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그리스도인의 종교행위, 구제와 기도와 금식; 위선자가 되지 말라 (6;1-6. 16-18)
* 3가지 종교적 행위; 구제. 기도, 금식; 구제하는 것은 이웃, 특히 궁핍한 이웃을 섬기라는 것이다.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우리가 그 분께 의지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금식하는 것 (영적인 이유로 음식을 끊는 것) 은 부분적으로 자신을 부인하고 그래서 훈련하려는 것이다.
이번 글엔 이 3가지 종교행위들 중, 구제와 기도에 대해 먼저 기술합니다. 그리고 기도에 대해선 다음의 주님게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에 좀 더 자세히 기술하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구제 (2-4절)
우리 하나님은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신 (눅 6:35-36)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시므로, 하나님의 백성 역시 인자하고 자비로워야 한다. 예수 님은 분명 자기 제자들에게 관대하게 주는 사람이 되길 기대하셨다. 라일이 말했듯이 그 말씀은 “많은 사람들의 이기적인 인색함”을 정죄한다. 하지만 관대함 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동기, 즉 마음의 숨은 생각에 관심을 가지셨다. 구제에 관해서도 예수 님은 이 은밀한 생각에 대해 똑 같은 관심을 가지셨다. 문제는 손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보다 손이 그 일을 하고 있을 때 마음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세 가지 가능성이 있다. 1) 사람들의 칭찬을 구하든지, 2) 익명성을 유지하지만 조용히 자신을 축하하든지, 아니면 오직 3) 하나님 아버지께 인정받기만을 열망하든가 이다.
사람들의 칭찬에 대한 탐욕스러운 갈망은 바리새인들을 따라다니는 죄였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니”(요 5:44)라고 말씀하셨다. 인간의 칭찬을 받고자 하는 그들의 욕구는 너무나 탐욕스러운 것이어서, 그들의 구제를 완전히 망쳐 버렸다. 예수 님은 그들이 그것을 공개적인 공연수준으로 바꾸어 버린 것을 조롱하신다. 스펄전이 말했듯이 “한 손에서는 동전 한 잎을, 다른 한 손에는 나팔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이 위선의 자세다.”
작금 그리스도인의 바리세 주의는 그렇게 재미있지는 않다. 우리는 교회나 자선기관에 헌금을 할 때마다 나팔을 부는 사람들을 동원에서 팡파르를 불게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낯익은 비유를 사용하자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나팔을 분다.’ 즉, 자화자찬을 한다는 것이다. 자선기관 기부자 혹은 좋은 일의 후원자 명단에 이름이 올라 간 것을 보면 자부심이 한껏 높아진다. 우리는 여전히 똑 같은 유혹에 빠진다. “사람에게 영광을 받으려고” 우리의 구제에 주의를 집중한다. 그렇게 사람들에게 영광을 받으려 하는 사람들에게 예수 님은 강조해서 말씀하신다.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예수 님은 그 과시적인 태도를 지적하신 후 기독교적 방식을 말씀하신다. 그것은 은밀하게 주는 것이다. “너는 구제할 때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내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헌금을 할 때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아야 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우리 자신에게도 말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헌금했다는 사실에 대해 스스로 의식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죄의식은 쉽게 자기 의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음의 죄성은 너무나 미묘해서 우리가 헌금했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비밀로 부치기 위해 의도적으로 애쓰면서도 동시에 자축하는 기분을 마음 속에 깊이 간직할 수 있다.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니 않는다. 구제의 목적은 궁핍한 사람들의 괴로움을 경감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자비의 행동을 허영심에서 나온 행동으로 바꾸어 버려서, 구제하는 주된 동기가 그 선물을 받는 사람의 유익이 아니라 주는 우리의 유익이 되게 할 수도 있다. 이타주의가 왜곡된 이기주의로 대체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의 죄된 허영심을 “억제하기’ 혹은 ‘죽이기 위해’ 우리의 구제를 다른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도 비밀로 하라고 촉구하신다. 구제를 행하기로 결정하고 그것을 행하는 순간 그것이 잊어버리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 흡족해 하기 위해, 또는 우리의 구제가 얼마나 관대하고, 성실한 것인지 우쭐대기 위해 계속 그것을 마음에 담아 있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의 구제의 특징은 자축이 아니라 자기희생과 스스로 잊어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궁핍한 사람을 구제할 때 추구해야 하는 것은 사람들의 칭찬도, 스스로를 칭찬할 만한 근거도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의 인정이다. 칼빈은 “예수님의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유일한 증인이시다 는 것을 만족해야 함을 의미한다”라고 증언한다.
그리스도인의 기도 (5-6절)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여기에서도 근본적인 차이는 위선과 진실함에 있다. 주님은 그들이 기도한 이유와 그 보상을 대조시킨다. 위선자들의 좋아하는 것은 기도도 아니고,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도 아니다. 그들은 자신을 좋아하며 공적 기도가 그들에게 주는 자기 자랑을 좋아한다. 종교적 바리새 주의는 오늘날에도 활개를 친다. 교회 출석자들은 종종 위선자라는 비난을 듣는다. 하나님을 예배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경건하다는 평판을 얻으려고 가는 것이다. 나아가 이들은 구제에서도 마음 속 숨은 동기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닌 사람들이 비열하게 자기를 섬기게 하는 것이다. 종교와 자선이 과시적 표현이 되는 것이다. 실제로는 사람의 칭찬을 받는 데 관심을 집중하면서 겉으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체하니!
그럼 그리스도인 어떻게 기도를 해야 하는가? “네 골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사람들의 눈을 차단하고, 하나님과 함께 골방에 틀어박혀야 한다. 그럴 때에만 우리는 주님의 그 다음 명령에 순종할 수 있다. 그것은 은밀한 중에 계신 ‘네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라’는 명령이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를 환영하기 위해 그곳에서 기다리신다.
우리는 은밀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몰두하기 보다는, 예수님이 ‘은밀한’ 기도를 강조하신 목적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것을 기도할 때 우리의 동기를 정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사람들에게 진정한 사랑을 나눠 주어야 하듯이,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사랑에서 기도하여야 한다.
주님!, 저희 구제와 기도가 온전히 주님의 사랑만을 드러내는 믿음행위가 되도록 저희 마음을 다스려주시고 그 온전한 길로 감에 부족한 저희에게 지혜와 명철을 허락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