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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영이가 초등학교 들어간 이후 저는 지영이와 1분 1초까지 계획을 세워 생활했어요. 학교에서 돌아 온 뒤 몇 군데 학원을 차로 이동시키며 저녁밥도 거의 차에서 먹이다시피 했지요. 지영이의 외조부와 아빠가 의사인데, 지영이도 당연히 의사가 되어야 하는 걸로 알고 자랐어요. 지영이는 저희가 시키는 대로 열심히 공부해서 중학교에 들어가서도 늘 평균 97, 98점이었어요. 둘째 아이를 갖지 않으려 했는데, 덜컥 둘째를 갖게 되어 작은 애는 지금 두 돌 지났습니다. 둘째가 어리다보니, 자연히 지영이에게 전처럼 모든 관심을 쏟기는 힘들어, 몸보다 말로 지영이를 감시, 감독했던 것 같아요. 중학 3학년에 올라가기 전 겨울방학 어느 때였어요. 먹은 게 잘못 되었는지 며칠을 토하고 잘 먹지도 못했는데, 마침 작은 딸애도 아파서 지영이한테 신경을 거의 못 썼어요. 그러더니 지영이가 점점 밥도 잘 먹으려 들지 않고 먹으면 토하고, 어느 날부터인가는 저한테 소리 소리 지르고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하지 않나 정신도 이상해지는 거에요. 의사 말씀으로는 몸에는 특별한 이상 소견이 없다는데, 도대체 왜 이러는 건지...그래서 지금 컨디션이 무너지면 입원했다가 좀 나아지면 퇴원하기를 반복하면서 정신과 치료를 병행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
딸과 일거수일투족을 함께 해 왔다는 말씀을 들으니, 간담이 서늘해지면서 지영이의 심신이 얼마나 고되었을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지만, 어머니 나름의 고충도 만만치 않았으리라 싶어 입원해 있는 큰 딸 보살피랴 어린 작은 딸 돌보랴 고생이 많으시겠다며 지영 어머니에게도 깊이 공감해 주었다. 첫 날 상담은 지영이 상황을 파악하는 일로 마무리했다. 입원 상태이니 지영이를 자주 만나는 달라는 어머니 말씀대로, 내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지영이를 자주 만나기로 하고 이틀 뒤 다시 병원에 갔다. 두 번째 날은 조금 컨디션이 좋아져, 지영이와 상당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초등학교 입학 이후 7-8년간을 단거리 경주하듯 달려 온 지영이에게 몸도 마음도 많이 지쳤을 테니, 이제 좀 쉬면서 천천히 가자고 격려해 주었다. 지영이는 눈물을 흘리면서 엄마가 고맙기도 한데, 엄마만 생각하면 뭔지 모르게 화가 치민다, 내가 이러다가 영영 학교로 돌아가지 못하는 건 아닌지 걱정된다고도 했다. 1학기 내내 학교에 가지 못했으니 이번 학년은 휴학이 불가피했는데, 1년을 유예하는 게 영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재수, 삼수도 하는데, 인생에서 1-2년 늦어지는 건 아무 것도 아니다, 진짜 문제는 네가 어떤 일을 하면서 살고 싶은지 찬찬히 살펴 찾아 나가는 일이다. 선생님이랑 그걸 찾아보자”고 제안하자, 지영이는 마음이 놓였는지 자기 이야기를 많이 털어놓았다.
외조부와 아빠가 의사이고, 지영이도 명석한 아이여서 공부로 그 성과를 보여주었으니, 지영이도 의사가 되어야 한다는 부모님과 친지들의 기대는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과연 그게 지영이 본인에게도 ‘당연한’ 바램이었을까. 지영이에게 그 동안 하고 싶었지만 시도해 보지 못했던 일들을 생각해 보라고 했더니, 귀를 뚫어 예쁜 귀걸이를 사 달고 네일아트도 해 보고 싶단다. 병원에 있는 동안 지영이는 휠체어를 타고 밖으로 나가 귀를 뚫고 귀걸이를 사면서 행복해 했다. 지영이도 아직은 자신을 예쁘게 꾸미고 친구들과 어울려 마음껏 놀고 싶어 하는 15살 소녀였다.
5번의 상담이 이루어진 뒤, 많은 양은 아니지만 밥도 조금씩 먹고 일어나 앉아 책도 볼 수 있을 정도로 상태가 호전되어 지영이는 퇴원할 수 있었다. 퇴원 뒤 집으로 몇 번 더 상담을 갔는데, 내가 마지막으로 간 날 지영이는 다시 자리에 누워 있었다. 며칠 전 속이 미식거려 화장실에 가서 토했는데, 어머니로부터 “억지로 개 짓는 소리 좀 내지 말라”는 비난의 말을 들었다며 숨죽여 울었다. 지영이 마음을 달래주고 돌아온 날 저녁,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왔다. 지영이 상태가 악화되어 다시 병원으로 간다며, 이제 상담을 마무리해야 겠다는 것이었다.
지영이는 몸으로 무엇을 말하려 했던 것일까. 원하지 않는 일을 장기간 감당하면서 동반되는 부정적인 느낌이나 생각은 어떤 식으로든 몸에 드러나기 마련이다(정신신체질환). 병원에 있는 동안 어머니는 지영이가 학교를 못 다녀도 의사가 안 되어도 좋으니 건강해지기만 하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나 퇴원하자 기대치가 다시 높아지면서 어머니는 지영에게 더 이상 무너지지 말라고 다그치고 강해지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지영이의 몸은 그것을 바로 알아챘다. 건강해지면 이전과 마찬가지로 엄마의 기대와 잔소리에 휘둘리며, 다람쥐 쳇바퀴 도는 학업 스트레스로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지영이의 몸은 다시 그 생활로 돌아가느니 차라리 자리보전을 하는 게 낫다는 식으로 창의성을 발휘한 것이라 생각된다.
긴 시간동안 엄마에게 의존하여 일체화된 생활을 해 온 지영이가, 어느 날 갑자기 중학 3학년이나 되었으면서 왜 독립적이지 않느냐고 야단을 맞아야 하는 건 부당한 일이다. 그래서 계속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고 머리로는 생각하지만, 몸으로 대응할 힘이 없는 지영이는 병을 선택하기로 엄마에게 함성을 지르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지금까지는 엄마가 자신의 바램대로 지영이를 붙들어 두셨듯이, 이제는 지영이 편에서 엄마를 꼼짝 못하게 괴롭히겠다는 식으로 몸으로 복수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의식하지는 못하지만 이렇듯 우리의 몸은 불건강한 심리상태를 창의적인 방식으로 표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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