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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2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3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6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7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8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9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2011 통계청 사회 조사
국민 45% "나는 하층민이다"…통계청 2011 사회조사
우리 나라 국민이 느끼는 소득 만족도가 낮은 것으로 조사됐다.
국민 중 45%가 자신의 지위가 하층에 머물러 있다고 느끼는 가운데 지금 벌어들이고 있는 소득이 불만족스럽다고 대답한 비율도 절반(49.1%)에 달했다.
통계청이 15일 발표한 `2011년 사회조사 결과`에 따르면 가구주 소득 자신감이 전반적으로 약화된 것으로 나타났다.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여가 활동을 할 때도 돈이 발목을 잡았다. 경제적인 부담 때문에 여가 활동이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대답한 국민이 60.9%로 가장 많았다.
◦ 성별로 보면, 남자 가구주는 자신이 「상층」2.2%, 「중간층」57.3%, 「하층」40.5%이라고 생각
◦ 반면, 여자가구주의 10명중 6명은 본인이 「하층」이라고 생각함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살림살이가 어려워지고 있다고 토로한 가구가 늘었다는 점이다. 소득, 직업, 교육, 재산 등을 고려했을 때 본인의 사회ㆍ경제적 지위가 하층에 있다고 대답한 가구주가 45.3%에 달했다. 중간층에 있다고 응답한 비중이 52.8%로 가장 많았지만 상층 비중은 1.9%에 그쳤다. 직전에 했던 2009년 조사와 비교했을 때 상층과 중간층이라고 대답한 비중은 각각 0.8%포인트, 2.1%포인트 줄어든 반면 하층 비중은 2.9%포인트 늘었다. 자신이 하층이라고 답한 소득 계층은 월평균 소득 100만원 미만이 77.3%로 가장 많았다. `일생을 노력해도 본인의 사회 경제적 지위가 높아질 가능성이 낮다`고 응답한 비율은 58.7%로, 크다고 응답한 비율(28.8%)에 비해 훨씬 높았다.
이러한 분위기는 젊은이들 직업 선택에도 녹아 있다. 직업을 고를 때 가장 중요한 요소로 수입(38.3%)과 안정성(29.2%)이 꼽혔고 적성ㆍ흥미는 14.1%에 그쳤다. 수입이 중요하다고 응답한 비율은 2년 전보다 2%포인트 늘어났다. 13~29세 청년층이 가장 선호하는 직장으로는 국가 기관(28.7%)이 1순위에 올랐다. 대기업(21.6%), 공기업(15.6%) 등이 뒤를 이었다. 고용 불안이 심하다고 대답한 사람도 많았다. 평소 직업을 잃거나 바꾸어야 한다는 데 불안감을 느낀 사람이 59.9%로 높게 분석됐다. 특히 소득 계층의 허리를 이루는 30~39세는 65.0%가 고용 불안을 호소했다.
일과 가정 생활 중 일을 우선 순위에 둔다는 응답도 54.5%로 더 높았다.
수목장을 가장 선호하는 장례 방식으로 선택하는 등 국민의 사회 의식에 변화가 일고 있는 것도 특징이다. 19세 이상 중 80.4%가 화장을 가장 선호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구체적으로 수목장 등 화장 후 자연장(41.1%)이 가장 높게 나타났고 화장 후 봉안(납골당ㆍ납골묘)이 39.3%, 매장 17.1% 순이었다. 다만 고연령층일수록 매장 선호도가 높아 70세 이상은 42.5%나 됐다.
집 근처에 장애인 시설이 들어서는 것에는 대부분(93.8%)이 우호적인 반응을 보였다. 장애인을 위한 정부 복지 사업은 재원이 허락한다면 확대돼야 한다는 의견이 45.2%로 높게 나타났다.
