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
상하이는 변혁하는 도시였다. 19세기부터 물밀듯이 동양으로 몰려들던 서양세력이 멈춘 듯이 자리잡은 곳. 현재의 상하이는 대륙 중국이 서양으로 나아가는 관문이다. 도시의 건물들은 날씬한 자태를 뽐내듯이 하늘을 향해 쭉 뻗어 오르고 있었는데, 한국의 성냥갑처럼 생긴 빌딩보다는 예술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인상이었다.
일단,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상하이 청사를 찾아 나섰다. 임정 상하이청사는 11월 30일과 12월 10일 두 차례 다녀왔다. 상하이청사가 있는 곳은 마땅루(馬當路) 306번지, 푸징리(普慶里) 4호(이하, 보경리청사). 이곳은 1926년 12월 김구선생이 임시정부 국무령에 당선될 당시, 그의 거처로 프랑스 조계 빠이라이니멍 마랑루[白來尼蒙馬浪路, 지금의 馬當路]였다. 당시로서는 일본 경찰의 정탐과 파괴가 심해서 영사관이나 공사관처럼 드러내어 놓고 활동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어서 번듯한 독립건물을 사용하지 못하고 요인이 거처하는 거주지를 임정청사로 사용했다. 그때부터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사 의거후 항저우로 이동하기까지 이곳을 중심으로 임정의 주요활동이 이루어진 유서 깊은 곳으로, 1990년대초 중국과의 수교 후 새롭게 정비되어 관광객을 맞고 있었다.
필자가 있었던 서광병원은 마침, 마당로와 가까운 곳에 있어 쉽사리 그곳을 찾을 수 있었다. 상하이시 시정부가 위치한 인민광장에 인접한 화이하이중루(淮海中路)에 있는 지하철역, 황피남루잔(地鐵 ; 黃陂南路驛)에서 남북으로 난 마땅루를 따라 남쪽으로 50m정도만 들어가면, 중심가와는 다르게 60-70년대처럼 그야말로 남루한 거리가 연결되고, 2-3개 정도의 사거리(興安路, 太倉路, 興業路)를 지나니, 거리 사이로 황색차양이 인도(人道)쪽으로 쑥 나온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떨리는 가슴을 안고 가까이 다가서니, 선명하게 「大韓民國臨時政府舊地」라고 쓰여진 간판이 보였다. 살며시 현관문을 밀고 들어갔다. 사무실은 그리 크지 않았으며, 좌측으로 접수대가 있고, 중앙 벽면쪽에 태극기와 김구선생 흉상이 모셔져 있었다. 벽면에는 「良心建國」, 「獨立精神」라고 쓰여진 액자가 걸려 있었으며, 그 우측으로 VTR이 설치되어 있었다. 먼저 온 관광객과 잠시 기다린 후 임정의 상하이시기와 관련된 영상을 시청했다. 안내자의 인솔하에 그곳을 나와 普慶里라고 쓰여진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니 「大韓民國臨時政府舊地」라고 쓰여진 안내판이 있었다. 대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곳에서는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하여 안타까웠다. 1층으로 들어서자 정면에 태극기가 대나무에 게양되어 대각선으로 교차되게 설치되어 있었고 앞쪽에는 회의탁자가 있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밑에 화장실이라고 씌여 있어 커튼을 들쳤더니 양동이만 하나 덩그라니 놓여 있었다. 안내원은 그냥 '상하이식'이라고 했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니깐 김구선생의 집무실이라는 곳이 나오는데 김구선생의 가족사진과 침대, 책상, 그리고 몇 개의 가구들이 있고 약간 바깥쪽 가구에는 독립신문이 가득 쌓여 있었다. 또, 다시 가파른 계단을 올라 북편 방으로 들어갔다. 그 방에는 임정이 상해 있을 때 벌였던 항일투쟁을 중심으로 갖가지 자료와 사진이 전시되어 있고 윤봉길의사와 이봉창열사의 사진이 걸려 있어 일순, 숙연함을 느끼게 했다. 다시 맞은편 방을 거쳐 옆방으로 들어섰는데 그곳은 수교 후 우리 나라 역대대통령 및 주요인사의 기념품과 방명록이 전시되어 있는 곳이었다. 무엇보다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방문객 통계표였다. 연간 만 5천명에서 6만명 정도의 관람객이 다녀간 것으로 되어 있었고 1998년에는 특히 적은 수의 관광객이 다녀가 이곳에서도 IMF를 실감할 수 있었다. 층계를 내려와 1층 기념품 가게에서 윤봉길의사 일대기 한 권을 사서 나왔다.
