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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BC 설원을 향해 설사면을 오르는 대원들.
BC 도착 첫날부터 강풍과 눈이 위협
3월24일 인천공항에서 마지막으로 비행기를 타고 네팔로 향하는 길은 너무나 지루하고 어려웠다. 특히 국내를 처음 벗어나는 나로서는 너무도 힘들었다. 어렵사리 25일 오후 6시 네팔에 도착했을 땐 현지대행사 직원들과, 한국인들과 친하다는 앙 도르지 사장이 나와 환영해주어 기뻤으며, 한국말이 유창히 들려 곧 친숙해지기도 했다. 다음날부터 식량과 장비 구입으로 모두들 바쁘게 움직였다.
3월30일 저녁 6시쯤 헬기를 타고 카트만두에서 포카라까지 이동했다. 원래는 베이스캠프까지 바로 짐을 보내고 대원들은 투쿠체에서 내려 캐러밴을 시작하려고 했다. 그러나 하루에 바로 가기 힘들다며 포카라에서 하루 쉬고 다음날 이동하기로 했다.
짐 싣기도 여간 어렵지 않아 수송을 맡고 있는 나로서는 더욱 곤혹스러웠다. 헬기 규정 무게를 넘긴 것이 문제였다. 다 싣고 가야 등반에 지장이 없는데, 몇 개를 빼야 된다는 헬기 대행사측의 요구는 정말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진땀이 주르륵, 그러나 형님들은 나무라지도 않으며 다른 방도를 찾아주고 매끄럽게 해결해 주셨다.
31일 8시경 헬기에서 내린 곳은 투쿠체. 양쪽으로 높고 높은 봉우리들과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다. 태어나서 해발 2,000m가 넘는 고지가 처음이고, 주변 풍경도 이색적이라 카메라 셔터는 쉴 틈이 없다. 헬기는 무정하게 짐을 내팽개치고 훌쩍 떠나 버린다. 빨리 BC로 가고 싶어진다.
투쿠체에서 민박하고 다음날 고소적응차 야크카르카(3,700m)를 오르내렸다. 별 문제 없이 갔다 왔다. 헬기로 오지 못한 포터와 몇몇 셰르파들을 기다리며 계획을 다시 수정해본다. 포터 6명, 셰르파 2명, 대원 7명은 캐러밴을 한다. 캐러밴 짐을 제외한 것은 헬기로 보내 이동이 간편해졌다. 처음엔 포터들이 뒤처진다. 포터들을 체크하면서 뒤에 붙었다.
▲ ABC 설원에 도착, 환호하는 대원들.
야크카르카에 도착, 텐트를 치려는데 1동이 보이지 않는다. 셰르파 1명이 실수로 놓고 온 것이다. 짐 확인을 확실하게 하지 않았다고 화살이 쏟아진다. 화가 나서 셰르파에게 책임을 묻자 사다인 다와가 그 책임을 떠맡으려 했다. 그는 다울라기리 정상을 다섯 번이나 밟은 베테랑이지만, 나이가 많아 어려워하는 눈치가 엿보인다. 자기가 다시 내려가 가져오겠다고 했으나, 어차피 한 번 더 내려가야 되기에 다음날 가져오게 했다.
사다는 내가 한 말에 대해 감정이 약간 상했는지 삐쳐 보였다. 그러나 성공을 위해 노력하자며 곧 화해의 악수를 나눴다. 셰르파가 대원들의 말을 듣지 않아 등반이 상당히 어려운 경우가 있었다는데, 그 우려를 넘긴 것 같다.
해발 4,000m를 넘어서자 눈이 덮여 있어 러셀과 이동이 상당히 어려웠다. 동상 위험도 있었기에 다들 조심했다. 다행히 날씨가 크게 나빠지지 않아 모두들 무사히 BC로 올랐다. BC(4,700m)는 헬기로 먼저 도착한 승국형(광운공고 OB)과 셰르파 2명이 이미 다져놓아 모두들 안심했다.
▲ 다울라기리 북동릉 루트도.
사흘 동안 바람과 싸우고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한 새벽이 찾아왔다. 다시 BC를 정리하고 등반준비를 했다. 등반에 앞서 라마 제단을 쌓고 기를 세웠다. 이제야 제대로 된 BC가 되어 가는 듯했다. 혼자 빙하를 파 화장실을 만들고 있는데, 제단 근처에는 화장실을 만들 수 없다고 한다. 4시간이나 삽 들고 혼자 끙끙거리며 판 것이지만, 어쩔 수 없이 다시 파묻었다.