공정 사회를 위해 개선할 부문으로는 조세(27.8%), 취업(25.2%), 경찰ㆍ사법(19.7%), 신문ㆍ방송(14.7%), 교육(11.6%) 등을 손꼽았다. 19세 이상 가구주 가운데 노후 준비를 하고 있다고 응답한 비중은 75.8%로 비교적 높게 나타났다. 노후 준비 방법은 국민연금, 예ㆍ적금, 사적연금 순이었다. 국민 연금은 2년 전 42.6%에서 올해 55.2%로 12.6%포인트 늘어나는 등 노후 자금 마련 수단으로 큰 관심을 받았다.
팍스 로마나
얼마전 소천하신 존 스토트(J. Stott) 목사님이 말씀한 것처럼, 성경을 읽거나 해석할 때 우리가 범하기 쉬운 실수 중 대표적인 것은 우리가 사는 현대 문화와 현대의 편견의 안경을 끼고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이천년 전 특별한 시대 속에서 주신 말씀을 현대의 시대적 간격을 고려하지 않은 채 그저 오늘의 사고로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단에 빠지는 이유는 성경을 안 믿기 때문이 아니라 성경해석에서 종종 예수님이 말씀하신 때의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특히 오늘 우리가 읽었던 누가복음 2장은 올바른 본문의 이해를 위해서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대한 고려가 필요합니다. 누가복음 2장 1절은 유명한 로마 황제의 이름으로 시작되어 집니다.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
가이사라는 말은 황제라는 뜻입니다. 성경에 언급되는 로마의 모든 황제는 가이사로 통칭됩니다. 가이사(Caesar)라는 단어는 기원전 3세기이후 가장 유명한 로마의 명문가문을 가리키는 단어로서 특히 출중했던 인물은 '줄리어스 씨저'로 우리에게 알려진 ‘케사르 가이우스 줄리어스-Caesar Gaius Julius. B.C 100-44)’입니다. 신약 시대의 팔레스틴과 유대인들은 로마 가이사의 권세 하에 있었습니다. 아구스도(BC 31- AD 14), 디베료(AD 14-37), 칼리쿨라(AD 37 -41), 글라우디오(AD 41- 54) 및 네로(AD 54- 68)가 바로 그들입니다. 아구스도는 본문에 나오는 로마 황제로 예수께서 탄생하실 때 호적을 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디베료 때에 세례 요한은 전도하며 요단 강에서 세례를 주었고, 글라우디오때에 아가보 선지자는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와서, 성령의 지시로 흉년이 들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그리고 네로 때에는 바울이 로마의 옥에 갇히게 되었으며 최초의 기독교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가이사 아구스도는 줄리우스 씨저의 양아들로 우리에게는 옥타비아누스로 널리 알려진 인물입니다. 이 가이사 아구스도의 시대는 로마의 권력과 역사에서 절정기였습니다. 가이사 아구스도는 ‘행정의 천재’라고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로마의 전반적인 행정을 개혁하였고 쇠퇴하고 있던 공화제를 군주제로 바꾸는 복권시키는 강력한 힘을 가진 황제였습니다. 기원전 27년, 원로원은 신격(神格), 신성(神性)의 의미인 ‘아우구스투스’ 라는 존칭을 그에게 부여했으며 사후 황제가 신격화 되는 최초의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바로 그후 200년간을 팍스 로마나(Pax Romana, 로마의 평화)라고 불렀습니다.
이 가이사 아구스도가 호적하라는 명령으로 누가복음은 시작됩니다. 이 가이사 아구스도의 힘과 권력이 얼마나 막강했는지 우리는 본문 속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곧 이 한 사람의 말에 천하의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갈 수 밖에 없는 막강한 권력에 의해 다스려지는 시대가 예수님이 탄생하신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가이사의 강력한 권세와 또 다른 분위기를 우리는 본문 속에서 감지하게 됩니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 (누가 2, 4~7)
(1) 겸손히 안방을 내어드려야 평화가 옵니다.
