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터넷에서 검색하다가 좋은글을 읽고 하나 올립니다
한국연구재단의 학문 관리와 학문의 몰락
학문이 개인이나 학문연구자들의 집합체인 개별 대학의 문제라고만 규정한다면 학문 연구 문제에 대해 한국연구재단과 같은 국가 기관이 개입하거나 지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헌법 22조에는 ‘모든 국민은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가진다’라고 하여 학문이 국가 구성의 근본임을 명시하고 있다. 또한 학문 탐구의 장인 대학을 규정한 고등교육법 제28조는 대학의 목적으로 “대학은 인격을 도야하고, 국가와 인류사회의 발전에 필요한 학술의 심오한 이론과 그 응용방법을 교수·연구하며, 국가와 인류사회에 공헌함을 목적으로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국가의 학문 진흥 정책의 책임을 맡고 있는 한국연구재단에 대하여 한국연구재단법은 이 재단의 목적을 규정한 1조에서 “이 법은 한국연구재단을 설립하여 학술 및 연구개발 활동과 관련 인력의 양성 및 활용 등을 보다 효율적이고 공정하게 지원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라고 한다. 학문에 대하여 헌법과 법률이 이렇게 규정하고 있는 것은 국가, 구체적으로는 국가를 대표하는 정부가 학문을 진흥시킬 책임을--학문의 ‘관리’가 아니라 ‘진흥’임을 주목하자—갖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현재 학문 진흥의 책임을 지고 있는 한국연구재단이 하고 있는 일을 살펴보면 학문의 ‘진흥’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현재 한국연구재단은 학문의 진흥이 아니라 학문의 몰락, 더 나아가 지식 세계의 몰락의 길로 학문 연구자들을 몰아가고 있다.
1. 국가, 대학, 그리고 학문
한국연구재단법 1조에 나와 있는 “학술 및 연구개발 활동”은 대학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삼성경제연구소와 같이 기업이 설립한 연구기관도 학술활동을 한다. 또한 한국개발연구원같은 정부출연 기관도 정부의 정책을 연구하는 학술활동을 한다. 그러나 삼성경제연구소와 같은 기업연구소나 한국개발연구원같은 정부출연 연구기관에서는 특정 목적을 위한 학문 활동이 이루어진다. 기업연구소는 기업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한 연구를 하고 정부출연 연구기관은 정부의 정책을 위한 연구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들 연구기관은 미리 정해진 목적 없이 학문 활동을 하는 조직인 대학과는 구별된다. 기업연구소가 국책 연구기관이 학술활동을 한다고 하여 한국연구재단이 이들 연구소나 연구기관을 지원할 필요는 없다. 이들은 헌법과 고등교육법이 규정하고 있는 자유롭고 심오한 학술활동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 연구 활동을 하기 때문이다. 한국연구재단이 지원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학문은 대학에서 이루어지는 학문이다. 한국연구재단이 대학과 직간접으로 연관된 학술 연구자들의 학문 작업을 지원해야 하는 이유는 대학이 국가의 존립 근거를 제공하는 교육과 연구 활동을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국가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데서 확인할 수 있는 국민으로 구성된, 영어의 the nation-state에 해당하는, 국민국가(미주1)를 뜻한다.
국가의 학문 지원 의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학문 활동의 대표 조직인 대학, 대학에서 이루어지는 학문의 속성, 그리고 대학과 국가와의 관계를 역사적인 관점에서 잠깐이라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학자들의 공동체란 뜻을 갖는 대학(university)은 11세기 경 이탈리아의 볼로냐에서 시작되었지만 학문 탐구의 장이라는 현대적 의미의 대학은 19세기 초 독일에서 시작된다. 현대 대학이 연구 중심 대학으로 변하게 된 것은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의 “학부간의 논쟁”이라는 글에서 대학은 신학, 법학, 의학과 같은 실용학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과 세계에 대한 근본적인 지식을 탐구하는 기초학문이 대학의 근본이 되어야한다고 주장하면서 그 계기가 마련된다. 이런 칸트의 대학에 관한 성찰에 근거하여 1815년에 독일(당시는 프로이센)에서 교육부 장관 역할을 하던 철학자 훔볼트가 베를린 대학을 세운다. 베를린 대학의 근본 원칙은 교육과 연구의 자유였다. 학문의 자유를 완벽하게 보장함으로써 학문의 발전을 이룬다는 베를린 대학의 모델은 그 자체로 대단한 학문적 성과를 이루고 있었다. 베를린 대학의 학문적 성과는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게 된다. 우선은 미국에서 베를린 대학을 본받아 미국 최초의 연구중심 대학인 존스 홉킨스 대학이 생겼으며 그 후 시카고 대학 나아가 이제 미국의 대부분의 종합대가 베를린 대학식의 연구중심 대학이 되었던 것이다.
