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둘은 초등학교, 막내는 유치원 다닐 무렵 아파트에서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했다. 80년대 포스코에서 분양한 상대동 라이프주택으로 불려 지던, 당시만 해도 그리 흔치않은 유럽풍의 집이었다. 대지50여 평 건평 25평 남짓한 작은 집이지만 파란 잔디가 깔린 작은 뜰도 예쁜데다 이불도 활활 털 수 있고 창고에 연탄도 가득 쌓아 둘 수 있겠다며 좋아했었다. 무엇보다 누구의 도움 없이, 살고 있던 집보다 조금 넓은 집을 장만했다는 것이 내심 뿌듯했던 것 같다. 우리 가족이 똘똘 뭉쳐 그 집에서 오래오래 단란하게 살아갈 그림을 그리며 무척 행복했었다.
꿈같은 날도 잠깐, 어느 날 남편이 느닷없이 ‘어머니가 홀로 계시면 적적하실 테니 새집엔 방도 여럿 있으니 모시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장남이 아니어서 어른을 모신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나로선 무척 당황스러웠다. 망설이다 ‘며칠 생각을 좀 해 보자.’고 대답했지만, 남편이 내 표정만 살피는, 그 며칠이 훨씬 지나도, 아무런 대안이 떠오르지 않았고 이미 남편이 입 밖으로 말을 낸 이상, 결과는 자명했다. 아버님이 세상을 떠나신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이고, 아파트 베란다에 서서 혼자 눈물지으시던 어머님의 뒷모습을 본 적이 있는 나로선, 남편의 뜻을 도저히 반대할 수 없었다.
어머님은 며느리의, 당신을 선뜻 모시지 못한 불효도 모르시고, 예쁘게 꾸며진 것도 없건만, 막내아들의 집에 자신의 방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무척 흐뭇해 하셨다. 그럼에도 나는 어머님이 손님 같기만 했고, 행동이 자유롭지 못한 것을 자주자주 불편해 했다. 한 동안 그렇게 보내는데 어느 날 문득 이렇게 하다간 내 탓에 온 집안 분위기가 어두워 질 것이라는 생각과 알 수 없는 가책으로 가슴이 콩닥콩닥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어떤 방법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었고, 이왕 모시면 잘 모시자고 다짐하며 내 스스로가 변하기로 작심했다. 우선, 잠자리에 드시기 전, 따뜻하게 데운 우유를 들고 어머님의 방을 찾아가 정을 깊게 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묘했다. 억지로라도 해야 된다고 나름 각오까지 했는데 의외로 내 자신, 그 일이 싫지가 않았다. 요 밑에 손도 넣어보고 별 일이 없는 담에는 꼬박꼬박 밤 인사를 드리니 어머님은 정말 환하게 웃으시며 “오냐, 너거도 잘 자거라.” 다정하게 대해 주셨다. 집 앞 공터에다 작은 밭도 일구시고, 그런대로 정을 붙여 가시는지 어머님 얼굴이 훨씬 밝아지셨고 나도 점차 어머니와의 관계가 편안해져갔으며 어른이 계시니, 집을 비울 때도 아이들 걱정을 안 해도 되어 어른과 함께 사니 좋은 점도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랬는데 그만, 마음 상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이의 월급날, 그 때만해도 급여를 현금으로 가져와서 월급봉투를 받을 때였다. 나는 깨끗한 돈만 골라서 어머님 용돈을 준비해서 “어머니, 얼마 되지는 않아요.” 하고 웃으며 봉투를 내밀었는데 어머님은 봉투를 방 한쪽 구석으로 휙 던지시는 게 아닌가, 움찔, 놀라 서 있는데 “이거 받으면 너거가 다 쓰지.내가 쓰나.” 하시는 것이었다. 내가 기대했던 건, “그래, 잘 쓰마.” 웃음 띈 얼굴로 받으시는 어머님을 뵙는 것이었는데…… 나는 어머니의 반응에 당황해서 어떻게 처신 할 바를 몰랐었다. 그래도 마음을 가라 앉히며, ‘어쩌다 그러셨겠지.’ 생각했는데, 그 다음 달도 또 그 다음 달도 어머님은 매달 그렇게 하셨고 내 상한 감정은 골이 깊어갔다. 그러다보니 밖으로 들어내진 않았어도 숨길 수 없는 표정이 여실히 그런 마음을 대변했을 터이니. 인생을 오래 사신 어머니가 모르실 리 없었으리라.