- 성탄 인사 -
1. Merry Christmas
Christ = Christos(그리스도), Mas = Mass(미사, 예배)
“기쁨으로 그리스도께 예배합시다”라는 뜻
2. 스페인어 - Feliz Navidad
3. 프랑스어 - Joyeux Noel
예수님께서 나신 곳이 어디입니까? 작은 나라인 유대, 그 작은 나라 중에서도 아주 작은 마을인 베들레헴, 그리고 말이 사는 마굿간, 말의 먹이를 놓아두는 구유라는 곳입니다. 생각해보면 너무 처량할 정도로 보잘 것 없지 않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런 작은 마을에서는 결코 훌륭한 사람, 유명한 사람이 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이란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것은 이해가 되는데, 그런데 어떻게 말이 사는 마굿간에서 태어나시고, 또 어떻게 말의 먹이를 놓아두는 구유에 누워계실 수 있겠습니까? 잘 이해가 안 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무렵에 천사들이 밤새워가며 양떼를 지키던 목자들에게 나타났습니다. 그처럼 예수님이 태어나신 것과 관련된 유대 베들레헴, 말이 사는 마굿간, 말의 먹이를 놓아두는 구유, 그러한 것들은 무엇을 생각나게 합니까? 보잘 것 없고, 어둡고, 춥고, 축축하고, 냄새나고, 지저분한 곳, 사람이 살기 힘든 곳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또 밤새워가며 양떼를 지키는 목자들은 무엇을 생각나게 합니까? 가난하고, 너무 힘들게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그처럼 예수님이 태어나신 것과 관련된 것들은 별로 좋은 것들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태어나셨습니까?
낮아지신 모습을 우리 사람들에게 보여주시고, 우리 사람들도 낮아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나를 끊임없이 낮추라는 것입니다. 이름도 빛도 없이 나를 낮추고 감출 때에 인생의 수많은 문제들이 해결됨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나라 교회 역사에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우리 나라의 경상남도 남해군 이동면 탐정리 섬에서 태어난 이자익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집이 너무 가난하여 항상 먹을 것이 부족했습니다. 너무 배가 고파 친척집에 가서 머슴 노릇을 했지만 굶주린 배를 채울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곡식이 많이 나는 김제라고 하는 곡창지대의 어느 부잣집을 찾아가 ‘밥만 먹여주면 머슴이 되겠다.’고 사정했습니다. 집 주인은 그를 불쌍히 여겨 집의 머슴으로 삼았습니다.
바로 그때에 미국에서 최의덕이라는 선교사가 김제에 들어와 선교활동을 했습니다. 이 최의덕 선교사가 이자익이란 머슴 청년을 전도했고, 그의 집 주인 가족까지도 전도하여 모두가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때 글을 모르던 이자익은 주인 아들이 글을 읽는 소리를 들으며 글자를 익혔습니다. 이제, 최의덕 선교사의 전도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자 금산교회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집 주인인 조덕삼과 머슴인 이자익을 교회 영수 곧 지도자로 임명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최의덕 선교사는 선교 활동 반경이 넓어져 주일 예배를 인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자익 청년을 조사로 임명하여 설교를 하게 했습니다. 그러자 이자익 청년이 머슴으로 있던 집 주인인 조덕삼 영수는 “우리 집에서 머슴으로 일하던 일꾼이 교회의 조사가 된다니 그 얼마나 자랑스러운가?”라고 말하며 함께 기뻐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은 강단 아래에서 그의 설교를 들으며 교회를 열심히 섬겼습니다.
1908년, 금산교회에서 장로를 선출하게 되었습니다. 조덕삼과 이자익이 나란히 장로 후보로 나왔습니다. 투표 결과 이자익 영수는 장로로 피택되고, 조덕삼 영수는 떨어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투표 결과를 놓고 웅성거렸습니다. 그때 조덕삼 영수가 일어서서 “여러 교우님들, 참 감사합니다. 저는 나이가 많아서 교회에 봉사하기 어려운데, 이자익 영수를 장로로 선출하여 일하게 하였으니 참 잘하셨습니다. 우리 이자익 장로를 잘 받들어 교회를 잘 섬깁시다.”라고 말했습니다. 1년 후에 조덕삼 영수도 장로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선교사의 추천으로 이자익 장로는 평양에서 신학을 공부하여 목사가 되었고, 한국 장로교의 총회장을 세 번이나 지냈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낮아져 머슴인 이자익 목사를 잘 받들어 섬겼던 조덕삼 장로는 집안 대대로 하나님께 큰 복을 받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성 어거스틴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큰 덕목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성 어거스틴은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 둘째, 셋째 모두가 자신을 낮추는 겸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늘 우리 자신을 낮추는 겸손을 이루어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것과 관련된 것들은 별로 좋은 것들이 아니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태어나셨습니까?
