복잡한 생리구조를 쉽게 관찰할 수 있는 하나의 간접적인 길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몸을 관찰할 때 거기에 비로소 마음과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고리를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의 몸과 마음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끈과 같다고 한다. 몸이 밧줄과 같이 굵은 부분이라면 마음은 X-ray와 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실날보다 더 미세한 끈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이 마음의 끈을 붙잡아야 하는 것이다.
명상은 애당초 이야기할 가치조차 없는 것이라고 선에서는 말한다. 왜냐하면 명상은 우리에게 내내 일어나고 있는 상황인데 우리 자신이 자신의 숨소리를 듣지 못하듯이 그것을 까마득히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명상을 한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짓이다. 만약 누가 명상을 수행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명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알기위한 하나의 준비과정이지 명상수행이 곧 명상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누가 명상수행을 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호수와 같이 잔잔한 평온 속에서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참된 명상이란 아무런 비행경험도 없는 그런 사람이 조종하는 비행기가 하늘로 신나게 날아가는 바로 그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