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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발견한 새로운 이미지와 사랑과 감사의 시편들
심상운 (시인, 문학평론가)
‘광복 70년’, ‘한글독립 70년’이라는 시대적 환경 속에서 ‘쉬운 언어’, ‘짧은 형식’, ‘희망과 치유의 긍정적인 메시지’를 시민들의 가슴 속에 생동하는 언어로 전달하는 현역 시인 280인 542편의 시선집(詩選集)『2015판 연간 지하철시집』의 발간은 한국현대시의 현장에서 하나의 사건(事件)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이 시집의 시편들 속에는 한국시단을 대표하는 시인들이 많이 참여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신선한 감각의 젊은 시인들이 새로운 주류를 형성하고 있어서 변화하는 한국현대시의 현장을 조감(鳥瞰)하는 시집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시민들이 향유할 수 있는 지하철시의 보편성에는 한글을 창제한 세종(世宗)의 뜻이 들어있다고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 시집의 시편들의 메시지에는 시라는 고정된 틀이나 고답적인 언어형태에 얽매이지 않는 자신의 삶에 대한 시인들의 진솔하고 천진한 언어가 친근감과 살가운 감동을 전한다. 그리고 일부 젊은 시인들의 시편 속에는 상투적인 고정관념의 벽을 허물고 독자들에게 경이로움을 주는 새로운 시각의 이미지들이 잘 닦여진 유리창처럼 빛을 내고, 삶에 활력을 안겨주는 역동적인 감흥의 언어들을 통해 울림을 주고 있어서 시의 완성도와 수준면에서도 긍정적인 평가를 하게 한다. 필자는 만화경(萬華鏡)같이 펼쳐진『2015판 연간 지하철시집』의 다양한 시편들을 몇 개의 부류로 나누어서 소감을 피력하고자 한다.
1. 일상에서 발견한 새로운 시각의 시편들
권주열 <파도>, 김광순 <고래가 사는 우체통>, 김상현 <오월>, 김선진 <우우 일어서고 있다>, 김완성 <비 갠 후>, 김유석 <약력握力>, 김철교 <목동무지개>, 마경덕 <연밥>, 윤태수 <능금> 조재선 <유리잔>, 최규창 <역사歷史>, 이향지 <흙의 건축> 등의 젊은 시인들의 시편들은 상투적이고 관념적인 사고와 시각의 틀에서 해방된 역동적 이미지가 경이로움을 주고 있다.
최규창의 <역사歷史>는 지구(인간)의 역사를 레미콘에 비유한 발상이 신선한 놀라움을 준다. 이런 발상은 우주적인 시각에서 지구를 보는 상상력의 소산이라고 인식된다.
오늘도 거리에는
레미콘의 큰 덩어리가
지구의地球儀처럼 돌고 있다
돌과 모래와 시멘트가
아우성을 치며
콘크리트가 되고 있다
그러나
밖에서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최규창의 <역사歷史> 전문
조재선의 <유리잔>에서는 자신의 색을 갖지 않은 유리잔은 여러 가지 색을 담을 수 있고, 희망으로 설렌다는 발상과 이미지의 전개가 매우 싱싱하게 감지된다. 이런 발상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인연으로 해서 생기는 것으로, 영원하고 불변하는 본성(本性)인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불교의 교의(敎義)와도 연관되어서 독자들의 사유를 확장시키는 계기를 제공하는 시로 읽힌다.
투명한 유리잔은
자신의 색을 갖지 않는다.
자신에게 담겨질
주인의 색을 입기 위해
속을 비워둔다.
적포도주를 담으면
농염하게 출렁이고
맑은 생수를 넣으면
없는 듯 미소 짓고
홀로 주인을 기다릴 때도
햇살에 몸을 부시며 반짝인다.
모든 걸 다 비운 유리잔은
기다림도 희망으로 설레인다.
- 조재선의 <유리잔> 전문
김선진의 <우우 일어서고 있다>는 대야산 용추계곡의 풍경을 역동적인 감흥의 언어로 전하여 독자들의 마음에 마그마 같은 삶의 에너지를 출렁이게 한다. 자신의 감흥을 객관화하여 전하는 기법에서 새로움이 발견된다.