사실 알고 보면 모든 사람의 모습이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 관련된 것들과 똑같기 때문입니다. 병든 사람들은 몸이 아파서 힘들어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쓸 돈이 적어서 힘들어 합니다. 부자는 어떻습니까? 부자도 아파하고 힘들어 합니다. 왜 아파하고 힘들어 합니까? 어떻게 하면 돈을 더 많이 모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돈을 더 잘 관리할 수 있을까?를 늘 고민합니다. 그러다보니 머리가 복잡해집니다. 또 돈 많은 부자들은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들을 만납니다. 때문에 부자 역시 머리도 아프고, 마음도 아픕니다. 알고 보면 이 세상에 힘들지 않은 사람이란 아무도 없습니다. 나이 많은 노인이나 어린 아이나, 여자나 남자나 모두가 힘들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신 이유는 바로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어 사랑하고 섬기며 평화를 누리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사람들이 서로 사랑과 섬김과 평화를 나누며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오래 전에 터키라는 나라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터키 사람들은 터키에서 함께 살고 있는 아르메니아 사람들을 몹시 싫어했습니다. 어느 날 한 터키 사람이 아르메니아 사람이 살고 있는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오빠와 여동생이 살고 있는 집이었습니다. 그는 먼저 오빠를 죽였습니다. 그리고 여동생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겨우 도망쳐 간신히 살아났습니다. 도망쳐 생명을 건진 그녀의 직업은 간호사였습니다. 그 일이 있은 지 몇 달이 지났습니다. 병원에 한 남자 환자가 들어 왔습니다. 얼굴을 심하게 다쳐 누구인지 알아 볼 수 없었습니다. 간호원은 정성 다해 치료해 주었습니다. 어느 정도 치료된 후, 그 남자의 얼굴을 보니까 자기 오빠를 죽인 사람이었고, 자기까지 죽일려고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여자는 몹시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치료를 하지 않고 그대로 좌두면 죽게 되니까 그렇게 죽게 하고 싶은 생각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그 여자는 “나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인 사람들을 사랑하시려고 사람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고, 또한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셨는 데 내가 이 사람을 죽여서야 되겠는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그 사람을 잘 치료해 주기로 결심했습니다. 정성을 다했습니다. 한 달이 지났습니다. 정성 다한 치료 끝에 다친 사람이 회복되어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눈을 뜨고 자기를 그 동안 정성 다해 치료해 준 여인을 보았습니다. 그는 그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얼마전에 그녀의 오빠를 죽였고, 또 그녀 또한 죽이려 했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그는 자신을 치료해 준 여자에게 물었습니다.
“당신 오빠가 수 개월전에 죽었지요?” “예”, “누가 죽였는지 아십니까?” “알지요”, “누가 죽였습니까?” “바로 당신입니다.” “그런데 원수인 나를 어떻게 이렇게 정성 다해 치료해 줄 수 있는 것입니까?”, 그러자 간호원은 “나는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당신을 죽이고 싶다는 독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을 더 열심히 치료하기로 작정했습니다. 지금 이렇게 나은 것을 보니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터키 사람은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만일 당신이 믿는 기독교가 그와 같은 것이라면 나도 이제부터 예수님을 믿겠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이후로 예수님을 남다르게 믿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고, 수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사랑과 섬김과 평화를 심는 위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신 의미는 바로 사랑과 섬김과 평화에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예수님처럼 그 어떤 사람이든지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고 섬기며, 평화를 이룰 수 있어야 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작은 나라 유대, 무명의 작은 마을 베들레헴, 마굿간, 말구유, 가난하고 힘들게 살아가는 목자들에게 오심은 무능하거나 천해서가 아닙니다. 겸손과 사랑과 섬김과 평화를 보여주시기 위함 때문입니다.
