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을 깨우침은 앎에서 출발하되 거기 머무는 것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어디에 있는지 뻔히 알면서도 일을 겪은 뒤에야 말씀의 의미를 깨닫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로고스(logos)로서의 말씀은 알되, 레마(rema)로서의 말씀은 철저하게 알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어느 교회에 설교 잘 하는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개척한지 몇 년이 못 되어 백 명을 넘어서더니 이내 출석 오백명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다툼이 생겨 일부가 갈라져 나가고, 그후 서너 번 그런 일이 생겼고 결국 교단을 탈퇴하지만 위아래로 나누어 예배를 드리기까지 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진실되게 열심히 살아도 욥과 같은 고난이 옵니다. 그러나 '내 고난은 욥의 고난, 남의 고난은 요나의 고난'이라고 믿는 열심은 아무리 빨간 등이 켜져도 보지 못합니다. 가룟 유다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 그는 일이 터진 후에야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깨달았고 자살합니다. 그가 정말 기도했으면, 동료들과 의논했으면, 세 번쯤 깊이 생각했으면... 역사의 가정이 의미 없는 일일지라도 우리는 스스로에게 적용해 보면 그런 과정이 중요한 일임을 이내 알게 됩니다.
세상이나 교회나 대개 목소리 큰 어리석은 자의 뜻대로 좌지우지 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지나고나면 알게 됩니다. 말씀대로 행하였는지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열심으로 정말 사십니까? 아니면 본문의 가룟 유다와 같은 열심입니까?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후 11,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