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를 들어 촛불은 기름이 연소하는 현상이지 실재하는 사물이 아니다. 우리는 이러한 기름이 연소하는 현상을 볼 때 촛불이라는 존재가 기름을 태우면서 타고 있다고 착각한다. 붓다는 <잡아함 335경>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비구들이여, 보는 놈(眼)은 생길 때 오는 곳이 없고, 사라질 때 가는 곳이 없다. 이와 같이 보는 놈은 부실하게 생기며, 생기면 남음 없이 사라지나니 業報는 있으나 作者는 없다.) 대정장 2, p. 92c의 필자 번역.
우리는 행위의 주체, 즉 작자가 행위를 일으킨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의 주체를 자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붓다는 이러한 행위의 주체의 존재를 부정한다. 눈이 보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을 눈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인지하는 자아, 행위하는 자아는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조건에 의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무상한 것이다.
따라서 행위하는 실체는 없고, 오직 행위를 통해 상호 영향을 받는 관계, 즉 업보만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불교에서는 연기설이라는 상호인과율에 의해 자아와 세계, 인간과 자연, 정신과 물질을 이원화된 실체로 보지 않고, 행위를 통해 영향을 주고받는 상호관계로 이해한다.
이러한 붓다의 무아설은 자아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업보는 있으나 작자는 없다 는 것은 불변하는 실체(作者)로서의 자아는 존재하지 않으나 행위를 통해 변화해 가는 업보로서의 자아는 있다는 것이다. 즉 착한 사람(작자)이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착한 일(業)을 하면 착한 사람(報)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아설의 근본취지이다. 인간의 본질은 영혼도 정신도 물질도 아니다.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인간의 본질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인간은 자신이 선택한 삶에 의해 스스로를 이룬다. 즉 인간의 본질은 업보이다. Majjhima-Nik ya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모든 중생은 업의 소유자이며, 업의 상속자이며, 업에서 나온 것이며, 업의 친척이며, 업을 의지처로 한다.) Kammassak , m ava, satt kammad y d kammayon kammabandh kammapa isara . (Majjhi a-Nik ya, Vol. 3, ed. Robert Chalmers, PTS, p. 203.)
행위의 주체를 자아로 보는 생각에서 우리는 세계를 주체와 객체로 나눈다. 이러한 세계관에서는 주체와 객체가 근본적으로 분리되어 대립한다. 주체는 객체가 될 수 없고, 객체는 주체가 될 수 없다. 주체는 행위를 통해 객체와 관계한다. 그러나 여전히 주체와 객체는 별개의 사물이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에서 행위를 통해 주체와 객체가 서로 영향을 주며 변해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체적으로는 대사작용을 통해 끊임없이 외부의 사물이 내 몸으로 들어오고 나간다. 내 몸은 이렇게 외부의 물, 공기, 음식 등이 들고 나는 가운데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외부의 사물을 차단하면 몸은 간 곳이 없이 사라진다. 정신도 외부와의 접촉을 통해 변화하며 유지된다.
외부와의 접촉이 완전히 단절된 상태에서는 어떤 정신적 작용도 나타나지 않는다. 몸도 마음도 행위를 통해 나타나고 유지된다. 따라서 업보를 자아로 보는 세계관에서는 주체와 객체가 서로 인연이 되어 존재한다. 주체가 없으면 객체가 없고, 객체가 없으면 주체도 없으며, 나아가 주체라고 할만한 것도 없고, 객체라고 할만한 것도 없다.
이와 같이 무아설에 의하면 주객의 분별은 무의미한 것이 된다. 불교는 이러한 연기설에 근거하여 우리에게 윤리의 토대를 제공한다. 모든 존재는 업을 통해 연결되어 있다. 함께 연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연기의 자각은 우리에게 나와 남 , 인간과 자연 은 하나라는 自他不二 의 의식을 갖게 한다. 즉 업보로서의 자아는 자신의 신체나 자신의 정신이라는 좁은 자아의 틀에서 벗어나 모든 존재로 확장된다.
이러한 자아의 확장은 남을 사랑하고 자연을 보호하는 삶을 가져다줄 것이다. 불교는 이러한 삶을 모든 것을 내 몸으로 보는 同體慈悲 의 실현으로 본다. 이것이 불교윤리의 핵심이다. 인간의 존엄은 이러한 윤리의 실천을 통해 그 업보로서 성립한다. 인간은 자비의 실현, 즉 윤리적 실천을 통해 존엄한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지 본래부터 존엄한 존재는 아닌 것이다.
삼성 태블릿에서 전송하였습니다.
