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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으로 사라져 가는 6·25
80년대까지만 해도 6·25 기념행사는 전국이 요란한 국가행사였다. YS 때부터 지자체별 또는 지역향군 주관으로 행사가 격하되더니 올해는 겨우 보훈처 주관 중앙행사만 KBS가 실황 중계를 할 뿐, 다른 여타 방송과 신문들은 6·25에 대한 기사 한 줄도 찾아볼 수 없어 호국보훈의 달이라는 말이 무색해진다.
이제 6·25를 아는 20%의 인구(고령자)들과 함께 6·25도 서서히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24년 전 (YS 시절) 시흥시 재향군인회 주관 6·25 기념행사에서 6·25 전황보고를 했던 원고가 있어 올려봅니다.
6·25 전황보고
1. 서론
1) 지난 6월 6일은 노르망디 상륙작전 50주년 기념식이 유럽에서 있었습니다.
그 기념식에 미국을 대표해서 클린턴 대통령이 참석하자 일부 언론에서는 그 작전 당시에 태어나지도 않았던 사람이 그 행사에 참석한다는 건 제격이 아니라고 한 평을 신문지상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6·25 당시 초등학교를 다녔던 참전 후배 세대가 이렇게 6·25 전황보고를 드리게 되어 역시 제격이 아닌 것 같아 참전 원로님 앞에 송구스러운 생각이 앞섭니다.
2) 근세사를 돌아볼 때 3·1 운동을 겪은 세대는 후배세대에게 그 진상을 자세히 알려주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과, 후배세대는 그 정신을 이어받고 승계했어야 할 역사적 사명을 등한시했다는 점을 상기해봅니다.
6·25 전쟁 역시 그런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되겠다는 충정에서 그날에 피 흘려 싸운 참전세대가 건재하고 있을 때 후배세대가 그날의 분노와 울분과 감격까지도 승계해야겠다는 생각에, 이렇게 전후세대가 6·25 전황보고를 드리게 되었다는 점을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3) 6·25 얘기는 6·25가 발발하게 된 배경부터 시작하는 것이 순서겠습니다만, 시간관계상 또 배경 문제는 이미 역사 자료에서 익히 알고 계시는 사항이기 때문에 생략하고 6·25 발발시점부터 휴전까지 한반도에서 전쟁이 진행된 전반적인 상황을 정리해서 보고드리겠습니다.
2. 본론
1) 1950년 6·25 일요일 새벽 북괴는 20만 병력으로 T34 전차 240여 대를 앞세우고 주공을 동두천-의정부-서울 방향으로, 조공을 화천-춘천-원주, 태백산맥, 동해안으로 전면 기습남침을 감행합니다.
2) 당시 38선을 연해 수 킬로미터마다 초소 1개씩을 운영하고 있던 아군은 소련의 현대식 무기로 무장된 적 앞에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었습니다. 38선은 그대로 무너지면서 6월 28일은 서울이 함락됩니다. 7월 1일 아군은 전력을 집결시켜 수원방어선에서 적과 일전을 벌였으나 수원성도 금방 무너져버렸습니다.
3) 이승만 대통령이 트루만 대통령에게 긴급 지원 요청 / 6월 26, 27일 UN 안보리 1, 2차 회의 소집: 천만다행으로 안보리 소련 대표의 불참으로 거부권 없이 세계가 한국을 지원할 것을 결의하고 당시 동경에 있던 맥아더 장군을 UN군 사령관으로 임명, 한국으로 보냅니다.
4) 6월 27일 한국에 날아온 맥아더는 3일간 전황을 살피면서 한반도에서 어떻게 작전을 할지 전략을 구상합니다. 먼저 가장 가까이 있는 미 24사와 25사를 투입시켜 적의 전진을 지연시키면서 방어에 유리한 지형에서 결정적인 방어를 하다가 원군이 도착 시 상륙작전으로 적의 허리를 자르겠다는 계획을 세웁니다.
