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년 2월6일 아침, 일본의 사세보항에서 연합함대 사령관 도고 헤이치로 중장은 함대에게 출전을 명령한다.
"전 함대는 요동반도의 여순항에 정박중인 러시아 함대를 공격하되 우리우 소장의 제 4함대는 제물포로 진입하여 러시아 군함 "바략" 과 "카레예츠"를 격파하고 육군을 제물포에 상륙시켜라."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나는 이 전쟁, 우리땅에서, 우리나라를 먹거리로 놓고 싸우는 전쟁임에도 당사자인 우리가 철저히 무시되고 소외된 이 역사적 사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러일전쟁을 "제물포 전투" 로 국한하여 가급적 민족적 관점을 배제하고 거기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하는 사실관계만을 돌이켜보고자 시도했습니다.
1883년에 제물포항이 개항되자 이 조그만 포구는 급격히 성장하여 여러 나라의 사람들이 이 항구에 모여살며 도시를 이루게 됩니다. 이에 자국민의 보호나 자국의 이익을 위하여 각 나라의 함대도 제물포에 출입하게 되지요.
1904년 2월에 제물포의 외항(월미도 앞바다)에는 러시아의 신예 순양함 "바략" 과 포함(砲艦)"카레예츠" 그리고 산동반도의 "여순항" 과 제물포를 오가는 민간 연락선 "슌가리" 호가 정박해 있었고 , 미국의 "빅스버그", 영국의 "탤보트", 이탈리아의 "엘바", 그리고 프랑스의 "파스칼" 호가 정박하고 있었고 일본의 "치요다" 함도 러시아 군함의 동태를 살피며 머물고 있었습니다.
전투의 주역, 연합함대 총사령관 도고 헤이치로 중장, 러시아 바략 함장 루든예프 대령, 제4함대 사령관 우리우 소장
러시아의 순양함 "바략"은 러시아가 미국에 주문하여 만든 최신예 함으로서 무게가 6,500톤에 달하고 길이도 127미터에 이르는 대형함선으로서 여러문의 6인치 주포로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바략" 과 함께 제물포에 머물던 "카레예츠" 는 "바략"보다는 규모가 작은 포함(砲艦)으로서 무게는 1,270톤, 길이는 60여미터이고 강력한 8인치 주포로 무장했습니다.
1904년 2월7일, 서울에 있던 러시아 공사 "파블로프"는 제물포에 있던 "루든예프" 함장을 불러 긴급한 지시를 내립니다.
"일본의 함대가 서해상에서 북상하고 있고 그 함대의 일부가 제물포에 상륙한다는 첩보가 있으니 이를 뤼순에 있는 사령부에 전하시오"
<카레예츠의 첫 교전>
이에따라 "루든예프" 대령은 카레이츠함의 함장 "벨라예프" 중령에게 임무를 하달했고 1904년 2월8일 오후 3시 40분에 "카레예츠" 는 제물포를 빠져나가 "비어수로(飛魚水路)를 따라 팔미도 방향으로 남진합니다.
그러나 얼마 가지못하여 제물포를 향하여 항진해들어오는 "우리우" 소장의 일본해군 제4함대와 조우하게 되지요.
아직도 사태를 파악하지못한 카레예츠함의 "벨라예프" 중령은 일본의 함대를 향하여 통상적인 경의를 표했지만 일본함대는 전투배치를 하며 "카레예츠" 를 향하여 몇발의 어뢰를 발사했습니다.
일본함대와 "카레예츠"의 조우상황
이에 놀란 "카레예츠"는 어뢰를 피하면서 대응사격을 한 뒤 가까스로 제물포 외항으로 귀환하여 이 사실을 "바략"함의 "루든예프" 대령에게 보고합니다.
일본해군 함대는 "카레예츠" 를 따라 들어와 오후 5시경에 월미도 외항에 머물고 그 중에 4척의 어뢰정은 러시아 함정의 바로 옆에 닻을 내렸습니다.
<일본함대의 전력>
"우리우" 소장이 지휘하는 제4함대의 주역은 영국에 주문하여 만든 신예 "아사마" 함 이었습니다.
무게는 10,476톤에 이르고 길이는 120미터이고 8인치 주포로 무장한 강력한 함정이었으며 그 밖에도 여러척의 함정들이 뒤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우리우" 소장이 이끄는 제4함대의 함정들 (어뢰정들과 수송선은 제외)
일본함대의 일부가 외항으로 진입하고 어뢰정이 바로 옆에 정박하자 기습공격을 염려한 "루든예프" 대령은 외국군함의 선임함인 영국 "탤보트" 함의 선장 "베일리" 대령을 찾아가 중립항에서의 전투행위를 막아줄 것을 부탁하였고, 이에 "베일리" 대령은 일본 해군의 "우리우" 소장을 찾아가 중립국 항구내에서의 전투행위 중단을 요구하게 됩니다.