상하이에 임정관련 유적으로 찾아가 볼 수 있는 곳이 전술한 보경리청사(1926-1932), 홍구공원(노신공원), 부흥공원과 만민공묘 등이 있다. 1919년부터 1926년까지의 임정청사는 제대로 남아 있지도 않고 일개 민간인신분으로는 주소지도 제대로 찾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주요 활동처가 화이하이루(淮海路)를 따라 마땅루(馬當路), 루이진얼루(瑞金二路)등에 걸쳐 있었던 것은 분명한 것 같았다. 사실 이기간 임정은 외교적 노력으로 대한의 독립을 쟁취하고자 했고 지하 비밀조직의 형태를 띠었기 때문에 정확한 청사의 위치를 알 수 없다. 그래서 우리 같은 일반인은 상하이에는 현재 관람이 가능한 보경리 청사만을 상하이 임정청사라고 생각하기 쉽다.
여기에서 잠깐 임정의 청사의 소재지를 살펴보면 1919년 3월 17일 여운형, 현순, 선우혁등이 상하이에 임시사무실을 두고 임시정부 설립 책임을 지고 있었는데 이강훈의 ≪대한민국임시정부사≫에 따르면 그곳이 빠오창루(寶昌路, 나중에 寶昌路→霞飛路→淮海東, 中路) 329호라는 것이다.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은 제1차 회의에서 대한민국의 임시정부 수립하고 4월 13일 내외에 정부수립을 정식으로 선포한다. 그 회의 장소가 당시 프랑스 조계 진선푸루(金神父路, 지금의 瑞金二路)이다. 이곳이 구체적으로 몇 번지인지는 알 수 없으나 현재까지의 연구로써는 진선푸루 22번지라고 한다. 그후 임시정부청사를 둔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1919년 9월 <申報>에 따르면 샤페이루(霞飛路) 321호에 임시정부가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 문제가 되는 것은 ≪대한민국 독립운동지혈사≫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정청'이라는 건물인데 ≪피어린 27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따르면 이 번지에 이런 건물은 없고 진선푸루부근에 이런 양식의 건물이 다소 남아 있다고 한다. 같은 해 10월 상순 상하이 주재 일본 영사관은 수차에 걸쳐 프랑스 조계 공동국에 압력을 가하여 10월 17일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하여금 샤페이루(霞飛路) 321호를 비우게 하였다. 임정은 여기에서 쫓겨난 뒤 지하로 잠입하게 되는데, 먼저 프랑스 조계 빠이얼루(白爾路, 지금의 重慶中路) 18호로 옮겼으며 거기에서 기관지 <독립신문>을 계속 발행하다가, 1922년 3월 28일 김익상과 오성륜이 新關부두에서 다나카(田中)을 암살하려다 실패하여 그곳이 노출되었다.
그 후 영미공동 조계 등을 전전하다가 1923년 8월 당시 재무총장이었던 이시영의 집으로 이사하였다. 이때부터 임시정부 주요 요인의 거처를 청사아닌 청사로 사용하게 되었다. 1926년에서 1932년까지 김구의 숙소인 빠이라이니멍 마랑루 (白來尼蒙馬浪路) 푸징리(普慶里) 4호를 중심거점으로 하고 이유필의 거처인 샤페이루(霞飛路) 빠오캉리(寶康里) 27호를 또 다른 거점으로 사용하였다.