라마제를 지내고, 조금 늦은 시각, 첫 발을 대디뎠다. 첫 고정로프는 막내대원이 설치하는 게 의례란다. 막내가 바로 나였기에 긴장됐다. 해발 4,700m가 넘는 지역에서 고정로프를 설치한다는 게 쉽지 않으리라 예상했다. BC에서도 조금만 무리해도 숨이 차올랐기 때문이다.
고정로프를 메고 한 걸음씩 올라본다. 시간은 얼마나 걸렸는지 감각도 없다. 그냥 올랐다. 어느새 200m 고정로프가 끝났다고 했다. 바위 지대에 하켄이 하나 박혀 있었지만 불안해 보여 스노바 3개를 단단히 박아 고정시켰다. 의외로 눈은 단단해 믿음이 갔다. 첫 고정로프를 설치하고 후등자와 같이 하강해 BC로 돌아왔다.
셰르파들, 정상 직전 설벽에서 안자일렌 거부
이제 우리의 오름짓은 시작됐다. C1을 설치하고, C2를 설치하고, C3를 설치하고 모두들 정상에 오를 것이라며 각오를 다졌다. 대장과 등반대장이 BC에서 지시하고, 3명씩 2개조로 나누어 운행하기로 했다. 등반대장은 훈련도 가장 열심히 했고, 가장 의욕적인 분이기에 그 누구보다도 앞장설 줄 알았는데, 지병이 BC에서도 이어져 등반이 어려웠다. A조는 승국형, 종헌형, 용필형이었고, B조는 희열형, 성진형, 그리고 나였다. 하루 하루 대원들의 컨디션에 맞춰 운행했기에 조는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
▲ C1에서 바라본 북동릉. 정상부에 설연이 날리고 있다.
첫 고정로프를 설치하고 나흘 뒤인 16일 드디어 C1(1,500m)이 뚫렸다. C1까지 가는 데 대부분 12시간이나 걸렸다. 그래서 도중에 ABC를 설치해 C1까지 가는 게 힘들지 않게 했다. C1이 설치되고 다울라기리는 또 한 번 변덕을 부려 짓궂은 날씨를 보여주었다. 한편으로 이탈리아 합동대가 입성하면서 BC 주변은 다소 활기차 보였다. 그들은 단체로 찾아와 고정로프 설치에 대해 의논했다. 우선 C1까지는 우리 로프를 신세지고, C1~C2는 그들이 깔고, 이후 C2~C3 구간은 같이 설치하자고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C1까지는 이미 깔린 우리 로프를 사용하고, C2까지는 로프작업이 필요없었으며, C3 구간도 거의 진행이 이루어지지 않아, 결국 우리가 다 설치하고 올라야 했다.
C2가 설치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흘렀다. 4월22일 드디어 C2(6,400m) 설치, 4월 안에 정상을 노릴 수 있게 됐다. 27일 C3 구축을 위해 C2의 전 대원이 출발했다. 몇몇 대원은 기력이 딸려 C2까지 오르는 것도 힘들어 했다. 저녁 C3 공격 회의로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C3 출발 가능한 대원은 현재 종헌형과 나, 그리고 약간 힘들어 보이는 승국형이었다.
▲ 스페인의 유명 등반가 인야키(왼쪽)와 함께.
대원들이 지쳐 보인다. 기력회복이 더디고, 쉬는 시간이 길어졌다. 이제 BC에 머물 수 있는 시간도 다 되어 간다. 남은 것은 C3 구축과 누가 되든 정상에 올라서는 일뿐이다. 종헌형과 셰르파 4명, 그리고 나에게 등정시도의 기회가 주어졌다. 이틀을 쉬고 5월1일 우리는 각자의 꿈을 위해 발을 내디뎠다. 운행시간도 상당히 단축되어 C2까지 무리 없이 올랐다.
남은 희망에 모든 노력을 쏟기 위해 C2부터 산소를 사용하기로 했다. 그러나 내 산소통은 잘 나오지 않고, 사용하는 데 더 숨이 차 몰래 벗고 메고만 올랐다. 종헌형은 레귤레이터가 괜찮은지 빠른 속도로 올랐다. 늦었지만 마지막으로 C3 예정지에 도착했다. 해발 7,400m. 보이는 건 더없이 펼쳐진 구름과 그 사이 뾰족이 솟은 몇몇 봉우리들뿐이다. 이곳에 선 우리들은 이제 말이 없어도 다들 잘 통한다. 기쁘다. 정상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 뿐만 아니라 내가 여기 서 있는 자체가 기뻤다. 게다가 산소를 사용하지 않고 여기까지 올랐다는 것이 나에게 자신감을 북돋운다.