러시아 정교가 지배하던 1800년대 초, 부패한 세상을 개혁하고자 계획한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계획이 실패하는 바람에 그는 그의 나이 28세에 체포되어 시베리아에서 사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사형 집행관이 사형을 집행하기 전에, 그에게 5분간의 시간을 주었습니다. 28년을 살아온 그 사형수에게 마지막으로 주어진 최후의 5분은 비록 짧았지만 너무나도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사형수는 ‘마지막 5분을 어떻게 쓸까?’ 고민 끝에 결정했습니다. 나를 알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작별의 기도를 하는데 2분, 그리고 오늘까지 살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곁에 있는 다른 사형수들에게 한 마디씩 작별 인사를 나누는데 2분, 나머지 1분은 눈에 보이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지금 최후의 순간까지 서있게 해준 땅에 감사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삼키면서 가족들과 친구들을 잠깐 생각하며 작별인사와 기도를 하는데 벌써 2분이 지나 버렸습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하여 돌이켜 보려는 순간 “아~! 이제 3분 후면 내 인생도 끝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지나가 버린 28년이란 세월을 금쪽처럼 아껴 쓰지 못한 것이 정말 후회스러웠습니다. “아~! 다시 한번 인생을 살 수만 있다면..... ” 하고 회한의 눈물을 흘리는 마지막 순간이었습니다. 갑자기 황제가 보낸 특사가 달려오면서 “사형을 멈추어라. 황제께서 사형 집행 중지명령을 내리셨다.”라고 외쳤습니다. 사형집행이 중단되었고, 그는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지게 되었습니다.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풀려 난 그는 사형집행 직전에 주어졌던 그 5분간의 시간을 생각하며, 남은 생의 순간순간을 소중이 여기며 열심히 살았다고 합니다. 그가 바로 톨스토이에 비견되는 세계적 문호로 "죄와 벌",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영원한 만남" 등 불후의 명작을 남긴 도스토예프스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형장에 오른 사형수에게는 사형을 중단하고 사형을 면한다는 소식보다 더 큰 소식이 없습니다. 암에 걸려 죽어가고 있는 사람에게 암덩어리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소식보다 더 큰 소식이 없습니다. 거액의 빚을 지고 몹시 괴로워하며 자살하고 싶은 사람에게 빚을 탕감해 준다는 소식보다 더 큰 소식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소식은 해당하는 개인에게만 상관이 있을 뿐, 해당되지 않는 사람에게는 별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우리와 똑같이 사람 몸을 입고 오셨다는 것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전인류적, 전세계적 뉴스입니다. 지역과 인종과 언어와 문화와 시간 등을 모두 포괄하는 가장 큰 뉴스입니다. 우리는 이미 그 엄청난 뉴스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살아야겠습니까?