국가와 대학 간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왜 당시의 독일 정부가 학문의 자유를 근본 원칙으로 삼는 대학을 세우려고 하였는지를 이해하여야 한다. 베를린 대학이 세워지던 당시의 유럽은 국가 체제의 관점에서 볼 때 왕권국가에서 벗어나서 국민국가(정확하게 말한다면 민족국가)가 대세를 이루던 시절이었다. 1789년에 절대 왕권을 무너뜨리고 세계 최초의 국민국가를 성취한 프랑스에서 국가는 곧 국민의 뜻의 총합으로서의 국가였다. 국가가 먼저 있고 그 국가의 통치 대상으로서의 국민이 아니라 국민이 먼저 있고 국민의 뜻에 따라 국가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규정된 국민국가로서의 대한민국은 곧 프랑스 혁명을 통하여 형성된 현대의 국민국가의 모델을 대한민국도 채택하고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바람직한 국민국가를 이루려면 바람직한 국민이 먼저 있어야 한다는 것이 국민국가의 구성 원리이다. 이런 이유로 국가를 대표하는 정부는 지적으로 성숙한 판단력을 발휘할 수 있는 국민을 양성하기 위하여 국민에게 교육을 시킨다. 국민국가 체제에서 대학은 최고 정점에 있는 교육과 학문 탐구 기구이다. 더 성숙한 국가, 더 발전하는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대학이 더 성숙하고 끊임없이 발전하여야 한다는 것이 국민국가 체제에서의 대학의 이념이며 이를 베를린 대학은 실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학의 이념은 이상적 국민을 양성하는 것이고 따라서 대학은 국민국가의 초석을 쌓는 일이 된다. 결국 대학의 학문은 국가가 원하는 것이고 국가를 위한 것이다.
2. 학문의 발전과 국가의 학문 지원 정책
국어사전에는 학문(學問)의 뜻을 ‘어떤 분야를 체계적으로 배워서 익히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학문은 배우고 익히는 것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학문은 원래 <논어>의 구절인 “博學而篤志, 切問而近思, 仁在其中矣”(널리 배우고 뜻을 굳게 하며, 절실하게 물으면서 가까운 것에서부터 생각해 나가면, 인(仁)이 그 가운데 있으리라)에서 따온 말이다. 즉 ‘널리 배우고 절실하게 물음’이 학문의 원래 뜻이다. 이런 의미의 학문이 베를린대학을 시발로 형성된 현대의 대학에서 이루어지는 학문이다. 학문은 배움에 근거하면서도 모든 것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이 말은 곧 학문 연구자가 기존의 지식 체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면서 도전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학문 활동을 하지 않는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미셀 푸코는 「담론의 질서」라는 글에서 담론의 작동방식을 논의하면서 담론이 전문가 집단에 의하여 그들의 전문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담론을 전유하고 기존의 담론의 장을 유지하려 할 때 담론은 고갈되어 버릴 위험이 있다고 진단한 바 있다. 담론이란 말을 학문이란 말로 바꾸면 푸코는 결국 학문이 계속 발전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새로운 분야를 탐구하고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 내며 기존 지식 체계를 변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셈이다.
한국연구재단의 설립 목적인 학문 지원의 뜻은 학문의 원칙인 자유를 보장하면서 물적 지원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학문 지원의 원칙은 ‘지원은 하되 간섭하지 아니 한다’는 것이어야 한다. 학문 활동에 어떤 식으로든 간섭하고 관리하려 들면 학문의 자유가 위축되며 학문의 자유가 위축될 때 학문의 발전은 위협받기 때문이다.
