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저우>
항저우에는 12월 4일 관광차 다녀온 후, 다시 12월 14일 임정관련 지역을 답사했다. 허둥지둥 오전 업무를 정리하니 11시 30분. 겨우 병원을 빠져 나와 택시에 올라타고 시간을 보니 11시 42분. 12시 기차인데…. 운전수에게 기차시간을 이야기하고서도 왠지 불안했다. 역 도착시간 11시 55분. 그제야 약간 안심이 되었고 급히 좌석을 찾아 앉고서야 턱까지 올라온 숨을 몰아 쉴 수 있었다. 그렇게 앉아있는데 여승무원이 과일을 권하길래 긴장된 목소리로 "뿌야오(不要)"라고 내뱉었는데 그것이 마음에 내내 걸렸다. 한참을 기다려 그 여 승무원이 다시 왔길래 정식으로 사과하고 작은 과일접시 하나를 골랐다.
시내를 벗어나 교외로 나가자 말자 끝을 볼 수는 광활한 평야가 계속 되었다. 촌스런 2층 건물들이 간혹 눈에 띄었고 고풍스럽게 생긴 아치형 다리는 저 멀리 사라지도록 눈길을 끌었다. 끝없는 평원, 개방후 20년. 창밖으로 내비치는 교외의 풍경은 그런 내색을 전혀 하지 않았다. 가을걷이를 끝낸 펀펀한 들판, 파릇한 채소밭, 비닐하우스…. 불현듯 무작정 걷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이렇게 1시간 가량 가다보니 늪도 많이 보이고 건물도 제법 큰 곳이 나타났다. 쟈싱(嘉興)이었다. 상하이에서 한발짝도 벗어나지 않았던 김구선생이 윤봉길의사 의거 직후 몸을 의탁한 곳이다. 기차에 곧장 뛰어 내려 그분의 발자취를 찾고 싶었다. 또 다시 1시간 가량을 달리자 이제는 제법 큰 고층건물이 나타났고 도시도 상당히 커 보였는데 이곳이 바로 항저우(杭州)였다.
항저우는 중국 20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6대 고도의 하나라고 하며 시호(西湖)로 유명한데 백낙천, 소동파등이 이곳에서 즐겨 시를 읊었다고 한다. 이 시호를 중심으로 높이가 59.9m의 육화탑, 영은사등도 유명하다. 임정요인들도 간혹 이 시호에 들러 소일했다고 한다. 필자가 갔을 때는 항저우역 공사로 항저우동역에 내렸는데, 시호는 항저우역 서편에 있고 임정요인과 관련된 지역은 시호 동편 도로인 湖濱路부근의 仁和路, 學士路, 長生路등에 산재되어 있다. 먼저 임정요인들이 항저우에서 처음으로 자리를 잡은 군영반점(群英飯店)을 찾아 나섰다. 飯店은 우리나라의 여관에 해당한다. 인화로에 있다기에 그 길을 찾아 살피다가 仁和路 22號에서 큰 어려움없이 군영반점을 찾을 수 있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길을 따라 쭉 호빈로까지 가서 저녁놀에 비친 시호를 구경하고 다시 되돌아오는데 사거리에서 구두딱기가 측은하기도 하고 구두도 너무 더러워 얼마냐고 했더니 2元이라고 해서 앉았더니 이런저런 말을 시키면서 다 닦고 나서는 17元이나 받았다. 정말 불쾌했다.
군영반점에 들러 혹시 옛이름이 淸泰第二旅舍가 맞느냐고 했더니 그렇다고 해서 양해를 구하여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은 두 그루의 야자수가 있는 정원을 중심으로 중간을 비워 삥 두른 이층 건물이었다. 이곳이 정말 상하이에서 빠져 나온 임정요인의 숙소인가 의심이 되어 관계자에게 물었더니 그렇다고 했다. 그러나 내게 그런 숨결은 느껴지지 않았다.
다시 임정요인들이 일정의 눈을 피하여 숙소로 정한 學士路에 있다는 思흠方 41호을 찾아 나섰다. 지도를 몇 번 확인하고서야 思흠方을 찾았는데 지금 思흠方 41호에 아무 사람도 살지 않는 듯 했다. 다른 샛길을 나오니 菩提路였고 思흠方이라고 쓰여진 중국식 동네입구가 보였다. 그 다음으로 임정요인이 숙소로 삼은 湖邊村 23호를 찾아 나섰는데 長生路부근에서 이리저리 헤매다가 겨우 뒷문을 통해 그곳에 들어갈 수 있었다. 思흠方 41호, 湖邊村 23호는 도로에서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으며 아주 남루해 보였다. 板橋路 오복리는 주변 사람들과 택시 운전수에게 물어보아도 한결같이 모른다고 하여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사실 임정이 상하이를 떠난 후 제대로 된 정부 활동을 하지 못하고 피난하기에 급급했다. 치쟝과 충칭에 이르러 어느 정도 구색을 갖추기까지 인적, 물적 어려움으로 임정의 명맥을 유지하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내부적으로도 크게 민족진영과 공산진영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임정내에서도 각 파벌간에 사분오열하는 양상을 띄었다. 그래서 임정이 거쳐간 항저우, 난징, 꽝저우에 임정관련 유적이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이 기간중에도 김구 선생을 중심으로 중국 국민당정부의 장개석과의 협상을 통하여 낙양군관학교에 한인훈련반을 설치하여 한인 청년들에게 군사훈련을 시키고 각 단체간의 통합 노력을 부단히 하여 차후 충칭에서의 전면적인 항일투쟁을 위한 준비작업을 계속하게 된다.
기차시간이 약간 남아 항조우의 명물이라는 육화탑으로 향했다. 육화탑을 이리저리 구경하고 시호로 다시 돌아와 소동파의 감독하에 만들었다는 소제(蘇堤)로 들어섰다. 시호에는 호수중간에 뚝길을 내어 남북으로 길게 소제가, 동서로 백제(白堤)가 있어 산책하기에 더 할 수없이 좋다. 잔잔한 시호의 소제를 호젓하게 걷노라니 고즈넉한 그 분위기가 마치 그리운 고향에 온 듯하여 흥얼흥얼 소리내어 오랜만에 고향노래를 불렀다. 정말 잊지 못할 시호(西湖)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