6) 7월 5일 24사 예하 1개 대대를 오산에 공수, 낙하시킵니다. 날아온 1개 대대는 북괴군을 무장 게릴라 정도로 보고 대응하다가 오산 전투에서 전멸당합니다.
7) 뒤이어 24 사 본대를 평택에 투입시켜 적을 저지해보았으나 전차를 앞세운 막강한 적 앞에 후퇴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고 7월 20일 대전이 함락됩니다. 대전을 먹은 적은 영호남 지역으로 양분해 압력을 가하며 남진합니다.
8) 호남지역으로 진출한 적은 7월 23일 광주를 유린하게 되고 동쪽으로 진격해오는 적은 8월 초에는 낙동강선까지 도달합니다. 아군은 방어에 가장 유리한 낙동강 방어선을 선정하고 이 방어선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입니다.
9) 이때 아군의 배치상황은 대구를 중심으로 동쪽은 한국군 5개 사단이, 서남쪽으로는 미 24사가 방어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미 24사는 막대한 손실을 입은 관계로 상주에 나가 있던 미 25사단을 뽑아서 거창, 함안 일대에 투입시켜 서측방을 보강했는데, 25사가 이동하며 방어진지 구축을 완료한 바로 그 시간에 호남지역을 휩쓸고 부산을 향해 돌진하던 적이 눈앞에 도달했다고 하니 당시 낙동강 서측방 상황도 얼마나 아슬아슬한 상황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10) 낙동강 방어전투에서 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은 “우리는 지금 시간과 싸우고 있다. 적이 먼저 부산에 도착하느냐, 원군이 먼저 도착하느냐! 이것이 생사의 관건이다” 하면서 현 위치 사수를 강조했고 모든 전투원들 또한 결사항전하는 가운데, 세계의 이목이 한반도 동남방에 쏠리고 있었습니다.
11) 8월 중순부터 속속 원군이 도착하기 시작합니다. 미 해병1사단, 미2사, 미7사, 1기병사단이 도착하자 맥아더는 새로운 전투 편성과 인천상륙작전 명령을 하달합니다.
* 인천상륙작전 - 해병 1사, 미7사, 한국군 일부(해병연대 17연대) 배치
* 낙동강 방어선이 취약한 서부지역 - 미 1기병사, 미2사를 투입
12) 9월 15일 야간상륙작전을 개시, 9월 16일 아침 인천상륙을 완료합니다.
이제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아군의 사기는 충천합니다. 8월 초부터 9월 15일까지 45일간의 낙동강 방어 전투야말로 나라의 운명을 좌우했던 전투였습니다. 희생도 컸지만 값진 전투였다는 것을 온 국민은 물론 세계가 공감했습니다.
13) 이제 허리가 잘린 적은 퇴각하기 시작합니다. 퇴각 시 양민 학살, 방화, 납치 등 온갖 만행을 저질렀으며 그들 중 3만여 명이 지리산, 태백산, 오대산 등지에 은거, 잔류하면서 후방 교란과 게릴라 활동에 들어갑니다.
14) 한편 인천상륙에 이어 북진하는 아군은 9·28 서울수복 여세를 몰아 동해안으로 북진하는 한국군 1군단이 10월 1일을 기해 38선을 돌파합니다.
15) 38선을 돌파한 아군은 불과 10여 일 만에 평양-원산선까지 진출하게 되자, 인천상륙에 투입되었던 미 1해병사와 7사를 동해안으로 다시 이동, 원산과 함흥 이원 에 각각 상륙시킵니다.
16) 10월 24일까지는 적과 접촉선이 청천강-함흥선까지 진출해 앞다투어 한만국경선을 향해 진격을 계속합니다. 이때 아군 규모는 미군 7개 사단, 한국군 8개 사단, 영국군 1개 여단이 이 지역에 투입되었습니다. 이제 전쟁이 마무리되나 싶어 부산으로 내려왔던 피난민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상경합니다.