부흥공원은 보경리 청사로부터 그리 멀지 않는 곳에 있다. 마땅루(馬當路)에서 서쪽으로 걸어나오다 보면 충칭중루(重慶中路)가 보이는 데 이 도로가 상하이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고가도로이다. 이 도로를 건너 조금만 들어가면 부흥공원이 나온다. 이 부흥공원은 프랑스가 1909년 그네들 조계지에 만든 공원으로 이동휘선생과 김구선생이 사상논쟁을 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도 시원스런 수목(樹木)이 깔끔하게 조성되어 있고 앞쪽 너른 잔디밭에는 누구나 한가로이 즐길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이곳 저곳 김구선생의 체취라도 느낄까하여, 둘러보다가 「保護綠化 保護니的自己(자연을 보호하는 것은 곧 자기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라는 팻말이 있었다. 듣기로 프랑스인들이 이 공원을 만들고 '개와 중국인은 들어 올 수 없다'라고 했다는 데 隔世之感이다. 불행히도 김구선생의 발자취는 긴세월에 잊혀지고 지워진 탓인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천천히 산보하며 서문(西門)쪽 가오란루(皐蘭路)로 나와 조금 더 걸어가니 루이진얼루였다. 임시의정원 문서에 있는 임정초기 청사 사진과 그곳의 건물을 대조해보며 천천히 걷다가 서금빈관(瑞金賓館)이라는 곳이 있어 들어 가보았는데 건물이 꽤 고풍스럽게 보였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들고 간 책과 대조해 보는데 건물 양식은 비슷했으나 임시정부 초기 청사라는 사진과는 거리가 있어 약간 실망했다.
진선푸루 22호가 루이진얼루 22호, 50호중 어디인지 의견이 분분하여 양쪽을 다 가 보았는데 22호 자리에는 큰 빌딩이 하나 서 있고 50호에는 「상해영업방옥초초유한공사」라는 상점이 있었으나 책에서의 그림과 같은 건물은 아니었다. 샤페이루(霞飛路) 즉 지금의 화이하이중루(淮海中路)의 460호와도 임정이 약간의 관계가 있었다고 하여 찾아갔더니, 458, 464, 468호는 있는데 460호 번지에 해당하는 곳에는 꽤 큰 건물이 있었으나 다음 기회로 미루다가 결국 정확히 확인하지 못했다. 현재의 상하이 지도상에 노신공원(魯迅公園) 서편에 빠오창루(寶昌路)라는 도로가 있는데 처음에는 '그곳이 옛날의 빠오창루인가'하여 헤매기도 하였다.
노신공원을 찾은 날은 해가 거의 기운 오후였다. 바람도 몹시 불고 약간 쌀쌀하게 느껴지는 날이었다. 으스름이 내린 노신공원에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노신공원은 홍구공원(虹口公園)으로 윤봉길의사의 의거장이다. 정문을 들어서서 안내판을 보았지만 이것에 대한 정보가 하나도 없어 적이 실망하고 이리저리 헤매다가 노신동상 뒷쪽 동편에서 겨우 비석하나를 발견했다. 비석은 그리 크지 않았고 윤의사에 대한 일대기와 의거에 관한 내용이 씌여져 있었다. 정말 반가웠다. 사진을 찍으러 왔다갔다하는데 중국학생으로 보이는 몇몇이 자꾸 말을 걸어와 약간 귀찮았다. 다시 자세히 살펴보니 이곳 전체가 매원(梅園)이라는 작은 정원형식으로 꾸며져 있었고 비석 뒷 둔덕에는 현판에 「梅軒」이라고 씌여진 이층 한옥양식의 건물이 있어 들어가 보았으나 시설물이 전혀 없어 설렁했다. '이곳에도 윤봉길의사 관련 자료를 전시하고 안내원을 두어 관람하게 하였으면... ' 하는 생각을 했다.
상하이에는 임정관련 유적이외에도 구경할 곳이 많은데 청나라가 서구에 조계지로 할양했던 와이탄(外灘)은 아직도 서구풍의 건물들이 즐비해 있고 맞은 편 푸동지구의 빌딩은 중국의 미래를 상징하듯이 하늘높이 솟아 있다. 또 위위엔(豫園)이라는 공원이 있는데 과거의 상하이 상류층 분위기를 잘 느낄 수 있다. 무엇보다 특이했던 것은 이층버스인데 홍콩에 관한 TV에서나 보던 그 이층버스를 타니 기분도 상쾌했고, '관광도시인 우리 경주에도 이런 이층버스가 있어 안압지, 박물관, 보문, 불국사 등을 오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