몇 년 전 "가이드포스트"지에 실린 글입니다. 윌리라는 소년이 크리스마스 연극 연습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능이 조금 떨어지는 아이입니다. 키가 크고 마땅한 배역이 없어 여관집 주인역을 맡겼습니다. 문 앞에 턱 버티고 섰다가 마리아와 요셉이 오면 "방 없어요!"라고 툭명스러운 말 한 마디만 하고 들어가면 되는 아주 쉬운 역이었습니다. 거의 한 달이나 연습한 끝에 성탄절이 되어 공연을 하게 되었습니다. 각본대로 마리아와 요셉이 다가왔습니다. "주인님, 방 하나만 빌려주세요. 아이를 낳아야 하는데 아무데서도 받아주질 않습니다. 제발 부탁합니다." 그러자 윌리는 퉁명스럽게 "빈 방 없어요, 다른 곳에나 가봐요!" 하고 말하여 맡은 역을 잘 소화해 냈습니다. 연극을 지도했던 선생님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습니다. 안으로 퇴장해야 할 윌리가 처량하게 발걸음을 옮기는 요셉과 마리아를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갑작스레 각본에도 없는 대사를 꺼내었습니다. "요셉님, 마리아님, 가지 마세요. 사실은 우리 안방이 비어 있어요. 그 방을 쓰시란 말이에요!"라고 소리쳤습니다. 바로 그 순간, 관객들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처럼 뜻 깊은 성탄 연극을 본 적이 없다고 하면서 모두 큰 은혜를 받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셨다는 가장 큰 소식을 접한 우리 모두가 내어드릴 안방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예수님의 형상을 닮는 가운데, 그러한 우리 자신의 몸부림에 의하여 만들어진, 겸손이란 안방, 사랑이란 안방, 섬김이란 안방, 평화라고 하는 안방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자리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하여 주시는 예수님께 언제나 성탄의 의미가 듬뿍 담긴 우리의 겸손이란 안방, 사랑이란 안방, 섬김이란 안방, 평화라고 하는 안방을 내어드리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이웃과 화목해야 평화가 옵니다.
팍스 크리스티나
누가는 당시에 온 천하를 통치하던 가이사 아구스도와 달리 또 다른 왕의 탄생에 관하여 보도하고 있습니다. 곧 새로운 왕의 탄생 이야기입니다. 누가가 ‘요셉도 다윗의 족속이므로’, ‘다윗의 집으로’라고 두 번 쓰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누가는 이 복음서를 통해서 예수님이 누구신지 대해서 당시의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것처럼 온 세계를 다스리시는 참된 그리스도는 다윗의 가문, 다윗의 자손에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또한 누가는 마리아가 잉태했을 때 가고자 하는 도시가 바로 베들레헴이라는 작은 마을이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이것은 미가서의 메시아가 태어날 장소에 대한 성취입니다. 미가서 5장 2~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그러므로 여인이 해산하기까지 그들을 붙여 두시겠고 그 후에는 그의 형제 가운데에 남은 자가 이스라엘 자손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목축하니 그들이 거주할 것이라 이제 그가 창대하여 땅 끝까지 미치리라.”
첫 성탄절에 오신 이 새로운 왕의 탄생은 독특합니다. 가이사 아우구스도의 지배력은 군사력이었습니다. 즉 무력의 군사로 제압하고 억누르는 것이었습니다. 반면 오늘 이 왕의 탄생 속에 비쳐지는 모습은 그것과 대조됩니다. 곧 그의 탄생의 장소가 세상의 왕과 달리 여관 밖의 방도 아닌 말구유라는 사실은 이 왕은 가이사와 전혀 다른 왕임을 암시합니다. 세상의 왕이 힘과 권력, 공포를 추구하는 것과 달리 이 왕은 전혀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탄생이야기를 통하여 우리의 왕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줍니다. 곧 그 분은 만왕의 왕이시지만 결코 군림하지 않으시고 섬기시는 겸손하신 왕이십니다.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던 헤롯이나 다른 권력자들이 이 아기를 찾지 못했던 이유는 새로운 왕되심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들은 새로운 왕이 화려한 도시에 화려한 왕국에서 탄생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예상을 깨고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가장 천하고 낮은 곳에 탄생하셨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탄생이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초라한 탄생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탄생이 우주적이었다는 것에 있습니다. 아마 인류 역사상 가장 놀랍고 가장 경이로운 사건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탄생하신 사건일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역사는 A. D 와 B. C로 나누어졌습니다. 이날이 위대한 이유는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날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부르는 성탄의 찬양처럼 참 신께서 참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그날이 성탄절이기 때문에 그 날은 깜작 놀랄만한 날입니다.