17) 10월 24일 청천강을 도하할 때까지도 보이지 않던 중공군이 10월 25일 갑자기 나타납니다. 예기치 못한 6만 규모의 적과 조우하게 되자 아군은 다시 청천강을 건너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8) 유엔군은 적의 규모를 대수롭지 않게 보고 다시 전열을 가다듬어 공격을 재개하고 11월 24일까지는 아군 일부는 압록강까지 진출, 동쪽은 청진까지 진출했으나 11월 25일 또다시 약 30만으로 추산되는 대규모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파도같이 밀려내려옵니다.
19) 나중에 알게 된 일입니다만, 중공군이 1차 공세 후 철수한 것은 그들의 본대가 다 도착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북괴군이 쫓기게 되자 중공군의 선발대로 도착한 병력으로 우선 아군의 북진을 막아주고 다시 완전한 공격 준비 태세를 갖춘 후 본격적인 공격을 감행한 것입니다.
20) 이제 아군은 후퇴에 후퇴를 거듭할 수밖에 없습니다. 12월 15일까지는 개성, 연천, 인제, 간성 선까지 후퇴해야 했는데, 무엇보다 위급한 상황은 내륙지역 후퇴보다 동북부 함경도로 진출했던 미군과 한국군 5개 사단이 후퇴를 못하고 흥남지역까지 포위망이 좁혀져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 12월 중순 38선에서 중공군의 진격이 잠시 중지되자 UN군은 중공군 개입 목적이 38선 회복에 있는 것으로 오판합니다.
21) 1951년 1월 1일을 기해 또다시 대규모 병력으로 서울을 공략하고 동쪽은 태백산 깊숙이 침투해 내려옵니다. 서부지역은 수원북방, 중부는 홍천까지 내려온 상태에서 흥남지역에 갇혀 있는 아군은 그대로였습니다.
22) 1월 4일 해군과 공군의 소나기 같은 폭격과 엄호 하에 배라는 배는 총동원되어 극적인 철수작전을 폅니다. 이것이 바로 1·4 후퇴 흥남철수작전입니다.
* 좁은 흥남부두에 군민 약 20만 인파가 영하 20가 넘는 눈보라를 맞으며 아비규환을 이룬 그 참상을 이루 다 형언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배에 태운 군인은 삼척에, 민간인은 영일만과 부산에 하선시켜 위기의 흥남철수작전을 완성합니다. 중공군에게 3차에 걸쳐 기습공격을 받은 UN군은 1월 24일 평택-단양-삼척 선에서 전선의 요철을 정리해서 반격 준비를 합니다.
23) 3월 15일 다시 서울을 탈환해 3월 16일 홍천, 3월 23일 문산을 차단해 서울에게 퇴각하는 적을 섬멸합니다.
* (당시 사단상황일지에 1일 야포 1문당 600발, 공중공격 39회로 기록), 4월 16일 화천까지 진격합니다.
24) 4월 11일 맥아더가 극적으로 해임됩니다. 잘 아시다시피 그는 끝없이 넘어오는 중공군을 보고 한만국경을 가격해 대규모 상륙작전으로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한반도에 들어온 적은 무자비한 공격으로 섬멸하겠다는 계획으로 UN군 증원을 요청했습니다. 미 행정부의 전쟁 조기 종결 의지와는 상반된 주장을 하다가 맥아더는 해임되고 후임으로리지웨이 장군이 부임합니다. 그의 해임은 당시 우리 온 국민이 애석하고 유감스럽게 생각했던 기억이 있을 줄 압니다.
25) 이제 한참 쫓기던 적은 4월 하순에 다시 대규모 공세를 해옵니다. 9일간의 공세로 서울을 공략하더니 5월 중순 다시 7일간의 2차 공세로 홍천, 강릉까지 진출합니다.
26) 이때부터 이 전쟁은 도저히 끝을 낼 수 없는 전쟁이라고 판단, 5월 16일 미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침략자를 38선 이북으로 격퇴하고 휴전 협정을 체결하라는 결정을 내리자 이로부터 휴전 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합니다.