4일, 눈을 감았지만 도무지 잠이 오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자려 했지만, 좀체 오지 않는다. 자정이 넘어 다들 깨웠다. 셰르파들도 이제는 피곤해 보였다. 커피 한 잔 마시고 텐트 밖으로 나왔다. 우모장갑을 꼈는데도 손발이 시려왔다. 땀도 제대로 마르지 않아 감각이 죽어 가는 것 같았다. 발가락을 계속 꼼지락거려도 느낌이 없다.
5일 새벽 1시 조금 넘어 모두들 조용히 출발한다. 1시간쯤 갔을까, 앞에 가던 종헌형이 멈춰서 있다. 산소가 샌다는 것이다. 조금 있자 형은 포기하고 내려가려 했다. 잘 나오지 않지만 내 레귤레이터를 꺼내 주었다. 그리고 다시 운행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형은 이제 안 되겠다며 그래도 상태가 나은 나에게 모든 것을 맡긴다며 묵묵히 내려갈 준비를 했다. 그래도 형이 앞에서 이끌어 주었는데, 나 혼자 간다고 생각하니 힘이 더 들 것 같았다. 여기까지 왔는데-. 가슴이 뭉클해진다. 이제 이곳에 남은 것 나와 셰르파 3명뿐이다.
▲ 세계 제7위 고봉 다울라기리 정상에 오른 필자.
가파른 설벽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배도 고프고 물도 먹고 싶었지만 배낭을 벗어 놓을 수 없었다. 어느새 시간이 등정 예상시각인 오후 1시를 넘기고, 이제 러셀도 매우 힘들어졌다. 또다시 한참 올랐다. 크러스트된 눈이 밟혔다. 눈을 밟고 올라서니 바위가 드러났다. 다시 1시간쯤 올랐을까. 정말, 아니 이제는 더 오를 곳이 없는 정상이 보였다. 셰르파는 먼저 올라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나도 얼른 올라 저렇게 찍을 것이다. 왠지 힘이 솟는다. BC에 무전을 보냈다.
이탈리아 합동대팀, 등정의혹 제기
“최임복 대원 정상 등정, 최임복 대원 정상 등정….”
말하기가 힘들어 간단히 말을 줄여 무전을 보냈다. 아 이제 다 왔구나. 다리에 힘이 풀리기 시작하면서 그 동안 느끼지 못한 감각들이 새로이 나를 파고든다. 대장님은 수호형 영정을 묻어야 한다고 당부하며 무사귀환을 바라셨다. 품속에 있던 수호형 영정을 얼른 꺼내 날리지 않도록 묻고, 하산을 준비했다. 30분 동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정상에 있었지만, 그곳에 있던 시간은 지금까지 노력한 시간에 비해 훨씬 길었던 것 같다. 오후 6시가 다가오고 있었다.
▲ 라마제를 지낸 후 기념촬영한 경상대원정대.
오후 8시 반쯤 C3에 도착, 힘없이 주저앉았다. 다음날 아침 이탈리아 합동대팀도 정상을 향하고 있었다. 우리가 먼저 올라 길은 낸 것에 나름대로 의미를 더하고 싶었다. 서 있기도 힘들고 먹는 것 또한 수월치 않았지만, C3에서 바로 BC로 내려갔다. 형님들이 모두 나오셔서 반겨주셨다.
BC로 내려온 다음날 뒤늦게 올라간 이탈리아 합동대팀에서 등정의혹을 제기했지만 우리가 올라간 게 확실히 밝혀짐으로써 그들도 우리를 축하해 주었다. 5월8일 헬기로 무사히 카트만두로 돌아왔다. 그리고 13일 네팔을 떠나 14일 새벽 6시 무사히 국내에 도착했다.
귀국 후 히말라야 전문 웹사이트인 에베레스트뉴스닷컴(everestnews.com)에 등정의혹 제기의 글이 떴지만 단순히 의문을 제시하는 글이었고, 이야기가 끝난 내용이었기에 내게 별 의미는 주지 못했다. 나에게 남은 건 그 동안의 노력과 준비과정을 통해 얻은 많은 경험들이다. 그리고 이제는 경상대학교 산악부 YB로서 그 임무에 최선을 다하는 게 나에게 주어진 일이다.
글 최임복 대원
사진 경상대 원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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