침묵하는 숲의 가슴을 열어 보라
옹알이 하던 연초록 고사리 손 잎사귀
짙은 풀빛 주먹을 꼭 쥐고
쑥쑥, 키가 자란다
통통 살이 오르는 젊은 숲
새벽안개가 짙은 날
앞서 가는
햇빛은 더 눈부시다
대야산 용추 계곡
목 트인 나무들 함성에
화들짝 놀란
구르는 물소리
우우 일어서고 있다.
-김선진의 <우우 일어서고 있다> 전문
김철교의 <목동 무지개>도 도시의 하늘에 뜬 무지개에서 받은 감흥을 동영상적인
이미지로 생동감 있게 표현하여 독자들에게 전하고 있다. 그러면서 자연과 인공의
대립적인 관계를 생각하게 한다.
동화책 속에 있던 무지개가
몇 년 만에 서울 하늘에 나타났다
가로수는 화사하게 웃는다
이파리에 달린 물방울마다
소년의 꿈이 빛난다
자동차 경적소리에
나무가 푸드득 날개를 턴다
놀란 무지개가 매연 속으로 사라진다
하늘밑으로 도시의 일상들이
구부정한 어깨로 걸어오고 있다
--김철교 <목동 무지개> 전문
2. 사랑과 감사, 존재의 깨달음을 주는 시편들
심수향 <낡은 문이 가르친다>, 구석본 <파도>, 김은우 <토우>, 김철 <빈집>, 문효치 <사랑법>, 안광태 <돌멩이의 노래>, 서정남 <길이 너무 팍팍할 때>, 송태옥 <헌신>, 권혁재 <밀물> 유자효 <아직>, 이필우 <안경을 닦으며> 등은 시각적인 이미지나, 감흥, 역동적 에너지는 약하지만 삶의 현실을 인식하고 차분하게 이웃과 자신의 존재성을 들여다보게 하고 사랑과 감사의 소중함을 일깨운다. 그래서 시의 메시지가 인간의 깊은 내면을 향하고 있다.
안광태의 <돌멩이의 노래>는 현실의 가장 밑바닥에서 발길에 채이며 굴러다니는 돌멩이의 독백을 통해 사회의 하층에서 말 못하고 살아가는 소외된 사람들의 존재성을 일깨워서 차분한 울림을 준다. 누군가에게 호소하는 듯한 시의 어조가 잊고 있던 이웃에 대한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시적 효과를 기대하게 한다.
누가 나를 짓밟고
발길로 찬다고
내 누구를 원망할 수 있으리
이 얼어붙은 가슴 밭에선
한 뿌리 사랑도
키워보지 못했으니
내 누구를 미워할 수 있으리
가슴이 답답하면
하늘 한 번 쳐다보고
흙 속에 묻혀 뒹굴면서
하늘이 준 뜻대로 살아갈 뿐이어라
--안광태 <돌멩이의 노래>전문
문효치의 <사랑법>은 사랑의 진실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시적인 비유의 언어로 완곡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언어이전의 이심전심(以心傳心)이 말보다 더 사랑의 속살에 닿을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말로는 하지 말고
잘 익은 감처럼
온몸으로 물들어 드러내 보이는
진한 감동으로
가슴속에 들어와 궁전을 짓고
그렇게 들어와 계시면 되는 것.
--문효치<사랑법> 전문
심수향의 <낡은 문이 가르친다>는 “왈칵 밀치면 더욱 열리지 않는 문/달래듯 어루만지는 손길에만 흔연히 열린다”라는 말로 급하고 사납게 돌아가는 사회풍조에 대해 성찰의 시간을 갖게 한다. 사람들의 마음 열림도 이와 같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어서 거듭 읽게 한다. ‘꽃 피는 소리에도’ 낡은 문이 열린다는 비유가 신선하고 아름답게 감지된다.
언제부터인가 문이 삐거덕거린다
삐거덕거리면서 열리지 않는다
왈칵 밀치면 더욱 열리지 않는 문
달래듯 어루만지는 손길에만 흔연히 열린다
사람들은 시원찮은 문 바꾸라고 하지만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는 것을
가르치는 문
세상의 문은 그렇게 열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문
때로는 깊은 속내 열어 보이듯
꽃 피는 소리에도 가만히 열리기도 하는
저 낡은 문의 가르침
--심수향 <낡은 문이 가르친다> 전문
유자효의 <아직>도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내 사랑을 너에게 함빡 주는 것이다”라는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시적인 비유는 단순하고 직설적이지만 시 속에 담긴 시인의 진정성이 감정의 울림을 주고 깨달음을 준다.