* 1951. 6. 23. 소련 UN 안보리 대표 말리크가 최초 휴전 제의
1951. 7.1. 북경 방종 휴전 제의
1951. 7.10. 개성 1차 회담 후 판문점으로 장소 이동 수차례 중단과 재개를 거듭하다가 당시 적과 접촉선을 휴전선으로 결정 합의
1953.7.27. 미국의 클라크, 중공의 팽덕회, 북한의 김일성의 서명으로 3년 1개월간의 전쟁은 일단 휴전
* 당시 휴전을 원하는 쌍방의 입장
미국 내 전쟁 조기 종식 여론
- 완전한 승리를 위해 중국 대륙에 진출하면 중국은 체면상 전쟁을 중지하지 않을 것이며, 중일 전쟁 재판이 초래되고 소련의 개입이 예상됨.
- 이 전쟁에서 완전한 승리는 불가능하다.
- 시간과 공간적으로 끝없는 전쟁에 미국의 힘을 소모하는 것은 소련이 원하는 바로, 세계 세력 균형이 붕괴될 위험이 있다.
중공(추정)
- UN군을 격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반도 산악지형을 이용해 방어를 지속할 수는 있으나 희생이 막대하다.
- 건국 후 1년 반에 불과한 현시점에서 직접적인 국가 이익이 되지 않는 곳에 힘을 소비하면 국내 혁명이 실패할 위험이 있다.
- 미국 내 강경파 주장으로 확전론으로 기울면 전면 전쟁의 위험(중국 본토 공격, 국부군 상륙 우려)
- 소련 원조 불투명
- 현재 상황에서 체면 유지 정도에서 휴전이 상책
이 전쟁으로 인한 피해상황을 살펴보면
사망: 국군 15만, 미군 5만, 민간 40만
부상: 국군 72만, 미군 11만
실종: 군국 8만, 민간 36만
전쟁고아, 미망인: 20만
50개 도시, 5400개 촌락 파괴
국가 주요시설, 건물: 28,000여 동 파괴
(* 인민군, 중공군 미확인)
3. 결론
1) 이 전쟁을 회고하면서 다시는 이 땅에 동족상잔의 전쟁은 없어야겠다는 생각에는 모두가 공감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 국민의 70%는 6·25를 모르는 세대입니다. 그들 중 물론 극소수입니다만 6·25를 남침이 아니라 북침이라고 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김일성이 명분 있는 전쟁을 했지만 이승만은 그것도 아닌 전쟁으로 수많은 희생만 가져왔다는 자도 있습니다.
정말 그날에 소금 뿌린 주먹밥 한 덩이를 먹어가며 싸우다 숨져간 호국영령 앞에 무슨 말을 해야 합니까?
2) 이제 김영삼, 김일성 남북정상회담 이야기가 나오니 모든 것이 다 해결된 듯 착각하는 이들을 향해 끝으로 한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그들의 궁극적 목표는 적화통일이고 그 목표를 포기한다는 징후는 아직 없으며, 북한 공산당의 속성은 타율적 강제 없이 스스로 핵무기 생산을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제는 핵무기 생산을 중단하겠다고 미국을 향해 공언했다지만 그들이 어디 약속을 지키는 걸 봤습니까?
3) 그들은 국제적으로 궁지에 몰릴 때마다 영향력 있는 전직 정치인, 무슨 전략문제 연구소장, 유명 성직자들을 끌어들여 약속 아닌 약속을 하면서 결과적으로는 알고도 또 속게 만드는 수법을 쓰는 것을 수차례 보아왔습니다.
4) 그들의 시간 벌기 전법에 또 말려드는 작금의 상황을 우리는 직시해야 합니다.
5) 우리가 보기에는 우습고 유치하게 보일지라도 그들의 궁극 목표는 아직도 적화통일이라는 것만 분명히 다시 한번 인식하자는 말씀을 드리며 6월에 숨져간 호국영령의 명복을 다시 한번 빌면서 6·25 전황보고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