국가의 학문 활동 지원은 지적으로 성숙한 국민을 형성함으로써 더 나은 국민국가를 이루기 위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국가의 학문 활동 지원은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국민을 위한 학문 활동을 지원하는 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정 집단의 이익을 구현하려는 학문 지원은 제한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경영학이나 공학 같은 기업의 이익을 실현하는 학문 활동은 국가가 굳이 지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 분야는 국가가 지원을 하지 않더라도 기업을 위한 제품 개발과 기업 경영 전략 구축 필요성 때문에 기업이 지원하게 되어 있다. 국가의 학문 활동 지원은 특수 집단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말하자면 국가의 학문 지원은 기본학문인 인문학, 자연과학, 기반 사회과학(사회학, 정치학 등) 분야에 대한 지원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3. 학문을 고갈시키는 한국연구재단의 학문 관리
한국연구재단은 2009년 기존의 한국과학재단, 국제과학기술협력재단, 그리고 한국학술진흥재단이 통합되어 생긴 학문지원 정부기관이다. 한국연구재단 측은 자신들의 사업이 ‘창의연구 지원’과 ‘연구인재 양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연구재단이 하고 있는 일을 살펴보면 크게 보아 연구지원과 연구관리가 주 업무라고 할 수 있다. 연구지원 분야를 본다면 학술연구의 모든 분야가 원칙적으로 지원 대상이 될 수 있지만 원천기술개발사업지원이나 원자력기술개발사업지원과 같은 사업 분야 목록에서 확인되듯이 한국연구재단의 연구 지원 사업은 이공분야의 연구에 치중되어 있고 또 실용적 목적을 위한 연구에 치중되어 있다. 연구관리 분야는 학술지 관리로 대표된다. 겉으로 보기에는 연구지원과 연구관리가 분리되어 있는 것 같지만 사실 연구 지원과 연구 관리는 상호 의존적이다. 물론 재정이나 업무의 규모로 본다면 연구지원이 연구관리 분야 보다는 훨씬 크다. 그러나 연구 지원이 연구관리 대상이 되는 학술논문 업적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학술 관리가 한국연구재단의 사업에서 더 근본이 되는 사업이라 할 수 있다. 한국연구재단의 학술 관리는 학술활동이 학술지에 실리는 논문으로 가시화되기 때문에 학술지 관리로 대표된다.
학술지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학문 진흥책이라고 인정할 수 있다면 1998년부터 지금까지 진행되고 있는 한국학술진흥재단 그리고 그 후 한국연구재단의 학술지 관리 체제 구축의 성과는 성공적이었다. 한국연구재단이 인정하는 학술지의 수는 비약적으로 늘었으며 또 한국연구재단의 관점에서 볼 때 학술지 자체의 질적 관리 노력 역시 상당하다.
그러나 한국연구재단의 학술지 관리는 학문을 위축시키는 관리 체제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이는 학문이 그 속성상 관리가 강화될수록 위축되고 고갈되기 때문이다. 앞에서 미셀 푸코의 학문 고갈 과정을 언급할 때 적용된 방식이 한국연구재단의 학술지 관리 방식에 그대로 나타난다. 한국연구재단이 학술지 관리 방식은 크게 보아 첫째 학문 활동 주체의 관리, 둘째 학문 분야의 관리, 셋째 학문 논의의 장의 관리로 나타난다. 이러한 관리 방식은 사실상 학문 활동을 제한함으로써 학문을 위축시킨다.
한국연구재단의 학술지 관리 체제는 해당 분야의 비전문가를 학술 논의에서 배제하면서 시작된다. 사실 학문의 변화와 발전은 특정 학문 분야의 기존 지식 체제에 의문을 제기하고 도전함으로써 이런 지식 체제를 변화시킬 때 이루어진다. 이런 도전은 해당 학문 분야의 비전문가에 의해 주로 이루어진다. 한국연구재단의 학술지 관리 체제는 이런 비전문가의 학문적 논의가 인정받을 수 없는 구조이다. 한국연구재단에서 인정하는 학술지는 해당 분야의 전문가라고 인정된 사람들의 모임인 학술연구자 단체 또는 학술연구소에서 간행하는 학술지를 말하기 때문이다. 해당 분야에서 의미 있는 학술 논문을 쓸 수 있는 연구자라 하더라도 기존의 학회 구성원의 인정을 받지 못하면 그 학회의 회원이 될 수 없으며 그런 학회지에 논문을 투고할 자격도 없어진다. 이런 체제에서 해당 전문 분야의 지식 체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학문 연구자는 기본적으로 해당 분야에서 배제된다.
또한 한국연구재단의 학술지 관리 체계는 학문 분야를 나누어 관리하는 방식을 취함으로써 학문을 위축시킨다. 한국연구재단에서 관리 대상이 되는 학술지는 인문, 자연, 공학, 사회 등의 분야로 나누어져 있고 인문계는 다신 문학 철학 등으로 문학은 다시 국문학 영문학 등으로 나누어져 있고 국문학은 다시 고전문학 현대문학으로 다시 현대문학은 시 소설 드라마로 나누어진다. 이런 분류된 학문 분야 중 어디에 속하기 어려운 학술적 논의는 학술 논문으로 인정받기 어렵다. 예를 들어 특정 학문 분야로 귀속되기를 거부한다고 할 수 있는 문화연구 영역을 고려해 본다면 이 영역이 기존의 학문 분야에 귀속되거나 신설된 학문 분야로 인정받을 때에만 학문의 장으로 인정된다. 어느 분야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모든 분야의 학문 체제를 흔들겠다는 태도를 유지하는 한 문화연구 영역은 한국연구재단의 관점으로는 학문의 위상을 가질 수 없다.
