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어머니
고향
부모란 자리에서 자식을 향한
어버이의 눈길은 한결 같습니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얼굴이 평안해 보이는데
날이 궂은날은 어버이 얼굴에 그늘이 확연합니다.
비가 올라치면
찢어진 우산은 당신이 쓰고
조금 나은 것은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자식 몫으로 챙겨들고 서성거립니다.
눈이라도 오는 날은
멋 부린다고 동내의도 입지 않고
집나간 자식 놈 걱정에 어렵게 장만한
오리털 점퍼 챙겨들고 동구 밖에 서성이는
어머님은 흔해빠진 목장갑 하나 손에 끼지 않고
시시나무 떨듯 떨고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고맙기는커녕
그런 어머님이 얼마나 창피하고 부끄러웠었는지
고맙고 감사하다는 말 대신에 이유 없는 짜증으로
마음 상하게 해드렸던 일들이 얼마이었던가?
좋은 학교를 다닌답시고
집을 떠나 도회지 생활을 하면서
그 구질구질한 시골 촌놈이란 말 듣지 않으려고
온갖 개 멋은 다 부리면서 삭월세 내야 할 일과
학교 공납금 독촉하느라 집에 계신 늙으신 부모님께
전화 한 것 외에 안부 전화 한번 해본 적 없는 내가 아니었던가?
그런 놈도 자식이랍시고
철철이 나는 과일 사서 보내시고
봄가을로 몸보신해야 한다고 보약지어
손수 들고 오셔서 먹는 방법까지 알려주신 어머님은
본래 그렇게 하셔야만 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 일이 어디 한두 번이고 한해 두해 이었던가?
나는 그렇게 학교도 다녔고 직장생활도 했고
결혼도 했고 자식 놈도 낳고 불혹의 나이도 넘어섰습니다.
어느 날 가을걷이를 끝내신 어머님이
자식 놈 주실 것이라고 이리 고르고 저리 고르고
좋은 것만 골라 등에 한 짐 지시고 머리에 한 짐이시고
무엇을 그리 챙기셨는지 양손에도 가득 들고
그리 가깝지도 않은 집을 걸어오시다가 넘어져 발목을 다치셨습니다.
철이든 것일까 처음으로 그런 어머님이
걱정이 되고 고맙고 감사해서 발목이 나을 때까지
집에 모시려 했지만 이까짓 것을 가지고 무슨 야단이냐며
한사코 거절하시고 집으로 돌아가시니 말씀대로 괜찮으신 줄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날 이후로
어머님이 그렇게 좋은 것이라며
이고 지고 들고 오셨던 것을
한 번도 가져다주신 적이 없었습니다.
이 때쯤이면 달력에 표시라도 해 놓으신 듯
오셨어야 할 어머님은 벌써 몇 해째 오시지 않아
참으로 오랜만에 전화를 드렸더니 팔팔하신 어머니가 아닌
아주 연세가 많고 힘이 없어 보이는 할머니가 전화를 받으셨습니다.
내 이름을 대며 거기가
홍길동이 집이 맞느냐고 물었더니
맞다 고 하셨습니다.
우리 어머님 좀 바꿔 달라고 했더니
오늘 시장에 가셨는데 당신이 집을
어머님 대신 봐주고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 어머님이 몇 해 동안
집에 오시지 않아 전화를 드렸노라 말하고
전화를 끊었는데 그분이 내 어머님이신 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날 다치신 사고로 휠체어 없인 거동을 못하신다는 것조차도 알지 못했습니다.
평소에 전화를 해봤어야
전화속의 어머니 목소리를 알아들을 텐데
전화 한번 한 적이 없었으니
어머니 목소리를 알아 들을 수 없고
그동안 전화 한번 하지 않았으니
어머님이 불구된 것을 알 수 있었겠는가?
그러든 어느 날 우리 고향 이장님이
내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았는지 전화를 해서
어머님이 돌아가셨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우리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말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내가 아는 내 어머님은
아직도 젊고 정정하신 분이시고
단 한 번도 아프신 적이 없으시고
죽음과는 아주 먼 곳에 계신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어머님을
하늘나라로 떠나보내시고서야
나의 삶이 얼마나 허구이며 패륜이며 바보이며
부끄러운 것이었는가를 때늦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내가 아버지가 되어 있고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시골 할머니라고 부르던 아이들에게
내 어머니를 어떻게 이야기해줘야 하며
내 어머니요 내 아이들의 할머니를 그
분은 훌륭하신 분이셨다고 어떻게 말해야 할지 말문이 막힙니다.
남들은 5월이 가정의 달이요
사랑실천의 달이라고들 합니다.
그런데 내게는 고통의 달이요 아픔의 달이요
가슴에 상처가 돋아나는 달입니다.
카페 게시글
우리들의 이야기
그리운 어머니
김원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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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5.30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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