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은 늘 그러하듯이 나에게 참으로 많은 것을 일깨워준다. 기독인으로서 어떻게 내면을 비우고 채워야 하며 교회공동체 내 그리고 그 사회에 대해선 어떤 가치관과 시각으로 봐야하고 필요한 경우, 의를 위하여 팝박받을 준비까지 하여야 함을 일깨워준다. 참으로 현실적으로 실행하기 어렵고 도전적인 대목들이 말씀 시작에서부터 말씀 끝날 때까지, 심지어 말씀과 말씀 그 사이에서 마저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도록 숨 가쁘게 도전의 횟초리가 마음의 등을 때린다. '한번'이란 단어를 쓰면서 잠시 숨을 고른다. 앞으로 몇 번 더 산상수훈 길을 걸어갈런 지 알 수 없지만, 주님이 부르시는 그 날까지 계속 걸어갈 것을 다짐하면서 <마치면서> 글을 기술한다.
<마치면서>
구약에서 10계명이 하나님의 제자들이 준수하여야 할 최고의 규약이라면, 신약에선 산상수훈 (마5:3 – 7:27)을 주님이 그리스도들에게 선사한 최고/최선의 실제적인 명령이라는 데엔 신학자들 간에 별 이의가 없다. 이 산상수훈에 대해 21세기 최고 신학자들 중 한 명인 C.S. 루이스는 ‘그런 명령이 사실이든지 아니면 예수님이 ‘엄청난 과대망상증’으로 고생하고 있었던가 둘 중 하나다’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추구하고 따라야만 하는 지상 최고수준의 믿음과 도덕기준인 산상수훈의 그 고상한 윤리가 미친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어느 누가 감히 진지하게 주장할 수 있겠는가? 그런 주장과 결론을 주창하는 것은 극단의 냉소주의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레프 톨스토이는 사뭇 달랐다. 그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실천할 수 있는 것이라는 믿음을 지니고 있었으며 1900년에 발표된 그의 마지막 소설 <부활 Resurrection>의 주인공 네흘류데프 공작의 입을 빌러 자신의 확신을 표현했다. … 그는 산상수훈에서 ‘대부분 과장된 불가능한 요구로 채워진 고상하고 추상적인 사상들이 아니라, 단순 명쾌한 실제적인 명령들, 순종하면 새로운 인간사회의 질서를 확립할 ‘ 명령들을 보았다.
네흘류도프는 낮게 타오르는 등잔불을 응시하며 앉아 있었다. 심장이 멈추는 듯했다. 우리가 영위하는 삶의 모든 가공할 혼란들을 상기하면서, 그는 사람들이 이 계명들에 순종하는 법을 배운다면 세상이 어던 모습일지 상상해보았다. 그러자 그의 영혼에 오랫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엄청난 황홀함이 몰려 왔다. 마치 오랜 갈망과 고통 끝에 갑자기 평화와 자유를 발견한 검과도 같았다.
그는 그날 밤 잠을 자지 않았다. 그리고 복음서를 읽은 수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 자신이 전에도 읽었고 수없이 여러 번 설교를 통해 들었던 그 말씀의 완전한 의미를 처음으로 이해했다. 그는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그 책이 자신에게 계시한 모든 중대하고 소중하며 즐거운 소식을 흡수했다. 그가 읽은 모든 것이 그에게 익숙해 보였다. 그리고 그가 오랫동안 알고 있었지만 한 번도 완전히 이해하거나 진짜로 믿지 않았던 것을 확증해 주고 실증하는 것으로 만들어 주었다. 이제 그는 이해하고 믿었다. …
그는 혼자 말을 했다.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지만 우리는 분명히 이렇게 구하고 하나님이 더하시는 것들을 얻는 데 실패하고 말았어. 그렇다면 난 평생 이것을 추구해야 해. 한 가지 과업은 끝났고 다른 한 가지가 내 앞에 대기하고 있어”
그날 밤 네흘류도프에게 완전히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그가 새로운 삶의 상황 속으로 들어갔기 때문이 아니라, 이후로 그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이 그에게 완전히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삶의 이 새로운 장이 어떻게 끝날지는 나중에 가서야 할 수 있을 것이다.
<부활> 톨스토이
톨스토이는 이상과 현실간의 긴장을 현실적으로 경험했다. 한편으로 그는 산상수훈에 순종하는 것이 ‘매우 가능한 일이라고’ 확신한 반면, 다른 한편으로, 자신이 제대로 그 일을 이루지 못한 것으로 보아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했기 때문이다. 양 극단 모두다 진리는 아니다. 산상수훈의 기준들은 모든 사람이 쉽게 도달할 수 있는 것도, 전혀 도달할 수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 기준에 아무도 도달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주신 산상수훈의 목적을 무시하는 것이다. 그 기준이 모든 사람이 도달할 수 있다라는 것은 인간의 죄의 실상을 너무 가볍게 본 결과이다.
이 모든 장애물들을 넘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예수님의 말씀과 그의 주장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에 우리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에 진지하게 반응하여야 한다. 여기서 하나님의 대안적 사회에 대한 묘사가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이 하나님 나라의 기준, 가치관, 우선순위이다.
그러나 교회는 이 도전을 외면하고 물질만능적이고 체제순응적인 체면 치레에만 몰두하고 것이 작금의 모습이다. 이런 교회는 세상과 전혀 구별할 수 없어서, 그 짠 맛을 잊어버리고 빛은 꺼트리며, 그럼으로 세상 거류민, 심지어 기독인들 에게 까지 실망을 안겨만 준다. 교회가 자신이 앞으로 올 시대의 기쁨과 권능을 이미 맛보고 있는 하나님의 새로운 사회 공동체라는 증거를 전혀 제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독교 공동체가 그리스도의 선언에 의해 살 때에만 세상은 교회에 이끌릴 것이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신다면, 바로 이것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것이다. 그는 세상에 대항하는 교회의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사랑과 은혜의 주님, 이 까지 동행하여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일깨워 주신 말씀처럼, 먼저 님의 이름, 나라, 그리고 의를 구하면서 주님께서 명령하신 빛과 소금이 되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면서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명령도 현장에서 실천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