셋째 한국연구재단의 학술지 관리 체계는 학술 논의의 장을 안과 밖으로 구분하여 밖에 있는 학술 논의의 장을 배제함으로써 학문을 위축시킨다. 한국연구재단에서 인정하는 학문적 논의는 등재(등재후보 포함) 학술지에 실린 논문이다. 아직 등재지가 되지 못한 학술지에 실린 학문적 논의도 의미 있는 논문으로 인정되지 않고 또 소위 ‘비학술지’에 실린 논문도 의미 있는 논문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학술지와 구분되는 비학술지는 대개 창작과비평, 문화/과학 등 대중이 독자로서 참여할 수 있는 대중적 학술지를 말한다. 한국연구재단의 학술지 관리 체제에서 비학술지나 비등재 학술지에 실린 논문은 학술 논문의 질이나 내용과는 관계없이 의미 있는 논문이라고 인정되지 않는다. 이렇게 학문의 논의의 장을 제한하는 관리 체제 역시 학문의 발전을 위축시킨다.
4. 대학의 몰락
한국연구재단의 학문관리 체제는 대학의 학문을 직접 지배한다. 각 대학에서 일반화된 성과중심의 경쟁적 교수업적 평가 체제는 교수들로 하여금 한국연구재단이 인정하는 방식으로만 학문 활동을 하도록 유도한다. 업적 평가에서 점수가 안 되는 학문 활동은 무의미한 학문 활동으로 치부된다. 교수들은 점수를 얻을 수 없는 대중적 학술지나 신문에 기고하지 않으려 하고 심지어 점수가 덜 되는 저술활동도 하지 않으려 한다. 최근에 한국연구재단이 등재학술지 제도를 없애겠다고 한 것은 이러한 상황을 노골적으로 악화시키겠다는 선언과 같다. 등재학술지를 없애겠다는 것은 모든 학술활동을 인정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한국연구재단의 관리체제 아래에서 선별된 극소수의 학술지만을 학문 활동의 장으로 인정하겠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국연구재단의 학문관리 방식은 크게 보아 두 가지 결과를 낳는다. 하나는 대학의 학문과 대중적 지식의 괴리이며 다른 하나는 대학의 학문연구자인 교수들의 국가 및 사회 지도력의 상실이다.
대학의 학문 연구자인 교수들은 이제 읽지도 않고 읽히지도 않는 논문을 쓰고 있다. 교수들은 대중들이 접근할 수 없는 학술지에서만 학문 활동을 하기에 대중적 파급력이 거의 없는 학문을 하고 있다. 4명(논문저술자 자신과 심사위원 3명)만이 읽는 논문을 쓰고 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듯이 교수들은 읽히지 않는 논문을 쓰고 있다. 또한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인 논문심사자의 심사를 통과하기 위하여 논문을 쓰기에 이제 대학 교수들이 쓰는 논문은 더욱 현학적이고 더욱 전문적이 되어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라면 읽히기 어려운 논문을 쓴다. 현재 대중의 지식과 대학의 학문은 극단적으로 분리되어 있다. 대중들은 네이버지식인(in)과 같이 극히 피상적인 지식을 제공하는 인터넷 사이트에서 지식(지식이라기보다는 정보)을 얻는다. 대중이 정보를 지식으로 착각할 때 이들은 특정 목적을 가진 정보에 휘둘린다. 이런 상황에서 학문을 통한 지식의 구축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인간과 인간을 둘러싼 세계에 대한 이해와 그리고 삶과 세계에 대한 비판적 성찰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대중을 일깨우고 이들을 이끌어가는 지식인으로서의 대학교수는 거의 소멸되었다.
한국연구재단의 학문 관리 체제 그리고 이 체제를 거의 그대로 수용하는 각 대학의 교수 관리 체제 아래에서 대학 교수들은 성과로 인정되지 않는 일을 하지 않으려 한다. 교수들은 공적 지식인으로서의 역할을 할 여유가 없다. 교수들은 고등교육법이 규정하고 있는 대학의 설립 목적, 즉 “국가와 인류사회의 발전”에 부합할 만한 일을 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교수들에 대한 억압적 관리 체제가 도입되기 전에 교수들은 사회적 권위를 가지고 있었고 또 국가나 사회의 정책 입안과 집행에 참여하면서 그들의 학문적 성과를 현실화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과거에는 대학이 국가와 사회의 두뇌집단(think tank)의 역할을 하고 있었으며 이에 따라 교수들이 정부의 각료로 참여하는 것도 흔한 일이었다. 현재도 대학 교수들의 정부 기구 참여가 이루어지고는 있으나 과거에 비한다면 현저히 줄어들었다.