<일본 육군병력의 상륙>
외국함대의 노력으로 항구내에서의 교전은 중지되었지만 러시아 해군을 항구에 묶어놓은 일본 해군은 이 날 저녁부터 수송선에 타고있던 일본 육군병력 3,500 여명을 작은 보트로 실어날라 제물포항에 상륙시킵니다.
소형보트를 이용하여 월미도 외항에서 제물포 내항으로 이동중인 일본군들.
이 날 밤사이에 상륙한 일본군은 제물포에 거주하는 교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방파제 주변에서 밤을 지샌 후 다음 날 아침 서울로 향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조선관료나 군대의 반응은 전혀 언급되어있지 않으며 결정적으로 국가가 무시되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다음날, 2월9일, 전쟁의 소문은 제물포의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져 제물포 방파제와 만국공원 언덕에는 이른 아침부터 구경꾼이 하얗게 뒤덮여 있었습니다.
아침 7시 30분이 되자 일본함대의 "우리우" 소장은 각국의 함대에게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으므로 외국의 함대는 낮 12시까지 항구를 떠나달라" 고 요청합니다.
<출전(出戰)>
이에 "루든예프" 대령은 오전 10시, 바다에 나아가 결전을 벌릴 것을 결심하고 전 대원을 불러모아 명령을 하달합니다.
"러시아 해군에게 항복은 없다. 최후의 순간까지 싸우자! 주님과 황제와 조국을 위하여! 만세!"
11시 20분, "바략" 과 "카레이츠" 는 러시아 국가 "주여, 황제를 보호하소서" 를 연주하면서 일본함대가 기다리고 있는 바다로 나아가고 이를 지켜보던 각국의 함대는 죽음의 길로 나아가는 러시아 함대에 경례로서 작별을 고합니다.
러시아 함대가 팔미도 방향으로 나아가자 무의도 근처에 자리를 잡고 기다리던 일본 함대가 포진하며 가로막고 나섰고 그 선봉에는 "아사마"가 나섰는데 상호간의 거리가 약 6킬로미터 정도로 함포의 사정거리안에 들자 교전이 개시되었습니다.
팔미도 앞 해상에서의 양측 함대의 포진 및 전투
어차피 이 전투는 러시아군의 객관적인 열세로서 패배가 뻔한 전투였지만 러시아군은 굴하지 않고 전투에 임했습니다.
오전 11시 45분,
일본 해군의 "아사마"의 8인치 함포가 불을 뿜었고 뒤를 이어 모든 일본 함대가 사격을 개시하였고 이에 "카레예츠"와 "바략" 이 응사하면서 전투가 개시됩니다.
"아사마" 가 발사한 포탄이 "바략"에 명중하면서 대포들이 연이어 파괴되고 함선의 곳곳에 구멍이 둟려 물이들어오면서 함체는 기울어졌습니다.
그러나 "바략"의 응전도 강하여 "바략"이 발사한 포탄이 "아사마" 에 명중하여 "아사마" 의 선장이 즉사하였고, "다카치" 함은 침몰, "나니바" 함의 함장이 중상을 입게 됩니다.
거의 한시간 가까이 지속된 교전의 끝물에 "루든예프" 함장은 머리에 부상을 입고 실신하였고 겨우 의식을 되찾은 함장이 다시 사령탑에 올라가 지휘를 계속했으나 상황은 절망적이었습니다. 여기저기가 파괴된 갑판에는 병사들의 시체가 찟겨져 널부러져 있었고 후미는 불이붙어 검은 연기를 내뿜었습니다.
12시 45분, 한시간여의 교전끝에 함장 "루든예프"는 제물포로 후퇴할 것을 명령합니다.
치열한 전투끝에 제물포항으로 후퇴하여 들어오는 "바략" 함의 모습.
교전 후 '바략" 과 "카레예츠"의 후퇴를 보여주는 그림
<자침(自沈), 그리고 자폭(自爆)>
"루든예프" 함장의 의도는 함정을 정비하여 오후 4시경에는 다시 전투에 임하려는 것이었으나 돌아와서 점검한 상태는 절망적이었습니다.
항구의 외국함대들은 항구를 떠나기위하여 준비중이었고 일본 함대가 "바략"을 노획하기 위하여 제물포로 올라오고 있었으므로 결국 "루든예프" 함장은 자폭을 결심합니다. 그러나 자폭(自爆)이 주변의 외국함대에게 피해를 준대는 영국 "베일리" 함장의 만류로 배의 배수판을 모두 열어 자침(自沈)시키게 됩니다.