일은 엉뚱한데서 엉키고 있었다. 어머님 때문에 상한 마음을 털어놓을 곳이라곤 남편밖에 없는데 내가 어머님에 대해 무슨 얘기만 할라치면 그이는 엄지손가락을 내려서 내 인격이 추락한다는 동작을 취함으로 말 한 마디 못하게 했다. 내 마음엔 점차 섭섭함이 중첩되어갔으니, 이젠 어머니가 문제가 아니라 그런 남편이 문제가 되고 있었다. 어른을 모신다고 했을 때, 주위의 아는 분이 “그냥 그 곳에 계시는 게 서로에게 좋지 않겠나, 용돈을 좀 더 넉넉하게 드리고” 조심스레 하던 말이 자꾸 생각났다. 밤 인사를 드릴 때면 어머님은 여전히 환하게 웃으셨지만, 나는 예전 같이 행복하지 않았고 ‘이런 일들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회의가 일어났다. 그렇게 맘이 힘들어하고 있을 때, 중풍을 앓다가 많이 회복된 손위 동서가 갑자기 병이 재발되어 어머님이 큰댁으로 가시게 되었다.
어머님이 큰댁에 가시고 나서야 나는 그 짧은 시일에도 불효했음이 참 죄송스러웠다. 형님이 회복되고 어머님이 다시 돌아오시면 잘 모셔야지 다짐했었지만, 그 후로 다시는 어머님을 우리 집에 모시지 못하였다. 세월은 참 빨리도 흘러갔고 동서도 어머님도 지금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 나는 가슴이 에이듯 그 일들이 마음이 아플 때면 ‘그래도 원인 제공은 어머님이 하셨지 않느냐.’고 스스로 위안을 삼으려 했던 것 같다.
알지 못했던 것 느끼지 못했던 것, 그 모든 것들을 깨닫게 된 건, 한 순간이었다. 어느새 내가 아이들의 손에서 용돈을 받는 나이가 되고 보니 그 때의 어머님 마음을 이해하게 되고 철부지였던 내가 보여 목이 메곤 한다. 아이들이 주는 용돈은 자동으로 이체되지만 명절과 생일은 봉투를 직접 받게 되는데 그때 어머님에게 내가 듣고 싶었던 ‘그래, 잘 쓸게.’ 그 말이 이상하게도 선뜻 나오지 않는 것이다. “뭐, 이런 걸 또…… 매달 용돈도 주면서 너희들 쓰기도 빠듯할 텐데……” 들릴 듯 말듯 중얼거리다 주머니에 쑥 넣지도 못하고 안방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어색하게 들고 있다가 거실 장식장위에 놓여있는 말 소품 밑에 찔러 놓고는 엉거주춤 주방으로 향하다가 아, 하고 어머님의 마음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표현 방법의 차이는 있지만, 바로 이런 마음이었구나.’ 하고 그날 아이들이 각각 제집을 향해 떠나고 난 뒤 나는 어머니에게 아들이 용돈을 드리게 했어야 했다고 후회하며 울고 울었었다.
내 자신, 아직도 사람의 도리에 아둔하고 염치도 모자라지만, 나름대로 관조의 마음도 생기고 예전보다 남을 이해하는 힘이 조금쯤 생겼다면 세월이 주는 선물일 게다. 우리가 좀 더 성숙하고자 노력한다 할지라도 노력으로 되지 않는 것이 있는 것이다. 그 중의 하나가 세월이 주는 철듦이란 생각을 해 본다. 누가 백 마디의 말을 한대도 실감하지 못하던 것들이 세월 속에서 체득되어져가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사고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게 아닌가 싶다.
하루는 교회의 예쁜 후배가 그랬다. “권사님, 요즘 제가 좀 변했나 봐요, 전에는 항상 며느리 입장이었잖아요? 그런데 언제부턴가 시어머니 입장에서 생각하게 돼요.”라고. 나는 크게 고개를 주억거리며 미소만 지을 수밖에, 세월이 스승인 것을 내가 더 무엇을 말하랴……
첫댓글 일상의 다소곳한 이야기가 감명적이군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수필을 써 보려고
마음에 걸리던 일을 글로 담아봤습니다.
배려하심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