이 위대하고 겸손하신 왕의 탄생 소식을 들었던 이들은 밖에서 양을 지키던 목자들이었습니다. 천사들이 목자들에게 나타나서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알렸습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여기에서 “기쁜 소식”이라는 원어적 단어는 당시 황제들이 출현하거나 태어날 때 사용되었던 표현입니다. 예를 들어 아우구스가 태어났던 때를 어떤 역사가는 “기쁜 소식의 시작”이라고 적기도 했습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탄생이 그 당시 사람들이 이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참되신 우주의 황제께서 태어나셨음을 증언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2장 11절에서도 발견됩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여기에서 “구주”라는 단어는 주로 당시의 황제들을 가리키는 표현이었습니다. 이 단어는 구약성경에서 온 우주를 다스리고 지배하는 지칭할 때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누가가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은 곧 예수님의 탄생이 황제의 위엄과 영광을 능가함을 보도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러한 누가의 의도는 13절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누가는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신 분들은 천사를 지칭하는 말에 약간의 차이가 있음을 아실 겁니다. 곧 10절에는 “천사가 이르되‘라고 말하는 반면 13절에서는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라고 말합니다. 즉 처음에는 천사만 나타났는데 갑자기 천군이 좋은 소식을 전한 천사와 함께 홀연히 나타났다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탄생소식을 함께 했던 것은 단순히 천사만이 아니라 하늘의 군대인 천군이 그 자리에 함께 했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참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의 군대를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누가는 그 분의 탄생에 하늘의 천사와 군대가 어떻게 옹위하고 그 위대한 사령관의 탄생 앞에 굴복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수많은 천군과 천사들이 외치는 찬양을 들어 보십시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그 분의 탄생은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였습니다. 이것은 당신의 로마 지배 상황에서 볼 때 이 왕의 탄생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보여줍니다. 로마가 군사력으로 평화를 이루었다면 예수님은 당신의 사랑으로 이 땅에 평화를 이루신 참 구주십니다. 예수님은 군대는 하늘의 군대이며, 예수님이 가져오시는 평화는 로마의 억압에서 오는 다스림이 아니라 공의와 사랑에 의한 평화였습니다. 바로 이 왕국은 하나님의 왕국, 하나님의 아들에 의해서 다스려지는 평화의 왕국, “팍스 크리스티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에 의한,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평화, 하나님의 통치, 그것이 바로 성탄의 사건입니다.
하늘에 속한 사람들
우리는 비록 이 땅에서 세상의 왕국의 지배를 받고 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는 이 땅의 왕국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의 시민입니다. 우리 주님의 왕국은 국경을 넘어 서서 온 나라에 걸쳐 있습니다. 영국에서 유학할 때 저는 일주일 중 이틀밤을 저희 지역의 홈리스 센터에서 일했었습니다. 그곳은 영국과 루마니아, 잠비아를 비롯한 다양한 나라에서 온 목사님들이 동역하던 곳이었습니다. 첫 출근 날, 홈리스 센터에서 일하시는 목사님들을 처음 만났을 때 그 분들은 저에게 악수를 나누면서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brother”라고 인사했으며, 곧 우리는 반갑게 허그 하였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처음 만났는데, 우리가 어떻게 그렇게 친근하게 만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같은 왕국에 속했으며 같은 왕을 섬김을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교회에서 처음 서로 만났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서로 형제, 자매라고 고백합니다. 이 세상에 이런 왕국은 없습니다. 이 위대하신 왕의 탄생을 축하합시다. 오래전 다윗이 노래한 것처럼,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주의 이름을 송축 하리이다’라고 찬양합시다. 존 스토트 목사님이 말씀하셨듯, 우리가 높이 올려야할 유일한 깃발이 있다면 모든 교회의 왕 되신 그리스도의 폐하의 깃발 뿐입니다. 이 왕국은 모든 지경을 넘어서는 왕국이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불멸의 왕국입니다. 누가는 말합니다. “다윗의 동네에 구주가 나셨다. 그분이 그리스도 예수시라” 위대하신 왕이 탄생하셨습니다. 그 분의 발 앞에 경배하며, 그분의 탄생을 송축합시다.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