"바략"은 수십구의 병사들의 시체와 함께 서서히 물속으로 수장되었으며, 피해를 입지않은 "카레예츠"는 외항에서 좀 더 멀리 나아가 자폭(自爆)하니 그 굉음이 서울에 까지 들리고 하늘로 솟아오른 잿가루와 종이, 파편들은 제물포항의 인가에 눈처럼 쏟아져 내렸다고 합니다.
러시아 민간 연락선 "슌가리" 호도 일본군에게 넘겨질 것을 꺼려하여 배에 불을 붙여 침몰시켰습니다.
"카레예츠"의 자폭 모습(미 해군 수병이 촬영)
이렇게 하여 "제물포 전투"는 러시아 함대의 패배로 끝납니다. 오후 늦게 일본 함대는 제물포의 사정을 잘 아는 "치요다" 함을 제물포로 보내 상황을 파악하나 이 때는 이미 두 함정이 침몰한 상태였습니다.
전투를 지켜본 외국함대는 바략의 부상자와 생존자를 구하여 자신들의 함대에 옮겨실은 후 적십자기를 게양하였습니다.
(상태가 심한 부상자들은 제물포의 일본 병원에 후송되어 일본 적십자단의 보호를 받았습니다.)
러시아 측의 기록을 보면 "바략"의 전사자 34명, 중상자 91명, 경상자 105명이며, 일본 함대는 전사자 30명, 부상자 200여명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일본의 기록에는 자국함대의 피해가 전혀 없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략" 의 계속된 수모>
바략을 자침(自沈)시킨 "루든예프" 함장의 실수는 이 배를 수심이 너무 얕은 곳에서 자침시켰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 배를 다시 수심이 깊은 곳으로 끌고 가기에는 파손의 정도가 너무 심했거나 부상자를 이동시킴으로서 배를 재가동 시킬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여하튼 자침된 배는 바닷물이 빠져나가면 일부가 드러나는 상태가 되어 전투가 끝난 후 일본에 의하여 인양되었습니다.
인양된 "바략"은 일본군의 훈련함 "소야" 로 변신하여 사용되다가 1905년 포츠머츠 회담에 의하여 러시아측에 반환되었습니다.
<무력한 관전자>
아래의 사진은 1900년 당시의 제물포의 모습으로서 "만국공원"에서 내려다보고 촬영한 것입니다.
오른 쪽 섬이 월미도, 왼쪽으로 연결된 작은 섬이 소월미도이며 멀리 흐릿하게 영종도가 보입니다.
월미도의 외측이 외국함대가 머물던 외항입니다. 군함들은 수심이 앝은 내항으로 들어올 수가 없어서 외항에 정박했던 것이지요.
내항(內港) 가운데에 있는 건물이 대불호텔이며 소월미도를 돌아 내항에 상륙한 일본군은 이 대불호텔앞을 지나 서울로 향했습니다.
1904년 2월9일, 이른 아침부터 제물포의 시민들은 이 만국공원에 올라 역사의 현장...내 나라를 먹이로 놓고 싸우는 쟁탈의 현장을 무기력하게 바라보았습니다.
백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다시 만국공원에 올라 바다를 내려다보면서 그날의 전투, 포성과 비명, 그리고 무엇보다도 바로 이 자리에서 스스로의 무기력함에 울분을 터트리며 기울어져가는 나라의 모습을 목도한 백성들의 마음에 공진(共振)해 보고자 잠시 침묵으로...내 마음을 추스려보는 것입니다.
************** Note ***************
1. 이 글은 박종효 전 국립 모스크바대 교수의 글을 가장 크게 참조하였습니다.
2. "가스통 루르" 가 쓴 "제물포의 영웅들" 도 일부 참조했으며 제물포 일본 교민의 기록과 러시아의 인터넷 자료도
참고했습니다.
3. 당시 일본 해군의 피해에 대하여 박종효 교수는 러시아측의 자료를 인용하여 상당한 피해를 언급하고 있으나
해군대학 강정현 교수는 공개된 글에서 러시아군의 형편없는 사격술로 인하여 일본측의 피해가 전혀없었다는
견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본측의 주장에 무게를 주신 것 같습니다.
4. 제가 그린 그림에는 당일 상륙한 일본군이 12사단 병력으로 언급하였으나 자료가 부족합니다.
당시에 일본군 12사단 병력이 서울에 주둔하고 있었던 것은 확실하나 이 병력이 모두 제물포를 통하여
상륙한 병력인지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조언을 부탁 드립니다.
5. 블로그에 올릴 수 있는 사진이 20장으로 한정된 것은 처음 알았습니다.(^.^) 욕심 같아서는 더 많은 사진을
올리고 싶었는데...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