너에게 내 사랑을 함빡 주지 못했으니
너는 아직 내 곁을 떠나서는 안 된다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내 사랑을 너에게 함빡 주는 것이다
보라
새 한 마리, 꽃 한 송이도
그들의 사랑을 함빡 주고 가지 않느냐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은
그들의 사랑이 소진됐을 때
재처럼 사그라져 사라지는 것이다
아직은 아니다
너는 내 사랑을 함빡 받지 못했으니
----유자효 <아직> 전문
3. 가족사랑 부부사랑의 생활시편들
강기옥 <다림질>, 구봉완 <저녁>, 김찬옥 <아기의 입 속에 우주가 숨어 있다>, 최진연 <부자 1> 이종천 <아내의 세상>, 이혜선 <흘린 술이 반이다>, 서상만 <꿈꾸는 지팡이>, 박현자 <꽃물> 등은 가족사랑, 부부사랑의 따뜻한 생활의 세계가 사람 사는 맛이 무엇인가를 느끼게 하고 감동의 울림을 준다.
김찬옥의 <아기의 입 속에 우주가 숨어 있다>는 제목이 던지는 메시지가 당돌하고 신선한 매력을 풍기면서 아기를 낳아 기르는 엄마의 체험과 감동이 매우 생생하게 다가온다. 특히 오-오하는 아기의 말소리는 태초의 소리를 상상하게 하는 감동 속에서 우주적인 감각의 세계를 감지하게 한다.
두 달된 아기가 옹알이를 한다
아기는 오-오 한 자 밖에 모르지만
그 말은 어떤 무성한 말보다 위력이 세다
입 속에 세상 만물이 다 응집되어 있다
고 작은 입을 통해 우주가 열리면
누구도 넘어가지 않고는 아기의 눈을 바라 볼 수가 없다
강철 같은 할아버지가, 심술 난 할머니가 끔뻑 넘어가고
창 밖 벚나무도 꿈쩍 놀라 억겁의 눈을 떴나보다
고목이 되어버린 벚나무 가지들이
날개를 활짝 펼치고 승천할 기세다
아기의 단조로운 모음 하나로
가족이란 울타리 안에 걸린 입들이
창 밖에 핀 벚꽃보다 더 환하다
----김찬옥 <아기의 입 속에 우주가 숨어 있다> 전문
최진연의 <부자 1>도 아버지와 아들이 손을 잡고 걸어가는 한 컷의 동영상이 인상적인 장면을 연출하여 건강한 가족의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풀밭 들판 길 가시밭길을 춤추듯 걸어가는 장면은 독자들의 가슴에 삶의 에너지도 전달하는 시적효과를 생산하고 있다.
아버지와 아들이 가고 있다.
아들이 아버지와 손을 잡고
내려다보며
쳐다보며
춤을 추듯 가고 있다.
풀밭 들판 길 가시밭길이라도
부자는 저렇게
기쁨으로 웃으며 함께 가리라.
---최진연 <부자 1> 전문
이종천의 <아내의 세상>은 남편의 눈에 비친 아내의 모습이 한 폭의 수채화처럼 선명한 인상을 남긴다. 끝 연의 “이쁘다”라는 감탄사도 매우 자연스럽게 시의 이미지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 부부의 사랑이 담긴 좋은 시로 평가된다.
햇빛 좋은 봄날
아내는
우물가 장독대인 듯
흙빛 항아리 반짝 윤이 난다.
화단도 없으면서
꽃밭인양
물도 주고 북도 주는 아내
이쁘다.
--이종천 <아내의 세상> 전문
박현자의 <꽃물>은 봄날 손톱에 봉숭아 꽃물 들이는 전통적인 정경이 현대적 감각의 언어에 잘 갈무리되어 현대 도시생활의 각박함 속에서도 아름다운 가족의 사랑을 느끼게 한다.
“초록색 이파리 두어 장 기쁨 몇 그램/희망 한 스푼 넣고 콩콩 찧어 손톱위에 두고”란 언어표현의 신선한 감각이 시인의 재능을 엿보게 한다.
