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결과는 근대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켰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것은 그들이 믿는 신이 특별히 돌봐준 은덕이라 여겨 모든 국민에게 정신력만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물질적인 뒷받침도 없이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도요토미(豊臣秀吉)가 일으킨 조선전쟁이 일본의 근대전쟁과 일치하는 점은 도요토미 자신도 신의 계시를 받은 신의 아들이라는 신념과 각오하에 전쟁을 일으켰으나 물자보급이 안돼 실패했다는 것이다.
조선침략, 즉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는 군량미와 무기를 충당하기 위해 국미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였다. 세금 징수 정도가 아니라 국민들이 지은 농사를 송두리째 조선전쟁에 보내야 하는 실정이었으니 끼니를 때우지 못하고 굶어 죽는 자가 속출하였다.
정유재란시는 특히 조선 의병이 일어나 강세를 보였고 영웅 이순신 장군이 탁월한 작전계획과 거북선이라는 위대한 발명으로 일본으로부터 들어오는 군량미와 무기를 차단하는 큰 역활을 하게 되었다. 즉 일본에서 물자를 싣고 들어오는 뱃길을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거북선이 먼저 차단하고 육지전투를 치르니 일본군인들은 식량이 떨어지고 소총 탄약이 모자라기 시작했다.
이때 물자공급의 책임자인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무장이 도요토미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자
"조선국에는 원래 먹을 것, 입을 것, 가지고 올 것이 풍부하니 조선국민을 모조리 죽이면 되지 않는가"
라면서 대호통을 쳤다고 한다.
실제로 이런 일이 우리 땅에서 일어났다. 한 동리를 쳐 모던 양민을 죽이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모조리 약탈해갔고, 가치있는 물건은 일본으로 보내어 졌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얼마 가지 못했다. 정유재란은 그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쉽사리 진척되지 않았다. 전세가 기울어지니 그들의 계획은 막막하기만 했다.
울산성 전투에 가담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병력은 7천이었는데 한 병사가 하루 군량미를 가지고 15일간 버티면서 전쟁을 했다 하니 알 만하다.
당시 군수물자는 해상군대 무장 구키요시타카(九鬼嘉降) 제9함대에서 보급했는데, 그때 제9함대는 경남 사천에서 보급길이 차단되어 물자를 공급하 수 없었다.
그러니 울산성에서 최후를 맡고 있던 가토 기요마사의 왜군들은 배고픔을 참지 못해 조선인을 죽이고 그 인육을 칼로 베어 먹으면서 전쟁을 치렀던 것이다.
이러한 인육을 먹는 기록은 토요토미의 생애를 담은 <회본태합기(繪本太閤記)>에 고스란히 그림으로 남아있다.
임진왜란시 울산성에서 저항 중인 왜군들은 식량이 떨어지고 먹을 것이 모자라자 조선인의 인육으로 배를 채우면서 전쟁을 했다는 것이다.
<자료출처>
- '임진왜란은 문화전쟁이다' -김문길-
<사진출처>
- KBS 역사드라마 캡쳐