이러한 사고의 기저 사상은 근본불교인 척하면서 변형불교로 이행하는 과정을 밟고 있는 변형불교의 사상인 것입니다. 많은 현 남북방불교가 이러한 생각에 기초하고 있으나 근본불교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변형불교의 해독은 근본불교의 근본을 교묘하게 완전히 뒤짚어 엎어 근본을 쏙 빼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올바른 법을 구별하는 잣대 6가지 훌륭한 법을 구별 하는 잣대 6가지 1. 잘 설 해진 것이라야 함.(지혜로운 이가 알아보고 칭찬 할 만 한 것. 뚜렷하고 확실하고 이익이 있는 것이라야 함.<이익-탐진치를 빼 없애 행복하게 사는 삶.>) 2. 보고 듣고 곧바로 알 수 있는 것이라야 함.(보고 들은 즉시 이해 할 수 있는 것이라야 하고 실천하면 즉시 이익이 있어야 하며 수행을 해서나 다음 생에 이익 되는 것을 말 하는 것이 아니라야 함) 3. 시간에 관계없이 늘 올바른 이치라야 함.(과거. 현재. 미래에 관계없이 늘 올바른 이치라야 하고 뒤바뀌지 않는 것이라야 함)
4. 생활 속에서 늘 실천 할 수 있는 것이라야 함.(보고 듣고 생활 속에서 실천하면 곧바로 이익이 되는 것이라야 함.) 5. 와서 보라고 할 만한 것이라야 함.(뚜렷하고 확실하기에. 이익이 되는 것이기에. 권장할 만한 것이기에) 6. 보통 사람의 지혜로 누구나 알 수 있고 실천 할 수 있는 것이라야 함(특정인만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야 하고 어느 경지에 이르러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야 함. 실천한 즉시부터 이익이 되는 것이라야 함) 이익=탐진치를 빼 없애 행복하게 사는 삶. 이 여섯 가지 모두가 해당 되는 법은 훌륭하고 올바른 법으로서 배우고 실천하면 이익이 많고 이 여섯 가지에서 한 가지라도 빠지는 법은 이익이 별로입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이러한 사고의 기저 사상은 근본불교인 척하면서 변형불교로 이행하는 과정을 밟고 있는 변형불교의 사상인 것입니다.
많은 현 남북방불교가 이러한 생각에 기초하고 있으나 근본불교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변형불교의 해독은 근본불교의 근본을 교묘하게 완전히 뒤짚어 엎어 근본을 쏙 빼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뗏목님 그런 소리 좀 하지 마세요
근본이니 변형이니 이런 소리 하지 마시고 명확한 답을 적어 보세요
나는 자아의 존재을 찿아 혜메이다 윗글을 보고 이해가 되는데 . . .
무슨 소릴 하는 거요 ?
할말 있으시면 남의 말 말고 자기가 공부 한 것을 내놓아 보시오
청일님의 블로그에 잠시 들려봤었는데
청일님의 기본 사상은 불교사상이 아니라
불교의 교주인 고타마 싯다르타 붓다(석가모니)께서
사물, 현상의 이치를 깨닫고 정면으로 반박한
전형적인 브라만 사상(범아일여 사상, 자타불이 일원론)인 것으로 보였어요.
변형불교를 진짜 불교인 근본불교인 것처럼 잘못 알고 있는 스님, 불자분들이 대부분이지요.
청일님도 그런 사람 중의 한 분이시고요.
이곳 사람들은 그런 낡은 사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예요.
불교에서 말하는 진리에 더욱 가까이 접근하시고자 한다면
좀 더 치열하게 불교공부를 더 하셔야지요.
기존의 모든 관념들을 다 강물에 흘려보내버리고 나서...
@뗏목 지기님슨 증상만이 가득 하시구려 ㅡ 증상만 이있는자는 스스로 께우칠 때 까지 기다 릴 수 밖에 , ,
아니면 지기님이 알고 있는 지기님의 말을 해보시오
지기님 안녕하시고 건강하시죠?
아함의 제일의공경 은 어떻게생각하시는지 지기님의의견이알고싶습니다
평안하십시요
카페 우측 상단 검색란에 제일의공경이란 키워드로 검색하면 여러 자료들을 볼 수 있을 거예요.
이러한 붓다의 무아설은 자아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업보는 있으나 작자는 없다 는 것은 불변하는 실체(作者)로서의 자아는 존재하지 않으나 행위를 통해 변화해 가는 업보로서의 자아는 있다는 것이다.
ㅡㅡㅡㅡㅡㅡㅡ
위 글은 함정입니다.
부처님의 무아설은 자아를 전혀 인정하지 않습니다.
위 주장에 따르면 업의 주체(작자)로서의 자아는 없으나 업의 객체(업보)로서의 자아는 있다는 주장입니다.
위 글을 쓴 사람은 업보를 자아라고 하는데...."나"를 버리기 무서워서 끝까지 "나"를 붙잡고 놓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럴듯한 논리와 교묘한 말장난에 속으면 안됩니다.
보리수님안녕하시지요? ㅆ
잡아함335제일의공경을완전부정하십니까?