꽃물을 들인다
아이와 마주앉아 옛이야기 풀어가며
먼 훗날의 추억을 물들이다
사과 빛으로 혹은 노을빛으로 무르익어
첫눈 내릴 때 쯤
아이의 소원 이루어지길 기도하며
초록색 이파리 두어 장 기쁨 몇 그램
희망 한 스푼 넣고 콩콩 찧어 손톱위에 두고
탯줄인양 친친 묶어주면
어느 새 상기된 아이의 두 뺨에
봉숭아꽃 여름처럼 밝다
---박현자의 <꽃물> 전문
4. 마음을 다스리는 시편들
강정화 <차를 마실 때>, 김내식 <참새들의 기도>, 김애자 <잠든의 자>, 김용언 <빈 깡통 허공을 날다>, 정성수 <아흔 아홉 살까지> 등의 시편들은 시인이 생활 속에서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태도와 행위를 보여주고 있다. 욕망을 비워버린 소박하고 겸손한 생활 태도와 분노의 감정, 소외된 감정을 푸는 행위의 시는 현대인들의 심리적 치유의 시로 분류된다.
정성수 <아흔 아홉 살까지>는 소멸하는 것들의 아름다움에 몸서리치면서도 아흔 아홉 살까지 몇 권의 책을 더 읽고 아내와 포도주 향내를 마시고 새벽에 시를 쓰겠다는 시인의 소박한 생활 태도와 삶에 대한 애착의 독백이 공감을 준다. 그 독백 속에는 시인의 낭만적인 꿈이 담겨있어서 허무에 대응하는 심리적 치유의 공간을 만들고 있다.
아흔아홉 살까지 살 것이다, 나는
몇 권의 책을 더 읽고
저녁에는
아내와 함께 늙은 포도주 향내를 마시고
소스라치듯 새벽에 깨어나
몇 줄의 그리운 시 쓸 것이다
사람에 가까운 사람의
마지막 그림자가 될 것이다
소멸하는 것들의 아름다움에
자주 몸서리칠 것이다.
------정성수 <아흔 아홉 살까지> 전문
김용언의 <빈 깡통 허공을 날다>는 술에 취해 빈 깡통을 차는 행위를 통해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시인(시적자아)의 모습이 경쾌한 언어감각으로 접촉된다. 이 시에도 3연의 “빈 깡통은 비어 있어서 시원하고/내 발길은 힘을 썼으니 시원하고/허공은 한데 얻어맞았으니 시원하고”가 만들어 내는 치유의 공간이 시적 효과를 기대하게 한다.
그런대로 취해서 비척대며 길을 가는 데
빈 깡통 하나가 눈에 잡힌다
온 힘을 다해 발길질을 하니
허공에 반원을 그리며 날개를 편다
깡통이 날아간 날개 자국이
한참 동안 눈에 선한데
허공에는 아무런 상처가 없다
허공처럼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얻는다
빈 깡통은 비어 있어서 시원하고
내 발길은 힘을 썼으니 시원하고
허공은 한데 얻어맞았으니 시원하고
아! 오늘은 시원한 날이다
--김용언 <빈 깡통 허공을 날다> 전문
이 외에도 가영심의 <마로니에 그늘 아래서>, 김왕노 <도시의 노래>, 손광세 <공원>장윤우 <장터>, 임웅수 <지하철 출근길에> 등 도시생활을 대상으로 한 시편들과 김용구의 <북한산으로>, 맹숙영 <자작나무>, 정복선 <꽃몸살>, 이명혜 <구룡폭포>, 이길원 <분재>등의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대상으로 한 시편들이 깊은 인상을 남기는 시편들로 평가되었다.
21세기에 들어와서 ‘해체’를 화두로 삼는 현대 철학계에서 주목을 받는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노자(老子)는 『도덕경』의 첫 구절에서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라는 말로 도의 핵심을 말하고 있다. 도를 도라고 하면 진정한 도가 아니라는 그의 말은 도라는 형태와 개념에 갇혀 있으면 진정한 도에 이르지 못한다고 해석된다. 이 말을 시에 대입하면 시라는 개념이나 형태에 갇혀 있으면 진정한 시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2015년 판 『지하철시집』의 서평을 마치며 한국현대시의 춘추전국시대를 상상해본다. 어느 한 쪽으로 통합되지 않은 다양한 형태의 시들은 서로 인정하면서 발견(소통의 시)과 발명(소통거부의 시)의 시가 융합하고 해체함으로써 세계적인 시로 뻗어나갈 수 있는 강한 에너지를 발휘하리라는 것이다.
* 월간 <see> 2015년 7월호에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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