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교회의 시작은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부터 입니다. 성령 강림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에 버금가는 큰 일입니다. 교회는 비로소 성령의 인도하심과 능력으로 비롯되었고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많은 교회가 세상에 있고 법에 따라 인준을 받아 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이 가르치고 있는 여러 모범이 있는데, 오늘 본문 말씀은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저희가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회의 본질은 건물의 평당 가격이나, 재정의 규모에 있지 않습니다. 성도의 본질도 마찬가지입니다. 건강의 정도나 재력, 혹은 학력이나 권력의 힘이 사람을 지탱하거나 축복을 받은 증거가 아닙니다. 물론 신앙대로 사는 사람은 그 삶의 형편이 나아질 것입니다. 건강해질 것입니다.(쓸 데 없는 일을 버리니) 그러나 암 걸려 죽어도, 사업이 부도 나도 예수 잘 믿은 사람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험한 일을 당해도 참된 신자는 해석과 적용, 반응과 결과가 믿음 없는 이와 다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구원과 해방이지, 세속적인 욕망이 아닙니다. 믿음의 본질이지 믿음의 보너스가 아닙니다. 보너스만을 노리는 자는 결코 본질에 다가설 수 없습니다. 교회도 그러합니다. 한 곳에 모일 때 그 교회는 진정한 교회를 이루게 됩니다. 물리적으로는 예배당에 모여 예배드리고 기도하며 나아가 전도하는 일이 그것이요, 목사에게서 어린이에 이르기 까지 오직 주의 영광을 위해 한 마음으로 사역하는 것이 본질을 아는 교회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분규와 다툼으로 영적 사역의 대오에서 벗어나 허덕이는 모습을 보여주는 일은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싸움에는 옳고 그릇됨이 없습니다. 따지고 보면 교리나 방법에서 적절하고 마땅한 생각이 있습니다. 한 마디로 옳은 쪽이 있습니다. 그러나 싸움으로 커지면 결국 옳고 그릇됨의 차원이 아니라 정치 투쟁이나 전쟁이 되고 맙니다. 정치엔 진리가 없습니다. 차선만이 있습니다. 이미 여기까지 오면 사람의 영안은 닫혀버려서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니 말 실수와 타자에게 상처주는 일이 진리라는 명목으로 합리화 됩니다. 물론 아무리 명약관화 한 일에도 '개념 없는' 사람은 꼭 있습니다. 앞서 가는 생각과 프로그램도, 그것이 이른바 잘 나가는 교회에서 30년 전부터 해오는 일일지라도 비난만 합니다. "나도 그거 알아." 그건 아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아는 것은 말이 아니라 실제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설교학 교수 설교 들을 게 없다'는 말은 설교의 이론은 대단하지만 회중의 심령을 쪼개고, 말씀에 빨려드는 감동이 없다는 뜻의 시쳇말입니다. 그래도 설교학 교수는 설교학 이론을 가르칠 자격이 되는데, 한 곳에 모이지 못하는 교회와 리더십은 할 게 없습니다. 교회는 이론의 무대가 아니라 삶의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이론이 좀 약해도 부흥하는 교회 보셨습니까? 많습니다. 그러나 실천력이 떨어지면서 부흥한 교회 보셨습니까? 한 번도 본 적 없습니다.
한 곳에 모이십시오. 주접스럽고 유치한 이론 따위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사람이 보기에 분명한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오직 성령이 인도하시는 데로 가십시오. 내가 있는 곳에 성령이 계신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계신 곳에 당신이 있습니까?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원수도 용서가 되고, 아니 원수는 말고라도 가시는 용서가 됩니까? 아니면 가시 없는 물고기만 드십시오. 고르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한 곳에 모인 주의 자녀는 원수도 없고 가시도 발라 먹을 줄 알게 됩니다. 성령님은 한 곳에 모인 이들을 화해케 하시는 분이시고, 단 한 사람의 성령의 사람이 있기만 하면 그 힘이 생겨납니다. 그 곳이 한 곳에 모인 교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