건강하시고
저는 "제일의공경"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空사상은 대표적인 대승불교의 사상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 니까야에도 여러 곳에 空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근본경전에 나오는 空에 대한 말씀이 부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인지, 후세에 누군가가 끼워 넣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설명하고 이해하는데 "空'을 빌지 않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또한 空을 바르게 이해한다면 空 개념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음도 알 수가 있습니다.
위 글을 쓴 사람은 업보를 자아라고 하는데...."나"를 버리기 무서워서 끝까지 "나"를 붙잡고 놓지 못하는 것입니다.
누가쓴글이아니라부처님의경으로알고있고
무었을버려서 무아가아니고 사실그자체가 무아아닌가요
이러한 붓다의 무아설은 자아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업보는 있으나 작자는 없다 는 것은
불변하는 실체(作者)로서의 자아는 존재하지 않으나 행위를 통해 변화해 가는 업보로서의 자아는 있다는
것이다.
-----
위 글이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이라구요?
"실체(作者)로서의 자아는 존재하지 않으나 행위를 통해 변화해 가는 업보로서의 자아는 있다는 것이다"
---------
이 말씀이 부처님 말씀이라면.... 어디에 나오는 말씀인지요?
"실체(作者)로서의 자아는 존재하지 않으나 행위를 통해 변화해 가는 업보로서의 자아는 있다는
것이다"라말이 부처님의 말씀이라면...... 어디에 나오는 말씀인지요?
어느 경전인가요?
보리수가 공부가 부족하여 잘 알지 못하겠습니다.
내 불교공부 사부이신보리수님께서 공부부족운운하시면 나는우짭니까?
내생각엔 원래 도둑놈은없지만도둑질을하면도둑놈이 있는것같아서~~~~~~
잘 이해하도록 선도해주십시요
궁극적으로는 도둑놈은 없습니다.
우리는 남의 물건을 그 주인의 의사에 반하여 멋대로 자신의 영역으로 옮기는 것을 도둑질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입장에서는 그 물건의 소유자(물건을 관리하는 주체)도 없고, 물건을 옮기는자(도둑질하는 주체)도 없으니 도둑질이란 없으며, 물건을 훔치는 주체(훔치는 자)도 없으니 도둑놈도 없습니다.
오직 물건이 옮겨지는 현상과 그 물건이 옮겨지면서 파생되는 현상(과보, 업보)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왜 부처님께서 도둑질을 하지 말라고 했을까요?
아직 수행을 완성하지 못하여 주체(나)가 있다고 전도된 생각을 내려놓지 못한 사람들에게 그런 생각을 내려놓을 수 있는 길을 부처님께서 제시하신 것이 계율이며,
전도된 생각을 내려놓은 사람(깨달은 사람)은 계율에 걸리지 않게 되니 도둑질을 하지 말라는 가르침도 군더더기에 불과하게 됩니다.
@보리수 근본자리(체)에서 보면 물건의 주체도 없고 물건을 옮기는 자도 없습니다. 그러면 과보(업보)도 무상(변하는 것)인걸요 ?
그런데 어찌 과보(죄무자성)인데 ---- 이찌 있겠습니까 ?
나로서는 연구하고 생각해봐야겠습니다
거짓도 이성이란도구와 논리의도구를 적절히사용 하면 진실로 보이는 법입니다.
올바른 법을 구별하는 잣대 6가지
훌륭한 법을 구별 하는 잣대 6가지
1. 잘 설 해진 것이라야 함.(지혜로운 이가 알아보고 칭찬 할 만 한 것. 뚜렷하고 확실하고 이익이 있는 것이라야 함.<이익-탐진치를 빼 없애 행복하게 사는 삶.>)
2. 보고 듣고 곧바로 알 수 있는 것이라야 함.(보고 들은 즉시 이해 할 수 있는 것이라야 하고 실천하면 즉시 이익이 있어야 하며 수행을 해서나 다음 생에 이익 되는 것을 말 하는 것이 아니라야 함)
3. 시간에 관계없이 늘 올바른 이치라야 함.(과거. 현재. 미래에 관계없이 늘 올바른 이치라야 하고 뒤바뀌지 않는 것이라야 함)
4. 생활 속에서 늘 실천 할 수 있는 것이라야 함.(보고 듣고 생활 속에서 실천하면 곧바로 이익이 되는 것이라야 함.)
5. 와서 보라고 할 만한 것이라야 함.(뚜렷하고 확실하기에. 이익이 되는 것이기에. 권장할 만한 것이기에)
6. 보통 사람의 지혜로 누구나 알 수 있고 실천 할 수 있는 것이라야 함(특정인만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야 하고 어느 경지에 이르러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야 함. 실천한 즉시부터 이익이 되는 것이라야 함)
이익=탐진치를 빼 없애 행복하게 사는 삶.
이 여섯 가지 모두가 해당 되는 법은 훌륭하고 올바른 법으로서 배우고 실천하면 이익이 많고 이 여섯 가지에서 한 가지라도 빠지는 법은 이익이 별로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