대학의 학문 연구자들이 정부 정책의 입안자나 집행자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현재 그 자리는 기업 집단이 장악하고 있다. 기업인이 정부의 각료가 되는 것은 흔한 일이다. 가장 심각한 것은 기업연구소의 정부 정책에 미치는 영향력이다. 예를 들어 삼성경제연구소는 기본적으로 기업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한 기업연구소이다. 그러나 현재 삼성경제연구소를 기업연구를 넘어 국가정책연구소가 되어있다. 삼성경제연구소는 100명이 넘는 박사급 연구 인력을 갖춘 두뇌집단이다. 삼성경제연구소의 연구원은 대부분 경제, 경영학 분야의 박사학위를 소지하고 있다. 한국의 어느 대학도 규모와 전문성에 있어 이 정도의 인력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이 규모와 조직력은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개발원을 훨씬 능가한다. 삼성경제연구소는 기업 연구뿐만 아니라 재정, 조세, 통일, 교육, 문화, 에너지 분야의 연구를 하고 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사회와 정부에 전달한다. 삼성경제연구소가 수립한 정책은 정부의 정책으로 수용되고 집행되어 한구 사회를 만들어 가고 있다. 심지어 진보를 표방했던 노무현 정부에서도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각료가 삼성경제연구소에서 국가의 경제정책에 대한 연수를 받으면서 정부 정책을 수립하고 있었다. 현재 한국사회에서는 삼성경제연구소뿐 아니라 LG경제연구원, 현대경제연구원 등 기업연구소가 정부정책을 수립하고 있는 실정이다. 기업연구소가 정부정책을 수립하고 정부가 이를 집행할 때 정부 정책은 국민을 위한 정책이 아니라 기업과 자본을 위한 정책이 된다. 기업연구소가 발행한 연구보고서는 책자로 발행되어 대중에게 전파되면서 대중에게도 영향력을 행사한다. 대학의 학문 연구자들이 한국연구재단과 대학 본부의 관리 체제 아래 대중적 영향력도 없고 국가와 사회에 대한 영향력도 없는 연구를 진행할 때 대중의 의식과 정부의 정책은 기업 자본에 의해 지배받게 된다는 것이다.
5. 맺는말
한국연구재단은 학문을 관리하기 위한 정부기구가 아니라 학문을 진흥시킬 책임이 있는 정부기구이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의 학문은 한국연구재단학문의 학문 관리 체제, 기업식 관리 체제가 구축된 대학의 교수 관리 체제에 의해 위기를 맞고 있다. 더구나 학문의 자유를 보장해야 하는 국가 체제를 기업 자본이 장악함으로써 상황은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학문이 고갈되고 대학의 학자인 교수들이 수행하여야 할 공적 지식인의 역할이 소멸될 때 그 사회의 미래는 없다. 해결책이 보이지는 않는다.
미주1.
필자가 이 글에서 대한민국 헌법을 인용하고 있기 영어의 the nation-state를 ‘국민국가’라고 표기하고 있지만 엄밀하게 말해 이 말에 해당하는 한국어는 ‘민족국가’이다. the nation-state란 특정 지역의 사람들 전체를 뜻하는 민족에 총의에 의하여 구축된 국가를 뜻하기 때문이다. 국민이란 말을 따져 보면 국민은 국가가 형성된 이후 그 국가에 속한 사람들임을 알 수 있다. 국민국가라는 말은 국가가 먼저 있고 그 국가에 의해 구성된 국민이 다시 국가를 구축한다는 뜻이 되어 버리기 때문에 형용 모순을 일으키는 용어이다. 그러나 ‘국민국가’라는 말이 현재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이 글이 인용하고 있는 헌법이 ‘국민’이란 말을 쓰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국민국가라는 용어를 쓰겠다.
[출처] 한국연구재단의 학문관리와 학문의 몰락|작성자 고부응
첫댓글 스,포,츠,토,토 프~로~토 온ㄹㅏ인ㅂㅔ팅
K U S 8 5 5 . 콤 (추.천.인1234)
회,원,가,입,시 3000원,지,급, 매.일 첫.충.전5%추/가/지/급.
올킬,올다이,이벤트중입니다. 단/폴(50)~모/바/일/가/능
365일 연/중/무/휴 24시간(해/외운/영) 온라인 고/객서/비스!
믿/음과 신/뢰는 MUSIC의 전/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